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이 화를 내려고 하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강서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강이한이 전화를 받자 강서현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영은 들은 척도 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 게.” 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 이유영은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 강서희 네 발표회에 갔어?” 강이한이 물었다. “몰라.” 이유영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강서희 그 병신이 강이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받아치고 싶지 않았다. 강이한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 성질 좀 죽여.” 강이한은 예전의 이유영이 너무 그리웠다. 그땐 절대로 이런 말투로 자기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보기 싫으면 보지 말던가.” 이유영도 화가 났다. 강이한은 전에도 강서희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책문했었다. 하긴, 강씨 가문에서 가장 말 잘 듣는 딸인데. 이유영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지음이라면 강서희는 두 번째였다. 하필이면 강이한과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도 화가 났다. “네가 받은 징벌이 아직 부족하나 본데.” 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품에 가두었다. 이유영이 몸부림칠수록 강이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이유영이 말했다. “너 계속 이러면 다 같이 죽는 거야.” “정말 할 수 있겠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유영은 화김에 말을 뱉은 후 안색이 변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번 죽었었다니? 매일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의 날타로운 눈빛이 이유영의 마음
“너 그런 능력 없어.” 강이한은 이유영을 놓고 경시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곧 서희 생일이야. 몇 년 동안 지켜본 물건이라고 하니까 한 세트 남겨줘.” ‘몇 년 지켜봤는데도 갖지 못했다고? 가든의 물건이 인기가 있긴 있나 보네.’ “걔가 원하는 건 한정판이라 나도 방법이 없어!” 이유영이 말했다. “네가 가든의 사장이잖아.” “제조량은 이사회를 통해서 결정하는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어.” “이유영!” “참, 깜박했네. 강 대표는 항상 조정하는 걸 좋아하지. 하지만 가든은 강씨 가문과 달라서 제조량이 항상 사람들을 미치게 하거든.” “…….” “그럼 내가 강서희와의 관계 때문에 전례를 깨뜨려야 하는 거야? 아님 우리의 관계 때문에?” 이유영이 말을 마치자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이유영의 도발적인 눈빛을 바라보았다. “너 대체 왜 날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사실 강이한도 짐작은 갔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것이 조사 중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카드 아직 사용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 누가 사용하고 있는지만 조사해 내면 사실이 밝혀질 것이었다. 이유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강이한은 이런 이유영을 보며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번 액세서리가 서희한테 엄청 중요해. 그러니까…” “나도 올해 신제품을 구매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돕겠어?” ‘이게 사장이 할 말이야? 주기 싫은 거야 아님 구매하지 못하는 거야?’ 강이한은 이유영이 앞뒤가 꽉 막혔다고 생각했다. 강이한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이유영의 핸드폰이 울렸고 소은지의 전화였다. “은지야.”이유영이 전화를 받았다. “유영아, 나 구름이 필요해!” 구름은 가든 올해 신제품 중 하나였다. 전화 소리가 너무 커서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강이한을 한 눈 보았다. 게다가 소은지의 성격이 털털해서 강이한이 똑똑히 들었다. “꼭 구름이어야 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건 이유영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한번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회사로 돌아오자 조형욱이 와서 말했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왜 그래?” “유경원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그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눈빛이 깊어졌다. “누가 들여보냈어?” “그게…” 조형욱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유경원이 청하시에서의 신분이 특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녀 배후의 유씨 가문은 일반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감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강이한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가 가서 보낼까요?” “응.” 강이한은 유경원에게 조금도 인내심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진영숙 혼자만의 착각 때문에 초래한 일이었다. 강이한은 강씨 본가에서 진영숙과 유경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예전에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유경원은 고개를 돌렸다. 들어온 사람이 조형욱인 걸 보고 그녀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직 안 돌아왔어?” “아가씨, 방금 대표님께 전화를 했는데 바쁘다고 오늘은 먼저 돌아가시라고 합니다.” “아니, 나 오늘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해.” 유경원은 얼굴을 갈고 울먹이며 말했다.원래는 한지음의 일에서 양보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날 강씨 본가에서 그런 말을 하고 떠난 후 그들이 한지음을 잘 배치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강주에 데려갈 줄은 몰랐다. 이어서 강이한과 이유영의 스캔들이 터지자 진영숙은 온갖 핑계를 대서 유경원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유경원은 이유영이 그렇게 집착할 줄은 몰랐다. 강이한과 이혼까지 해놓고 또다시 엮이다니. “대표님께서 정말 바쁜 것 같으니 제가 모셔다 드릴 게요.”
