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이 묻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지음이 강서희를 싫어하지만, 심지어 믿음직한 동맹도 아니지만 강씨 가문에 남겨두면 쓸모는 있었다. 진영숙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한지음, 내 기억으론 네가 총명했던 것 같은데 어리석게 굴지 마!” “아무도 주지 않았어요. 예전에 제가 사용하던 핸드폰에 있었어요.” “그래?” “네!” 한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숙은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서더니 한지음 뒤의 하인을 보았다. “사…… 사모님!” 한지음은 소리를 듣고 물었다. “사모님, 왜 이러세요?” “나는 네가 더 이상 이한에게 전화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니 때문에 그래요? 사모님도 언니를 싫어했잖아요.” “너와 네 언니의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네 언니는 정도라는 걸 안다는 거야.” 진영숙은 오래간만에 이유영을 칭찬했다. 나중에 이유영과의 관계도 별로 좋진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안 이상 누구든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어쩐지 이유영이 그런 사달을 내면서까지 이혼하려고 하더라니. 한지음의 얼굴은 다시 하얗게 질렸고 온몸이 떨렸다. 진영숙은 그녀의 핸드폰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핸드폰 안에 있는 강이한의 번호와 그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하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만 분수를 지킨다면 강씨 가문에서 너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줄 거야.” “…….” “한지음, 너도 수용소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지 알지?”말을 마친 정영숙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지음을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진영숙이 떠나자 한지음은 제자리에 한참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너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하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아닙니다. 사모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는……!”하인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정영숙이 한지음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한지음
지현우가 이유영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발표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신제품 보석류가 생산을 개시하자마자 크리스탈 가든의 팬들에게 거의 예약되었다. 그런데 강서희도 한 세트 예약하려고 한다는 말에 이유영은 강서희의 생일이 다가왔다는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 “없다고 전해줘요!” ‘누구에게 팔아도 강서희에게는 팔 수 없어.’ 진영숙과 강서희는 매년 크리스탈 가든 신제품의 발표회에 참석했었지만 한 번도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크리스탈 가든의 제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우는 이유영과 강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거절했을 것이었다. 강서희와 진영숙은 무대 아래에 앉아있었는데 주변에 모두 아는 귀부인들이었다. 모두들 금년의 보석 디자인을 의논하면서 진영숙에게 말했다. “사모님, 그쪽 며느리가 크리스탈 가든의 사장인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 “전에 그렇게 말을 잘 듣더니 이렇게 훌륭하게 교육했을 줄이야.” 그중 한 귀부인은 이유영을 칭찬하며 진영숙도 같이 칭찬했다. 순간, 진영숙은 이유영 때문에 마음이 뿌듯하기 시작했다. “우리 며느리는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잘 듣지!” “그런데 전에 왜 그 집 도련님과 그런 스캔들이 났을까?” 다른 귀부인이 말했다. 그의 목적은 의기양양한 진영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 바닥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억누르는 곳이었다. 진영숙은 안색이 변하더니 말했다. “그건 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문이에요. 두 사람 얼마나 알콩달콩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나중에 가든의 보석을 살 때 사모님께 부탁하면 편리하겠네요!” “가든의 보석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아니라 유영을 찾아도 쓸모없어요!” 진영숙은 총명한 여자였다. 현재 자신과 이유영의 관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이런
이유영은 차가운 웃음을 짓더니 대꾸하기 싫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강서희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이유영의 차 창을 잡고 말했다. “이유영, 넌 지금 네가 잘난 것 같지?” “넌 나랑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잘난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 “그리고, 난 그런 거 따질 시간도 없어.” 강서희의 분노와 달리 이유영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유영의 한마디에 강서희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애를 써서 설계한 함정이 상대방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니. “내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사겠다는데 왜 안 팔아? 내가 너 신고할 거야!” “뭐라고 신고할 건데? 가든의 물건은 해마다 한정판이야. 네가 늦어서 못 산 걸 누굴 탓해?” “너…” “더 할 말 있어?” “이유영, 너 너무 잘난 척하지 마.” “놔!” 이유영은 더 이상 쓸모없는 말을 듣기 싫어서 차 창에 놓인 손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강서희를 더욱 난감하게 했지만 그녀는 이유영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아채고 말했다. “내가 너 망하는 거 두고 볼 거야.” 강서희는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서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내가 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어떡하냐? 큰 소리를 쳤는데 주문을 하지 못해서.” “…….” “가든의 액세서리 없이 네 생일파티에서 어떻게 난감을 극복할지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강서희의 기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차에 탄 이유영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이유영은 엑셀을 밟았고 차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강서희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유영!” 강서희는 주먹을 쥐고 눈빛도 매서워졌다. 이유영은 백미러로 강서희가 화난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서희가 간사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하필이면 가든 같은 구하기 힘든 물건을 원할 게 뭐야?” ……. 홍원그룹.그 시각, 강이한은 의자에 앉아서 이유영의 통화기록을 보며 온몸에 차가운 기
