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몸에선 서로 다른 기운이 발산되었다. “이유영, 넌 겁도 없냐?” “강이한, 날 몰아붙이지 마.” 그녀가 외삼촌 때문에 여기에 묵고 있긴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리고 강이한도 알아들었다. 계속 몰아붙이면 이 여자가 도망갈 거라는 걸.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다음엔 그러지 마!” “그 여자를 찾아가도 돼, 하지만 나랑 엮지 마.” 이유영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했던 전화 때문에 이유영도 자신과 강이한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고, 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강이한은 오후에 그들이 이혼하지 않았거나 재결합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저녁에 혼자 운전해 강주로 갔다. ‘대체 누가 누구의 체면을 깎는다는 거야?’ “정국진이 너를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한참 후 강이한이 말했다. 그가 보기엔 이유영이 정국진 쪽과 관계가 있은 후부터 자기 앞에서 점점 더 날뛰는 것 같았다. “예전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당연히 너한테 반격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강이한, 네가 날 조금이라도 챙겼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어.” “나는…” “너는 뭐? 날 난감하게 하지 않았다고? 전에 너와 한지음의 소문이 돌 때 내가 난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때 모두들 강이한과 한지음의 소문 때문에 술렁거렸다. 그래서 이유영 쪽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때 너는 뭐 했는데?’ “걔랑 난…….” “내가 생각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제 와서 해명도 없이 그런 게 아니라고? 웃겨 정말!’ 강이한도 알아채고 말했다. “너 지금 나 몰아붙이는 거지?” 한지음은 저녁에 강이한에게 전화를 몇 통이나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목소리로 들었을 땐 엄청 급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이유영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너 마음속에 명확한 선택이 있다면 누가 널 몰아붙일 수 있겠어? 안 그래?” 이
“오늘 온 사람이 이한이었어도 이렇게 나오려고 했니?” 진영숙은 냉담한 말투로 물었다. 전에 병원에서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계산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특히 코 앞에서 자기까지 계산하는 사람은 더욱 싫었다. 한지음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바쁘게 나오느라...” 진영숙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곁에 있는 하인의 뺨을 때렸다. 하인은 놀라서 얼굴을 감싸고 불안한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사, 사모님!” “시가보다 5배나 많은 월급을 주는데 옷도 제대로 못 입혀? 그럼 널 남겨둬서 뭐 해?” “사모님, 제가 그랬어요.” 하인이 맞자 한지음이 진영숙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남자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었다. 진영숙도 전에 병원에서 한지음의 이런 모습을 본 후 마음이 약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맞은 하인을 흘겨보더니 소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황해하는 한지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지음이 너무 잘 감추고 있어 아무런 허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머님.”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 진영숙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한지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영숙은 그런 한지음을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말했다. “한지음, 넌 한지석의 동생이니 네 오빠를 봐서라도 우리 강씨 가문에서 너에게 잘해줘야 하는 건 맞지만 너도 정도껏 해야지.” “…….” “너무 과분하게 하면 결국 본전도 못 찾을 수 있어. 특히 너 지금 실명까지 했으니 강씨 가문이 없으면 상황이 엄청 힘들어질 거야.” 진영숙의 말은 직설적이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래서 원래 하얗게 질려있던 한지음의 안색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 진영숙의 말이 맞았다. 실명한 한지음을 강씨 가문에서 보호해주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것뿐이 아니었다. “어머님, 제가 뭘 잘못했나요?”한지음은 울먹이며 물었다.예전에 이유영에게 의견이 있을 때 이런 모습을 보면 이유영이 그런 건 줄 알고 마음이 약해지
진영숙이 묻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지음이 강서희를 싫어하지만, 심지어 믿음직한 동맹도 아니지만 강씨 가문에 남겨두면 쓸모는 있었다. 진영숙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한지음, 내 기억으론 네가 총명했던 것 같은데 어리석게 굴지 마!” “아무도 주지 않았어요. 예전에 제가 사용하던 핸드폰에 있었어요.” “그래?” “네!” 한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숙은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서더니 한지음 뒤의 하인을 보았다. “사…… 사모님!” 한지음은 소리를 듣고 물었다. “사모님, 왜 이러세요?” “나는 네가 더 이상 이한에게 전화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니 때문에 그래요? 사모님도 언니를 싫어했잖아요.” “너와 네 언니의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네 언니는 정도라는 걸 안다는 거야.” 진영숙은 오래간만에 이유영을 칭찬했다. 나중에 이유영과의 관계도 별로 좋진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안 이상 누구든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어쩐지 이유영이 그런 사달을 내면서까지 이혼하려고 하더라니. 한지음의 얼굴은 다시 하얗게 질렸고 온몸이 떨렸다. 진영숙은 그녀의 핸드폰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핸드폰 안에 있는 강이한의 번호와 그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하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만 분수를 지킨다면 강씨 가문에서 너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줄 거야.” “…….” “한지음, 너도 수용소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지 알지?”말을 마친 정영숙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지음을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진영숙이 떠나자 한지음은 제자리에 한참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너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하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아닙니다. 사모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는……!”하인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정영숙이 한지음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한지음