유경원은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강서희와 마주쳤다. 강서희와 비교하면 유경원이 더 우아했다. 강서희도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 “경원 언니,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 오빠 바쁠 텐데 만났나요?” 그녀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물었다. 유경원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였어?” 강서희는 황급히 말했다. “언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흥, 뭘 그렇게 의기양양한 거야? 강이한과 이유영이 재결합하면 너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신이 난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강서희의 얼굴이 굳더니 눈빛에 음험한 빛이 스쳤다. 유경원은 강서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강씨 가문에서만 오냐오냐하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발걸음이 멀어지자 강서희는 유경원의 뒷모습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강이한이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강서희가 왔다. 그녀는 웃는 모습이 어릴 때와 똑같이 귀여웠다. 게다가 지금은 커서 예쁘고 우아함도 묻어났다. “오빠, 어떻게 됐어? 새 언니 쪽은 해결했어?” 강서희는 친근하게 불렀지만 오전에 이유영이 발표회에서 의기양양한 모습만 생각하면 질투의 불이 타올랐다. 강이한은 강서희의 웃음을 보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설었다. “왜 그래? 잘 안 됐어?” “너도 가든의 규칙 알잖아. 올해 너무 늦게 말한 거 아니야? 주문 다 나갔대.” “하지만 새 언니가 가든의 사장이잖아.” 강서희는 불만스러워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투 속에 실망이 섞여 있었는데 왠지 듣기 거북했다. 강서희는 계속 말했다. “그럼 안 되는 거야?” “응!” “새 언니가 아직도 날 싫어 하나보다.” 강이한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강서희를 한 눈 보더니 말했다. “강씨 가문에서 누가 누굴 싫어하는지 몰라?” “오빠, 그건 엄마 때문에…….” 강서희는 뒤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뻔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진영숙에게 돌렸다. 강이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너!” “새 언니는 분명 날 싫어하는 거야. 날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줬을 거라고!” 강이한은 그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강서희는 일부러 그런 거였다. 그녀가 억울해하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쪼잔하다고 책망할 테니까. 그럼 지금의 이유영은 당연히 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겠지. 그게 바로 강서희와 한지음의 계획이었다.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러자 조형욱이 들어왔다. “대표님.” “무슨 일이야?” 강이한은 강서희 때문에 찌푸린 미간을 만지며 물었다. 조형욱은 강서희를 한 눈 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강이한은 알아차리고 강서희에게 말했다. “너 먼저 돌아가. 나 회의 있어.” “오빠!” 강서희는 억울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말해볼게.” 강이한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고마워, 오빠! 꼭 말해야 해. 내 친구들 모두 내가 구름을 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생일파티에 그거 하지 않으면 비웃을 거야.” “응.” 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그녀는 조형욱 곁을 지나갈 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조형욱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에 강이한과 조형욱 두 사람만 남았다. 강이한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한지음 씨의 수술,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강이한은 표정이 굳더니 조형욱을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어제 한지음 씨가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한지음 씨에게 수술해 줬던 의사가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 강이한이 물었다. “네.” “어떻게 확신해?” “이 자료 보세요!” 조형욱은 자료를 강이한 앞에 놓았다.자료로 봐서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수술 후의 신분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게 문제였다. 전에는 그냥 병원 안과의 주임이었는데, 지금은 운영자금이 8억이나 하는 의료기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족은?” “조사해 봤는데
사무실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조형욱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네, 지금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조형욱은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강이한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조형욱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강이한이 불렀다. “잠깐!” “대표님, 왜 그러세요?” “한지음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조사해 봐.” “네!” 이번 일을 얼핏 생각하기엔 이유영이 그런 것 같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해서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 이유영에게도 조심스러웠다. 특히 이유영이 한지음의 일에 있어서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 같은 시각, 이유영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신제품 발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오로라 스튜디오에서도 엄청 바빠졌다. 게다가 박연준의 동교 신도시도 공사를 시작해서 이유영은 도면의 상세한 부분을 잘 처리해야 했다. 저녁에 퇴근 시간에도 사무실에서 야근을 했다. 강이한이 전화가 오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나 오늘 밤 새야 하니까 먼저 들어가!” “내가 같이 있어줄 게.” 남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유영의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이 떨렸다. 사실 수공도면은 이미 완성했다. 지금은 전자판을 하고 있는데 차질이 생길까 봐 이유영이 직접 하고 있었다. “너……!” “십 분 후에 도착해!” 이유영은 욕하고 싶었다. 방금 강이한의 부드러운 말투는 이유영으로 하여금 옛날이 생각나게 했다. ‘그땐 강이한이 너무 바빠서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애교를 부리고 때를 써야 했었는데, 지금은…….’ 십 분 후. 강이한은 이유영이 좋아하는 떡까지 사들고 그녀의 사무실에 나타났다.매번 줄 서서 사야 했는데 모두 그가 직접 가서 산 것이었다. 예전엔 이 떡만 사 오면 아무리 화가 나도 감동되어서 풀리곤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앞으로 사지 마. 나 안 좋아해.” 강이한은 외투를 벗는 동작을 멈칫
