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기성은이 전화를 끊자 물 두 컵을 들고 걸어갔다.“기 비서님, 대표님이 또 새 지시를 내리신 거예요? 저 조금 전 소현아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제 사촌 언니예요.”“기 비서님, 제자와도 같은 저에게 조금만 알려주면 안 되나요? 그래야 저도 비서님의 일을 조금 도와드릴 수 있잖아요.”기성은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컵을 가져갔다.“알지 말아야 할 일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맡겨진 일이나 잘해요.”소민아는 오만한 얼굴로 자리를 뜨는 그를 보고는 눈을 까뒤집으며 그를 흉내 냈다.“아이고. 맡겨진 일이나 잘하세요.”맞은편 거울을 통해 그녀의 괴이한 모습이 모두 기성은의 눈에 들어왔다.전연우는 통화를 마치고 화가 난 여자를 달래러 2층으로 올라갔다.장소월은 화실에 들어와 붓을 들었다. 그녀가 연료를 놓은 곳 옆엔 꽃꽂이를 마친 꽃병이 놓여 있었다.전연우는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는 붓을 든 그녀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었다.“소현아 씨 일은 확실히 내가 방심했어.”“보상받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내가 전부 다 해줄게. 어때?”전연우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장소월이라는 교의 가장 충실한 신교 같았다.장소월은 그로 하여금 존엄, 자존심 등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장소월은 몇 번이나 손을 빼내려 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 타오르던 불길을 잠재우고 예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이미 소식 들었다는 거 알아.”“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 아니야? 세상 모든 일은 네 그 더러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전연우, 넌 여전히 그렇게... 진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야.”이번엔 장소월은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힘껏 손을 빼내고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를 떠나갔다.그녀는 별이 방에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복도를 타고 전연우의 귀에도 장소월이 화를 내며 문을 쾅 하고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닥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던 별이는 깜짝 놀랐지만 울지는 않았다.
“제가 들고 올라왔으니 한 번 맛보세요.”장소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별이를 안고 욕실에서 나와 함께 잘 준비를 했다.별이도 졸렸는지 손을 항상 올려두던 그곳에 놓고 새근새근 잠들었다.5성급 크리스탈 호텔.강지훈은 가랑이 사이에서 용을 쓰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송시아는 입가의 침을 닦으며 매혹적인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오늘 몸 상태 별로인가 봐요? 바깥에서 몰래 누구랑 했어요?”30분이 지나도 남자의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송시아의 입술은 이미 퉁퉁 부어올랐다.강지훈은 그녀의 아래턱을 들어 올려 유혹적인 입술을 쳐다보며 말했다.“10분만 더 줄게. 그래도 안 되면 부하들에게 던져넣어 어떻게 남자를 대접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게 해줄 거야.”송시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강지훈이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강지훈은 늘 임자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에게 찍힌 여자는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했다. 여자가 거부하더라도 수백 가지의 방법을 동원에 꼭 손에 넣고야 만다.송시아는 몸을 일으켜 손동작은 멈추지 않은 채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드러운 혀가 그의 민감한 곳을 핥았다.“날 전연우의 부인이라고 상상해봐요...”송시아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 가장 부드러운 곳으로 가져가고는 몰입하며 말했다.“당신이 만지는 곳은 전연우도 만졌어요. 우린 전연우의 신혼집 주방, 욕실, 베란다... 모든 곳에 흔적을 남겼어요...”송시아는 그의 하체에서 전해지는 선명한 반응을 느꼈다. 이어 그녀는 더더욱 자극적인 말로 그의 성욕을 끌어올렸다.다른 사람의 아내를 좋아하는 그 고질병은 이번 생이나 저번 생이나 여전했다.강지훈의 몸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곧바로 다리에 앉아있는 여자를 껴안아 들어 올리고 몸을 파고 들어갔다.“계속해...”송시아는 고개를 들고 신음했다. 그 목
파란불이 켜지자, 소현아는 우울한 기분으로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그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진주 가방을 메고 자신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있었다.정말 아이를 임신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그때, 신호를 기다리던 군용차 안, 강지훈의 부관이 지나가던 소현아를 발견하고는 말했다.“감옥장님, 소현아 씨입니다.”강지훈은 인파 속에서 단번에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 몸매는 오가는 사람들보다 날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들의 평균보다 조금 더 통통해 보였다.예전 강지훈은 이런 여자들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었다.하지만 그날의 소현아를 떠올리니 흥미로움이 피어올랐다.감히 그의 옷을 창문으로 던져버리는 여자는 이 세상에 그녀가 유일할 것이다.그를 거부하며 반항하는 행동도 강지훈은 그리 못마땅하지 않았다.소현아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바깥 노리개에 불과한 여자를 보는 것과는 달랐다. 마치 아껴주다가 가끔 장난을 치는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소현아는 버스 정류장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녀가 꽁꽁 언 손을 곰돌이 호주머니에 넣고 있을 때,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차 한 대가 앞에 도착했다.부관이 차 창문을 내렸다.“소현아 씨, 어디 가세요?”소현아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3초 뒤 돌연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어갔다.운동이라곤 전혀 하지 않던 그녀는 오늘 어디에서 그런 폭발력이 솟아올랐는지 한달음에 꽤나 긴 거리를 달렸다.남자는 그녀를 기만이라도 하는 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뒤따라가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그녀가 힘이 빠지자, 강지훈은 옆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차 안으로 던져버렸다.소현아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악마라도 본 것처럼 창문을 두드리며 차에서 내리려 발버둥 쳤다.“나... 나 집에 갈 거예요. 내리게 해주세요.”강지훈은 느긋하게 트렁크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어주었다.“숨 좀 고르고 말해
