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과 박연준은 전에 갔었던 식당에 갔다. 박연준은 친절하게 스테이크를 썰어서 이유영의 앞에 놓았다. 이유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박연준은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유영은 서류봉지를 박연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따가 보세요.” “급하지 않아요.” 박연준이 말했다. 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연준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유영 씨와 강이한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이유영은 마음이 철렁했다. 박연준을 보는 눈빛에도 엄숙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박연준이 강이한을 언급하는 게 싫었다. 박연준은 날카롭고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유영이 어떻게 대답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박연준이 말했다. “나에게 감출 생각하지 말아요. 그의 행동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유영은 안색이 창백해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었어?’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박연준이 말했다. “유영 씨 외삼촌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에 그가 안다면 강이한과 어떤 관계가 되겠어요?” ‘어떻게 될까?’공항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정국진이 세강그룹에 손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로열 글로벌에게 손을 쓴 게 강이한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유영이 요즘 강이한의 주위를 맴도는 것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이유영은 박연준을 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게…” “유영 씨, 강이한에게 협박당한 거 아니죠?” 박연준이 물었다. 원래 좋지 않던 이유영의 안색은 그의 말을 듣자 더 차가워졌다. “당신도 외삼촌처럼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할 건가요?” ‘외삼촌은 강서희와 한지음의 가면을 뜯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전엔 나도 강이한과 이혼하는 게 끝일 거라고 생각했고.’그뿐만 아니라
이번엔 박연준이 준비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거였다. 만약 미리 방비했다면 강이한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이유영의 마음도 조여왔다. “연준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이유영은 매일 한 침대에서 잤던 자기도 강이한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걱정되었다. 그렇게 쉽게 박연준과 로열 글로벌을 흔들었는데, 정말 화가 나면 어떻게 될지 두려웠다. “날 못 믿는 거예요? 아니면 유영 씨 외삼촌을 못 믿는 거예요?” “저…” 순간, 이유영은 박연준에게서 몰아붙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은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펴주려고 다가갔는데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뒤통수가 남자의 다른 한 손에 닿았다. “이러지 마요.” “여기에 근심 걱정이 있어서는 안 돼요.” 이유영의 마음은 부드러운 박연준에 의해 약해졌다. 거절해야 하는데 산 같은 박연준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실, 연애하는 7년 동안, 이유영은 항상 강이한을 의지했다. 평생 의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그녀가 처음으로 강서희를 언급할 때 그는 차가운 태도로 그녀를 경고했다. 이유영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강이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평시엔 의지가 되었지만, 유독 강서희와 상관있는 일이라면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한지음까지 나타난 후, 강이한은 이유영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처럼 그녀 혼자 절망의 심연을 직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한 번도 이유영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박연준의 손에서 전해오는 부드러움이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녀는 그런 느낌이 두려웠다.왜냐하면 이런 느낌은 빠져들기만 하면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울고 싶어요?”그녀의 촉촉한 눈시울을 보며 박연준의 말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이때 이유영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곁에서 떨어졌다.“이…
강씨 본가. 강서희는 방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드폰 안의 사진을 보더니 발송했다. ‘이유영, 조용한 생활을 두고 왜 하필 이러는 거야?’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배준석 도련님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희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알았어.”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좀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이다.’ 전화를 끊은 후 강서희는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진영숙은 막 나가려고 했는데, 귀부인의 메이크업에 새로운 헤어스타일까지 더욱 귀티가 났다. 강서희가 내려오는 것을 본 그녀는 잠깐 멍했다가 강서희에게 말했다. “내일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 돌아온다고 하니까 가서 만나봐!” 저번의 소개팅은 실패했지만 진영숙은 줄곧 강서희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상업결혼은 아니더라도 강서희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강서희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엄마, 나 결혼하기 싫어.”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내 곁에 있을 거야?” “나 평생 엄마랑 함께 있을 거야.” 강서희는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잘했다. 그래서 진영숙도 책망하다가 부드러운 얼굴로 변했다. “말 들어. 진씨 가문은 보수적인 집안이라 내일 단아한 옷으로 입고 가. 알았어?” “엄마!” “됐어. 나 일 있어서 나가봐야 해.” 말을 마치고 진영숙은 가방을 가지고 나갔다.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젊었을 때 엄청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진영숙이 나가자 강서희의 눈빛은 순간 날카로워졌다. 왕숙은 아래층에서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녀의 위험한 눈빛과 마주쳐 가슴이 덜컹했다. “아가씨.” “왕 아주머니.” “네!” “떡 좀 만들어줘.” 강서희는 기분이 좋아서 내일 소개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배준석이 와 이유영을 기다릴 장면을 생각하니 그녀는 가슴이 후련했다. 왕숙은 고개를 끄