“이 계좌의 최근 사용지와 사용시간 조사해 봐.” 강이한은 말하며 이유영의 계좌번호를 이시욱에게 건넸다. 이시욱은 계좌번호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욱이 모르게 해.” “네, 알겠습니다.” 이시욱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전에 조형욱에게 일이 있을 때도 이시욱이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시욱이 나가자 조형욱이 들어왔다. “대표님.” “다 됐어?” “네.” 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강이한에게 건네자 그는 열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형욱은 강이한을 보며 뭘 물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청하시의 기사들을 조형욱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과 이유영이 다시 엮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지음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조형욱이 나가자 사무실에 혼자 남은 강이한은 짜증 난 얼굴로 담배를 3 대를 피워서야 이유영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야?” 핸드폰에서 이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곧 점심시간인데 내가 데리러 갈 게.” “됐어. 방금 발표회에서 떠났어.” “가든으로 돌아간 거야?” “응.” “그럼 내가 너 찾으러 갈 게.” 강이한은 지금 당장 이유영을 만나고 싶었다. 요즘 그의 마음속엔 줄곧 같은 생각이었다. ‘절대로 이유영이 멀리 떠나게 해서는 안 돼.’ 마치 멀리 떠나면 영영 잃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이게 했다. “나 있다가 회의 있어. 바빠.” 이유영이 말했다.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아무리 그래도 강이한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참고 말했다. “강이한, 난 지금 청하시를 떠날 생각 없어!” ‘사람이란 참. 지난 생에 그런 스킨들이 난 후 그렇게 강이한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악연이야 진짜.’ 강이한의 전화를 끊자마자 정국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삼촌.” “발표회 봤어. 잘했어!” “…….” “올해
박연준이 돌아온다는 말에 이유영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지금까지 정국진은 그가 청하시에 올 수 없는 게 강이한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지, 회사와 박연준의 일은 몰랐다. 이유영의 마음은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상황이 순조롭나 보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유영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젊은 사람은 박력 있다니까.” 정국진은 가볍게 말했지만 이유영은 박연준의 긴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국진은 또 업무상의 일을 말했다. 이유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문 밖의 비서가 들어와 말했다. “사장님, 강 대표님 오셨어요!” 한 시름 놓인 이유영이 비서의 말을 듣자 다시 안색이 안 좋아졌다. 강이한은 조형욱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형욱은 손에 있는 도시락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끝났어?” 이유영은 자신이 전화를 두 통 할 새에 강이한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회의 끝난 거야? 아님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이유영은 화가 나서 말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화가 난 이유영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눈빛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모두 조형욱의 눈에 들어갔다. 그는 도시락을 세팅해 놓고 나갔다. 문을 닫는 순간, 그가 이유영을 보는 눈빛이 변했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자, 강이한은 이유영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그는 한 번도 없었던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런 부드러움은 이유영이 지난 생에서 체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중엔 모든 게 변했다. 대신 그녀에게 돌아온 건 기사와 차가운 소문들, 그리고 그의 의심과 독함이었다. 이유영은 도시락이 예전에 좋아하던 가게의 것이라는 걸 보고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거 할 필요 없어.” 이 모든 건 이유영에게 있어서 너무 늦었다. 강이한은 그녀의 말투 속의 정서를 알아챘지만 다른 뜻은 알지 못했다. “박연준이 돌아온대!” “정보력 하나는 참
이유영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이 화를 내려고 하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강서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강이한이 전화를 받자 강서현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영은 들은 척도 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 게.” 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 이유영은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 강서희 네 발표회에 갔어?” 강이한이 물었다. “몰라.” 이유영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강서희 그 병신이 강이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받아치고 싶지 않았다. 강이한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 성질 좀 죽여.” 강이한은 예전의 이유영이 너무 그리웠다. 그땐 절대로 이런 말투로 자기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보기 싫으면 보지 말던가.” 이유영도 화가 났다. 강이한은 전에도 강서희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책문했었다. 하긴, 강씨 가문에서 가장 말 잘 듣는 딸인데. 이유영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지음이라면 강서희는 두 번째였다. 하필이면 강이한과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도 화가 났다. “네가 받은 징벌이 아직 부족하나 본데.” 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품에 가두었다. 이유영이 몸부림칠수록 강이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이유영이 말했다. “너 계속 이러면 다 같이 죽는 거야.” “정말 할 수 있겠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유영은 화김에 말을 뱉은 후 안색이 변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번 죽었었다니? 매일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의 날타로운 눈빛이 이유영의 마음
“너 그런 능력 없어.” 강이한은 이유영을 놓고 경시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곧 서희 생일이야. 몇 년 동안 지켜본 물건이라고 하니까 한 세트 남겨줘.” ‘몇 년 지켜봤는데도 갖지 못했다고? 가든의 물건이 인기가 있긴 있나 보네.’ “걔가 원하는 건 한정판이라 나도 방법이 없어!” 이유영이 말했다. “네가 가든의 사장이잖아.” “제조량은 이사회를 통해서 결정하는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어.” “이유영!” “참, 깜박했네. 강 대표는 항상 조정하는 걸 좋아하지. 하지만 가든은 강씨 가문과 달라서 제조량이 항상 사람들을 미치게 하거든.” “…….” “그럼 내가 강서희와의 관계 때문에 전례를 깨뜨려야 하는 거야? 아님 우리의 관계 때문에?” 이유영이 말을 마치자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이유영의 도발적인 눈빛을 바라보았다. “너 대체 왜 날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사실 강이한도 짐작은 갔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것이 조사 중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카드 아직 사용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 누가 사용하고 있는지만 조사해 내면 사실이 밝혀질 것이었다. 이유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강이한은 이런 이유영을 보며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번 액세서리가 서희한테 엄청 중요해. 