소현아는 흉악한 그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렸다.그녀는 벙어리처럼 우물쭈물하며 못 들은 척했다. 말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지만 강지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그녀는 토끼처럼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강지훈이 그녀의 옷을 들어 올리니 두 층의 뱃살이 바지 위로 튀어 올랐다. 마르고 매끈한 체형의 여자만 봐왔던 그로서는 이런 통통한 살집의 뱃살은 처음이었다.“소씨 가문에 먹을 것이 많나 봐?”아무리 봐도 병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그 말에 소현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당연하죠. 저 매일 다섯 끼나 먹어요. 이 살들은 다 소월이 집에서 먹고 자라난 거예요. 소월이가 만든 음식 정말 맛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소월이의 그 나쁜 오빠가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다시는 절 소월이 집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했어요. 아니면 더 많이 먹었을 거예요.”강지훈은 이렇듯 성깔 없고 순진무구한 여자는 처음 보았다. 그녀가 뚱뚱하고 바보 같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그의 말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부관이 말했다.“감옥장님, 지금 차가 좀 막힙니다.”강지훈이 이마를 찌푸렸다.“배 아직도 아파?”소현아는 단번에 험악해진 그의 표정을 본 순간 곧바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몸을 움츠린 채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이... 이제 안 아파요.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소현아가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쥐어뜯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이른 시간이야.”“아니에요. 저 집에 가야 해요. 저번에 늦게 들어간 것 때문에 엄마가 화내셨단 말이에요.”소현아는 아랫배에서 살짝 경련이 일어났지만, 애써 참으며 그에겐 내색하지 않았다.강지훈이 물었다.“저번에 집에 가서 약 먹었어?”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먹었어요.”소현아는 매일 뇌 영양을 보충하는 한약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망가진 그녀의 뇌를 치료하려 가정형편이 좋아진 뒤로부터 거의 끊지 않고 한약을 먹였다.소현아 역시 자신의 지능이
소현아는 머리를 축 내리뜨리고 더는 말하지 못했다. 강지훈은 이미 그녀의 다리 위에 돈을 놓아두었다.“이건 네가 응당 받아야 할 돈이야. 난 다른 사람에게 빚지는 거 질색이야.”“받을 테니까 저 때리지 마세요.”소현아는 허둥지둥 그가 준 돈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이런 자극적인 상황에 놓이니, 그녀의 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렇게 좋아하면 이 그릇 안의 밥 다 먹어. 아니면 이곳에 가둬놓고 개 짓는 법을 배우게 할 거야. 말 듣지 않으면 때려죽일 테니까 알아서 해.”그녀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돌연 떠올라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차에 웅크리고 앉아 더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강지훈은 너무나 조용한 공기에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졌다.“차 세워.”정차하자 강지훈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꺼냈다.“내려. 혼자 택시 타고 가.”강지훈의 그 한 마디에 잠금이 열리자, 소현아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곧바로 문을 열고 도망쳐버렸다. 내리기 전, 강지훈이 준 돈은 한 장도 빠짐없이 자리에 남겨 놓았다.소현아는 머지않은 곳 구영관 가게 안에 뛰어 들어갔다.그녀는 사나운 호랑이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머리에 올려두었던 진주 머리띠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누군가의 발에 차여 쓰레기통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그녀는 호랑이 아가리에서 도망쳤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구영관에 들어서니 향긋한 음식 냄새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조금 전 일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아직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소현아는 6만 원가량의 음식을 시키고 4만 원은 집에 돌아갈 차비로 남겨두었다. 그러고는 구석에 앉아 레몬차를 홀짝거렸다.그녀는 구영관 앞에 검은색 군용차가 아직 떠나지 않고 서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강지훈은 창문을 반쯤 내리고 다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는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종업원의 얼굴에 난처함이 역력했다.“네? 그건...”소현아는 상 위에 6만 원을 내려놓고 말없이 가게를 뛰어나갔다.문밖을 나서자 참지 못하고 눈에서 투명한 진주알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아가씨!”종업원이 그녀를 쫓아가려 했으나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종업원은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저 여자분은 소현 그룹 따님이신 소현아 씨입니다. 성세 그룹의 장소월 아가씨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고요. 소월 아가씨는 소현아 씨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셰프와 직접 상의해 저희 가게 메뉴판까지 작성하셨습니다.”배를 끌어안고 깔깔거리던 그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져버렸다.그들은 소현 그룹과 갓 계약을 체결한 모델이었는데 아직 촬영도 하기 전이었다.다 끝났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저희... 지금 달려가 사과하면... 늦었을까요?”“다 네 그 주둥이 탓이야. 