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몸에선 서로 다른 기운이 발산되었다. “이유영, 넌 겁도 없냐?” “강이한, 날 몰아붙이지 마.” 그녀가 외삼촌 때문에 여기에 묵고 있긴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리고 강이한도 알아들었다. 계속 몰아붙이면 이 여자가 도망갈 거라는 걸.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다음엔 그러지 마!” “그 여자를 찾아가도 돼, 하지만 나랑 엮지 마.” 이유영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했던 전화 때문에 이유영도 자신과 강이한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고, 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강이한은 오후에 그들이 이혼하지 않았거나 재결합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저녁에 혼자 운전해 강주로 갔다. ‘대체 누가 누구의 체면을 깎는다는 거야?’ “정국진이 너를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한참 후 강이한이 말했다. 그가 보기엔 이유영이 정국진 쪽과 관계가 있은 후부터 자기 앞에서 점점 더 날뛰는 것 같았다. “예전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당연히 너한테 반격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강이한, 네가 날 조금이라도 챙겼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어.” “나는…” “너는 뭐? 날 난감하게 하지 않았다고? 전에 너와 한지음의 소문이 돌 때 내가 난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때 모두들 강이한과 한지음의 소문 때문에 술렁거렸다. 그래서 이유영 쪽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때 너는 뭐 했는데?’ “걔랑 난…….” “내가 생각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제 와서 해명도 없이 그런 게 아니라고? 웃겨 정말!’ 강이한도 알아채고 말했다. “너 지금 나 몰아붙이는 거지?” 한지음은 저녁에 강이한에게 전화를 몇 통이나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목소리로 들었을 땐 엄청 급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이유영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너 마음속에 명확한 선택이 있다면 누가 널 몰아붙일 수 있겠어? 안 그래?” 이
“오늘 온 사람이 이한이었어도 이렇게 나오려고 했니?” 진영숙은 냉담한 말투로 물었다. 전에 병원에서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계산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특히 코 앞에서 자기까지 계산하는 사람은 더욱 싫었다. 한지음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바쁘게 나오느라...” 진영숙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곁에 있는 하인의 뺨을 때렸다. 하인은 놀라서 얼굴을 감싸고 불안한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사, 사모님!” “시가보다 5배나 많은 월급을 주는데 옷도 제대로 못 입혀? 그럼 널 남겨둬서 뭐 해?” “사모님, 제가 그랬어요.” 하인이 맞자 한지음이 진영숙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남자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었다. 진영숙도 전에 병원에서 한지음의 이런 모습을 본 후 마음이 약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맞은 하인을 흘겨보더니 소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황해하는 한지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지음이 너무 잘 감추고 있어 아무런 허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머님.”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 진영숙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한지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영숙은 그런 한지음을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말했다. “한지음, 넌 한지석의 동생이니 네 오빠를 봐서라도 우리 강씨 가문에서 너에게 잘해줘야 하는 건 맞지만 너도 정도껏 해야지.” “…….” “너무 과분하게 하면 결국 본전도 못 찾을 수 있어. 특히 너 지금 실명까지 했으니 강씨 가문이 없으면 상황이 엄청 힘들어질 거야.” 진영숙의 말은 직설적이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래서 원래 하얗게 질려있던 한지음의 안색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 진영숙의 말이 맞았다. 실명한 한지음을 강씨 가문에서 보호해주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것뿐이 아니었다. “어머님, 제가 뭘 잘못했나요?”한지음은 울먹이며 물었다.예전에 이유영에게 의견이 있을 때 이런 모습을 보면 이유영이 그런 건 줄 알고 마음이 약해지
진영숙이 묻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지음이 강서희를 싫어하지만, 심지어 믿음직한 동맹도 아니지만 강씨 가문에 남겨두면 쓸모는 있었다. 진영숙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한지음, 내 기억으론 네가 총명했던 것 같은데 어리석게 굴지 마!” “아무도 주지 않았어요. 예전에 제가 사용하던 핸드폰에 있었어요.” “그래?” “네!” 한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숙은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서더니 한지음 뒤의 하인을 보았다. “사…… 사모님!” 한지음은 소리를 듣고 물었다. “사모님, 왜 이러세요?” “나는 네가 더 이상 이한에게 전화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니 때문에 그래요? 사모님도 언니를 싫어했잖아요.” “너와 네 언니의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네 언니는 정도라는 걸 안다는 거야.” 진영숙은 오래간만에 이유영을 칭찬했다. 나중에 이유영과의 관계도 별로 좋진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안 이상 누구든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어쩐지 이유영이 그런 사달을 내면서까지 이혼하려고 하더라니. 한지음의 얼굴은 다시 하얗게 질렸고 온몸이 떨렸다. 