이유영은 바빠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혼하면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영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사무실에는 이유영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한참 후!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저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해외의 프로젝트가 문제 생겼습니다.” “뭐?” 남자는 순간 날카롭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이유영은 이상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들어 강이한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그의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 5 분 후, 그는 전화를 끊고 이유영에게로 다가왔다. “너 뭐 하는 거야?” 이유영은 그의 안색을 보며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강이한은 직접 이유영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올려 키스를 퍼부었다. 이유영은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거 아니야?’ 그녀가 손을 들어 때리려고 할 때, 강이한이 말했다. “네 외삼촌이 내 해외의 프로젝트를 건드렸어.” “쌤통이다.” 이유영이 반박했다. 정국진은 로열 글로벌의 사장인데, 그렇게 큰 손해를 보고도 가만있을 리가 없지. 이유영은 갑자기 턱에 통증이 느껴왔다. “넌 그런 외삼촌이 있어서 자랑스러운 가봐?” “당연하지.” 이유영은 숨김없이 말했다. 강이한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마음이 개운했다.강이한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몸을 굽혔다. 이유영은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강이한, 이 미친놈아…” “욕해! 좀 있으면 욕할 힘도 없을 테니까.” “너….” “계속해!” 이유영은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강이한을 죽이고 싶었다. 청하시의 밤은 엄청 아름다웠지만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강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외삼촌이 네 해외의 프로젝트를 모두 망쳤으
세강그룹에 도착하자 이유영은 조형욱, 이시욱과 직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서마다 긴급회의가 열렸는데 강이한의 엄숙한 모습을 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유영의 마음은 차가웠다. 해외의 프로젝터가 문제가 생긴 건 엄청 난 일이었다. 그래서 각 부서에서 모두 돌아와 야근을 하며 문제를 처리했다. 3시간 후, 강이한은 이유영이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눈빛을 느끼고 정신을 차려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이 회사가 오늘 망했으면 좋겠어.” “너 오늘 잘 처리하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 생각하지 마.” 그의 말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유영도 자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건 명백한 복수야! 외삼촌이 그에게 한 화풀이를 나도 함께 감당하라는 거야.’ 강이한은 화를 돋우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유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너 대단하잖아? 그럼 거의 다 해결했겠지?” 이유영이 화난 말투로 말했다. 그건 강이한이 예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었다. 예전엔 회사에 어떤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도 그녀가 걱정할까 봐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영도 커리어우먼으로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너희 외삼촌 그렇게 대단한데 하룻밤에 해결될 리가 없잖아?” “너…” 이유영은 화가 나서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요즘 그녀는 매일 바빴다. 오전에는 발표회의 일로 바쁘고 오후에 가든에서 회의를 마치면 다시 박연준의 일로 바빴다. 동교 신도시의 공사도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서 쉬고 싶은데 강이한이 이럴 줄은 몰랐다. 강이한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피로가 가득한 이유영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유영은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다.특히 지금 여기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바로 이유영이었다. 게다가 밤이라 그녀는 지루해서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그런데 강이한의 사무실에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려서 잠을 잘 수가
언제 조건을 말했다는 건데?도대체 언제였다는 걸까?눈 내리던 날, 설선비의 추락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며 반복적으로 항변했던 그때를 말하는 걸까?‘넌 나를 이렇게 대할 자격이 없어.’라고 했었던 말을 가리키는 걸까?그 모든 말 속에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에게 내건 조건들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결과는?결과는 뻔했다.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청하시 사업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소은지의 명성을 어떻게 철저히 짓밟았는지.청하시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전설적인 변호사 소은지의 진짜 얼굴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들썩했지만, 그 기사를 본 소은지의 마음은 고통과 분노로 폭발 직전이었다.“과거에 나를 파멸로 몰아넣을 때 그토록 신속하고 냉혹하더니, 여섯째 도련님도 감정에 얽매일 때가 있다니 놀랍군.”소은지의 말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졌다.그랬다.그날,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에게 모든 진실과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전했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소은지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조건을 듣겠다니! 소은지의 삶에는 더 이상 조건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설령 소은지가 내건 모든 조건이 하나하나 충족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그건 소은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나는 항상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나아가는 사람이야.”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나한테 주는 보상들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설령 같은 사회적 위치를 되찾아준다 해도 그것은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이 모든 것을 소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떤 보상도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게 지금의 소은지였다.“정말 잘난 척하는군.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 사실 너도...”“맞아, 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 하지만 예전에 내 대단함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어