강서희의 안색이 변하더니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좋긴 뭐가 좋아?” “…….” 왕숙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강서희는 맛있게 먹다가 못 다 먹은 떡을 쟁반 위에 던졌다. “조…… 조금 더 드세요!” ‘겨우 만든 건데 반 조각밖에 먹지 않다니.’ 강서희는 일어서며 말했다. “안 먹어.” 그러자 왕숙의 눈에 서운한 빛이 스쳤다. “아가씨, 사실 제가 진씨 가문의 도련님도 뵌 적이 있는데 외모와 성격이 괜찮아서 아가씨랑 잘 되면…….” “닥쳐!” 왕숙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서희에게 끊겼다. “아가씨 마음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진영숙의 반응을 떠보아서, 왕숙은 강서희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진영숙의 귀에 들어간다면 지금 가진 것도 모두 없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서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왕숙을 보며 물었다. “다 안다고?” “전 어릴 때부터 아가씨를 지켜보았어요. 아가씨 마음속의 서러움을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왕숙의 말에 강서희의 마음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인도 아는 걸 자신을 친딸처럼 생각한다는 사람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사모님은 서로 걸맞은 사람끼리 결혼하는 걸 선호하는 데다가 강씨 집안이 대가족이다 보니 가문의 이익 위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 “사모님이 아가씨를 키우다시피 했지만…….” 왕숙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잠깐 멈칫했다. 강서희는 왕숙을 째려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 “사모님은 아가씨가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아요.” 왕숙의 말을 들은 강서희는 원래 안 좋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숙의 말이 좀 듣기 거북하지만 강서희도 모두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영숙은 확실히 강서희가 눈에 차지 않았다. 이유영에 대한 태도의 변화도 모두 이유영 외삼촌의 지위와 그가 국제에서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강서희의 눈엔 원망이 스쳤다. 그녀는 진영
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지현우도 이유영의 처리수단에 대해 만족했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든 지금의 자리에 앉았으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맞받아칠 박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정국진이 원하던 것이었다. 예전에 정국진이 이유영을 여론 속에 내버려 둔 건 그의 성질과 기개를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로열 글로벌의 미래 타수로서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 지현우가 나가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유영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이한이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유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문에 기대고 말했다. “주동적으로 말할 거야? 아님 내가 심문할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유영은 화가 나서 강이한에게로 펜을 던졌다. ‘해명은 그렇다 치고 심문은 너무 오버 아니야? 왜? 고문하고 사형까지 내리지 그래?” 남자는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이유영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 때문에 잘생긴 얼굴에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이유영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품속에 고정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이유영은 그의 호흡을 피하며 말했다. “비켜!” “내가 네 외삼촌을 더 바빠지게 할까? 아님 로열 글로벌을 무너뜨릴까?” “흥, 네가 그렇게 대단해?” 이유영은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로열 글로벌을 무너뜨린다고? 허세는.’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손에 로열 글로벌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도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유영은 화가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강이한은 그녀의 턱을 잡고 음침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주는 느낌이 바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넌 이런 수단 말고
분명히 물어본 사람은 강이한이었는데 이유영의 답을 들으니 그는 더 화가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의자에 던지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이유영. 너 참 대단하다.”그는 계속 말했다.“네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을까?”“경고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유영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강이한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는 것도 네 뒤에 외삼촌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그의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협박이라는 건 확실했다.이유영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눈가의 위험한 눈빛도 순간 더욱 짙어졌다.강이한이 계속 말했다.“난 정말 그렇게 해보고 싶어.”“그래. 나도 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보고 싶네.”이유영이 말했다.그녀는 강이한이 계속 외삼촌으로 협박을 하니 꼭대기에서 겨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위험한 압박력을 지닌 키스가 이유영의 입술에 떨어졌다.이유영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손톱으로 강이한의 목을 그어 핏자국이 생기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강이한은 화가 나서 이유영을 놓고 핸드폰을 그녀의 앞에 던지며 물었다.“이 번호 알아?”강이한의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이유영은 어리둥절해졌다.그녀는 강이한을 째려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보았다. 한 눈만 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눈에는 위험한 눈빛이 스쳤다.