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고요함이 내려앉은 룸 안, 주시윤이 사람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하지만 얼마 후 누군가 호기심에 물었다.“소월 선배님, 전 대표님은 선배님 오빠 아닌가요? 왜 그렇게... 낯선 사람 대하듯 하는 거예요?”인턴생 한 명이 눈치 없이 물었다.박원근이 일그러진 얼굴로 경고의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그녀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죄송해요...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에요. 더는 질문 안 할게요.”장소월은 덤덤히 웃으며 설명했다.“괜찮아요. 나와 그 사람 예전엔 확실히 남매였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 사람과의 사이도 거의 끊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언젠가는 돌려줘야 해요. 4억 원짜리 술... 우리 스튜디오에서 십몇 년을 일해도 모으지 못할 돈이에요.”누군가 질문을 이어갔다.“그럼 얼마 전 시끌벅적하게 전해졌던 결혼 기사는 무엇인가요?”장소월이 저도 모르게 주스가 들어있는 컵을 꽉 움켜쥐었다.“우린 결혼 안 해요.”혼인 신고를 했다고 해도 그녀는 영원히 인정할 수 없다.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말이다.주시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됐어. 기자도 아니면서 뭣 하러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그렇게 캐물어. 빨리 밥이나 먹어. 다 먹고 나서 오늘 밤... 사우나까지 가야지!”장소월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늘 이 상황 또한 송시아가 그녀를 난처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송시아... 이번 생엔 너와 이런 시답지 않은 거로 안 싸워.’장소월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 가끔씩 다른 사람이 그녀와 말을 걸면 간단히 대답하곤 했다.장소월은 그들의 흥겨운 분위기에 어우러지지 못하는 듯했다.혼자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단아하고 우아했다.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그 분위기는 아무도 쉬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었다.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장소월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불꽃놀이를 보지 못했다.“그래요. 먼저 화장실 다녀올게요.”룸에서 나가자 종업원이 손짓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가까이 가니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자 두 명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헤어를 정리하고 있었다.“장소월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시윤 선배와 원근 선배는 그렇게 싸고도는 거야? 장소월이 하는 작업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그러니까! 그까짓 술 나도 먹어봤다고! 아까 그 얼굴 봤어? 우리가 빚이라도 진 줄 아나 봐! 그저 돈 많은 오빠 하나 있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유세야!”“그리고 그 오빠라는 사람... 애초에 장소월한텐 관심도 없는 거 아니야? 장소월은 그저 우리 앞에서 허세 부린 것뿐이고...”“우리 중에서 연기 제일 잘하는 게 장소월이잖아. 그 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어!”장소월은 의연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그녀는 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조용한 곳을 찾아 의자에 앉았다.희미한 조명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이곳은 원래 야외 레스토랑이었는데 날씨 때문에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뼈를 에일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이야말로 그녀로 하여금 다른 생각 없이 평온함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그녀는 추위에 몸이 경직되어 급기야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때 종업원이 코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어 그녀를 살펴보고는 자리를 떴다. 장소월이 룸에서 나와 이곳에 올 때까지 쭉 지켜봐 온 종업원이었다.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온 두 여자가 돌연 초대를 받았다.“전 대표님께서 두 분에게 물으실 것이 있으시답니다.”“전 대표님이요? 성세 그룹 그 전 대표님?”여자의 목소리가 한껏 흥분되었다.“맞습니다!”“세상에! 정말 그분이야!”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은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이 조심스럽게 룸 안으로 들어갔다.“대표님... 저희는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전연우가 잔에 술을 따랐다.“와서 앉아요.”두 여자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 마시면 죽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마시지 않을 수도 없다...그리고... 장소월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왜 갑자기 와이프라는 말이 전연우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이럴 줄 알았다면 화장실에서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전연우가 룸으로 돌아갔다.송시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는 옆으로 다가가 헝클어진 그의 셔츠를 정리해 주었다.“난 소월 씨가 부러워요. 무슨 말을 해도 욕 한 번 안 하잖아요. 연우 씨... 나한텐 언제 그런 특권 줄 거예요?”전연우는 그녀를 밀어내고 책상 위 차 키를 쥔 다음 자리를 뜨려 했다.송시아가 곧바로 그에게 소리쳤다.“전연우 씨! 오늘 밤엔 절대 못 가요! 6조나 되는 계약을 따온 날 이렇게 푸대접하면 안 되죠! 나랑 하룻밤 보내는 것도 안 돼요?”그녀는 전연우에게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술 때문인지 그녀의 감정은 극한까지 올라와 있었다.“나 이제 당신이 장소월과 결혼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냥... 날 위해 하루만 함께 있어 주면 안 돼요? 장소월이 당신한테 하는 거 나도 다 할 수 있어요...”알코올은 한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 외에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평소를 초월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하룻밤만 함께 있어달라고 비참하게 구걸하고 있는 송시아가 바로 그 예다.“연우 씨... 오늘 내 생일이에요. 장소월과의 웨딩 사진 일정을 망친 건 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전생에서... 