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같이 온 사람은요?”“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루이스는 그녀와 동행했지만 취조실까지 따라들어올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이마에 식은땀이 돋기 시작했다.형사도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괜찮으시죠?”“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절망한 얼굴로 아랫배를 붙잡고 의자에 몸을 웅크렸다.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지더니 하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통스럽게 신음하다가 한 순간에 의식을 잃었다.경찰서가 아수라장이 된 사이, 홍문동은 여전히 평화로운 아침을 마주했다. 강이한과 한지음은 아침햇살을 맞으며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밤새 비가 내린 뒤라 공기가 무척 맑았다.“아침 먹고 간병인이랑 산책을 나갈 거야.”강이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지음에게 말했다.“아니에요. 수고스럽게 뭘 그런 것까지 해요.”그 말에 남자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옆에서 지켜보던 간병인이 그 눈빛을 보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수고스러울 것 하나도 없어요.”한지음은 긴장한 목소리를 듣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알았어요.”그 말 한 마디에 현장에 있던 고용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한이 한지음에 관한 모든 것을 신경 쓰기에 고용인들마저 고도의 긴장감을 갖추고 임해야 했다.강이한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오전에 드레스 가져올 거야. 입어 보고 예쁜 거로 골라.”그 말에 한지음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정말 괜찮겠어요?”“내가 결정한 일이야. 말했잖아. 평생 널 돌봐주겠다고.”평생 돌봐준다는 말은 그녀가 원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한지음은 그의 이런 약속이 한지석을 향한 죄책감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그 목소리는 최근 들어 점점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분명 그 여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데도 매번 그 여자에게 불리한 일을 할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그는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그쪽으로 출발해.”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시욱이 물었다.“이유영 씨를 보러 간다는 말씀입니까?”“그래.”말을 마친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힘껏 연기를 들이마시며 짜증을 억눌렀다.이시욱은 차를 돌려 경찰서로 향했다.이때,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여보세요.”“그까짓 여자 둘에게 끌려다니다니. 참 실망이구나.”수화기 너머로 근엄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까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벌써 10년이다.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니!”“과거에 거절했듯이 지금도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강이한은 싸늘한 목소리로 단박에 거절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핸드폰에 대고 기싸움이 오갔다.잠시 후, 싸늘하고도 음침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그럼 어쩔 수 없구나. 네가 못한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그 여자들을 처리하는 수밖에!”“아무것도 하지 마세요!”“이한아….”강이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그 사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결국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이만 끊겠습니다.”그는 상대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핸드폰을 무심하게 던져버린 그의 얼굴은 사납기 그지없었다.“차 돌려!”강이한이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로 이시욱에게 말했다.이시욱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좌석을 살폈다.그는 갑자기 통화를 마친 상사가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잠시 후, 강이한이 지친 목소리
형사가 말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사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심문 방식은 저희 쪽에서 조정해 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이유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사실 가슴이 조금 아프기는 했다.길고 길었던 심문이 이 아이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니 쓰라린 마음도 있었다.잠시 후, 크리스탈 가든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이유영은 처음에 동교 사건 해결이 굉장히 골치 아플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심각한 건 크리스탈 가든의 사건이었다. 증거도 확실하고 증인까지 있으니 그녀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정교하게 설계된 거대한 그물망에 걸린 느낌이었다.아무리 그녀와 무관하다고 해도 결국 인정하지 않으면 사건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증거가 확실한 상황에서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건 재판밖에 없었다.“조 비서가 밖에서 보석 신청을 하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모든 걸 변호사에게 맡겨요.”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유영의 옆에 서서 그녀를 위로했다.현재 그녀가 임신한 상태라서 보석 절차에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런 말도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온 세상이 흑백이 된 기분이었다.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니 강이한에게 분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에게 되물었다.반항할까? 아니면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포기할까?지난 생의 그녀는 암흑 속에서 반항할 힘조차도 없었다.이번 생은 어떠할까? 약간의 반격을 한 뒤에 결국 또 그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았는가?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강이한의 손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강이한에게 실망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실망스러웠다.어쩌면 모든 건 하늘이 정한 운명이고 피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쪽에서 제시한 증거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한참의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강이한이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하더라도 그녀는 끝까지 무관함을 주장할 거라는 태도 표시이기도 했다.결국 이 싸움에서 져서
