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아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전연우가 관심을 두는 건 그저 그녀 배후의 그 사람일 뿐이다.송시아가 겁도 없이 그의 턱 밑에서 이런 일을 꾸미는 건 분명 성세 그룹을 장악하기 위함이다.그녀를 이대로 놔두는 건 등 뒤의 그 사람이 그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송시아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지금의 성세 그룹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단번에 먹어버리겠다고?송시아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전연우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응시했다.“대체 언제면 나 걱정 안 시킬래.”“넌 나한테 송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남자의 손이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침대 위 여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를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들은 혼인 신고를 했지만 장소월은 줄곧 반지를 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전연우도 강요하지 않았다.장소월이 깨어났을 때, 날은 어느덧 밝아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손 하나가 그녀를 부축하자 장소월은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귓가에 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아직도 낫지 않는 거야?”“그냥 감기라고 하지 않았어?”서철용이 대답했다.“면역력이 약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 보통 감기 맞아. 우리도 신은 아니야. 예상과 빗나갈 수도 있어.”그녀 일에 대면한 전연우는 늘 이렇듯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왜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단 말인가.“물...”그들의 실랑이를 들으니 장소월은 머리가 더더욱 지끈거렸다.은경애는 집에 돌아갔다가 장소월이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장소월 또한 고작 하룻밤 샌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오래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시끌벅적한 그믐날도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보내야 했다.장소월 때문에 성세 그룹에서도 연말 파티를 취소했다.전연우는 스카이 테크놀로지와 계약을 체결한
서철용은 한숨을 내쉬고는 책상 위 종래로 움직인 적 없는 약을 들어 전연우의 손에 쥐여주며 말을 돌렸다.“네 와이프가 약을 제때에 먹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네가 잘 타일러. 난 이만 빠질게.”그는 전연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부드럽게 말해. 어린아이한테 하듯 말이야.”틀린 말은 아니다. 전연우는 서른 살 중반이 되었고 장소월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을 갓 넘겼다. 삼촌 조카 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 차이다. 하여 늘 공통 화제가 없었기 때문에 전연우는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서철용이 떠나니 병실엔 두 사람만 남았다.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불꽃놀이와는 달리 이 좁은 병실에선 숨이 턱턱 막혀오는 분위기가 사람을 옥죄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 몇 개가 병실을 비추었다.장소월은 힘없이 보온병을 들어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은 이미 식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입가에 가져갔다.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제지했다.“누워서 쉬고 있어. 내가 물 끓여올게.”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전 전연우는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세계에서 뒹굴며 갖은 고생을 했었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그는 고급 정장 자켓을 벗고 회색 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뒤 밖에 나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믐날 저녁이었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쓸쓸했다.왜 하필 이런 때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단 말인가.장소월은 냉수욕을 한 탓인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었다.전연우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장소월은 침대 옆에 앉아 고통스럽게 구토하고 있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탓에 나오는 거라곤 시큼한 위산밖에 없었다. 전연우가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는 입가심할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입원한 지 5일이나 지났지만 호전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지고만 있었다.“이런 골칫거리 같으니라고.”오랫동안 애지중지 보살펴 겨우 붙었던 살이 이 짧은 며칠 사이에 다시 빠져버리
“잠시 뒤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전연우가 옆에 걸어두었던 정장을 입으며 기성은에게 분부했다.“물건 챙기고 퇴원 준비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연우가 장소월의 옷을 꺼내자 그녀는 차갑게 거절했다.“나가 있어. 나 혼자 갈아입을 수 있으니까.”“아직 몸도 안 좋은데 내가 해줄게.”장소월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전연우의 손을 빌려 옷을 갈아입은 뒤 그의 품에 안겨 병원을 나섰다.떠나기 전 서철용이 장소월에게 약 두 개를 건넸다.“저번에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잖아요. 이건 수면을 돕는 약이고 이건 면역력을 높여주는 약이에요.”장소월이 받지 않자 서철용은 약봉지를 뜯어 자신이 한 알 삼켰다.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킨 뒤에야 그녀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넣어주었다.“집에 가서 몸조리 잘해요. 밥 잘 먹고 약도 잘 챙겨 먹고요.”서철용이 그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이제 가요.”장소월은 그의 스킨쉽이 싫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전연우가 말했다.“그 손 함부로 움직이지 마.”