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이건 저희 가게에서 가장 비싼 웨딩드레스입니다. 한 벌밖에 없는 디자인이기도 하고요. 위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모두 한 땀 한 땀 손으로 박아넣은 겁니다. 적잖은 부잣집 아가씨들이 와서 입어 보았지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송시아 씨가 처음입니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이틀 뒤 신상 웨딩드레스가 도착하니 그때 다시 와보세요. 저희가 직접 가지고 가도 됩니다.”송시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한 곳을 가리켰다.“저 디자인 마음에 드네요.”종업원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아, 저건...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 드레스는...”“아니, 아가씨...”종업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시아는 성큼 걸어 나갔다. 종업원은 깜짝 놀라며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두 방은 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다.돌연 들려온 인기척에 장소월은 고개를 들었다. 화장대 거울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송시아가 비쳤다. 장소월은 순간 전생에서의 송시아가 떠올라 화들짝 놀랐다. 그때에도 그녀는 똑같은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결혼식장에 걸어 들어갔었다. 하늘이 내린 것 같은 완벽한 한 쌍의 부부의 모습으로 말이다.“당신 누구예요?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송시아는 바로 팔을 들어올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뺨을 내리쳤다.“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아!”“장소월 씨, 우리... 오랜만에 만나네요.”그녀의 등장에도 장소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당황스러움은 감추지 못하고 다리에 올려놓은 손을 꽉 말아쥐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장소월에게로 향했다.송시아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송시아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거울 속 그녀를 보며 말했다.“소월 씨, 웨딩드레스 입어 보러 왔어요? 하지만... 이 드레스 난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죠? 아! 깜빡할 뻔했네요. 이 드레스는 연우 씨가...”말을 하다가 멈춘 그녀는 어깨를 위로 으쓱
지금 장소월의 눈엔 오히려 송시아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순간 송시아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두 번째 삶이 주어졌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일편단심 전연우를 사랑하고 있다.하지만 이번엔 장소월은 더는 물러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마침 전연우도 여기에 있으니 차라리 나가서 직접 묻는 게 어때요?”“지금은... 내가 전연우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연우가 날 놓지 못하는 거예요!”“짝사랑이 힘들다는 거 나도 알아요.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날 찾아와도 이해할 수 있어요!”“하지만 송시아 씨가 일부러 날 도발하는 건 참을 수가 없네요.”“정신병을 부리고 싶으면 전연우한테 가세요!”장소월의 그 말을 들은 종업원들이 중얼거렸다.“뭐라고? 설마요. 비서부터 시작해 부대표 자리까지 꿰찼으면 됐지, 내연녀까지 되려고 하다니요.”“그러니까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 신문이나 TV에서 볼 때는 엄청 독립적인 커리어우먼인 줄 알았는데 다 연기였네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남의 남자를 빼앗는 내연녀예요! 정말 역겨워요! 대표님이 사모님과 함께 결혼사진 찍으러 왔는데 이런 난동을 피우다니요.”그 말들은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송시아의 귀에 꽂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깊게 일그러졌다.“다들 입 다물어!”“장소월 씨!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그 오만함도 얼마 가지 못할 거예요. 분명 머지않아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울며불며 애원하게 될 거예요!”송시아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방에서 나갔다.송시아에게 서비스하던 종업원은 장소월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워 다급히 연이어 사과했다. 송시아가 나간 이후엔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장소월의 꽉 쥐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마음을 짓누르던 거대한 돌멩이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때 촬영사 조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사모
기성은이 전화를 끊자마자 장소월이 그를 확 밀치고 나갔다.“당신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아가씨!”기성은은 손에 반지를 들고 있어 돌연 나가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장소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나갔다.전연우는 그녀를 쫓아 나온 뒤 별이를 경호원에게 넘겨주었다.“장소월은?”기성은이 말했다.“이미 나가셨습니다.”겨우 잡은 촬영 일정이 망가져 버렸다.전연우가 돌아왔을 때, 다행히 장소월도 남원 별장에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불과 몇 분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전연우가 차에서 내리자 경호원은 그와 함께 들어가 아이를 도우미에게 넘겨주었다.은경애는 연이어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오늘 두 분 웨딩 사진 찍으러 간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거지?’전연우가 물었다.“소월이는요?”은경애가 대답했다.“사모님은 위층에 올라가셨어요.”전연우도 위로 올라가 침실 문을 열었다. 날아온 건 베개가 아니라 화장대에 놓여있던 꽃병이었다. 그 꽃병은 저번 전연우가 자선 파티에 갔을 때 경매로 사 온 헤아릴 수 없는 값어치의 물건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침실 안 가구와 장식품은 모두 직접 주문 제작한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었다.정면으로 꽃병을 맞은 전연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실크 잠옷을 줍고는 툭툭 털어 한쪽에 걸어놓았다.“아직도 송시아의 도발에 넘어가는 거야? 소월아... 대체 언제 좀 영리해질래.”장소월은 눈을 감고 애써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은 얼마나 힘주어 말아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온몸을 집어삼킬 듯한 심장의 고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송시아 외국으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언제 또 돌아온 거야?”전연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꽉 쥔 주먹을 풀어주고는 깊은 눈동자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장소월의 내리뜨린 눈동자에서 그에
