“지음아.”“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그녀는 고독이라는 표현으로 그와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었다.강이한은 대답 없이 현관을 나섰다.잠시 후, 간병인이 짐 정리를 마치고 내려왔다.“아가씨, 가시죠.”간병인은 한지음의 처지를 동정했다.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고 약혼도 깨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절망적일까?한지음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그 미소가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했다.그녀의 인생을 책임진다던 강이한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인생은 길고 단지 책임감만으로 한 남자의 옆에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불쌍한데 그것마저 변고가 생긴 것이다.“겨우 이곳 환경에 적응했는데 또 옮겨야 하네요.”한지음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시력을 잃은 그녀가 환경에 적응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또 새로운 환경으로 가서 그곳 생활에 적응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한지음은 공허한 표정으로 홍문동을 나섰다.그녀가 나가자마자 집사는 강이한의 연락을 받았다. 모든 것을 이유영이 떠나기 전으로 돌려놓으라는 지시와 함께 한지음의 흔적을 모두 지우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빨리 움직여!”집사는 일사분란하게 고용인들을 지휘했다.한지음이 이곳에 온 뒤로 강이한은 의도적으로 이유영의 물건들을 창고에 처박았었다.하지만 어쩐 이유인지 그것을 버리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그들은 창고를 정리하며 물건을 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홍문동에 이런 변고가 생길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진실은 밝혀졌는데 이유영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한편, 한지음은 차를 타고 이동하며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았기에 간병인과 다른 사람들은 상대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다만 한지음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요.”누군지는 몰라도 한지음이 상대
그 말을 들은 이시욱은 당황한 얼굴로 상사를 바라보았다.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조형욱은 한지음에게 굉장히 친절하게 굴었고 이번 사건이 완전히 한지음과 무관하다는 증거도 없었다.강서희가 혼자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강이한이 왜 강서희에게만 벌을 내리고 한지음은 내버려 두었는지, 아무도 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한지음을 홍문동에서 내보내는 것 이외에 강이한은 그녀에게 어떤 추궁도 하지 않았다.증거가 부족해서일까?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강이한의 신변에 오래 있은 이시욱마저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대표님, 어디 가십니까?”이시욱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강이한은 어느새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이시욱의 부름에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며칠 전에 비해 많이 야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시욱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이한은 눈을 질끈 감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의 사람들과 박연준의 사람들을 방해하지 마.”지현우의 필적 감정은 그가 이시욱을 시켜 결과를 조작한 것이었고 박연준의 직원들도 적지 않게 그들의 방해를 받고 있었다.하지만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인원이 철수하게 될 것이다.이시욱은 충격 어린 얼굴로 상사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대표님….”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지현우와 박연준의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낸다면 세강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강이한은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실형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하지만 가늘게 떨고 있는 상사의 어깨를 보자 이시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그가 이유영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망가뜨렸고 그녀를 구치소에 보내고 말았다.10년을 함께한 정 때문에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그녀 역시 그들의 10년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이유영은 생전에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를 찾고 있었고 강이한은 계속해서 그 증거들을 모두 파멸시켰
강이한이 오히려 먼저 입을 열었다.“이정.”“네, 도련님.”“무덤을 옮길 준비를 하지.”“네?”이정은 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유영의 무덤을 강이한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강이한은 무덤 앞에 놓여있는 이유영의 사진을 만졌고 비바람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흠뻑 젖어있었다.“유영이를 그녀의 고향인 청하에 묻어줘야지.”강이한은 청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영이 멀고 먼 파리의 땅에 묻혀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정은 강이한의 평온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얼마나 자기의 아내인 이유영과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느껴져서 덩달아 감동했다.‘유영 씨를 청하로 데려가려고 파리로 온 거였네.’그녀는 강이한의 결정이 많은 반대와 방해를 받을 건지 알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간결하게 답했다.“네, 준비하겠습니다.”강이한은 단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 별다른 의도는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필요도,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강이한은 평소 모든 일에 이성적인 사람이었다.하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내의 죽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지금은 애써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이유영의 죽음 이후, 강이한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사명을 가지고 모든 뒷일을 처리했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정국진은 강이한이 무덤을 옮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지하려고 달려왔다.그의 말투는 유난히 차가웠다.“유영이한테 왜 그러는 거야? 편안하게 보내주면 안 돼?”강이한은 이유영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정국진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는 이유영에게만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번 생에서는 박연준, 정유라 등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말이다.강이한은 정국진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담담하게 답했다.“유영이는 외로운 걸 두려워해요.”“틀렸어,