소현 그룹 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내 일자리는 날아가 버렸어.”“이제 와 내 탓을 한다고? 네가 그럴 자격이나 돼? 아까 너도 엄청 웃었잖아.”소현아는 길옆 토스트 가게 앞까지 달려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4천 원을 꺼내 토스트 하나를 사 들고 버스 정류장에 가 버스를 기다렸다.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돼지면 어때서? 돼지가 얼마나 귀여운데.”불과 십여 미터밖에 안 되는 곳에서 강지훈이 그녀를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찼다.“속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저쪽으로 가.”“네.”반쯤 먹고 나니 소현아의 입술은 기름으로 뒤덮여 번들거리고 있었다. 빵빵거리는 차 소리에 그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살펴보았다. 그 차가 눈앞에 멈춘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까 안 갔었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소현아는 저승사자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그녀가 주소를 말하자 택시 운전사는 곧바로 출발했다.자신의 애완동물이 도망치자 강지훈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찌푸려졌다.조금 전 자신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녀가 겁을 먹었
“넌 정말 속도 없어. 괴롭힘당하고도 고개만 돌리면 바로 잊어버리고, 조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잖아.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 거야?”엄마는 입으론 그녀를 책망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딸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엄마, 빨리 아빠 모셔와서 밥 먹어요.”저번 노원우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하지만 소현아의 친구인 성세 그룹 아가씨 장소월이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기에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처음엔 노원우가 믿음직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와 결혼하면 회사를 왕성하게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가는 마치 흡혈귀처럼 소현아의 집안을 한입에 삼켜버릴 욕심을 부렸다.그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소현아는 어찌한단 말인가? 엄마는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최근 며칠 동안 소현아는 줄곧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장소월과 통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바닥에 누워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는 두둑한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월아, 우리 아가 요즘 엄청 얌전해. 더는 나 힘들게 하지 않아. 나 지금 예전보다 밥 두 그릇 더 먹을 수 있어.”“별이는 어때? 별이는 말 잘 들어?”방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장소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실 장소월은 소현아가 부러웠다. 그 어떤 일에 부딪히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하는 그녀를 말이다.만약 소현아가 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한다면 장소월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흔쾌히 받아들인 일이고, 또한 적어도 이 아이는... 그녀가 배 아파 낳은 친자식일 테니 말이다.장소월이 말했다.“별이도 요즘 고분고분 내 말 잘 들어.”“소월아... 이 아이를 낳으면 누굴 닮았을 것 같아? 절대 그 나쁜 자식을 닮지 말고 날 닮아야 할 텐데...”“현아야, 항상 몸조심해야 해. 절대 몸을 차게 굴면 안 돼. 알겠지?”“알았어. 나 지금도 엄청
“얼마 전, 현아가 구영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했대. 알아보니 우리 회사와 계약했던 모델들이라 처리하려고 알아봤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더라고.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보서를 보냈는데도 미동 하나 없어.”“뭐라고요? 현아가 바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요? 그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소현아 엄마의 초점은 자신의 딸에게 맞춰져 있었다.소정국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지. 됐어... 이제 자자. 내일 또 회사에 회의가 있어.”엄마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분출할 데가 없어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목욕물 받아놓았어요. 씻고 주무세요.”“다른 할 일 있어?”그녀가 입을 막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내일 현아 먹일 한약을 끓여야겠어요. 한의사 선생님이 중간에 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그런 일은 도우미한테 시켜.”“현아에 관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마음이 안 놓여요. 집안에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쉬어요. 저도 곧 갈게요.”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새벽 3시.인형을 안고 잠든 소현아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꿈속 그녀는 온통 식인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수림 속에 갇혀 있었다. 등 뒤에서 날개 달린 이리 한 마리가 그녀를 잡아먹으려 뒤쫓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리 뛰어도 수림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안개가 자욱이 내린 수림 속, 소현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바짝 쫓아온 이리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그녀를 삼키려 했다.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약을 들고 올라가던 그녀의 엄마는 소리를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화려하게 꾸며진 공주방, 단정히 정리된 침대에 소현아가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엄마는 얼른 한약 그릇을 내려놓고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