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좋아요.”소현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끌려갔던 도우미는 모두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었다. 다들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도우미 유니폼을 입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음식 솜씨 또한 좋아 빠르게 점심상을 차렸다.소현아는 도우미가 위층에서 갖고 내려온 신발을 신고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해맑게 밥상에 앉아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다.이곳 도우미들은 모두 지하성에서 골라온 사람들이었는데, 한 달 월급이 일반인의 연봉에 버금갈 만큼 어마어마했다.집안일 외, 도우미들은 밤에 주인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녀들 또한 주인님과 함께하는 밤을 즐겼다.여기는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용모, 몸매, 그리고 요리 실력까지 모든 면에서 엄격한 검증을 통과해야만 한다.도우미는 은수저를 들고 강지훈의 다리에 앉아 그에게 음식을 먹여줬고, 다른 한 명의 도우미는 그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소현아는 강지훈에겐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소현아 옆에 있던 도우미가 다섯 그릇째 건네주던 순간, 사람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막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종래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소현아는 마지막 그릇까지 비운 뒤 국까지 한 그릇 마시고 나서야 빙그레 웃으며 트림을 했다.이어 그녀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배를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강지훈 씨, 저 배불러요. 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올라가 잘게요.”소현아는 블루베리 케이크를 들고 아이처럼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사실 옆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그녀는 발견하지 못했다.소현아가 올라간 뒤, 강지훈의 무릎에 앉아있던 금발의 여자가 가슴을 남자의 가슴팍에 비비며 교태를 부렸다.“주인님, 저 여자 누구예요? 약간 어리바리해 보이네요.”강지훈은 품 안 여자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애완동물은 총명할
희미한 조명이 밝히고 있는 유럽식 인테리어의 서재 안, 예수 동상이 놓여있는 어두운색의 책상 앞에 그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앉아있었다.부관이 맞은 편에 서서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말했다.“감옥장님, 이 사람을 찾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습니다.”“어쩌면 저희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에 찾았던 단서도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강지훈은 의자에 앉아 날카롭게 번뜩이는 작은 칼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위치가 어디야?”“토성촌입니다. 저희가 갔을 땐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내 명령이라고 전해. 살았으면 사람을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체라도 가져와.”“네.”강지훈은 돌연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됐어. 내가 직접 가.”“차 준비해.”...남원 별장.낮잠을 자고 있던 장소월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잠이 깨어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머릿속에 문득 무언가 떠오른 그녀는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가 털 슬리퍼를 신고 옆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원래 그녀가 옷방으로 사용하던 곳이었기에 대부분 장소월의 옷으로 채워져 있었다. 공간이 커 많은 물건을 이곳에 놓아두었다.강영수가 그녀에게 주었던 사진첩도 전연우가 찾아낼까 봐 두려워 이곳에 숨겼었다.그녀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 담긴 철로 만든 박스를 꺼냈다.그녀는 국내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일 아이디가 로그인되어있는 예전 사용했던 핸드폰을 꺼냈다.전원을 켜보니 아직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다만 조금의 배터리밖에 남지 않았다.장소월은 곧바로 메일을 열었다.강용이 보내온 수많은 영상 메일이 담겨 있었다.하나씩 내려보던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음속에서 저릿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몇 년이 지나도록 그는 줄곧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꿋꿋이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장소월의 부르르 떨리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을
방 안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던 은경애가 문 앞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옷방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대표님 오셨어요.”은경애의 귀띔에 장소월은 얼른 핸드폰을 박스 안에 넣고는 원래 위치에 숨겨 놓았다.전연우는 약간 어수선한 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 들어섰다. 음산한 눈빛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장소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은경애는 이제야 그를 발견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아! 아가씨께선 드레스룸에서 옷을 고르고 계십니다. 옷장 안에 있는 옷에 싫증이 난다며 새 옷을 입고 싶으시답니다.”전연우는 티 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장소월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벌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전연우가 옷방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안에서 걸어 나오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그녀는 손에 예전 입었던 잠옷을 들고 있었는데 전연우의 관심은 그곳에 가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얼굴 위 눈물이었다.전연우가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닦아주며 말했다.“울었어?”장소월은 머리를 움직여 그의 손길을 피하고는 행여 그가 무언가 눈치챌까 봐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벌레가 눈에 들어와서 그래.”“봐봐.”전연우는 자세히 살펴보려 허리를 굽혔다.“됐어. 이제 괜찮아.”장소월은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그때 별이가 발밑까지 기어와 그녀의 바짓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엄... 엄마...”아이가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이를 안고 전연우가 있는 방을 떠났다.전연우 역시 그녀의 감정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간 뒤, 전연우의 날카로운 눈빛이 은경애에게 쏘아졌다. 순간 그녀는 오금이 저려왔다.“아이고, 대표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전연우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아가씨가 집에서 늘 이러고 계신다는 거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아까도 갑자기