의무실 직원과 루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이스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모든 건 여기서 일단 나가고 다시 생각해요.”박연준이 청하 시를 떠났고 정국진이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은 강이한에게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이유영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이번 생도 그렇고 지난 생도 그렇고 그녀는 사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자신의 핏줄이지 않은가!“루이스는 몰라요.”이유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로써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는 이런 상황은 이미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았다.그런 상황에서 단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가장 중요한 건 이 아이를 이용해서 밖으로 나간다면 강이한에게도 소식이 갈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미친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이용해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그가 만약 그녀를 감방에 보내기로 결정했다면 아마 아이 때문에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굳이 이 소식을 그에게 알릴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회장님 쪽에 얘기도 해보지 않고….”루이스는 말끝을 흐렸지만 이유영은 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외삼촌 쪽에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고 사람은 파리에 있으니 이쪽 상황을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아이를 이용하는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절차 알려주세요.”루이스는 처음 보는 그녀의 단호하고 차가운 표정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꼈다.의사도 아까의 차가운 표정 대신,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체 아이 아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절차가 좀 복잡하긴 한데 꼭 필요하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는 있어요.”의사가 착잡한 표
루이스는 따뜻한 물 한잔을 따라 이유영에게 건넸다.“이거라도 마셔요.”“고마워요.”이유영은 허망한 얼굴로 물컵을 입가로 가져갔다.분명 생수인데도 입맛이 썼다.한편, 세강 그룹.회사에 도착한 강이한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이시욱이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짙은 담배연기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대표님.”“시킨 일은 다 지시했지?”“네.”이시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또 물었다.“한지음 쪽은 잘 준비되고 있어?”“뭘 준비해야 하나요?”이시욱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상사가 뭘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까 차에서 그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강이한의 태도가 이상했다.그리고 곧이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의 보석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한지음 쪽에 뭘 준비하라는 건지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강이한은 그제야 자신이 이유영에게만 신경 쓰다가 가장 지켜줘야 할 사람에게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이정수를 지음이 쪽으로 보내.”“대표님!”이시욱이 당황한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이정수는 해외에 발령된 강이한의 심복이었고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청하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다.세강 그룹이 흔들릴 때도 호출하지 않았던 사람을 한지음을 위해 부른다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혹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이시욱이 물었다.이정수까지 호출했다는 건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설명했다.그제야 이시욱은 어쩌면 이유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으려는 강이한의 행동이 그녀를 지키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잔소리 말고 티켓이나 보내!”남자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이시욱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지시는 없었다.‘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임신한 조사 대상이 보석을 거절당하는 일은 거의 흔치 않았다.게다가 정국진도 연락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 혹시 정국진마저 이유영을
루이스는 억울함을 가득 담은 그녀의 눈빛에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더라도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갈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과 강서희를 위해 그녀를 벼랑으로 몰더라도 그래서 평생 감옥에서 나갈 수 없더라도 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뭘 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대신 처리하겠습니다.”루이스는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현재 외부와 그 어떤 연락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루이스는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유영은 알 수 없었다.“지현호 씨에게 전화해서 전에 확보한 서류 대조 자세히 하라고 하세요.”“네.”“그리고 감정기관에 의뢰해서 필적도 자세히 대조하라고 해두고요.”장시간의 조사에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검찰 측에서 현재 확보한 증거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스스로 조사를 할 것이다.강이한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그녀는 절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평생 감옥에 있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알겠습니다.”루이스는 그녀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다.강이한이 경찰에 연락해서 보석 신청마저 보류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희망을 잃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래도 잘 추스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루이스. 외삼촌 쪽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 줄 수 있나요?”계속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DNA 감정서가 공개된 뒤로 그녀와 외삼촌 사이도 이상하게 틀어진 것 같았다.하지만 정국진이 그 일로 그녀에게 등을 돌린 것 같지는 않았다.아니면 정유라 일 때문에 그녀를 멀리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정유라는 그의 소중한 딸이고 현재 상황을 들었을 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루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회장님 쪽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그가 아는 정국진은 이렇게 오래 연락이 두절될 인물이 아니었다.