강이한은 손을 미친 듯이 떨면서 이유영의 심장박동을 느끼려고 유골함을 꽉 안아봤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차갑기만 했다.“유영아...”작은 유골함을 꼭 껴안은 강이한의 심장은 질식할 정도로 아팠다.강이한은 불이 나기 전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고 이렇게 허망하게 이유영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 같아 자꾸만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왜 이제야 기억이 떠오르게 한 거죠? 왜 저한테 또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죠?’이제는 너무 늦었고 비참한 결과를 바꿀 수도 없었다.강이한은 유골함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집으로 가자.”...와인 농장.정국진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의사가 이유영에게 약을 바꿔주고 있었다.그녀의 팔과 목에는 한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흉터들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얼굴에는 약간의 상처만 있었다.이유영은 이틀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그녀는 의사가 소염제를 묻힌 솜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내자, 아프고 쓰라린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헉!”다시 태어난 이후 더욱 강인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그녀를 한 번 보고는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미안하지만 조금 아플 거예요, 우리 잘 참아봐요.”“음.”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의사는 지혈 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입술이 터져서 피나요.”이유영은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줬고 그를 훑어보았다.“감사합니다.”지혈 솜을 받아 입에 물었지만 통증을 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소도윤은 파리 최고의 화상 전문의였고 그에게 치료받으면 성형수술로 회복할 확률이 높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그는 장사에는 관심이 없어 금융학을 배우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바램에도 의학을 선택했고 지금 파리에는 20여 개의 병원을 소유하고 있었다.하지만 평소 성격이 괴팍하고 방문진료도 하지 않던 그가 와인 농장까지 와서 이유영을 치료해주는 건 외삼촌의 정국진이 얼마나 애
이유영은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감당해야죠.”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무거운 화제로 인해 소도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배 속의 아이를 좋아하고 사랑하더라도 강이한의 피가 섞였기에 결국 지울 수밖에 없었다.그냥 지금 자기 배 속에 있는 한 달, 일주일, 단 하루라도 아이가 고생을 적게 하도록 보호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소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세상에는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자기를 힘든 방향으로 내모는 선택은 하지 말기를 바랄게요.”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해결 방식이 있다는 소도윤의 말만 맴돌았다.‘아이를 지우는 것 빼고 또 무슨 방식이 있는 걸까?’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고 소도윤도 묵묵히 그녀를 치료해 줬다.이유영도 생각에 잠겨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더 이상 끙끙거리지도 않았다.... 치료가 끝나자, 소도윤은 이유영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옆에 있던 간호사도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따라나섰다.이유영은 문밖에서 정국진과 소도윤이 한참 얘기를 나누다 소도윤이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는 것을 보고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방에 들어온 정국진은 잠이 든 이유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사고 이후 와인 농장에 온 이유영은 몸이 더 허약해져서인지 계속 잠만 잤고 며칠 사이에 몸이 많이 말랐어도 기품은 꺾이지 않았다.“외숙모가 너 먹으라고 담백한 수프를 끓였어, 의사도 네가 영양에만 더 신경 쓰면 빨리 회복할 거라고 했어.”이유영은 잠결에 정국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울컥했다.“외삼촌.”그녀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느라고 정국진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이유영은 강이한때문에 구치소에 끌려갔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던 정국진이 왜 이번 사고에서 그녀를 구해주고 청하까지 가서 그녀를 데리고 왔는지 알지 못했다.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예리하게 물었다.“그때 사고로 죽