당신은 한 번도 내 생일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어요. 하물며 작은 기념일에도 늘 내 옆에 있어 줬어요. 당신은... 또 내 눈이 제일 좋다고 말했어요...”전연우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마를 일그러뜨렸다.“너 많이 취했어. 일찍 들어가 쉬어.”그는 송시아를 밀어내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음을 뗐다.“연우 씨! 가지 말아요!”단호히 떠나는 그의 모습에 송시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또 이내 하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정신이 나간 듯한 괴이한 그 모습에 종업원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폭죽 소리에 파묻혔다. 적잖은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바깥으로 뛰어나왔다.장소월은 마지막으로 손바닥에서 녹아내린 눈송이를 말아쥐고 어두운 밤공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등 뒤 화려한 불꽃은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고요함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그 불꽃놀이보다 장소월은 혼자 있는 게 더 좋았다. 예전엔 혼자가 싫었지만, 지금은 결국... 그녀 혼자만 쓸쓸히 남게 되었다.장소월은 목수건을 얼굴에 감싸고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거닐었다.저녁 12시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붐비었다...그녀가 기억하기로 예전 이 시간 서울 거리엔 별로 사람이 없었다.고개를 들어보니 거리는 설날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조용한 좁은 길을 선택했다.폭죽 소리는 그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검은색 차량 한 대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그녀가 좁은 골목길에 발을 들인 순간, 눈부신 상향등이 돌연 그녀의 등을 비추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욱 어두운 곳으로 걸어갔다.차 경적이 울렸음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했다.얼마 후, 장소월의 눈에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그녀의 청초한 눈동자가 눈송이보다도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장소월은 그의 반대로 방향을 틀어 한 걸음 한 걸음 그와 멀리 떨어졌다...‘전연우, 넌 지금 모든 걸 다 가졌지만 무언가를 더 찾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전연우... 나 사실 마음 놓은 지 오래야. 더는 너 미워하지 않아.’‘예전엔 너 자체가 내 세상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넌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했어.’장소월은 스스로 택시를 잡아 남원 별장에 돌아갔다.도우미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사모님, 드디어 오셨군요. 얼른 대표님한테 전화하세요. 대표님께서 너무 걱정하
현재의 그녀는... 모두 해탈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그와 마주한다.이제 그녀 얼굴에 서려 있던 증오까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장소월은 그를 공기 대하듯 무시하고 마른 수건 하나를 잡아 방을 나가 침실이 아닌 화실로 향했다.오늘 밤 장소월은 한동안 야근해야만 마지막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완성할 수 있다.전연우는 술기운이 올라온 탓인지 가슴이 더 격렬하게 일렁거렸다. 줄곧 애써 유지해왔던 통제력도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 채 돌아서 버린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그가 돌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장소월이 들고 있던 붓을 빼앗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종이가 절반으로 찢어지고 말았다.“너... 뭐 하는 거야!”장소월은 몸 전체가 창가로 확 밀려버렸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강제로 키스를 퍼부었다.장소월은 눈앞의 사람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그저 이 역겨움을 참아내며 그가 멈추기를 기다릴 뿐이었다.반항하던 힘이 점점 사그라들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꼭 감은 두 눈과 깊게 찌푸려진 눈썹이 그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반항 대신 결국 타협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에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전연우의 불꽃은 조금씩 조금씩 꺼져버렸다.순간 전연우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그녀를 통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아이 역시 그녀에게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한다.전연우가 더는 움직이지 않자 장소월은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 순간 위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올라와 더는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미친 듯이 구토했다.장소월은 변기를 잡고 앉아 조금 전 마셨던 생강차를 모두 토해냈다.전연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장소월은 팔을 뻗어 그를 멈춰 세웠다.전연우는 3보 떨어진 거리에 서서 괴롭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속 안 모든 음식물을 토해낸 탓에 온몸에 힘이 풀린 그녀는 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성세 그룹이 어떻게 되든 장소월은 관여할 수 없다. 그의 옆엔 송시아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또한 장소월의 일에 관해서도 전연우는 종래로 무어라 말하지 못한다. 그 역시 장소월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히 휴식해야 한다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오늘은 그녀가 가장 늦게까지 일한 날이었다. 작업을 끝마치고 나니 바깥에서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화상 회의는 아직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월, 박원근, 주시윤 외 다른 사람들은 늦게까지 회식하는 바람에 어젯밤 야근엔 참여하지 않았다.박원근이 말했다.“소월아,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서 쉬어! 나머지는 우리가 할게.”“괜찮아요. 이제 조금 밖에 안 남았잖아요.”끝마치고 같이 쉬면 된다.주시윤이 말했다.“나 아침 식사 준비했는데 소월이 집은 너무 멀어서 보내지 못했어.