이유영은 강이한도 조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몰라.”이유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유영!” 강이한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이유영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내가 강서희의 번호라고 하면 믿을 거야?” “너 무슨 일이나 서희와 엮지 마.” “그럼 몰라. 나는 강서희와 상관있다고 생각해. 모호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강이한의 선택이야.’ 이유영이 말을 마치자 강이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마치 강이한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강이한이 떠난 뒤, 이유영은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려고 심호흡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았다. 박연준이 했던 말처럼 그는 절대 곱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외삼촌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벌인 일이었다.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이 내려가지 않았다.“유영아.”“일은 어떻게 되었나요?”이유영이 물었다.지금도 그 남자를 생각하면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정국진이 말했다.“걱정 마. 잘 처리했어.”“외삼촌.”“그래.”“로열 본사 내부에 다른 문제는 없죠?”그녀는 크리스탈 가든에 생긴 것과 비슷한 문제가 로열 글로벌 내부에 존재할까 봐 걱정했다.비록 그녀가 한 일은 아니지만 이미 기업의 수장이 되었으니 책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이미 전임 대표가 만들어 놓고 간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만 해도 그녀는 골머리가 아팠다.“본사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설마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거니?”정국진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정국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짜증을 숨겼다.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을 토로했다.“이번 일, 강이한이 주도한 거예요.”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넌 진작에 알고 있었고?”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국진이 물었다.“네.”“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말을 꺼내는 거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어!”정국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 로열 글로벌 내부에 생긴 문제는 그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내부에서만 생긴 문제라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면 앞뒤가 설명이 됐다.“죄송해요, 외삼촌.”“그 인간이 너 협박했어?”“외삼촌….”“이유영,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외삼촌도 못 미더웠다 그거지?”“그게 아니라….”
‘비겁한 자식!’유영이 말했다.“외삼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유영은 정국진에게 계획 전부를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은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정국진은 그녀의 생각을 듣고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알았어. 크리스탈 가든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하지만 회사에 영향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거야. 알겠니?”“네, 외삼촌.”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이 원하는 건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당한 게 있는데 되돌려주지 않으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을 정국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을 막고 싶지 않았다.“곧 한 해가 지나가는데 박 대표랑 같이 파리로 와서 같이 보내는 건 어때?”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외삼촌, 사실 저랑 박 대표 사이는….”“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해 보도록 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어디 쉽겠어? 하지만 박 대표는 좋은 사람이야. 외삼촌 안목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어.”결국 유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사실 외삼촌을 만난 뒤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매번 그런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하고 씁쓸했다.전화를 끊은 유영은 홀로 사색에 잠겼다.강이한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미친 짓의 의도는 결국 그녀를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다.유영은 그가 지나간 그들의 10년을 내려놓지 못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는 그들이 옛날처럼 서로를 사랑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박연준이 떠나 있는 동안에 벌써 흔들렸을 것이다.매번 강이한과 함께 있을 때면 지난 생에 자신을 억지로 수술실에 들여보내던 광기 어린 얼굴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
자신의 오빠이자 가장 믿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유영은 든든했다.“그래, 다행이야.”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긴장으로 몸까지 떨리는 모습을 보며 여진우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스쳤다.이런 감정은 여진우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래서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부드러워졌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늘 곁에 있을게.”여진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사실 이유영은 아직도 이 수술을 왜 꼭 용성시에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파리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수술실에서.이유영은 이미 수술대에 누워 있었고 여진우는 약속대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소독약 냄새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고 그녀는 주변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진우는 강이한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여진우는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이유영과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정말 끝난 걸까?