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용은 한숨을 내쉬고는 책상 위 종래로 움직인 적 없는 약을 들어 전연우의 손에 쥐여주며 말을 돌렸다.“네 와이프가 약을 제때에 먹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네가 잘 타일러. 난 이만 빠질게.”그는 전연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부드럽게 말해. 어린아이한테 하듯 말이야.”틀린 말은 아니다. 전연우는 서른 살 중반이 되었고 장소월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을 갓 넘겼다. 삼촌 조카 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 차이다. 하여 늘 공통 화제가 없었기 때문에 전연우는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서철용이 떠나니 병실엔 두 사람만 남았다.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불꽃놀이와는 달리 이 좁은 병실에선 숨이 턱턱 막혀오는 분위기가 사람을 옥죄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 몇 개가 병실을 비추었다.장소월은 힘없이 보온병을 들어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은 이미 식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입가에 가져갔다.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제지했다.“누워서 쉬고 있어. 내가 물 끓여올게.”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전 전연우는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세계에서 뒹굴며 갖은 고생을 했었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그는 고급 정장 자켓을 벗고 회색 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뒤 밖에 나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믐날 저녁이었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쓸쓸했다.왜 하필 이런 때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단 말인가.장소월은 냉수욕을 한 탓인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었다.전연우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장소월은 침대 옆에 앉아 고통스럽게 구토하고 있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탓에 나오는 거라곤 시큼한 위산밖에 없었다. 전연우가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는 입가심할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입원한 지 5일이나 지났지만 호전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지고만 있었다.“이런 골칫거리 같으니라고.”오랫동안 애지중지 보살펴 겨우 붙었던 살이 이 짧은 며칠 사이에 다시 빠져버리
“잠시 뒤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전연우가 옆에 걸어두었던 정장을 입으며 기성은에게 분부했다.“물건 챙기고 퇴원 준비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연우가 장소월의 옷을 꺼내자 그녀는 차갑게 거절했다.“나가 있어. 나 혼자 갈아입을 수 있으니까.”“아직 몸도 안 좋은데 내가 해줄게.”장소월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전연우의 손을 빌려 옷을 갈아입은 뒤 그의 품에 안겨 병원을 나섰다.떠나기 전 서철용이 장소월에게 약 두 개를 건넸다.“저번에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잖아요. 이건 수면을 돕는 약이고 이건 면역력을 높여주는 약이에요.”장소월이 받지 않자 서철용은 약봉지를 뜯어 자신이 한 알 삼켰다.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킨 뒤에야 그녀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넣어주었다.“집에 가서 몸조리 잘해요. 밥 잘 먹고 약도 잘 챙겨 먹고요.”서철용이 그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이제 가요.”장소월은 그의 스킨쉽이 싫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전연우가 말했다.“그 손 함부로 움직이지 마.”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족보대로라면 전연우는 응당 그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연우의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고 몇 분 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약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꼭 잡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약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널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 이미 집에 도착해 있어. 당분간은 일 뒤로 미루고 최대한 집에서 너랑 같이 있어 줄게.”“결혼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저번에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어.”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지나가는 나무와 꽃들만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녀 손등에 키스하고는 깊고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전연우, 나 엄마한테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전연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동의했다.“그래. 기성은에게 준비하라고 할게. 오후에 가자.”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고귀하다고?‘전연우... 전생의 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넌 매번 날 더러운 흙더미에 짓밟아 넣었었잖아.’장소월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몸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반항하지 못할 뿐이었다.‘전연우, 예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지금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어!’전연우는 그녀가 심심해할까 봐 가끔씩 그녀에게 말도 걸었다. 서철용이 그에게 해준 충고가 효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와 장소월 사이엔 정말로 세대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그때 가져온 웨딩드레스 다른 사람이 만진 적도 없는 새것이야. 모두 다 내가 직접 디자인했고.”그가... 직접 디자인했다고?장소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전연우의 심장은 침착하고도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3년 전, 네가 떠나갔을 때...”