만약 정말 송시아를 싫어한다면, 지금 전연우의 권력으로 어떻게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분명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기에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는 것이다.드디어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절대 송시아가 소원을 이루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마음속을 짓누르던 응어리가 드디어 해소되는 것 같았다.전연우의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너무 역겨워 토사물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그와 송시아는 역시 하늘이 내려준 한 쌍의 커플이다!“송시아가 돌아온 건... 나와...”장소월이 평온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전연우!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난 질투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야. 내가 왜 질투를 하겠어! 난 다만 송시아가 매번 날 도발하는 게 짜증 날 뿐이야! 아무 이유 없이 욕설을 듣고 화가 안 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말 더는 하지 마. 아무 의미도 없잖아. 듣는 것도 질려.”장소월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신발을 신은 뒤 그의 옆을 지나갔다. 전연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송시아를 옆에 두는 건 단지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야.”“성세 그룹에 그 여자 지분도 있어. 때문에 내 뜻대로 강제로 내보낼 수도 없어!”“송시아가 성세 그룹의 목숨줄을...”장소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잘됐네. 난 네가 망했으면 좋겠어. 성세 그룹이 무너지고 길바닥 거지 신세가 되는 천벌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장소월이 작업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그림판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이 핸드폰은 전연우가 선물한 것이다. 핸드폰 속 데이터도 모두 마음대로 이동시켰었다. 다행히 핸드폰엔 자주 쓰는 메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연락처엔 전화번호 하나만 저장되어 있었다.영원히 통화가 연결되지 않을 단 하나의 전화번호다.낡은 핸드폰은 다행히 아
장소월이 답장을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보도 기사 하나가 튀어나왔다.소씨 가문 사모님이 병원으로 향하던 도중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이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차량이 칠십 퍼센트나 훼손된 큰 사고였다.후속 기사도 계속 보도될 것이라 한다!소씨 가문?장소월은 사진을 확대해 차 번호판을 확인한 순간 머리 안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지?그녀는 다급히 소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몇 번 시도했음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장소월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낸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송시아나 전연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그녀는 반드시 전연우를 찾아가 따져 물어야 했다.장소월은 문고리를 잡은 순간 멈춰 섰다. 그녀의 이성이 무슨 일이나 그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여 그녀는 소민아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그녀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통화는 빠르게 연결되었다.“소월 언니!”“기사 봤어요. 사고 어떻게 된 거예요?”성세 그룹 기성은의 사무실 안, 소민아는 전화를 받으며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소월 언니, 숙모가 차 사고를 당했어요. 하지만 생명에 위험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병원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치료받고 계세요.”장소월이 또 물었다.“현아는요?”“언니는... 언니는 잘 지내고 있어요!”간단한 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장소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화를 끊은 뒤, 소민아가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소월 언니한테 숨기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알면 분명 화낼 거예요.”기성은이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들고 일어나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괜찮아요. 알려줘도 아가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민아 씨는 내 말대로만 하면 돼요. 그리고 그 입 간수 좀 잘하고요.”그 경고의
장소월은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에게 주시윤과 박원근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스튜디오에서 올해 마지막 회의를 진행하고 회식까지 한다는 내용이었다.장소월이 포함되어있는 그룹 채팅방에서 다들 열정적으로 그녀를 초청하고 있었다.“소월 선배님, 꼭 오셔야 해요!”“맞아요! 저번엔 너무 급하게 가셔서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봤잖아요.”채팅방이 너무 시끄러워 그녀는 알림을 끄고 박원근에게 문자를 보냈다.[최대한 갈게요.]장소월이 맡은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다들 그녀의 그림을 기다리고 있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겨울의 밤은 늘 꽤나 긴 편이다. 장소월은 완성된 결과물을 의뢰인에게 보내고 문제없다는 확답을 받았다.그 후 작업실에도 보내주려 했으나 오늘 밤 회식한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안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또 야근을 할지도 모르니...날이 어두워지자 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해진 목을 주물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장소월이 문을 열어보니 도우미가 서 있었다.“괜찮아요. 저 오늘은 밖에서 먹을 거예요.”도우미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대표님께서 오늘 밤 회사 파티엔 안 오셔도 되지만 밖엔 나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전에 대표님에게 허락을 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 사모님, 약 드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송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웨딩 사진 일정도 망가뜨렸고, 회사 연말 파티에도 참석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장소월은 짜증 나는 도우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차를 불렀다.아이보리색 니트 상의에 아래엔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치마를 입고 긴 머리는 위로 자연스럽게 묶었다. 대충 꾸며도 정교하게 치장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손목엔 붉은색 수건을 걸고 가방을 들었다.“사모님, 정말 나가시려고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오늘 나가지 마시라고 했는데..