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족보대로라면 전연우는 응당 그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연우의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고 몇 분 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약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꼭 잡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약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널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 이미 집에 도착해 있어. 당분간은 일 뒤로 미루고 최대한 집에서 너랑 같이 있어 줄게.”“결혼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저번에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어.”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지나가는 나무와 꽃들만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녀 손등에 키스하고는 깊고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전연우, 나 엄마한테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전연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동의했다.“그래. 기성은에게 준비하라고 할게. 오후에 가자.”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고귀하다고?‘전연우... 전생의 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넌 매번 날 더러운 흙더미에 짓밟아 넣었었잖아.’장소월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몸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반항하지 못할 뿐이었다.‘전연우, 예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지금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어!’전연우는 그녀가 심심해할까 봐 가끔씩 그녀에게 말도 걸었다. 서철용이 그에게 해준 충고가 효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와 장소월 사이엔 정말로 세대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그때 가져온 웨딩드레스 다른 사람이 만진 적도 없는 새것이야. 모두 다 내가 직접 디자인했고.”그가... 직접 디자인했다고?장소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전연우의 심장은 침착하고도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3년 전, 네가 떠나갔을 때...”“만약 송시아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 인시윤과 이혼하려 애쓰지 않았을 거야. 내가 강씨 집안에 저지른 일은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네가 믿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강영수의 죽음은 정말 나랑 관련 없어. 강씨 저택과 강한 그룹은 모두 인씨 가문이 장악하고 있어. 강한 그룹을 다시 살리겠다고 한다면 난 반대 안 할 거야.”장소월은 눈을 감고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설명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공동묘지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두꺼운 눈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지만, 유독 성예진의 묘지만큼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장소월의 얼굴이 약간 발갛게 얼어가고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강영수는 안 죽었어.”장소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요즘 계속 강영수의 유골을 찾
“...소월아... 오빠가 널 너무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랬어.”그렇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가 아니다. 그때처럼 잔인하지도, 죽을 것처럼 괴롭히지도 않는다.그가 정성껏 챙겨줬던 것들... 장소월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니, 확실히 마음이 움직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를 생각하면...그녀는 자신에게 단호히 경고했다. 이 모든 건 널 현혹시키기 위한 그의 술수이고 연기라고!하마터면 잊을 뻔했다!전연우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전연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그녀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방에 돌아온 뒤 장소월은 약을 꺼냈다.‘전연우... 너만 계획이 있고, 너만 생각이 있는 게 아니야.’이건 그녀가 떠나갈 수 있는 마지막 유일한 기회다.전연우가 그토록 원한다면 장소월은 그에게 협조해 연기할 것이다.그녀가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그런 척해줄 것이다...다음 날 아침, 이번 설날은 예전 장씨 가문에서 지냈던 것과 흡사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설 인사하러 온 사모님들 모두 우리 회사랑 협력관계 회사 안주인들이야. 시끄러운 게 싫으면 내가 돌려보낼게.”장소월은 열심히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 거울 속 전연우를 쳐다보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선물도 많이 보내왔던데 도우미들한테 창고에 넣어두라고 했으니까 네가 다시 돌려줘.”전연우가 말했다.“마음에 드는 건 남기고, 싫은 건 버려.”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핑계 찾아서 오지 못하게 해.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 아파. 나 며칠 쉬고 싶어.”사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카드놀이를 했다.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그녀에게 져주기도 했다.카드놀이로 딴 돈만 해도 서울에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것이다.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그녀였지만, 이미 집에 들어온 사람을 매정히 내칠 수는 없었다.문득 귀국한 이후 한 번도 백윤서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
