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전연우의 품에 안겨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토록 만신창이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래턱에 여드름까지 잔뜩 돋아나 있었으나 수려한 그의 외모엔 전혀 손색이 없었다. 도리어 성숙한 남자 특유의 매력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이어 그녀가 시선을 떨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목에 남아 있는 상처를 쳐다보았다.얼마 후, 전연우가 몸을 움직였다. 잠에서 깼는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그녀의 이마에 올려 체온을 체크했다.“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조금 더 자.”부드럽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전연우는 자세를 고쳐잡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어 허리를 잡고 품 안에 꼭 끌어안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장소월은 아무런 말 없이 그의 행동에 따랐다.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별이가 꼬물꼬물 기어들어 왔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리며 옹알이를 했다.별이는 침대 옆까지 기어가 침대 시트를 잡고 벌떡 일어서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장소월은 무언가 자신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전연우가 고개를 들고 쳐다본 순간 별이는 흥분에 찬 얼굴로 꺄 소리를 지르고는 두 사람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별이는 전연우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침이 흥건한 입술을 장소월의 얼굴로 들이밀었다.“아... 엄... 엄마...”장소월은 힘겹게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더는 잠들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내려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가 경악하며 소리쳤다.“악!”“내 얼굴!”바깥에서 전연우가 쏜살같이 뛰어 들어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껴안았다.“괜찮아. 곧 다 나을 거야. 약 잘 챙겨 먹으면 돼.”“정말 괜찮아. 그래도 예뻐.”장소월이 울음을 터뜨렸다.“나... 어떻게 된 거야?”전연우가 차분히 말했다.“그곳 물이 너한테 안 맞았는지 알레르기가 생겼대. 이틀 정도 약 먹으
소리를 들은 은경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침실로 들어왔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른 아이를 안고 옆방으로 피했다.“대표님, 이러시면 안 돼요. 차가운 물로 아가씨 몸을 닦아드려야 해요.”“물 갖고 와요.”전연우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은경애는 곧바로 아이를 내려놓고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연고는 간지러움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에게 평온이 찾아왔다. 하지만 손톱에 긁혀 터진 상처에서 통증이 밀려왔다.“이번 일로 내가 너한테 고마워할 거라 생각하지 마.”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면봉으로 그녀의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었다.“미안해.”“너한테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었어.”장소월은 자신의 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고개 한 번 떨구지 않던 전연우가 사과를 하다니.전연우!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세계에선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 설사 그게 틀린 것일지라도 말이다.하지만 이번엔 그가 장소월을 위해 스스로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다.은경애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펴보다가 얼른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경직된 몸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두 번의 삶을 살아가며 가장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지난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소월은 눈시울을 붉히며 힘껏 자신의 손을 빼냈다.“어떤 일은 사과 한마디로 해결되지 않아. 네 보호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 멍청이라는 거 알아.”“하지만 지하 끝까지 타락한다고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전연우, 난 네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아. 난 네가 싫어. 알겠어?”“제발 송시아한테 가서 네 와이프가 되어 달라고 해. 넌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잖아. 내가 사라지고 시간만 지나면 분명 날 잊어버릴 거야.”장소월은 가득 흥분하며 미친 듯이 눈앞 남자에게 쏘아붙였다.전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머리를 가까이 붙였다.“소월아... 송시아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했잖아. 내 와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꽁꽁 묶인 채 컴퓨터에 정보가 입력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사무소 직원은 혼인 증명 서류를 전연우에게 건넸다.“대표님, 혼인신고 절차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대표님과 장소월 씨는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오십시오.”장소월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혼인신고서에 적힌 내용들 상당수가 거짓이었다. “전연우, 이 비겁한 자식! 이건 다 가짜잖아.”“언젠가는 해야 할 결혼이었어.”전연우가 말했다.“너무 좋지 않아? 앞으로... 넌 명실상부 내 아내야.”“소월아, 너 드디어 나만의 여자가 됐어.”장소월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전연우는 그들의 혼인신고를 축하하기 위해 그녀에게 예쁜 원피스까지 선물했다.그는 또 둔탁한 순으로 그녀의 머리를 따주었다. 장소월은 거울로 종래로 이런 일은 해본 적 없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토록 고도로 집중하는 건 회사 일을 할 때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그가 한 가지 일에 열중할 때마다 발산되는 매력은 항상 그녀를 매료시켰었다.하지만 이번엔...장소월 그녀 역시 이 느낌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그가 정말 변한 건가?