천하 일성.야간 업소 룸 밖, 전연우는 전화를 끊었다. 장소월이 또 이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남원 별장을 뛰쳐나갈 거라는 예상은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그는 기성은에게 그녀를 찾아보라고 분부한 뒤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송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과학 회사 대표와 사업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오자 그녀는 상 밑에서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남자의 몸에 가져가며 도발했다.“부대표, 먼저 마시고 있어. 난 화장실 다녀올게.”그가 나가자 송시아는 뒤를 따라나섰다. 이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웨딩 사진은 못 찍었지만 대신... 6조짜리 계약은 성사됐어요. 연우 씨... 이번엔 나한테 감사해야 하지 않아요?”“말해. 네가 원하는 게 뭐야?”전연우가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송시아는 몸을 일으키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연우 씨도 알고 있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연우 씨 와이프 자리라는 걸. 지금은 장소월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해 줄 거예요. 이번 6조는 그저 시작일 뿐이에요...”“언젠간 분명 나야말로 당신 아내 자리에 가장 잘 아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연우 씨... 이 세상에 나보다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 둘은 똑같이 이익이 무엇보다 우선인 사업가잖아요...”“이제 나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기다릴게요...”‘전연우, 넌 수차례 장소월을 사랑한다고 나한테 증명해 보이긴 했어... 하지만 결국 계약서 한 장에 녹아버렸잖아!’‘난 너와 장소월의 웨딩 사진을 망쳐버렸어. 하지만 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날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6조... 전연우, 난 너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장소월에게 아무리 감정이 깊다고 해도 종이 위 이 차가운 숫자엔 비하지 못할 거야.’닫지 않은 룸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종업원이 대답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맞은 편 룸에서 손님들이 회식을 하고 있는데 제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드릴게요.”바로
장소월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농담이에요.”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배님이 이제 농담하는 것까지 배웠다니.하지만 그때, 장소월의 미소가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머지않은 곳 코너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박원근과 주시윤도 깜짝 놀라며 장소월을 쳐다보았다.박원근이 재빨리 반응하고는 말했다.“전... 전 대표님, 송 부대표님!”레드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정장을 어깨에 걸친 채 걸어온 송시아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소월 씨? 여기에 온다는 말 왜 안 했어요? 했으면 나랑 연우 씨가 데리러 갔을 텐데.”“연우 씨도 참! 같이 좀 오지 그랬어요.”장소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어 그녀는 그들을 무시해버리고 걸어가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정말 역겹다.박원근과 주시윤도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주시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소월아, 저 사람 네 오빠 아니야? 얼마 전에 너랑 저 사람이 결혼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진짜야?”박원근이 주시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장소월은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루머예요. 어떤 집 오빠가 자기 여동생과 결혼하겠어요?”주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저번 그들이 귀국해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성세 그룹 대표가 직접 장소월은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했으니 아마 결혼 기사는 거짓일 것이다.그 말은 룸 밖 사람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전연우가 팔짱을 끼고 있던 송시아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녀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복수를 했다는 쾌감까지 들었다.장소월의 기분 한 번 잡치게 만든 것과 6조짜리 계약을 맞바꾼 것, 전혀 아깝지 않았다.하지만 장소월은 그들이 뭘 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송시아와 전연우 두 사람을 애초부터 알지 못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룸 안 뜨거운 분위기는 장소월로 하여금 빠르게 머릿속 잡념을 떨쳐내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