그러니까…” “나도 올해 신제품을 구매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돕겠어?” ‘이게 사장이 할 말이야? 주기 싫은 거야 아님 구매하지 못하는 거야?’ 강이한은 이유영이 앞뒤가 꽉 막혔다고 생각했다. 강이한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이유영의 핸드폰이 울렸고 소은지의 전화였다. “은지야.”이유영이 전화를 받았다. “유영아, 나 구름이 필요해!” 구름은 가든 올해 신제품 중 하나였다. 전화 소리가 너무 커서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강이한을 한 눈 보았다. 게다가 소은지의 성격이 털털해서 강이한이 똑똑히 들었다. “꼭 구름이어야 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건 이유영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한번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회사로 돌아오자 조형욱이 와서 말했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왜 그래?” “유경원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그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눈빛이 깊어졌다. “누가 들여보냈어?” “그게…” 조형욱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유경원이 청하시에서의 신분이 특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녀 배후의 유씨 가문은 일반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감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강이한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가 가서 보낼까요?” “응.” 강이한은 유경원에게 조금도 인내심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진영숙 혼자만의 착각 때문에 초래한 일이었다. 강이한은 강씨 본가에서 진영숙과 유경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예전에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유경원은 고개를 돌렸다. 들어온 사람이 조형욱인 걸 보고 그녀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직 안 돌아왔어?” “아가씨, 방금 대표님께 전화를 했는데 바쁘다고 오늘은 먼저 돌아가시라고 합니다.” “아니, 나 오늘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해.” 유경원은 얼굴을 갈고 울먹이며 말했다.원래는 한지음의 일에서 양보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날 강씨 본가에서 그런 말을 하고 떠난 후 그들이 한지음을 잘 배치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강주에 데려갈 줄은 몰랐다. 이어서 강이한과 이유영의 스캔들이 터지자 진영숙은 온갖 핑계를 대서 유경원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유경원은 이유영이 그렇게 집착할 줄은 몰랐다. 강이한과 이혼까지 해놓고 또다시 엮이다니. “대표님께서 정말 바쁜 것 같으니 제가 모셔다 드릴 게요.”
서주가 이런 상황인데도 강이한은 굳이 파리로 찾아갔다.이유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 아이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깊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를 보셨습니까?”소월이...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보자마자 이유영 품으로 달려갔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꽉 찼다.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도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무겁게 말했다.“그 사람... 소식은 들었어?”강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사람에 관해 묻기 시작하자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염 선생님은 지금 우천에 머물고 있습니다.”“우천?”“네, 주소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몇 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고 계셨습니다.”염 선생님은 명망 높은 의학자였다. 그는 70세에 서주 국제병원에서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의 진료는 항상 예약이 어려웠으며 그의 손을 거친 환자는 어떤 이유로 실명을 겪더라도 결국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한지음을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염 선생님이 이미 은퇴한 후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다. 강이한은 이유영과 함께 전생을 경험했기에, 이유영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수술을 계속 미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차라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수술이 실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평생 어둠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이유영은 이미 한 번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무력함을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이유영의 눈가를 살며시 스쳤다.아주 조심스럽게...이유영은 마치 그 온기가 자신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여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말로는 상황이 심각하대.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어줘, 응?”“응.”그동안 가족들은 계속해서 이유영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유영은 전생에 겪었던 어둠 속에서의 공포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유영은 다시 과거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 싫었기에 항상 핑계를 대며 수술을 미뤘다.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눈 수술은 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이유영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그 고통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그 어둠은.마치 악마의 동굴과 같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유영아.”“응?”“수술 전까지는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져봐. 그러면 수술에도 좋을 거야.”여진우의 말은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그는 마치 곧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여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유영이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았다.“왜?”여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모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알겠지?”이유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여진우는 잠시 멈칫하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상의 수술 환경을 준비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이 지금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이유영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다.강이한, 한지음, 이온유... 이들은 모두 이유영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유영은 이런 고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