“오빠.”“왜 그래?”“무서워.”차가운 의료 기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떨렸다.여진우는 그녀가 대기실에 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말할 때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묻어났다.“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곁에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있으니까, 좀 편안하게 있어 봐.”“그래도 무서워...”이유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공포는 마치 그녀의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수술대 반대편에 누워 있던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듣고 온몸이 떨렸다.그는 그녀의 공포가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박연준에게 자신의 곁은 지옥과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유영은 강이한 곁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그의 눈앞
밤은 그렇게 평온하게 지나갔다.이유영은 깊이 잠들었고 여진우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며 박연준과 강이한에 대한 불쾌한 감정도 점차 사라졌다.물론 임소미는 계속해서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어 곁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유영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스레 거절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는 마음 깊숙이 가족들이 곁에 있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여자는 다 그렇다. 가장 힘든 순간에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이 곁을 지켜 주길 바라는 것이다.이유영은 편안하게 잠들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우지와 우현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쳤다.오늘은 이유영의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 아침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가자.”여진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그는 조심스럽게 이유영을 품에 안아 일으켜 세웠다.“수술실까지 같이 가는 거야?”“응.”“박연준은?”“그가 보고 싶어?”“아니, 그런 건 아니야!”요즘 계속 박연준이 곁에 있었기에 갑자기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박연준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유영은 계속 화가 났다.차 안에서도 이유영은 박연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진우가 온 이후로 박연준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오빠.”“응?”“수술이 끝나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이유영은 집에 가고 싶었다. 월이도 보고 싶었다.그녀는 요즘 밤마다 월이를 그리워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아이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유영은 더욱 두려워졌다.그런 세상 속에서 그녀는 아이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그러나 그보다도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 변화를 실제로 느끼고 싶었다.“물론이지.”여진우의 목소리는 따뜻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하지만 앞좌석에 앉아 있던 박
여진우는 마치 아무런 빛도 없는 건조한 사람이었다.과거에 강이한과 박연준은 그 면을 이용해 이유영을 협박했지만 지금은 그런 방법을 포기했다.강이한은 이미 포기했고 박연준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수술, 다 준비됐어?”여진우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엿보였다.“그럼.”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실수는 절대 없어야 해.”여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물론이지.”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번 수술이 이유영에게 다시 빛을 가져다줄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고 최고의 의료진을 준비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그럼 다행이야.”여진우는 짧게 답했다.“너는 내일 여기 있을 거야?”박연준이 물었다.“맞아. 수술이 끝나면 유영이를 데리고 같이 돌아갈 거야.”박연준은 말없이 여진우를 바라보았다.이유영과 함께 돌아간다고? 이게 무슨 뜻인가?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의 남편이었다. 그들의 관계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여진우는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쏘아붙였다.“그런 생각은 하지 마. 만약 너희 사이에 희망이 없다면, 이제 그만 포기해.”그의 말은 날카롭게 박연준의 가슴을 찔렀다. 이미 답답한 가슴이 더 찢어지는 것 같았다.포기라고? 말은 쉽지만 실제로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포기라니, 흥.”“포기 말고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더 좋은 방법? 없었다.“너와 그 녀석, 둘 다 유영이에게 어울리지 않아.”여진우의 단언에 박연준은 씁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네 말이 맞아. 나도, 강이한도, 유영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유영에게 접근한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으니까.그들은 그녀에게 험난한 세상을 선물했고 그녀는 그 폭풍 속에서도 강인한 난초처럼 꿋꿋이 살아남았다.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유영을 자신의 세계로 억지로 끌어들이려 했고 그녀는 더 거센 폭풍을 맞아야 했다.만약 자신들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모이산의 코코넛 주스는 유명해서 파리 수도에서도 판매될 정도였다. 임소미도 피부에 좋다며 코코넛 주스를 즐겨 마셨다.“정말 신선하고 은은한 맛이네!”“원액 그대로라서 그래. 원래 이런 맛이야.”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정말 맛있어.”코코넛 주스의 맛은 확실히 좋았다. 적어도 이제는 익숙해진 맛이었다.예전에는 하얀 색감과 끈적한 질감이 부담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코코넛 주스는 맑고 달콤했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신선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멀리서 강이한과 박연준이 광장 한가운데 펼쳐진 캠프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제 가야 해?”