화려한 화장대 위, 조금의 장소월의 화장품을 제외하면 온통 액세서리들로 뒤덮여 있었다.도우미들은 그녀의 취향대로 목걸이, 귀걸이 등 보석들을 정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모두 다 보통 사람들은 가격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정도의 귀중한 쥬얼리였는데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귀걸이 한쪽만 해도 서울시 집 한 채에 버금가는 값어치였다.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해도 아무도 감히 몰래 훔치지 못한다. 이들은 모두 유일무이한 번호와 로고, 그리고 장소월의 이니셜까지 새겨져 있기 때문에 팔려고 내놓은 순간 사람들이 알아챌 테니 말이다.서재, 전연우는 해외 의료 투자 프로젝트에 관한 영상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의료 연구 기업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의료 기업 재단을 설립해 과학자들에게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다.설사 그 자금들이 아무 소득 없는 휴짓조각이 될지라도 전연우에겐 크나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그의 책상 앞에는 제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사진 속 장소월은 검고 윤기가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짧은 치마 차림에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장소월의 제운 고등학교 첫 등교 날 전연우가 직접 그녀를 찍어준 것이었다.회의 내용은 모두 지난 몇 년간 기업 투자 진행 상황이었다.경제 불황을 겪기도 했으나 이젠 안정된 궤도에 들어섰다. 심지어 그 수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주식이 상한가를 치니, 가장 낮은 가격에 매입했던 회사의 주식도 한 주에 백만 달러까지 상승했다.또한 전연우는 성세 그룹의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의료 기술 특허를 냈다.때문에 어느 날 성세 그룹이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성세 그룹의 이런 폭발적인 성장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전연우가 해외 기업 투자로 인해 이룬 업적들이 각 나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국내에 소식이 전해진 지 3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 성세 그룹의 전화는 모두 먹통이 되
기성은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자 소민아는 서류를 안고 짧은 걸음으로 총총 따라나섰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소민아는 비서팀 직원으로서 한때 송시아의 직속 아래 유일한 인턴이었다. 하지만 이후 송시아가 사라졌고, 그녀는 기성은의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기성은의 부하직원으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3개월 동안 일해왔다.3배의 연말 보너스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그의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 팽이처럼 바삐 돌아치던 그 나날들이 그리워졌다.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 눈을 뜰 수도 없었다.소민아는 겁을 먹고 기성은의 뒤에 숨어 이따금 고개를 들어 기자들의 질문에 의연하게 대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성세 그룹 자산 총액이 세계 5위 올랐고, 성세 그룹 또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자리에 올랐습니다. 성세 그룹의 미래 계획이 어떤지 궁금합니다.”“성세 그룹 대표님께서 해외로 이민을 할 생각이 있으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성세 그룹과 인하 그룹의 혼사가 있은 뒤로 사모님께서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주부로 지내실 생각이신가요?”“...”수많은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소민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만약 그녀였다면 절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기성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모든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기자님들이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식 기사로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님의 사적인 문제에 관해선 죄송하지만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그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기성은이 옆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그는 재빨리 모든 기자들을 회사 문밖으로 밀어냈다.소민아는 기성은이 멀리 떠나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쫓아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소민아가 서류를 품에 안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모두 다 전생과 같아.”‘전연우, 드디어 싫증이 났구나.’그녀는 이제 전연우가 그녀를 남원 별장에서 쫓아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전연우의 관계는 그때가 되어야만 완전히 끝난다.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살아야 한다.동영상 속, 전연우는 파티장 전체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그의 지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가 없다.심지어 예전 강씨 집안까지도 훨씬 뛰어넘었다.이럴수록 장소월은 그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더 선명히 떠올랐다.강씨 가문 사람들의 시체를 밟고, 한 계단 한 계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전연우...