지현우가 이유영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발표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신제품 보석류가 생산을 개시하자마자 크리스탈 가든의 팬들에게 거의 예약되었다. 그런데 강서희도 한 세트 예약하려고 한다는 말에 이유영은 강서희의 생일이 다가왔다는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 “없다고 전해줘요!” ‘누구에게 팔아도 강서희에게는 팔 수 없어.’ 진영숙과 강서희는 매년 크리스탈 가든 신제품의 발표회에 참석했었지만 한 번도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크리스탈 가든의 제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우는 이유영과 강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거절했을 것이었다. 강서희와 진영숙은 무대 아래에 앉아있었는데 주변에 모두 아는 귀부인들이었다. 모두들 금년의 보석 디자인을 의논하면서 진영숙에게 말했다. “사모님, 그쪽 며느리가 크리스탈 가든의 사장인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 “전에 그렇게 말을 잘 듣더니 이렇게 훌륭하게 교육했을 줄이야.” 그중 한 귀부인은 이유영을 칭찬하며 진영숙도 같이 칭찬했다. 순간, 진영숙은 이유영 때문에 마음이 뿌듯하기 시작했다. “우리 며느리는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잘 듣지!” “그런데 전에 왜 그 집 도련님과 그런 스캔들이 났을까?” 다른 귀부인이 말했다. 그의 목적은 의기양양한 진영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 바닥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억누르는 곳이었다. 진영숙은 안색이 변하더니 말했다. “그건 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문이에요. 두 사람 얼마나 알콩달콩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나중에 가든의 보석을 살 때 사모님께 부탁하면 편리하겠네요!” “가든의 보석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아니라 유영을 찾아도 쓸모없어요!” 진영숙은 총명한 여자였다. 현재 자신과 이유영의 관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이런
이유영은 차가운 웃음을 짓더니 대꾸하기 싫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강서희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이유영의 차 창을 잡고 말했다. “이유영, 넌 지금 네가 잘난 것 같지?” “넌 나랑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잘난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 “그리고, 난 그런 거 따질 시간도 없어.” 강서희의 분노와 달리 이유영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유영의 한마디에 강서희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애를 써서 설계한 함정이 상대방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니. “내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사겠다는데 왜 안 팔아? 내가 너 신고할 거야!” “뭐라고 신고할 건데? 가든의 물건은 해마다 한정판이야. 네가 늦어서 못 산 걸 누굴 탓해?” “너…” “더 할 말 있어?” “이유영, 너 너무 잘난 척하지 마.” “놔!” 이유영은 더 이상 쓸모없는 말을 듣기 싫어서 차 창에 놓인 손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강서희를 더욱 난감하게 했지만 그녀는 이유영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아채고 말했다. “내가 너 망하는 거 두고 볼 거야.” 강서희는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서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내가 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어떡하냐? 큰 소리를 쳤는데 주문을 하지 못해서.” “…….” “가든의 액세서리 없이 네 생일파티에서 어떻게 난감을 극복할지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강서희의 기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차에 탄 이유영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이유영은 엑셀을 밟았고 차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강서희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유영!” 강서희는 주먹을 쥐고 눈빛도 매서워졌다. 이유영은 백미러로 강서희가 화난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서희가 간사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하필이면 가든 같은 구하기 힘든 물건을 원할 게 뭐야?” ……. 홍원그룹.그 시각, 강이한은 의자에 앉아서 이유영의 통화기록을 보며 온몸에 차가운 기
“이 계좌의 최근 사용지와 사용시간 조사해 봐.” 강이한은 말하며 이유영의 계좌번호를 이시욱에게 건넸다. 이시욱은 계좌번호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욱이 모르게 해.” “네, 알겠습니다.” 이시욱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전에 조형욱에게 일이 있을 때도 이시욱이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시욱이 나가자 조형욱이 들어왔다. “대표님.” “다 됐어?” “네.” 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강이한에게 건네자 그는 열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형욱은 강이한을 보며 뭘 물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청하시의 기사들을 조형욱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과 이유영이 다시 엮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지음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조형욱이 나가자 사무실에 혼자 남은 강이한은 짜증 난 얼굴로 담배를 3 대를 피워서야 이유영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야?” 핸드폰에서 이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곧 점심시간인데 내가 데리러 갈 게.” “됐어. 방금 발표회에서 떠났어.” “가든으로 돌아간 거야?” “응.” “그럼 내가 너 찾으러 갈 게.” 강이한은 지금 당장 이유영을 만나고 싶었다. 요즘 그의 마음속엔 줄곧 같은 생각이었다. ‘절대로 이유영이 멀리 떠나게 해서는 안 돼.’ 마치 멀리 떠나면 영영 잃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이게 했다. “나 있다가 회의 있어. 바빠.” 이유영이 말했다.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아무리 그래도 강이한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참고 말했다. “강이한, 난 지금 청하시를 떠날 생각 없어!” ‘사람이란 참. 지난 생에 그런 스킨들이 난 후 그렇게 강이한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악연이야 진짜.’ 강이한의 전화를 끊자마자 정국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삼촌.” “발표회 봤어. 잘했어!” “…….” “올해
박연준이 돌아온다는 말에 이유영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지금까지 정국진은 그가 청하시에 올 수 없는 게 강이한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지, 회사와 박연준의 일은 몰랐다. 이유영의 마음은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상황이 순조롭나 보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유영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젊은 사람은 박력 있다니까.” 정국진은 가볍게 말했지만 이유영은 박연준의 긴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국진은 또 업무상의 일을 말했다. 이유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문 밖의 비서가 들어와 말했다. “사장님, 강 대표님 오셨어요!” 한 시름 놓인 이유영이 비서의 말을 듣자 다시 안색이 안 좋아졌다. 강이한은 조형욱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형욱은 손에 있는 도시락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끝났어?” 이유영은 자신이 전화를 두 통 할 새에 강이한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회의 끝난 거야? 아님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이유영은 화가 나서 말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화가 난 이유영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눈빛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모두 조형욱의 눈에 들어갔다. 그는 도시락을 세팅해 놓고 나갔다. 문을 닫는 순간, 그가 이유영을 보는 눈빛이 변했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자, 강이한은 이유영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그는 한 번도 없었던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런 부드러움은 이유영이 지난 생에서 체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중엔 모든 게 변했다. 대신 그녀에게 돌아온 건 기사와 차가운 소문들, 그리고 그의 의심과 독함이었다. 이유영은 도시락이 예전에 좋아하던 가게의 것이라는 걸 보고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거 할 필요 없어.” 이 모든 건 이유영에게 있어서 너무 늦었다. 강이한은 그녀의 말투 속의 정서를 알아챘지만 다른 뜻은 알지 못했다. “박연준이 돌아온대!” “정보력 하나는 참