이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이한이 내리는 모든 결정이 결코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선택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유영은 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번에 우천으로 간다면, 최소 반년은 걸립니다.”이정은 무거운 목소리로 강이한에게 말했다.반년.평소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금처럼 서주가 긴박한 상황에서는 반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정은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의 태도를 보니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여진우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중요한 것, 그리고 포기.삶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때로는 과감히 선택하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지금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알겠습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이한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순간, 이정이 강이한에 대한 모든 의문과 흔들림이 경외심으로 바뀌었다.이 남자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강이한의 삶에는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주위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결코 눈을 감고 지나칠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한편.서주의 상황은 점점 더 긴박해지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 역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엔데스 명우가 서주에 나타났다. 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을 드나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소은지.”남자는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하지만 소은지는 그를 비웃듯 바라보며 그의 이가 갈릴 정도로 억눌린 분노를 아무렇지 않게 감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여자, 곧 죽어?”소은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기운은
서주가 이런 상황인데도 강이한은 굳이 파리로 찾아갔다.이유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 아이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깊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를 보셨습니까?”소월이...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보자마자 이유영 품으로 달려갔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꽉 찼다.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도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무겁게 말했다.“그 사람... 소식은 들었어?”강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사람에 관해 묻기 시작하자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염 선생님은 지금 우천에 머물고 있습니다.”“우천?”“네, 주소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몇 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고 계셨습니다.”염 선생님은 명망 높은 의학자였다. 그는 70세에 서주 국제병원에서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의 진료는 항상 예약이 어려웠으며 그의 손을 거친 환자는 어떤 이유로 실명을 겪더라도 결국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한지음을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염 선생님이 이미 은퇴한 후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다. 강이한은 이유영과 함께 전생을 경험했기에, 이유영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수술을 계속 미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차라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수술이 실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평생 어둠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이유영은 이미 한 번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무력함을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이유영의 눈가를 살며시 스쳤다.아주 조심스럽게...이유영은 마치 그 온기가 자신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여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말로는 상황이 심각하대.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어줘, 응?”“응.”그동안 가족들은 계속해서 이유영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유영은 전생에 겪었던 어둠 속에서의 공포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유영은 다시 과거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 싫었기에 항상 핑계를 대며 수술을 미뤘다.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눈 수술은 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이유영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그 고통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그 어둠은.마치 악마의 동굴과 같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유영아.”“응?”“수술 전까지는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져봐. 그러면 수술에도 좋을 거야.”여진우의 말은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그는 마치 곧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여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유영이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았다.“왜?”여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모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알겠지?”이유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여진우는 잠시 멈칫하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상의 수술 환경을 준비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이 지금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이유영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다.강이한, 한지음, 이온유... 이들은 모두 이유영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유영은 이런 고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