“만약 송시아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 인시윤과 이혼하려 애쓰지 않았을 거야. 내가 강씨 집안에 저지른 일은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네가 믿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강영수의 죽음은 정말 나랑 관련 없어. 강씨 저택과 강한 그룹은 모두 인씨 가문이 장악하고 있어. 강한 그룹을 다시 살리겠다고 한다면 난 반대 안 할 거야.”장소월은 눈을 감고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설명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공동묘지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두꺼운 눈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지만, 유독 성예진의 묘지만큼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장소월의 얼굴이 약간 발갛게 얼어가고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강영수는 안 죽었어.”장소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요즘 계속 강영수의 유골을 찾
“...소월아... 오빠가 널 너무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랬어.”그렇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가 아니다. 그때처럼 잔인하지도, 죽을 것처럼 괴롭히지도 않는다.그가 정성껏 챙겨줬던 것들... 장소월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니, 확실히 마음이 움직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를 생각하면...그녀는 자신에게 단호히 경고했다. 이 모든 건 널 현혹시키기 위한 그의 술수이고 연기라고!하마터면 잊을 뻔했다!전연우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전연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그녀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방에 돌아온 뒤 장소월은 약을 꺼냈다.‘전연우... 너만 계획이 있고, 너만 생각이 있는 게 아니야.’이건 그녀가 떠나갈 수 있는 마지막 유일한 기회다.전연우가 그토록 원한다면 장소월은 그에게 협조해 연기할 것이다.그녀가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그런 척해줄 것이다...다음 날 아침, 이번 설날은 예전 장씨 가문에서 지냈던 것과 흡사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설 인사하러 온 사모님들 모두 우리 회사랑 협력관계 회사 안주인들이야. 시끄러운 게 싫으면 내가 돌려보낼게.”장소월은 열심히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 거울 속 전연우를 쳐다보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선물도 많이 보내왔던데 도우미들한테 창고에 넣어두라고 했으니까 네가 다시 돌려줘.”전연우가 말했다.“마음에 드는 건 남기고, 싫은 건 버려.”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핑계 찾아서 오지 못하게 해.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 아파. 나 며칠 쉬고 싶어.”사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카드놀이를 했다.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그녀에게 져주기도 했다.카드놀이로 딴 돈만 해도 서울에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것이다.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그녀였지만, 이미 집에 들어온 사람을 매정히 내칠 수는 없었다.문득 귀국한 이후 한 번도 백윤서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
그가 원하는 건 바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와이프다.그렇다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된다.그가 나간 뒤 핸드폰이 진동했다. 허이준이 보내온 문자였다. 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고 옷방으로 들어갔다.이 핸드폰은 전연우가 그녀에게 줬던 스마트폰이었다. 예전 썼던 핸드폰은 그가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버려버렸다.전연우의 성격대로라면 아마 이 핸드폰에 일찌감치 감시 어플을 깔아놓았을 것이다. 그녀가 뭘 하든 실시간으로 그에게 전송될 것이고, 심지어 그녀에게 오는 메시지나 전화를 차단시킬 수도 있다.만약 허이준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수단은 5년 전과 똑같이 더럽고 추악하다.그녀는 자신이 숨겨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메일함에 허이준의 메일이 와있었다.[네가 부탁했던 거 찾았어. 서민용은 해외에 없어. 서씨 가문에서 일부러 그 사람의 행적을 감추고 있어. 서씨 집안 도우미를 찾아 알아봤는데 서민용은 다시 해외로 나간 적이 없대. 그래서 병원 기록을 찾아봤는데 불치병에 걸렸더라고. 내가 보기에... 서민용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 같아.]이미 죽었다고?그럼 배은란과 서철용은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그녀는 어떻게 서민용을 잊을 걸까.그녀와 서민용은 어렸을 때부터 인연을 맺고 대학 졸업 후 결혼까지 했다. 그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는가.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허이준이 빠르게 해결해 주었다.[서철용이 형수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었어. 하지만 더 자세한 건 나도 몰라...][소월아... 그 사람들은 왜 조사하는 거야?]장소월이 답장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고생했어.]서철용은 대체 무슨 방법으로 배은란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걸까...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장소월은 다급히 핸드폰을 원래 자리에 감추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전연우가 죽 한 그릇을 들고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뭐 하는 거야?”장소월이 느긋하게 그가