그가 원하는 건 바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와이프다.그렇다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된다.그가 나간 뒤 핸드폰이 진동했다. 허이준이 보내온 문자였다. 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고 옷방으로 들어갔다.이 핸드폰은 전연우가 그녀에게 줬던 스마트폰이었다. 예전 썼던 핸드폰은 그가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버려버렸다.전연우의 성격대로라면 아마 이 핸드폰에 일찌감치 감시 어플을 깔아놓았을 것이다. 그녀가 뭘 하든 실시간으로 그에게 전송될 것이고, 심지어 그녀에게 오는 메시지나 전화를 차단시킬 수도 있다.만약 허이준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수단은 5년 전과 똑같이 더럽고 추악하다.그녀는 자신이 숨겨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메일함에 허이준의 메일이 와있었다.[네가 부탁했던 거 찾았어. 서민용은 해외에 없어. 서씨 가문에서 일부러 그 사람의 행적을 감추고 있어. 서씨 집안 도우미를 찾아 알아봤는데 서민용은 다시 해외로 나간 적이 없대. 그래서 병원 기록을 찾아봤는데 불치병에 걸렸더라고. 내가 보기에... 서민용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 같아.]이미 죽었다고?그럼 배은란과 서철용은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그녀는 어떻게 서민용을 잊을 걸까.그녀와 서민용은 어렸을 때부터 인연을 맺고 대학 졸업 후 결혼까지 했다. 그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는가.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허이준이 빠르게 해결해 주었다.[서철용이 형수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었어. 하지만 더 자세한 건 나도 몰라...][소월아... 그 사람들은 왜 조사하는 거야?]장소월이 답장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고생했어.]서철용은 대체 무슨 방법으로 배은란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걸까...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장소월은 다급히 핸드폰을 원래 자리에 감추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전연우가 죽 한 그릇을 들고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뭐 하는 거야?”장소월이 느긋하게 그가
전연우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방을 나선 뒤, 장소월은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와 잡았던 손을 닦아냈다.전연우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감시 어플을 살펴보았다. 불과 십여 분 전에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모두 장소월과 허이준이 디자인과 관련해 나눈 이야기였다.그는 이어 암호가 걸려있는 그녀의 메일을 열었다. 메일함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전연우가 심어놓은 감시 어플엔 재부팅 기능이 있었다.메일 내용을 본 순간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태양이 모습을 감춘 시간, 미뤄두었던 회사 연말 파티가 오늘에야 시작되고 있었다.서철용이 함께 설을 보내려 저녁 식사를 요청했지만, 전연우는 무정히 거절해버렸다.전연우는 직접 그녀에게 조금의 살결도 드러나지 않는 롱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 해야 마땅한 옷차림이었다. 그토록 두꺼운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여리여리한 몸매를 자랑하는 장소월이었다. 그녀는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귀걸이도 하지 않았다.네 번째 손가락에 끼운 레드 다이아몬드 반지는 그녀를 더더욱 눈부시고 우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장소월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고귀한 분위기를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닌 듯했다. 이 세상 아무도 그녀를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그녀의 몸에선 어렸을 때부터 명문가 규수의 자태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행동일지라도 그녀가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매료되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전연우는 거울을 비추는 그녀를 보고는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할 수만 있다면 너 꼭꼭 숨겨놓고 나 혼자만 보고 싶어.”그가 장소월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저녁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어머... 대표님, 아가씨, 그렇게 대놓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별이가 보잖아요.”은경애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장소월은 순간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은경애가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내
그녀는 이 팔찌의 역사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전생에서 송시아, 백윤서, 그리고 다른 어떤 여자에게서도 이 옥 팔찌는 보지 못했다.전연우가 군데군데 흠집까지 나 있는 낡은 반지를 이렇게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분명하다.장소월은 급기야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진정으로 그를 이해했던 적이 있었나?그녀의 기억 속 전연우는 옛것을 그리워하기보단 이익만 중요시하는 장사꾼이다.실은 예전부터 전연우에게 그만의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차가 연말 파티 장소에 멈추자 정장을 갖춰있는 남자가 먼저 내렸다. 특별히 꾸미지도 않은 평소 같은 모습이었지만 더없이 고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방황하던 소년으로부터 현재 모든 것을 다 이룬 서른 살의 사업가로 성장한 그는 모든 여자들을 설레게 만드는 꿈의 이상형이 되어 있었다.“긴장할 필요 없어. 여보.”그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올 때마다 장소월은 심장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전해졌다.장소월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조금 전 피어올랐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들이 나타나자 시끌벅적했던 파티장에 순식간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장소월은 예전 장해진과 함께 적잖은 파티에 참석했기에 이런 자리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유독 낯설고 긴장감에 사로잡혔다.성세 그룹 임원들과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를 쳤다...전연우는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대표님? 대표님이 오셨어요! 세상에, 아까 한 내기에서 제가 이긴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대표님은 분명 오실 거라고.”그중 여직원 한 명이 흥분감에 몸을 흔들며 말했다.“옆에 서 있는 저분 사모님일까요? 정말 예쁘시네요. 와...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 같아요.”“신기할 게 뭐가 있어요. 아가씨와 대표님은 이미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신 사이예요. 두 분이 결혼하신 거...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