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가 말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사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심문 방식은 저희 쪽에서 조정해 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이유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사실 가슴이 조금 아프기는 했다.길고 길었던 심문이 이 아이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니 쓰라린 마음도 있었다.잠시 후, 크리스탈 가든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이유영은 처음에 동교 사건 해결이 굉장히 골치 아플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심각한 건 크리스탈 가든의 사건이었다. 증거도 확실하고 증인까지 있으니 그녀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정교하게 설계된 거대한 그물망에 걸린 느낌이었다.아무리 그녀와 무관하다고 해도 결국 인정하지 않으면 사건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증거가 확실한 상황에서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건 재판밖에 없었다.“조 비서가 밖에서 보석 신청을 하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모든 걸 변호사에게 맡겨요.”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유영의 옆에 서서 그녀를 위로했다.현재 그녀가 임신한 상태라서 보석 절차에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런 말도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온 세상이 흑백이 된 기분이었다.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니 강이한에게 분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에게 되물었다.반항할까? 아니면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포기할까?지난 생의 그녀는 암흑 속에서 반항할 힘조차도 없었다.이번 생은 어떠할까? 약간의 반격을 한 뒤에 결국 또 그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았는가?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강이한의 손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강이한에게 실망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실망스러웠다.어쩌면 모든 건 하늘이 정한 운명이고 피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쪽에서 제시한 증거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한참의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강이한이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하더라도 그녀는 끝까지 무관함을 주장할 거라는 태도 표시이기도 했다.결국 이 싸움에서 져서
의무실 직원과 루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이스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모든 건 여기서 일단 나가고 다시 생각해요.”박연준이 청하 시를 떠났고 정국진이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은 강이한에게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이유영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이번 생도 그렇고 지난 생도 그렇고 그녀는 사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자신의 핏줄이지 않은가!“루이스는 몰라요.”이유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로써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는 이런 상황은 이미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았다.그런 상황에서 단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가장 중요한 건 이 아이를 이용해서 밖으로 나간다면 강이한에게도 소식이 갈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미친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이용해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그가 만약 그녀를 감방에 보내기로 결정했다면 아마 아이 때문에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굳이 이 소식을 그에게 알릴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회장님 쪽에 얘기도 해보지 않고….”루이스는 말끝을 흐렸지만 이유영은 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외삼촌 쪽에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고 사람은 파리에 있으니 이쪽 상황을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아이를 이용하는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절차 알려주세요.”루이스는 처음 보는 그녀의 단호하고 차가운 표정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꼈다.의사도 아까의 차가운 표정 대신,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체 아이 아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절차가 좀 복잡하긴 한데 꼭 필요하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는 있어요.”의사가 착잡한 표
루이스는 따뜻한 물 한잔을 따라 이유영에게 건넸다.“이거라도 마셔요.”“고마워요.”이유영은 허망한 얼굴로 물컵을 입가로 가져갔다.분명 생수인데도 입맛이 썼다.한편, 세강 그룹.회사에 도착한 강이한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이시욱이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짙은 담배연기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대표님.”“시킨 일은 다 지시했지?”“네.”이시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또 물었다.“한지음 쪽은 잘 준비되고 있어?”“뭘 준비해야 하나요?”이시욱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상사가 뭘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까 차에서 그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강이한의 태도가 이상했다.그리고 곧이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의 보석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한지음 쪽에 뭘 준비하라는 건지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강이한은 그제야 자신이 이유영에게만 신경 쓰다가 가장 지켜줘야 할 사람에게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이정수를 지음이 쪽으로 보내.”“대표님!”이시욱이 당황한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이정수는 해외에 발령된 강이한의 심복이었고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청하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다.세강 그룹이 흔들릴 때도 호출하지 않았던 사람을 한지음을 위해 부른다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혹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이시욱이 물었다.이정수까지 호출했다는 건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설명했다.그제야 이시욱은 어쩌면 이유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으려는 강이한의 행동이 그녀를 지키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잔소리 말고 티켓이나 보내!”남자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이시욱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지시는 없었다.‘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임신한 조사 대상이 보석을 거절당하는 일은 거의 흔치 않았다.게다가 정국진도 연락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 혹시 정국진마저 이유영을