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난 먼저 갈게.”박연준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했다.“안 가봐?”강이한이 물었다.“여진우가 곁에 있으니까. 이유영은 내가 안 가는 걸 더 좋아할 거야.”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실 박연준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마주할 때마다 냉정했고 그의 접근을 극도로 거부하는 태도는 박연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다행히도 유영이의 곁에는 정씨 가문이 있어.”강이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박연준도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정씨 가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가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면서도 이유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한 번 넘은 선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듯,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갑옷을 두른 채 자신을 지켜냈다.강이한은 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만약 나와 유영이 사이에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그럼에도 박연준은 이해했다.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강이한은 온 힘을 다해 이유영을 붙잡았을
“나랑 이유영이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미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포기할게.”강이한은 여진우의 품에 안긴 이유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온전히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박연준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오고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저녁노을은 붉은빛을 띠며 마치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아름다웠다. 강이한은 저 붉게 물든 노을처럼 이유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마음 깊이 새겼다.“내가 왜 수술을 내일로 잡았는지 알아?”“...”“나는 해 뜨는 아침의 유영이를 보고 싶었어. 희망 속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아침 해는 희망을 상징한다.그는 이유영이 희망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네 곁에 그렇게 오래 있을 동안 그런 모습 한 번도 보지 못했어?”“유영이에겐 절망의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강이한의 말에 박연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지난 시간 동안, 이유영은 강이한 곁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고 그 절망은 결국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그 어떤 상황도 그 절망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내일 수술이 끝나면, 그녀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며 비로소 진정한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강이한은 떠났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우지와 우현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유영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여진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고 이유영은 모닥불이 뿜어내는 따스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입 벌려.”옆에서 여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할 수 있어!”“입 벌려!”여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결국 이유영은 조용히 입을 벌렸고 여진우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구운 고기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고
여진우의 품에 안기자 이유영은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 이유영은 이런 안정적인 가족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수술은 언제로 잡혔어?”“내일.”“그러면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좋아.”여진우가 곁에 있어 준다는 말에 이유영의 불안은 잦아들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더욱 꽉 껴안았다.그는 이유영이 겪은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수술이 성공해도 그 고통은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맞은편 건물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은 나란히 서서 여진우 품에 안긴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눈에는 슬픔과 씁쓸함이 서렸고 목소리는 이미 쉰 듯했다.“나는 유영이의 세상에 나만 있다고 생각했어.”“그래서 평생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유영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믿어왔다.하지만 결국, 강이한의 생각은 틀렸다.이유영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강이한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녀 곁에 가족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상 용서는 거의 불가능했다.“내일 이후로...”박연준은 말을 멈추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내일 이후로 어떻게 될까?내일 이후, 그는 이유영이 견뎌온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내일 이후... 박연준, 유영이 곁에는 이제 네가 유일해!”강이한은 진심으로 결심했다.이유영을 떠나 박연준을 우천시로 보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완전히 결심했다.이유영의 곁에서 떠나기로.“너 정말...”박연준은 불안한 마음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예전부터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 말해왔다.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그는 한때, 이유영과의 관계가 이렇게 변할 거
