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전연우의 품에 안겨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토록 만신창이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래턱에 여드름까지 잔뜩 돋아나 있었으나 수려한 그의 외모엔 전혀 손색이 없었다. 도리어 성숙한 남자 특유의 매력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이어 그녀가 시선을 떨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목에 남아 있는 상처를 쳐다보았다.얼마 후, 전연우가 몸을 움직였다. 잠에서 깼는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그녀의 이마에 올려 체온을 체크했다.“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조금 더 자.”부드럽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전연우는 자세를 고쳐잡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어 허리를 잡고 품 안에 꼭 끌어안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장소월은 아무런 말 없이 그의 행동에 따랐다.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별이가 꼬물꼬물 기어들어 왔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리며 옹알이를 했다.별이는 침대 옆까지 기어가 침대 시트를 잡고 벌떡 일어서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장소월은 무언가 자신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전연우가 고개를 들고 쳐다본 순간 별이는 흥분에 찬 얼굴로 꺄 소리를 지르고는 두 사람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별이는 전연우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침이 흥건한 입술을 장소월의 얼굴로 들이밀었다.“아... 엄... 엄마...”장소월은 힘겹게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더는 잠들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내려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가 경악하며 소리쳤다.“악!”“내 얼굴!”바깥에서 전연우가 쏜살같이 뛰어 들어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껴안았다.“괜찮아. 곧 다 나을 거야. 약 잘 챙겨 먹으면 돼.”“정말 괜찮아. 그래도 예뻐.”장소월이 울음을 터뜨렸다.“나... 어떻게 된 거야?”전연우가 차분히 말했다.“그곳 물이 너한테 안 맞았는지 알레르기가 생겼대. 이틀 정도 약 먹으
소리를 들은 은경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침실로 들어왔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른 아이를 안고 옆방으로 피했다.“대표님, 이러시면 안 돼요. 차가운 물로 아가씨 몸을 닦아드려야 해요.”“물 갖고 와요.”전연우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은경애는 곧바로 아이를 내려놓고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연고는 간지러움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에게 평온이 찾아왔다. 하지만 손톱에 긁혀 터진 상처에서 통증이 밀려왔다.“이번 일로 내가 너한테 고마워할 거라 생각하지 마.”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면봉으로 그녀의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었다.“미안해.”“너한테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었어.”장소월은 자신의 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고개 한 번 떨구지 않던 전연우가 사과를 하다니.전연우!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세계에선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 설사 그게 틀린 것일지라도 말이다.하지만 이번엔 그가 장소월을 위해 스스로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다.은경애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펴보다가 얼른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경직된 몸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두 번의 삶을 살아가며 가장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지난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소월은 눈시울을 붉히며 힘껏 자신의 손을 빼냈다.“어떤 일은 사과 한마디로 해결되지 않아. 네 보호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 멍청이라는 거 알아.”“하지만 지하 끝까지 타락한다고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전연우, 난 네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아. 난 네가 싫어. 알겠어?”“제발 송시아한테 가서 네 와이프가 되어 달라고 해. 넌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잖아. 내가 사라지고 시간만 지나면 분명 날 잊어버릴 거야.”장소월은 가득 흥분하며 미친 듯이 눈앞 남자에게 쏘아붙였다.전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머리를 가까이 붙였다.“소월아... 송시아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했잖아. 내 와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꽁꽁 묶인 채 컴퓨터에 정보가 입력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사무소 직원은 혼인 증명 서류를 전연우에게 건넸다.“대표님, 혼인신고 절차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대표님과 장소월 씨는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오십시오.”장소월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혼인신고서에 적힌 내용들 상당수가 거짓이었다. “전연우, 이 비겁한 자식! 이건 다 가짜잖아.”“언젠가는 해야 할 결혼이었어.”전연우가 말했다.“너무 좋지 않아? 앞으로... 넌 명실상부 내 아내야.”“소월아, 너 드디어 나만의 여자가 됐어.”장소월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전연우는 그들의 혼인신고를 축하하기 위해 그녀에게 예쁜 원피스까지 선물했다.그는 또 둔탁한 순으로 그녀의 머리를 따주었다. 장소월은 거울로 종래로 이런 일은 해본 적 없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토록 고도로 집중하는 건 회사 일을 할 때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그가 한 가지 일에 열중할 때마다 발산되는 매력은 항상 그녀를 매료시켰었다.하지만 이번엔...장소월 그녀 역시 이 느낌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그가 정말 변한 건가?