루이스는 억울함을 가득 담은 그녀의 눈빛에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더라도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갈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과 강서희를 위해 그녀를 벼랑으로 몰더라도 그래서 평생 감옥에서 나갈 수 없더라도 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뭘 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대신 처리하겠습니다.”루이스는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현재 외부와 그 어떤 연락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루이스는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유영은 알 수 없었다.“지현호 씨에게 전화해서 전에 확보한 서류 대조 자세히 하라고 하세요.”“네.”“그리고 감정기관에 의뢰해서 필적도 자세히 대조하라고 해두고요.”장시간의 조사에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검찰 측에서 현재 확보한 증거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스스로 조사를 할 것이다.강이한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그녀는 절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평생 감옥에 있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알겠습니다.”루이스는 그녀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다.강이한이 경찰에 연락해서 보석 신청마저 보류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희망을 잃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래도 잘 추스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루이스. 외삼촌 쪽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 줄 수 있나요?”계속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DNA 감정서가 공개된 뒤로 그녀와 외삼촌 사이도 이상하게 틀어진 것 같았다.하지만 정국진이 그 일로 그녀에게 등을 돌린 것 같지는 않았다.아니면 정유라 일 때문에 그녀를 멀리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정유라는 그의 소중한 딸이고 현재 상황을 들었을 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루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회장님 쪽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그가 아는 정국진은 이렇게 오래 연락이 두절될 인물이 아니었다.
집사가 말했다.“한지음 씨는 많이 놀라셨는지 지금까지 방에서 나오지를 않네요.”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계단 입구를 올려다보았다.그의 주변의 살기가 한층 진해졌다.결국 그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이시욱은 이정수의 귀국을 지시하던 상사를 떠올리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위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한지음의 방에서 나오던 가정부가 그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도련님, 드디어 오셨군요.”“상황은 어떻습니까?”“이한 오빠.”가정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지음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놀란 고양이처럼 잔뜩 겁에 질린 그 목소리에 강이한은 가슴이 저렸다.그는 가정부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눈짓한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나 여기 있어.”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차가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지자 남자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 사람 도둑 아니었어요. 도둑은 절대 아니었어요.”한지음은 횡설수설하며 강이한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알아. 내가 처리할게.”“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그 인간의 의도를 떠올린 듯, 한지음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하게 질렸다.강이한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며 다독이듯이 말했다.“이제 괜찮아.”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지음은 와락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그 순간, 강이한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현재 그들의 관계와 평생 책임지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허공에서 손을 멈추었다. 결국 그는 힘없이 손을 내리고 한지음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내가 있으니 이제 괜찮아.”“오빠, 난 너무 무서워요.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에게서 위험한 냄새를 느꼈어요.”진짜로 시력을 잃은 뒤로 그녀는 주변 환경에 굉장히 민감했다.그래서 위험이 닥친 순간에 더 두렵고 무기력함을 느꼈다.강이한은 그녀가 실명한 원인을 이유영의 탓으로 돌리며