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먹자.”“네. 그래요.”“요즘 배달 어플이 잘 되어 있어서 30분이면 집에 도착하더라고.”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주시윤의 얼굴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원근 선배, 큰일 났어. 소희랑 정현이가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갔대.”“뭐라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장소월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아직은 잘 모르겠어. 병원에서 방금 나한테 전화 왔어.”장소월의 목소리가 영상 속에서 흘러나왔다.“제가 먼저 알아볼 테니까 선배님들은 계속 작업 완성하세요.”박원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박원근은 밤새 휴식 없이 일한 그녀가 걱정되어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작업실 총 관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직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못 본 척할 수가 없다.“그래요.”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빠르게 책상을 잡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을지도 모른다.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패딩을 집어 들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밥상을 차리고 있던 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사모님, 오늘 왜 이렇게 일찍 깨셨어요? 밖에 나가시려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그의 눈길을 피했다.“전연우... 제발 다른 사람 하찮게 여기는 그 더러운 습관 좀 버려. 그 사람들 목숨도 똑같이 소중해! 앞으로 다른 사람이 날 욕하든 말든 상관하지 마!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니까. 넌 네 회사 일이나 신경 쓰면 돼. 그리고 나 스스로 내 밥벌이는 할 수 있으니까 절대 너한테 손 안 내밀어.”장소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난 방에 들어갈게. 아침밥은 혼자 먹어.”그녀는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조금의 예고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전연우가 곧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의 첫 반응은 그녀의 호흡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당장 구급차 불러요.”도우미가 다급히 대답했다.“네네... 지금 바로 전화할게요.”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쓰러진단 말인가!병원에 도착한 뒤, 서철용은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큰일은 아니야. 그냥 좀 피곤했어서 그래.”서철용이 이마를 찌푸리고 전연우를 쳐다보았다.“돈을 그렇게 많이 벌면서 대체 어디에 쓴 거야? 몸이 안 좋다는 거 뻔히 알면서 밤새 일을 하게 만들어? 돈 벌어서 다 송시아한테 주기라도 한 거야?”“나랑 송시아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장소월이 믿지 않으니 나도 이제 방법 없어.”방법이 없다고?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다니.서철용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엔 다시 삼켜버렸다. 언젠간 그녀는 반드시 떠날 것이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무용지물일 테니 말이다.“그건 소월 씨가 깨어나면 직접 설명해. 나한테 말하는 건 아무 소용 없어.”“언제면 깨어날 수 있는데?”“조금 더 자면 깨어날 거야. 이 링거 다 맞고 나서 퇴원해.”서철용이 나간 뒤 전연우는 침대 옆에 앉아 장소월을 아프게 지켜보았다.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그가 눈을 떴다.“대표님, 그 두 사람 이틀 뒤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세 그룹 입사를 요구해 제가 인사팀 사람을 보냈습니다.”알코올 중독과 성세 그룹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맞바꾼 것, 그들에겐
송시아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전연우가 관심을 두는 건 그저 그녀 배후의 그 사람일 뿐이다.송시아가 겁도 없이 그의 턱 밑에서 이런 일을 꾸미는 건 분명 성세 그룹을 장악하기 위함이다.그녀를 이대로 놔두는 건 등 뒤의 그 사람이 그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송시아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지금의 성세 그룹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단번에 먹어버리겠다고?송시아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전연우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응시했다.“대체 언제면 나 걱정 안 시킬래.”“넌 나한테 송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남자의 손이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침대 위 여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를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들은 혼인 신고를 했지만 장소월은 줄곧 반지를 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전연우도 강요하지 않았다.장소월이 깨어났을 때, 날은 어느덧 밝아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손 하나가 그녀를 부축하자 장소월은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귓가에 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아직도 낫지 않는 거야?”“그냥 감기라고 하지 않았어?”서철용이 대답했다.“면역력이 약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 보통 감기 맞아. 우리도 신은 아니야. 예상과 빗나갈 수도 있어.”그녀 일에 대면한 전연우는 늘 이렇듯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왜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단 말인가.“물...”그들의 실랑이를 들으니 장소월은 머리가 더더욱 지끈거렸다.은경애는 집에 돌아갔다가 장소월이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장소월 또한 고작 하룻밤 샌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오래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시끌벅적한 그믐날도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보내야 했다.장소월 때문에 성세 그룹에서도 연말 파티를 취소했다.전연우는 스카이 테크놀로지와 계약을 체결한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