전연우는 보석이 박힌 머리끈을 찾아 묶어주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전연우는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씩 웃고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피하며 그가 자신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나 지금 몸 전체에 두드러기가 돋아있어. 감염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그는 혼인신고 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프러포즈도, 결혼식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전연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별이가 장소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니, 별이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 먹고 더 달라는 듯 우유병을 흔들었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은경애를 쳐다보았다.은경애가 눈치를 채고 별이를 안자 전연우가 말했다.“저한테 주세요.”은경애는 흠칫 놀라고는 아이를 넘겨주었다.시끄럽게 버둥거리던 아이가 전연우의 무릎에 앉자마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해졌다.은경애는 간식거리를 찾아 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밥 먹어.”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 살을 발라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그러고는 선물 상자를 그녀의 눈앞에 밀어주었다.“저녁에 뜯어봐.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야.”장소월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식사가 끝나자 가족사진을 찍어줄 사진사가 시간 맞춰 도착했다.장소월은 얼굴에 자라난 붉은 두드러기가 신경 쓰였다.“왜 하필 오늘이야? 시간 바꾸면 안 돼?”전연우가 얼굴을 막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포토샵 기술이면 두드러기 지우는 건 식은 죽 먹기야. 몇 분이면 되니까 다 찍고 나서 약 먹어.”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빨리해. 나 어지러워.”사진사는 이미 배경을 설정해 놓았다. 장소월은 옷은 그대로 입고 간단히 메이크업을 받은 뒤 배경 앞 의자에 앉았다.사진사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촬영에 박차를 가했다.빠르게 촬영이 끝나고 사진사가 결과물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사모님, 만족스러운지 봐주실래요?”장소월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리어 갑자기 몰려온 메슥거림에 가슴팍을 부여잡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구토했다.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전연우는 이미 이마를 찌푸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1층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장소월이 허리를 굽히고 변기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먹었던 죽까지 모두 토해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말했다.“저 그냥 맛만 보면 돼요.”다시 태어난 뒤 첫 설날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평소 좀처럼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탁을 은경애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럼 제가 바로 해올게요. 바깥에서 드시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그래요.”은경애는 다급히 꼬치구이 재료를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장소월이 매운 것을 잘 먹지 않기에 집에 고춧가루도 별로 없었다.아래층에 내려가니 주방에서 도우미들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은경애는 그때에야 집에 꼬치구이 도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급히 오 집사에게 부탁했다. 오 집사는 돈을 받은 뒤 바로 전연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별장 안 사람들은 은경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연우의 사람이다.장소월에 관련된 일은 반드시 그의 허락을 맡고 난 뒤에야 행할 수 있다.마늘 한 조각을 사는 사소한 일이라도 말이다.전연우는 종래로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주 자세한 일까지 알기를 원했다.전연우가 전화를 받고 장소월을 보러 가려 일어섰을 때, 마침 오 집사가 걸어왔다.“이게 먹고 싶대요?”“네. 아주머니가 돈을 주며 여기에 씌어있는 재료들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오 집사는 종이를 전연우에게 보여주었다.살펴보니 모두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구였다.그의 기억력은 꽤나 뛰어났다...남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얼굴로 말했다.“해달라는 대로 해요.”“네. 대표님.”전연우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이 돈으로 사고 나머지는 돌려줘요.”“네.”오 집사가 나간 뒤 전연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소월은 책 한 권을 옆에 두고 침대에 앉아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구름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 줄기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하얀 피부가 빛을 반사해 미세한 솜털까지 또렷이 보였다.예전 그녀가 이 집에 살 때 장해진의 모든 주의력은 전연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날 역시 지금처럼 눈이 내렸었다