집사가 말했다.“한지음 씨는 많이 놀라셨는지 지금까지 방에서 나오지를 않네요.”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계단 입구를 올려다보았다.그의 주변의 살기가 한층 진해졌다.결국 그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이시욱은 이정수의 귀국을 지시하던 상사를 떠올리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위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한지음의 방에서 나오던 가정부가 그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도련님, 드디어 오셨군요.”“상황은 어떻습니까?”“이한 오빠.”가정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지음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놀란 고양이처럼 잔뜩 겁에 질린 그 목소리에 강이한은 가슴이 저렸다.그는 가정부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눈짓한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나 여기 있어.”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차가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지자 남자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 사람 도둑 아니었어요. 도둑은 절대 아니었어요.”한지음은 횡설수설하며 강이한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알아. 내가 처리할게.”“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그 인간의 의도를 떠올린 듯, 한지음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하게 질렸다.강이한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며 다독이듯이 말했다.“이제 괜찮아.”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지음은 와락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그 순간, 강이한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현재 그들의 관계와 평생 책임지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허공에서 손을 멈추었다. 결국 그는 힘없이 손을 내리고 한지음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내가 있으니 이제 괜찮아.”“오빠, 난 너무 무서워요.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에게서 위험한 냄새를 느꼈어요.”진짜로 시력을 잃은 뒤로 그녀는 주변 환경에 굉장히 민감했다.그래서 위험이 닥친 순간에 더 두렵고 무기력함을 느꼈다.강이한은 그녀가 실명한 원인을 이유영의 탓으로 돌리며
그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뒤에 싸늘한 눈빛으로 이시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그럼요.”이시욱이 나간 뒤, 서재에 홀로 남은 강이한은 고민에 잠겼다.정국진은 완전히 이유영을 포기한 것일까?조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이유영….”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는 이혼한 뒤에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무슨 일이 있어도 당분간은 안에 얌전히 있기를 바랄게!’어느새 시간은 흘러 강서희의 생일날이 다가왔다.그 시간 동안 모두가 편안하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꿈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유영은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진영숙은 강서희에게 실망했지만 생일 파티는 성대하게 준비하였다.화려하게 치장한 강서희의 방에 왕숙이 들어왔다.“아가씨, 도련님 오셨어요.”왕숙의 목소리에서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고개를 돌린 강서희가 물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어?”왕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지음 씨도 같이 왔더라고요.”그 말에 강서희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머릿속에 홍문동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걔가 여기를 왜 와?”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강서희는 좋았던 기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이유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가족들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파티를 즐겼고 이유영이 들어온 뒤로 불편함을 느껴서 겨우 쫓아보냈는데 한지음이 또 끼어들 줄이야!문제는 한지음은 이유영처럼 만만히 당하고 있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괴롭히는 쪽이라는 게 문제였다.“아가씨.”“나 걔 얼굴 보고 싶지 않아.”강서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한지음만 떠올리면 오빠를 빼앗겼다는 처참한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왕숙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위로했다.“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아가씨잖아요. 주인공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사모님 얼굴이 뭐가 돼요.”“아줌마.”“현재는 도련님이 그 아가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
이곳이 싫어진 이유가 강이한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한때는 이런 곳에서 강이한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우지를 불러줘!”이유영은 강이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은 이 모든 것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아까 말했잖아. 우지랑 우현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러 나갔어. 여기 지역은 아침으로 특산 요리가 많거든, 그래서 주방에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어.”“...”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리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침묵과 순응은 강이한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이유영은 차라리 말없이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절대로 강이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예전에 아무리 바쁜 아침을 보냈어도 강이한은 이유영이 아침에 어떤 루틴을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이러면 몸에 좋지 않아. 그냥 가자.”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네가 우지 씨와 우현 씨의 핸드폰을 가져갔지, 그렇지?”강이한은 잠시 멈칫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부모님께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드리는 게 맞지 않아?”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 우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감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터질 것 같았다.강이한은 여전했다. 여전히 타인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어떤 짓까지 했는지, 그 기억은 이제 이유영에게 있어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이 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미 쪽지를 남겼어. 네가 눈 치료를 받으러 갔다는 건 부모님도 알고 계실 거야.”“...”“치료가 끝나면 집으로 데려다 줄 거야.”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차갑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모든 행방을 전부 숨겼다는 거잖아?”이유영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지붕 위에서 여전히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옆에서 느껴지던 온기 역시 그대로였다. 이유영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강이한이 살짝 안으며 말했다.“깼어?”“당장 떨어져!”어젯밤,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잠들었지만,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걸까? 이유영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강이한의 큰 손이 이유영의 손을 단단히 감싸며 태연하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춥잖아.”이불 밖으로 팔을 뻗자 싸늘한 한기가 순간적으로 스며들었다.우천시는 여름에 오면 굉장히 쾌적하다고 한다. 전통 가옥은 단열 효과가 뛰어나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이유영의 짜증과는 반대로 강이한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부드러운 인내심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마치 오랜 시간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이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일어날래? 내가 옷 입는 거 도와줄게!”“우지 씨를 불러.”시야를 잃은 이유영의 성격은 예전보다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이유영의 화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태연히 대답했다.“우지와 우현은 나갔어.”나갔다고? 말도 안 돼!우지는 이유영이 강이한과 단둘이 있기를 꺼린다는 걸 잘 알았기에, 늘 둘 중 한 명은 곁에 남아 있으려 했다.“강이한!”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화난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유롭게 말했다.“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나랑 조금 더 누워 있어.”“...”이유영은 비록 자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강이한의 농담 섞인 말에 자신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강이한이 옷을 입혀주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상황 같았지만 강이한은 의외로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강이한은 이곳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