이유영은 이번 화재로 인해 불을 두려워하게 되었다.하지만 그녀가 더욱 두려워진 건 아무리 운명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쳐도 바꿀 수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이번 일로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정국진은 화가 났는지 말이 끝나고 나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실망이라는 두 글자가 이유영의 명치를 세게 내리쳤다.그녀는 한동안 충격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얼마 뒤, 외숙모인 임소미가 수프를 들고 들어왔지만, 이유영은 입이 붙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임소미가 이유영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회복이 빠르지.”“외숙모.”임소미는 지금 정씨 가문의 별장이 아닌 와인 농장에서 살고 있다.‘유미의 약혼자가 나 때문에 사고를 당했는데도 원망은커녕 날 보살펴 주다니!’이유영은 임소미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임소미는 수프 한 숟가락을 떠서 이유영에게 건네주었다.“마셔봐.”“외숙모?”이유영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임소미의 피곤한 모습과 슬픈 눈빛에서 정유미의 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 상황에서 왜 아직도 외삼촌과 외숙모는...?’“유영아, 일이 가끔은 네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어,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해.”“외숙모, 유미는...”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를 냈다.“더 이상 얘기하지 마!”이유영은 갑작스러운 임소미의 반응에 놀랐지만, 그녀는 금방 평정심을 찾았다.“...”이유영은 함께 지낸 3개월 동안 줄곧 온화하던 임소미가 자기 때문에 화났다고 생각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이한이 이유영에 대한 복수만 아니었더라면 정유미의 약혼자인 심하준이 죽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은 미안한 마음에 임소미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변했고 임소미는 대답 대신 이유영에게 또다시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건넸다.이유영은 주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고 나서
이유영은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임소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문득 정유라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동공이 커지면서 얼굴색도 더욱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강이한은 유골함을 갖고 청하로 돌아왔다.이정은 그가 청하로 돌아온 후, 유골함을 적절한 장소에 묻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홍문동으로 가지고 왔다.사람이 사는 집안에 유골함을 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었다.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진영숙은 식탁 오른쪽에 유골함을 놓고 밥을 먹고 있는 강이한을 보고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미친 거야?”진영숙은 이유영이 살아있을 때도 자기 아들을 힘들게 하다가 죽어서까지도 괴롭힌다는 생각에 식탁에 놓여있는 유골함을 엎지르려고 했다.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서 차갑고도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유영이가 살아있을 때도 손찌검을 하시더니 그녀의 유골함에까지 손을 대려고요?”진영숙은 강이한의 차가운 시선에 순간 멍해졌다.이유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서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진영숙은 강이한의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다.“이한아, 그 애는 이미 죽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그녀는 아직도 이유영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 송장처럼 지내는 강이한이 안타까웠다.강이한은 진영숙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면서 말했다.“유영이가 저한테 시집오고부터 그동안 쭉 괴롭히셨잖아요, 죽었으면 놔줄 때도 됐잖아요, 왜 계속 이러시는 거예요?”“...”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강이한의 직설적인 말은 그 어떤 비난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이한아, 엄마는 다...”“그만해요!”강이한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은지 진영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진영숙은 아들이 유골함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화는 사그라들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들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유영이가 너
진영숙은 강서희가 구치소에 끌려간 데다가 강이한까지 여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니까 머리가 아팠다.밖에서는 지금 강씨 집안이 뒤죽박죽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게다가 강서희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돌면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이한아, 서희를 계속 구치소에 계속 두는 건 집안 이미지에 좋지 않아.”진영숙은 강서희에 관한 증거가 모두 강이한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그가 강서희를 놓아주기를 바랐다.그러나 강이한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조용히 앞에 있는 와인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태연한 행동에 급해졌다.“서희가 네 친동생은 아니더라도 함께 자랐잖아, 근데 어떻게 여자 때문에...”“유영이는 남이 아니에요!”강이한은 이런 상황에서도 강서희를 감싸고 도는 진영숙에게 실망했고 이유영이 자기가 곁에 없을 때 당했을 수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났다.“이한아,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그럼 뭔 데요? 유영이를 어떻게 생각한 건데요?”진영숙은 강이한의 계속되는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강서희의 일 때문에 사정하려고 온 그녀였지만 그의 강경한 태도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진영숙은 홍문동에 유골함을 계속 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말을 꺼냈다.“아무리 그래도 유골함은 땅에 묻어야지 여기에 두는 건 안 돼!”“묻을 거예요.”강이한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진영숙은 이유영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자기의 삶까지 포기할 것 같아 문득 불안해졌다.“이한아...”강이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홍문동에 들어온 후부터 강이한은 줄곧 지금의 식탁 위치에서 밥을 먹었었고 이유영도 그의 옆에 앉아 우아하게 밥을 먹었었다.그는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가 좋아하던 갈비를 골라서 그녀 자리의 접시에 덜어줬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행동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거운 마음으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