1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그 10년 동안 그녀와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이유영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수많은 달콤한 순간들은 오히려 더 깊은 아픔이 되어 되돌아왔다.“7년의 장기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그런 경우는 드물었다.그녀와 강이한은 그 7년 동안 정말 달콤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굳이 말하자면 그 7년 동안 그녀가 겪었던 불쾌한 일은 오직 강씨 가문뿐이었다.하지만 결혼 전 그들의 추억이 모두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 많은 것들 이 변했다.“우리가 결혼하게 된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었다는 걸, 난 상상도 못 했어...”그런데 어떻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인생에서 청춘은 고작 십 년에 불과하다.자기의 모든 청춘을 강이한에게 바쳤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당연히 견딜 수 없었다.여진우가 물었다.“연서 말하는 거야?”“그래, 연서!”요즘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심지어 밤의 악몽에서까지 존재했던 이름이었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10년 동안, 나는 그 사람 그림자에 불과했어!”태양처럼 빛나던 소중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여진우는 위로하려던 말을 다시 한번 억눌렸다. 지금 이유영에게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결코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이한은 그녀에게 가장 빛나는 청춘을 주었고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구원자처럼 나타났다.결국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소중하게 여겼던 청춘은 결국 타인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박연준은 그녀의 청춘을 무너뜨린 뒤 지옥으로 끌어냈다.“처음부터 나 혼자 견뎌냈어...”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그녀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는 사실이었
이유영은 침묵했다.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 이유영의 모습에 여진우조차도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알 수 없었다.여진우는 등나무 의자를 끌어 그녀 옆에 앉았다.“파리는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그래서?”“이번에 돌아갈 때, 지난번처럼 그렇지 않을 거야.”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관심이 섞여 있었다.“...”이유영은 지난번을 떠올렸다.그건 엔데스 명우의 사건과 얽힌 일이었다. 사실 그 일은 정씨 가문에서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엔데스 가문은 정국진이 절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는 가문이었고 그래서 이유영이 그 일에 휘말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은 현재 박연준과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었다.“알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잠시 후, 이유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알아줘서 다행이야. 아버지는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어. 모두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그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번져갔다.그녀는 결국 가족들에게 가장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이런 현실을 깨닫고 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내가 모두를 실망하게 했어!”이 말을 하며 이유영의 가슴은 더욱 괴로웠다.“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잘못한 것이 없다고?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로 인해 세 사람의 얽힘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일까?모든 것을 계산한 박연준이 잘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계산할 수 없다.강이한의 잘못이 더 클까?그도 당연히 잘못이 있었다.“유영아.”“응?”“오빠 말 들어. 그만 놓아줘!”여진우는 고독해 보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증오일까?물론 증오했다!강이한이나 박연준이 그녀에서
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를 곤란에서 구해주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다 연서 때문이잖아!”‘연서’라는 두 글자에서 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박연준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렇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의 분석 속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사실처럼 여겨졌다.지금 이유영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그와 강이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모두 연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에게 쏟는 모든 마음도 연서에게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박연준, 기억해! 나는 이유영이야!”“...”“내가 받는 너의 호의는 연서에게 전달되지 않아!”이유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알아, 나도 다 알고 있어!”박연준은 씁쓸한 목소리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언제부터 알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이미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네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네가 모르길 바랄 뿐이야!”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고 있더라도 이유영은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게 지금의 이유영이다.“아직 할 이야기 더 남았어?”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조금 전에 박연준이 이야기하자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유영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지금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마음속에는 더욱 깊고 섬세한 아픔이 퍼져갔다.이유영의 웃음 속에 비꼬는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박연준은 이유영의 그런 웃음을 보며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들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숲속 길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여진우였다. 그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걸까?여진우를 보자 박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여진우는 이미 테라스로 올라갔다.이유영은 발소리를 듣고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