이게 네가 원했던 거야?금빛 햇살이 화실 창문 앞 장소월의 몸에 떨어졌다. 그녀의 피부는 마치 빛을 투과하기라도 하는 듯 하얗고 투명했다. 따뜻한 온실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도우미가 위층으로 올라왔다.“사모님, 저녁 식사 하세요.”“알겠어요.”전연우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소월을 보는 도우미의 시선에 연민의 감정이 더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장소월을 그에게 버려진 가엾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여 장소월을 마주할 때마다 행여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행동에 신중을 기했다.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그들의 사모님의 성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심지어 대표님이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장소월은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텅 빈 거실을 마주한 채 아이와 함께 쓸쓸하게 밥을 먹었다.옆에선 은경애가 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장소월은 고전 신화 전설에 관한 자료를 펼쳐보았다.최근 사부님의 작업실에서 또 대형 게임 디자인 의뢰를 받았는데 그 배경이 신화라 장소월에게도 크나큰 도전이 되었다.전에는 단 한 번도 이에 관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전연우가 없으니 장소월은 이상하게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별장 구석구석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
전연우는 이마를 찌푸리고 조수석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고는 송시아의 질문엔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은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잠그지 않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현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밥상에 앉아 졸고 있던 은경애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어머나... 대표님?”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정장을 대충 옷걸이에 걸어놓았다.“소월이는요?”“아가씨께선 급한 작업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야식을 만들어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깜빡 잠들어버렸네요.”불현듯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아이고, 내 갈비탕.”은경애가 갈비탕을 들고 고개를 돌렸을 땐, 거실은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장소월은 하품을 하며 별이의 방에서 나오던 순간,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남자와 마주쳤다.장소월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몇 초간 쳐다보다가 차분히 시선을 피하고 몸을 돌렸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몸에 깃든 익숙한 향기를 그녀에게 보내왔다.송시아가 자주 사용하는 샤넬 향수였다.장소월이 그를 쳐다본 순간, 그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 그의 마음을 찢어발겼다.전연우는 장사꾼이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장사꾼은 없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장소월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거리는 낯선 사이와 다름없다.은경애가 갈비탕을 갖고 올라오자 전연우는 직접 받아들고 장소월의 옆에 놓아주었다. 하여 그녀가 그림판을 내려놓으려던 자리가 점령당했다.전연우가 자연스럽게 그림판을 받으며 말했다.“그림은 천천히 그려도 돼. 일단 먹어. 먹고 좀 쉬어.”장소월은 그와 말조차 섞지 않았고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전연우는 그림판을 내려놓고 창가에 가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조용히 갈비탕을 먹고 있는 그녀를 지긋이 지켜보았다.입에서 뱉어낸 연기는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사라졌다.본래 가장 익숙하고, 침대에서도 최고의 속궁합을 맞추던 그들 사이에 숨
고급스러운 검은색 박스 안,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가 누워있었다. 반지는 520개의 다이아몬드 조각을 정교하게 이어붙여 만들었는데 한 단계 한 단계 세심하기 그지없는 기술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크거나 작으면 반지 전체가 무너지고 부서지기 때문이었다.이 붉은색 보석은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것이었다.그 가치는 6천억 원에 달했다.장소월이 잠들지 못해 몽롱한 정신으로 뒤척이고 있을 때, 침대 옆쪽이 밑으로 쭉 꺼져내려갔다. 손이 누군가의 손에 살포시 끌려가더니 이어 무명지에 차가운 온도의 무언가가 느껴졌다.눈을 떠보니 전연우는 어느새 무명지에 붉은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순간 정신이 든 그녀는 곧바로 손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뭐 하는 거야?”그녀는 무명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빼내려 했다.전연우는 묵묵히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피곤함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청혼...”장소월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전연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인시윤의 결혼은 마무리됐어. 내일 외부에 공표할 거야.”장소월은 몇 번 시도했으나 마음처럼 반지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그녀는 베개를 잡아 그의 얼굴에 던져버렸다.“전연우, 너 정말 미쳤구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넌 인씨 집안을 이용했고, 인시윤을 죽이기까지 했어.”“그럼 난? 난 어떻게 이용해 먹을 생각이야? 지금 내 모든 것은 이미 네 것이 됐잖아. 장해진도 죽었고, 남천 그룹도 손에 넣었어. 대체 왜... 왜...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전연우는 손을 뻗어 흥분하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장소월의 병은 아직도 채 낫지 않았다.전연우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장해진의 죽음은 나와 관련 없고, 난 남천 그룹에 손대지 않았어. 그냥 네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남천 그룹을 관리만 하고 있을 뿐이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난 싫어... 그런 건 필요 없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