그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뒤에 싸늘한 눈빛으로 이시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그럼요.”이시욱이 나간 뒤, 서재에 홀로 남은 강이한은 고민에 잠겼다.정국진은 완전히 이유영을 포기한 것일까?조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이유영….”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는 이혼한 뒤에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무슨 일이 있어도 당분간은 안에 얌전히 있기를 바랄게!’어느새 시간은 흘러 강서희의 생일날이 다가왔다.그 시간 동안 모두가 편안하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꿈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유영은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진영숙은 강서희에게 실망했지만 생일 파티는 성대하게 준비하였다.화려하게 치장한 강서희의 방에 왕숙이 들어왔다.“아가씨, 도련님 오셨어요.”왕숙의 목소리에서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고개를 돌린 강서희가 물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어?”왕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지음 씨도 같이 왔더라고요.”그 말에 강서희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머릿속에 홍문동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걔가 여기를 왜 와?”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강서희는 좋았던 기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이유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가족들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파티를 즐겼고 이유영이 들어온 뒤로 불편함을 느껴서 겨우 쫓아보냈는데 한지음이 또 끼어들 줄이야!문제는 한지음은 이유영처럼 만만히 당하고 있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괴롭히는 쪽이라는 게 문제였다.“아가씨.”“나 걔 얼굴 보고 싶지 않아.”강서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한지음만 떠올리면 오빠를 빼앗겼다는 처참한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왕숙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위로했다.“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아가씨잖아요. 주인공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사모님 얼굴이 뭐가 돼요.”“아줌마.”“현재는 도련님이 그 아가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니까 손님들 잘 접대해.”“응, 엄마.”강서희는 진영숙의 팔을 놓고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맨마지막에 심드렁한 얼굴로 강이한과 한지음에게로 다가갔다.강이한은 재벌가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한지음의 손을 잡고 있었다.행동 하나하나 배려하는 모습에 강서희는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녀석, 안목 좋네. 하지만 이 아가씨의 처지가 좀 안타깝기는 하구나.”한 나이든 회장이 강이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한지음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연민이 가득했다.오늘 현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에 있었던 불쾌한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지음을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강서희에게는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강이한은 그 회장의 말을 듣고 묵묵히 한지음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나 괜찮아요, 오빠.”“피곤하지 않아?”강이한이 부드럽게 물었다.“안 피곤해요.”둘이 함께 있는 화면은 한지음의 공허한 눈동자만 아니면 무척이나 어울렸다.강서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오빠.”강이한이 고개를 돌리자 강서희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그래도 생일이라서 그런지 강이한은 더 이상 차가운 표정을 짓지 않고 있었다.“그래.”담담한 반응에도 강서희는 대범하게 다가가서 한지음의 팔짱을 꼈다.“지음 언니, 왔구나?”누가 봐도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그녀는 한지음의 팔목에 낀 팔찌를 보고 짐짓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팔찌 거의 부러졌어.”“아까 부주의로 어디 부딪혔나 봐.”한지음은 조금 전에 강이한의 셔츠 단추에 팔찌가 걸린 적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강서희는 미소를 지으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오빠, 지음 언니 잠깐 빌릴게. 내 방에 액세서리 많아.”그 말을 들은 한지음은 본능적으로 강이한의 손을 꽉 잡았다.강서희와 단둘이 있으면 절대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 시각, 청하 구치소.이유영은 반복되는 조사를 마치고 구치소로 옮겨졌다.루이스는 늘 하던 대로 매일 그녀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날 밤, 독방에 옮겨진 이유영이 잠깐 휴식을 취하려는데 루이스가 찾아왔다.그의 표정은 사뭇 심각해 보였다.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줄곧 지현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제출한 증거는 이미 통과되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희망을 지현우에게 걸었다.다만 루이스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일이 뒤틀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어때요? 결과는 나왔나요?”이유영의 질문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이유영도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철렁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지현우 실장님이 결과를 올려보냈는데 강이한 쪽에서 미리 알고 손을 쓴 것 같습니다.”그렇다는 건 감정결과가 그녀에게 불리하게 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다.이유영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그 인간은 아마 내가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군요.”‘하긴. 그렇게 오랜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준비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그의 악랄함은 이미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아직 재판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회가 있을 거예요. 지 실장님과 조 비서도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으니 대표님도 희망을 잃지 마세요.”루이스가 말했다.이유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울음을 삼켰다.한참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단호함과 처절함만 남았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루이스에게 말했다.“지 실장에게 말해서 비밀리에 해외 기관에 감정을 맡기도록 하세요.”청하에서 아무리 조사를 해도 강이한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달리 방법이 없잖아요.”어쩌면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결과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종 재판에서 상황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그녀는 무슨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