이유영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이 화를 내려고 하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강서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강이한이 전화를 받자 강서현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영은 들은 척도 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 게.” 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 이유영은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 강서희 네 발표회에 갔어?” 강이한이 물었다. “몰라.” 이유영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강서희 그 병신이 강이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받아치고 싶지 않았다. 강이한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 성질 좀 죽여.” 강이한은 예전의 이유영이 너무 그리웠다. 그땐 절대로 이런 말투로 자기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보기 싫으면 보지 말던가.” 이유영도 화가 났다. 강이한은 전에도 강서희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책문했었다. 하긴, 강씨 가문에서 가장 말 잘 듣는 딸인데. 이유영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지음이라면 강서희는 두 번째였다. 하필이면 강이한과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도 화가 났다. “네가 받은 징벌이 아직 부족하나 본데.” 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품에 가두었다. 이유영이 몸부림칠수록 강이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이유영이 말했다. “너 계속 이러면 다 같이 죽는 거야.” “정말 할 수 있겠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유영은 화김에 말을 뱉은 후 안색이 변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번 죽었었다니? 매일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의 날타로운 눈빛이 이유영의 마음
한때 청하시에 머물던 시절.소은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온 탓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남자를 광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결국 아픔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랑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특히 현우의 내면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하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감정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하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과거에 소은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래, 여자가 순진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지막에 우는 건 그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소은지의 말은 냉소적이었고 태도는 언제나 가벼워 보였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소은지는 여자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휘말려야 할까?사랑은 진심을 다한 사람이 결국 패배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같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상처받은 여자들을 보아왔다.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처받은 남자들도 보아왔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던 소은지는, 현우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얼마나 걸릴까요?”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천시로 떠나는 것에 관한 질문이었다.현우가 소은지를 우천시로 보내려 한다는 건, 현재 파리의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시간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소은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엔데스 가문이 정말로 벼랑 끝에 다다른 걸까?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억눌렀다.“네.”짧은 한마디.그러나 그 짧은 대답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은 오직 소은지만이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에게 우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일에 대해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보상이라는 형태로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하지만 복수를 결코 잊지 않는 성격답게, 이 모든 보상 또한 결국 갚으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가 현우에게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듣고 현우는 그녀를 감싸던 팔이 잠시 멈췄다. 한참을 생각하던 현우는 말했다.“제가 바래다줄게요.”“...”바래다준다니? 어디로?“일곱째 도련님?”“이유영은 지금 우천시에 머물고 있어요. 은지 씨도 잠시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은지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예요?”“전기봉을 강이한이 찾아냈어요.”“...”전기봉. 이 중요한 인물을 찾는 일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였다.전기봉이 나타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를 찾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이제는...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찾아냈다고요?”“네.”이제 엔데스 가문의 운명은 앞으로의 며칠간 모든 것이 결정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소은지는 현우의 표정을 보며 더욱 불안해졌다.“하지만 전...”“지금 우천시에는 박연준이 있어요. 은지 씨도 그쪽에 있으면 더 안전할 거예요.”지금의 파리는 너무 위험했다.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런 위험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청하시에 있던 시절, 평화롭게 지내던 소은지의 삶에 갑작스럽게 파리의 사건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 충격은 소은지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만약 우천시에 있었다면, 소은지는 지금처럼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지금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속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그리고 그 분노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저는...”소은지는
기다리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강이한, 박연준, 그리고 이유영. 세 사람의 얽힌 관계는 이제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한편, 파리에서는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점점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도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반산월.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소은지는 품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현우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이 녀석을 꽤 잘 돌본 모양이에요. 아주 잘 자랐네요.”길에서 처음 이 고양이를 주웠을 때는 겨우 갓난 새끼 고양이였다.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생명체였는데 지금은 소은지의 품에서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로 감싸인 작은 생명체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조그마했지만 이제는 생명의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는 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현우의 옆에 앉았다.