장소월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본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장소월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네가 몸을 회복하면 해외에서 주문한 웨딩드레스도 도착해 있을 거야. 그때 한 번 입어 봐.”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잡자 그녀는 단번에 빼버렸다.“전연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내 동의도 없이 혼인신고까지 했으면 네 목적 다 달성한 거 아니야? 더는 내 앞에서 존재감 과시하지 마.”전연우는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했다.“얼마 후 우리 결혼 소식이 서울 전체에 전해질 거야. 넌 이제 성세 그룹 안주인이야.”“전연우! 사람들이 우리가 예전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있다는 거 몰라? 넌 내 아버지의 양자였고, 내 오빠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가 결혼한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전생에서 그들이 결혼했을 때, 장소월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연우의 아내임을 알리고 싶어 했으나 그가 원하지 않았다.그녀와의 결혼이 전연우에게 있어선 더없는 수치였으니까.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접은 지금, 도리어 그가 미친 듯이 원하고 있다.“사람들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어. 웨딩 사진 찍고 나면 회사 연말 파티에 널 데리고 갈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를 일부러 자극하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전연우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푹 쉬어.”그는 일어서 몸을 돌리고 몇 번 연이어 기침했다.장소월도 전연우의 몸이 아직 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으니 말이다.전연우는 서재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엔 하얀색 약병 두 개가 놓여있었다.그건 서철용이 전연우에게 처방해준 분노를 제어하는 약물이었다.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전연우는 적잖은 정력을 소모했다.전연우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 불빛이 천
전연우였다!장소월은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품 안은 그야말로 난로와도 같이 뜨거웠다.몸을 회복하지도 못했으면서 왜 그녀와 함께 집에 있는단 말인가?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준수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 이런 다정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면 장소월은 아마 행복감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전연우... 전생엔 대체 왜 그렇게 날 미워했던 거야? 만약 백윤서 때문이라면... 난 이미 속죄했잖아.’‘그럼 이번 생은?’‘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거야?’...까마득한 높이의 펜트하우스 안, 샤워 가운을 입은 송시아가 책상 위 모든 물건을 쓸어내렸다.“전연우! 너 어떻게... 장소월과 결혼할 수가 있어!”송시아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사에 실린 두 사람의 혼인신고서를 본 순간 손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녀는 정말이지 미치광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네 옆에서 성세 그룹을 세운 것도 나고, 널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앉힌 것도 나야.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널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혔단 말이야. 전생에서 넌 날 선택했어. 이번에도... 응당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송시아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어 머리를 쥐어뜯었다.“그게 이렇게 이성을 잃을 일이야?”중년 남자가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에선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송시아는 바로 감정을 가라앉혔지만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표독함은 감추지 못했다.“억울해서 그래요. 전연우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거 절대 인정 못 한다고요!”남자는 아직 성욕이 채 소진되지 않았는지 여자의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그곳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의자에 앉혔다.“조급해하지마. 이제 시작이야...”송시아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그럼... 동의한 거예요?”“당연하지.”송시아는 씩 웃으며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의 행동에 협조했다.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음란한 기운이 방안에 만연했다...
그때, 대표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긴 생머리에 정장 치마를 입은 25세 정도의 여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기... 기 비서님... 커피...”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거기 놔요.”이름은 소피아, 소민아가 떠난 뒤 잠시 고용한 기성은의 새 비서였다. 소피아가 불안하게 커피를 내려놓았다.“기 비서님, 다른 시키실 것 있으세요? 없으면 서류 프린트할 게 남아서 가보겠습니다.”기성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그래요. 가봐요.”기성은은 대표님을 제외하면 가장 대면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고위급 인사들까지도 그의 낯빛을 살펴야 할 정도였다.일하는 과정에서 조그마한 착오라도 생길 시엔 반죽음으로 욕설을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바로 해고될지도 모른다.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또다시 기성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 씨 아직도 연락 안 돼요?”“기 비서님께서 소민아 씨를 출장 보내신 거 아닌가요? 저희도 오랫동안 소민아 씨 보지 못했어요. 전화해도 연결되지 않더라고요.”“그래요. 알겠어요.”사무실 문이 닫힌 뒤, 기성은은 사인펜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표님과 약속을 잡은 몇몇 다른 회사 대표, 그리고 사무적으로 연결된 임원들과 주고받은 메시지만 가득했다. 소민아와 나눈 메시지는 며칠 전에 멈춰있었다.기성은은 일을 함에 있어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소민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녀가 맡았던 일들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그는 다시 문자를 작성해 그녀에게 보냈다.[두 시간 안에 회사로 와요. 아니면 다시는 성세 그룹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말아요.]멀고 먼 곳에서 소민아는 선글라스를 걸고 선텐하며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돌연 도착한 기성은의 문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연락처를 악마라고 저장해 놓았다.문자 내용을 본 순간 피식 웃으며 욕설을 퍼부었다.“뻔뻔한 인간 같으니라고. 해고하려면 하라지. 내가 무서워할 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