전연우는 보석이 박힌 머리끈을 찾아 묶어주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전연우는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씩 웃고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피하며 그가 자신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나 지금 몸 전체에 두드러기가 돋아있어. 감염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그는 혼인신고 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프러포즈도, 결혼식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전연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별이가 장소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니, 별이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 먹고 더 달라는 듯 우유병을 흔들었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은경애를 쳐다보았다.은경애가 눈치를 채고 별이를 안자 전연우가 말했다.“저한테 주세요.”은경애는 흠칫 놀라고는 아이를 넘겨주었다.시끄럽게 버둥거리던 아이가 전연우의 무릎에 앉자마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해졌다.은경애는 간식거리를 찾아 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밥 먹어.”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 살을 발라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그러고는 선물 상자를 그녀의 눈앞에 밀어주었다.“저녁에 뜯어봐.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야.”장소월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식사가 끝나자 가족사진을 찍어줄 사진사가 시간 맞춰 도착했다.장소월은 얼굴에 자라난 붉은 두드러기가 신경 쓰였다.“왜 하필 오늘이야? 시간 바꾸면 안 돼?”전연우가 얼굴을 막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포토샵 기술이면 두드러기 지우는 건 식은 죽 먹기야. 몇 분이면 되니까 다 찍고 나서 약 먹어.”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빨리해. 나 어지러워.”사진사는 이미 배경을 설정해 놓았다. 장소월은 옷은 그대로 입고 간단히 메이크업을 받은 뒤 배경 앞 의자에 앉았다.사진사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촬영에 박차를 가했다.빠르게 촬영이 끝나고 사진사가 결과물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사모님, 만족스러운지 봐주실래요?”장소월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리어 갑자기 몰려온 메슥거림에 가슴팍을 부여잡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구토했다.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전연우는 이미 이마를 찌푸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1층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장소월이 허리를 굽히고 변기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먹었던 죽까지 모두 토해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말했다.“저 그냥 맛만 보면 돼요.”다시 태어난 뒤 첫 설날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평소 좀처럼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탁을 은경애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럼 제가 바로 해올게요. 바깥에서 드시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그래요.”은경애는 다급히 꼬치구이 재료를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장소월이 매운 것을 잘 먹지 않기에 집에 고춧가루도 별로 없었다.아래층에 내려가니 주방에서 도우미들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은경애는 그때에야 집에 꼬치구이 도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급히 오 집사에게 부탁했다. 오 집사는 돈을 받은 뒤 바로 전연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별장 안 사람들은 은경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연우의 사람이다.장소월에 관련된 일은 반드시 그의 허락을 맡고 난 뒤에야 행할 수 있다.마늘 한 조각을 사는 사소한 일이라도 말이다.전연우는 종래로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주 자세한 일까지 알기를 원했다.전연우가 전화를 받고 장소월을 보러 가려 일어섰을 때, 마침 오 집사가 걸어왔다.“이게 먹고 싶대요?”“네. 아주머니가 돈을 주며 여기에 씌어있는 재료들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오 집사는 종이를 전연우에게 보여주었다.살펴보니 모두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구였다.그의 기억력은 꽤나 뛰어났다...남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얼굴로 말했다.“해달라는 대로 해요.”“네. 대표님.”전연우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이 돈으로 사고 나머지는 돌려줘요.”“네.”오 집사가 나간 뒤 전연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소월은 책 한 권을 옆에 두고 침대에 앉아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구름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 줄기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하얀 피부가 빛을 반사해 미세한 솜털까지 또렷이 보였다.예전 그녀가 이 집에 살 때 장해진의 모든 주의력은 전연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날 역시 지금처럼 눈이 내렸었다