“작은 동물들은 금세 자라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아이는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반면, 동물들은 마음만 쓰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다.“...”소은지가 아이를 언급하자, 현우는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이 좋아해요?”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은지는 잠시 멈칫했다.아이를 좋아하냐고?“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설명할 수 없어요.”“왜요?”“아마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존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였다.그러나 소은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복잡했다.청하시에서 일하며 소은지는 직업 특성상 아이들과 얽힌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결국 이혼을 앞두고는 지독히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리, 결혼하자.”이유영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갑자기 말했다.“...”공기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이 남자, 미쳤나 봐.이유영은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볼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두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의 눈빛에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이유영은 차갑게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유영아.”“서주...”서주?“네가 원하는 건 결국 우리 아버지의 지원이야?”지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온 확신마저 이유영에게는 이익을 위한 계산으로 보인단 말인가?“괜찮아. 세상 모든 일은 사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줄게.”“흥!”박연준의 다짐이 이유영에게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내가 기회를 줄 것 같아?”이유영은 단호했다.박연준이 자신을 이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싫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박연준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박연준,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날카롭게 내뱉었다.이유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만약 지금 이유영이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 서주로 돌아가 강이한과 박연준을 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박연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그날, 서재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에게 물었다.“이유영이 시력을 되찾으면, 서주를 가장 먼저 공격할 거야.”이유영은 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신씨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신지수가 이유영 편에 선다는 건 그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그런데 서주 자체가 워낙 복잡하니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
강이한은 아마도 세상에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세상에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그는 지금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아이는 그렇게 경계하며 강이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월이는 강이한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퉁이를 돌 때, 강이한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놀라서 움찔했다.남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월이에게 말했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월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월이가 침묵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이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모든 고통은 한때 이유영이 홀로 겪었던 것이었다.이제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이유영이 겪었던 아픔이 하나하나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강이한은 떠났다.한편, 임소미는 조용히 정국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국진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임소미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이것이 이유영이 항상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이유영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그렇게 눈앞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다.살아있는 사람의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기꺼이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유영은 어떤 수단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두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강이한의 말대로 만약 석 달 후에 이유영이 염 선생의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강이한이 책임지겠다고 했다.이것이 서재에서 정국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딸이 이렇게 다치고 나서 임소미는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강이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이유영이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에게서 벗어나려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한편으로는 한지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유영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행복을 방해해 왔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소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뒷마당에서.강이한은 멀리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강이한의 마음이 아파졌다.그 아이는 나비를 쫓으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곳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곳인 듯했다.정씨 가문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꽤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아마 조산 때문일 것이다.“유씨 할머니, 저 잡았어요!”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잡고 기쁜 얼굴로 도우미에게 달려갔다.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점점 더 빨라졌네요. 나비도 잡을 수 있군요.”“저 정말 대단하죠?”“네, 정말 대단해요.”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밝게 웃었다.“유씨 할머니.”“네?”“수박 먹고 싶어요.”“알겠어요. 가져다줄게요.”그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었다.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임소미는 종종 한탄했다. 그 아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다.아이는 나비를 놓아주었다.아이는 나비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대로 해치려 하지 않았다. 수박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 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강이한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