진영숙은 그녀의 핸드폰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핸드폰 안에 있는 강이한의 번호와 그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하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만 분수를 지킨다면 강씨 가문에서 너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줄 거야.” “…….” “한지음, 너도 수용소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지 알지?”말을 마친 정영숙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지음을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진영숙이 떠나자 한지음은 제자리에 한참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너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하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아닙니다. 사모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는……!”하인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정영숙이 한지음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한지음
지현우가 이유영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발표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신제품 보석류가 생산을 개시하자마자 크리스탈 가든의 팬들에게 거의 예약되었다. 그런데 강서희도 한 세트 예약하려고 한다는 말에 이유영은 강서희의 생일이 다가왔다는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 “없다고 전해줘요!” ‘누구에게 팔아도 강서희에게는 팔 수 없어.’ 진영숙과 강서희는 매년 크리스탈 가든 신제품의 발표회에 참석했었지만 한 번도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크리스탈 가든의 제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우는 이유영과 강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거절했을 것이었다. 강서희와 진영숙은 무대 아래에 앉아있었는데 주변에 모두 아는 귀부인들이었다. 모두들 금년의 보석 디자인을 의논하면서 진영숙에게 말했다. “사모님, 그쪽 며느리가 크리스탈 가든의 사장인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 “전에 그렇게 말을 잘 듣더니 이렇게 훌륭하게 교육했을 줄이야.” 그중 한 귀부인은 이유영을 칭찬하며 진영숙도 같이 칭찬했다. 순간, 진영숙은 이유영 때문에 마음이 뿌듯하기 시작했다. “우리 며느리는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잘 듣지!” “그런데 전에 왜 그 집 도련님과 그런 스캔들이 났을까?” 다른 귀부인이 말했다. 그의 목적은 의기양양한 진영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 바닥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억누르는 곳이었다. 진영숙은 안색이 변하더니 말했다. “그건 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문이에요. 두 사람 얼마나 알콩달콩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나중에 가든의 보석을 살 때 사모님께 부탁하면 편리하겠네요!” “가든의 보석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아니라 유영을 찾아도 쓸모없어요!” 진영숙은 총명한 여자였다. 현재 자신과 이유영의 관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이런
이유영은 차가운 웃음을 짓더니 대꾸하기 싫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강서희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이유영의 차 창을 잡고 말했다. “이유영, 넌 지금 네가 잘난 것 같지?” “넌 나랑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잘난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 “그리고, 난 그런 거 따질 시간도 없어.” 강서희의 분노와 달리 이유영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유영의 한마디에 강서희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애를 써서 설계한 함정이 상대방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니. “내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사겠다는데 왜 안 팔아? 내가 너 신고할 거야!” “뭐라고 신고할 건데? 가든의 물건은 해마다 한정판이야. 네가 늦어서 못 산 걸 누굴 탓해?” “너…” “더 할 말 있어?” “이유영, 너 너무 잘난 척하지 마.” “놔!” 이유영은 더 이상 쓸모없는 말을 듣기 싫어서 차 창에 놓인 손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강서희를 더욱 난감하게 했지만 그녀는 이유영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아채고 말했다. “내가 너 망하는 거 두고 볼 거야.” 강서희는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서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내가 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어떡하냐? 큰 소리를 쳤는데 주문을 하지 못해서.” “…….” “가든의 액세서리 없이 네 생일파티에서 어떻게 난감을 극복할지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강서희의 기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차에 탄 이유영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이유영은 엑셀을 밟았고 차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강서희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유영!” 강서희는 주먹을 쥐고 눈빛도 매서워졌다. 이유영은 백미러로 강서희가 화난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서희가 간사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하필이면 가든 같은 구하기 힘든 물건을 원할 게 뭐야?” ……. 홍원그룹.그 시각, 강이한은 의자에 앉아서 이유영의 통화기록을 보며 온몸에 차가운 기