전연우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방을 나선 뒤, 장소월은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와 잡았던 손을 닦아냈다.전연우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감시 어플을 살펴보았다. 불과 십여 분 전에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모두 장소월과 허이준이 디자인과 관련해 나눈 이야기였다.그는 이어 암호가 걸려있는 그녀의 메일을 열었다. 메일함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전연우가 심어놓은 감시 어플엔 재부팅 기능이 있었다.메일 내용을 본 순간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태양이 모습을 감춘 시간, 미뤄두었던 회사 연말 파티가 오늘에야 시작되고 있었다.서철용이 함께 설을 보내려 저녁 식사를 요청했지만, 전연우는 무정히 거절해버렸다.전연우는 직접 그녀에게 조금의 살결도 드러나지 않는 롱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 해야 마땅한 옷차림이었다. 그토록 두꺼운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여리여리한 몸매를 자랑하는 장소월이었다. 그녀는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귀걸이도 하지 않았다.네 번째 손가락에 끼운 레드 다이아몬드 반지는 그녀를 더더욱 눈부시고 우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장소월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고귀한 분위기를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닌 듯했다. 이 세상 아무도 그녀를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그녀의 몸에선 어렸을 때부터 명문가 규수의 자태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행동일지라도 그녀가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매료되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전연우는 거울을 비추는 그녀를 보고는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할 수만 있다면 너 꼭꼭 숨겨놓고 나 혼자만 보고 싶어.”그가 장소월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저녁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어머... 대표님, 아가씨, 그렇게 대놓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별이가 보잖아요.”은경애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장소월은 순간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은경애가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내
그녀는 이 팔찌의 역사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전생에서 송시아, 백윤서, 그리고 다른 어떤 여자에게서도 이 옥 팔찌는 보지 못했다.전연우가 군데군데 흠집까지 나 있는 낡은 반지를 이렇게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분명하다.장소월은 급기야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진정으로 그를 이해했던 적이 있었나?그녀의 기억 속 전연우는 옛것을 그리워하기보단 이익만 중요시하는 장사꾼이다.실은 예전부터 전연우에게 그만의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차가 연말 파티 장소에 멈추자 정장을 갖춰있는 남자가 먼저 내렸다. 특별히 꾸미지도 않은 평소 같은 모습이었지만 더없이 고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방황하던 소년으로부터 현재 모든 것을 다 이룬 서른 살의 사업가로 성장한 그는 모든 여자들을 설레게 만드는 꿈의 이상형이 되어 있었다.“긴장할 필요 없어. 여보.”그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올 때마다 장소월은 심장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전해졌다.장소월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조금 전 피어올랐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들이 나타나자 시끌벅적했던 파티장에 순식간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장소월은 예전 장해진과 함께 적잖은 파티에 참석했기에 이런 자리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유독 낯설고 긴장감에 사로잡혔다.성세 그룹 임원들과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를 쳤다...전연우는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대표님? 대표님이 오셨어요! 세상에, 아까 한 내기에서 제가 이긴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대표님은 분명 오실 거라고.”그중 여직원 한 명이 흥분감에 몸을 흔들며 말했다.“옆에 서 있는 저분 사모님일까요? 정말 예쁘시네요. 와...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 같아요.”“신기할 게 뭐가 있어요. 아가씨와 대표님은 이미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신 사이예요. 두 분이 결혼하신 거...
장소월은 전연우가 껍질을 깐 포도알이 놓여있는 과일 접시를 들고 일어나 조금 전 말했던 그 직원에게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전 다이어트 중이라 다 못 먹어서요. 대표님이 직원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드세요.”예쁘게 꾸민 아가씨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니, 아니에요... 사모님, 그냥 농담이었어요.”머지않은 곳에 서 있던 기성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건 또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장소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양은 많지 않지만 나눠 드세요.”“전 손 씻으러 화장실에 다녀올게요.”다른 한 명의 직원이 재빨리 일어섰다.“사모님, 제가 모시고 갈게요.”장소월은 담담히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요.”하지만 그때, 송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 씨,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장소를 가려서 해야죠. 여긴 회사 연말 파티장이에요. 소월 씨 집 방구석이 아니라고요.”증오가 다분히 담긴 그 뾰족한 말과 함께 송시아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모든 사람들이 불꽃 튀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성세 그룹 직원들은 모두 비서로부터 시작해 이 자리까지 올라온 부대표가 대표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부대표님, 이런 자리에선 그렇게 막말을 하면 안 되죠. 그럼 다들 부대표님에게 돈 버는 능력만 있지, 예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할 거잖아요! 고작 포도 한 접시일 뿐이에요. 제가 언제 사람을 모욕했다고 그래요? 말하기 전에 그 뇌로 생각부터 좀 하세요. 혹시... 지금도 제가 부대표님을 모욕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장소월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옆에 앉아있던 직원은 경직되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천진난만하게 포도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이 포도는 대표님께서 직접 껍질을 발라 사모님에게 주신 거예요. 사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