장소월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본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장소월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네가 몸을 회복하면 해외에서 주문한 웨딩드레스도 도착해 있을 거야. 그때 한 번 입어 봐.”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잡자 그녀는 단번에 빼버렸다.“전연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내 동의도 없이 혼인신고까지 했으면 네 목적 다 달성한 거 아니야? 더는 내 앞에서 존재감 과시하지 마.”전연우는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했다.“얼마 후 우리 결혼 소식이 서울 전체에 전해질 거야. 넌 이제 성세 그룹 안주인이야.”“전연우! 사람들이 우리가 예전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있다는 거 몰라? 넌 내 아버지의 양자였고, 내 오빠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가 결혼한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전생에서 그들이 결혼했을 때, 장소월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연우의 아내임을 알리고 싶어 했으나 그가 원하지 않았다.그녀와의 결혼이 전연우에게 있어선 더없는 수치였으니까.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접은 지금, 도리어 그가 미친 듯이 원하고 있다.“사람들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어. 웨딩 사진 찍고 나면 회사 연말 파티에 널 데리고 갈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를 일부러 자극하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전연우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푹 쉬어.”그는 일어서 몸을 돌리고 몇 번 연이어 기침했다.장소월도 전연우의 몸이 아직 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으니 말이다.전연우는 서재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엔 하얀색 약병 두 개가 놓여있었다.그건 서철용이 전연우에게 처방해준 분노를 제어하는 약물이었다.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전연우는 적잖은 정력을 소모했다.전연우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 불빛이 천
전연우였다!장소월은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품 안은 그야말로 난로와도 같이 뜨거웠다.몸을 회복하지도 못했으면서 왜 그녀와 함께 집에 있는단 말인가?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준수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 이런 다정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면 장소월은 아마 행복감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전연우... 전생엔 대체 왜 그렇게 날 미워했던 거야? 만약 백윤서 때문이라면... 난 이미 속죄했잖아.’‘그럼 이번 생은?’‘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거야?’...까마득한 높이의 펜트하우스 안, 샤워 가운을 입은 송시아가 책상 위 모든 물건을 쓸어내렸다.“전연우! 너 어떻게... 장소월과 결혼할 수가 있어!”송시아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사에 실린 두 사람의 혼인신고서를 본 순간 손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녀는 정말이지 미치광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네 옆에서 성세 그룹을 세운 것도 나고, 널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앉힌 것도 나야.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널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혔단 말이야. 전생에서 넌 날 선택했어. 이번에도... 응당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송시아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어 머리를 쥐어뜯었다.“그게 이렇게 이성을 잃을 일이야?”중년 남자가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에선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송시아는 바로 감정을 가라앉혔지만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표독함은 감추지 못했다.“억울해서 그래요. 전연우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거 절대 인정 못 한다고요!”남자는 아직 성욕이 채 소진되지 않았는지 여자의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그곳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의자에 앉혔다.“조급해하지마. 이제 시작이야...”송시아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그럼... 동의한 거예요?”“당연하지.”송시아는 씩 웃으며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의 행동에 협조했다.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음란한 기운이 방안에 만연했다...
그때, 대표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긴 생머리에 정장 치마를 입은 25세 정도의 여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기... 기 비서님... 커피...”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거기 놔요.”이름은 소피아, 소민아가 떠난 뒤 잠시 고용한 기성은의 새 비서였다. 소피아가 불안하게 커피를 내려놓았다.“기 비서님, 다른 시키실 것 있으세요? 없으면 서류 프린트할 게 남아서 가보겠습니다.”기성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그래요. 가봐요.”기성은은 대표님을 제외하면 가장 대면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고위급 인사들까지도 그의 낯빛을 살펴야 할 정도였다.일하는 과정에서 조그마한 착오라도 생길 시엔 반죽음으로 욕설을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바로 해고될지도 모른다.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또다시 기성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 씨 아직도 연락 안 돼요?”“기 비서님께서 소민아 씨를 출장 보내신 거 아닌가요? 저희도 오랫동안 소민아 씨 보지 못했어요. 전화해도 연결되지 않더라고요.”“그래요. 알겠어요.”사무실 문이 닫힌 뒤, 기성은은 사인펜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표님과 약속을 잡은 몇몇 다른 회사 대표, 그리고 사무적으로 연결된 임원들과 주고받은 메시지만 가득했다. 소민아와 나눈 메시지는 며칠 전에 멈춰있었다.기성은은 일을 함에 있어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소민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녀가 맡았던 일들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그는 다시 문자를 작성해 그녀에게 보냈다.[두 시간 안에 회사로 와요. 아니면 다시는 성세 그룹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말아요.]멀고 먼 곳에서 소민아는 선글라스를 걸고 선텐하며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돌연 도착한 기성은의 문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연락처를 악마라고 저장해 놓았다.문자 내용을 본 순간 피식 웃으며 욕설을 퍼부었다.“뻔뻔한 인간 같으니라고. 해고하려면 하라지. 내가 무서워할 줄 알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