“이 계좌의 최근 사용지와 사용시간 조사해 봐.” 강이한은 말하며 이유영의 계좌번호를 이시욱에게 건넸다. 이시욱은 계좌번호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욱이 모르게 해.” “네, 알겠습니다.” 이시욱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전에 조형욱에게 일이 있을 때도 이시욱이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시욱이 나가자 조형욱이 들어왔다. “대표님.” “다 됐어?” “네.” 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강이한에게 건네자 그는 열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형욱은 강이한을 보며 뭘 물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청하시의 기사들을 조형욱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과 이유영이 다시 엮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지음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조형욱이 나가자 사무실에 혼자 남은 강이한은 짜증 난 얼굴로 담배를 3 대를 피워서야 이유영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야?” 핸드폰에서 이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곧 점심시간인데 내가 데리러 갈 게.” “됐어. 방금 발표회에서 떠났어.” “가든으로 돌아간 거야?” “응.” “그럼 내가 너 찾으러 갈 게.” 강이한은 지금 당장 이유영을 만나고 싶었다. 요즘 그의 마음속엔 줄곧 같은 생각이었다. ‘절대로 이유영이 멀리 떠나게 해서는 안 돼.’ 마치 멀리 떠나면 영영 잃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이게 했다. “나 있다가 회의 있어. 바빠.” 이유영이 말했다.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아무리 그래도 강이한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참고 말했다. “강이한, 난 지금 청하시를 떠날 생각 없어!” ‘사람이란 참. 지난 생에 그런 스킨들이 난 후 그렇게 강이한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악연이야 진짜.’ 강이한의 전화를 끊자마자 정국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삼촌.” “발표회 봤어. 잘했어!” “…….” “올해
박연준이 돌아온다는 말에 이유영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지금까지 정국진은 그가 청하시에 올 수 없는 게 강이한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지, 회사와 박연준의 일은 몰랐다. 이유영의 마음은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상황이 순조롭나 보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유영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젊은 사람은 박력 있다니까.” 정국진은 가볍게 말했지만 이유영은 박연준의 긴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국진은 또 업무상의 일을 말했다. 이유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문 밖의 비서가 들어와 말했다. “사장님, 강 대표님 오셨어요!” 한 시름 놓인 이유영이 비서의 말을 듣자 다시 안색이 안 좋아졌다. 강이한은 조형욱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형욱은 손에 있는 도시락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끝났어?” 이유영은 자신이 전화를 두 통 할 새에 강이한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회의 끝난 거야? 아님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이유영은 화가 나서 말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화가 난 이유영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눈빛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모두 조형욱의 눈에 들어갔다. 그는 도시락을 세팅해 놓고 나갔다. 문을 닫는 순간, 그가 이유영을 보는 눈빛이 변했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자, 강이한은 이유영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그는 한 번도 없었던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런 부드러움은 이유영이 지난 생에서 체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중엔 모든 게 변했다. 대신 그녀에게 돌아온 건 기사와 차가운 소문들, 그리고 그의 의심과 독함이었다. 이유영은 도시락이 예전에 좋아하던 가게의 것이라는 걸 보고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거 할 필요 없어.” 이 모든 건 이유영에게 있어서 너무 늦었다. 강이한은 그녀의 말투 속의 정서를 알아챘지만 다른 뜻은 알지 못했다. “박연준이 돌아온대!” “정보력 하나는 참
이유영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이 화를 내려고 하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강서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강이한이 전화를 받자 강서현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영은 들은 척도 하기 싫었다. 강이한은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 게.” 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 이유영은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 강서희 네 발표회에 갔어?” 강이한이 물었다. “몰라.” 이유영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강서희 그 병신이 강이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받아치고 싶지 않았다. 강이한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 성질 좀 죽여.” 강이한은 예전의 이유영이 너무 그리웠다. 그땐 절대로 이런 말투로 자기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 보기 싫으면 보지 말던가.” 이유영도 화가 났다. 강이한은 전에도 강서희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책문했었다. 하긴, 강씨 가문에서 가장 말 잘 듣는 딸인데. 이유영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지음이라면 강서희는 두 번째였다. 하필이면 강이한과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도 화가 났다. “네가 받은 징벌이 아직 부족하나 본데.” 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품에 가두었다. 이유영이 몸부림칠수록 강이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이유영이 말했다. “너 계속 이러면 다 같이 죽는 거야.” “정말 할 수 있겠어?” “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유영은 화김에 말을 뱉은 후 안색이 변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번 죽었었다니? 매일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의 날타로운 눈빛이 이유영의 마음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