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정말 속도 없어. 괴롭힘당하고도 고개만 돌리면 바로 잊어버리고, 조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잖아.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 거야?”엄마는 입으론 그녀를 책망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딸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엄마, 빨리 아빠 모셔와서 밥 먹어요.”저번 노원우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하지만 소현아의 친구인 성세 그룹 아가씨 장소월이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기에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처음엔 노원우가 믿음직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와 결혼하면 회사를 왕성하게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가는 마치 흡혈귀처럼 소현아의 집안을 한입에 삼켜버릴 욕심을 부렸다.그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소현아는 어찌한단 말인가? 엄마는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최근 며칠 동안 소현아는 줄곧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장소월과 통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바닥에 누워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는 두둑한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월아, 우리 아가 요즘 엄청 얌전해. 더는 나 힘들게 하지 않아. 나 지금 예전보다 밥 두 그릇 더 먹을 수 있어.”“별이는 어때? 별이는 말 잘 들어?”방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장소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실 장소월은 소현아가 부러웠다. 그 어떤 일에 부딪히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하는 그녀를 말이다.만약 소현아가 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한다면 장소월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흔쾌히 받아들인 일이고, 또한 적어도 이 아이는... 그녀가 배 아파 낳은 친자식일 테니 말이다.장소월이 말했다.“별이도 요즘 고분고분 내 말 잘 들어.”“소월아... 이 아이를 낳으면 누굴 닮았을 것 같아? 절대 그 나쁜 자식을 닮지 말고 날 닮아야 할 텐데...”“현아야, 항상 몸조심해야 해. 절대 몸을 차게 굴면 안 돼. 알겠지?”“알았어. 나 지금도 엄청
“얼마 전, 현아가 구영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했대. 알아보니 우리 회사와 계약했던 모델들이라 처리하려고 알아봤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더라고.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보서를 보냈는데도 미동 하나 없어.”“뭐라고요? 현아가 바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요? 그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소현아 엄마의 초점은 자신의 딸에게 맞춰져 있었다.소정국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지. 됐어... 이제 자자. 내일 또 회사에 회의가 있어.”엄마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분출할 데가 없어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목욕물 받아놓았어요. 씻고 주무세요.”“다른 할 일 있어?”그녀가 입을 막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내일 현아 먹일 한약을 끓여야겠어요. 한의사 선생님이 중간에 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그런 일은 도우미한테 시켜.”“현아에 관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마음이 안 놓여요. 집안에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쉬어요. 저도 곧 갈게요.”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새벽 3시.인형을 안고 잠든 소현아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꿈속 그녀는 온통 식인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수림 속에 갇혀 있었다. 등 뒤에서 날개 달린 이리 한 마리가 그녀를 잡아먹으려 뒤쫓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리 뛰어도 수림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안개가 자욱이 내린 수림 속, 소현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바짝 쫓아온 이리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그녀를 삼키려 했다.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약을 들고 올라가던 그녀의 엄마는 소리를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화려하게 꾸며진 공주방, 단정히 정리된 침대에 소현아가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엄마는 얼른 한약 그릇을 내려놓고
현관에 들어서자 군화를 신고 대리석 바닥을 내딛는 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바람이 구름층을 한껏 헤집어 놓은 하늘, 반달이 빛을 내뿜는 유리창 아래, 남자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어른거렸다.강지훈이 복고풍의 계단을 오르려고 한 순간, 2층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강지훈은 2층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걸음을 멈추고는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몇 초 뒤, 소현아의 모습이 그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내리뜨리고 흐릿한 정신으로 손에 토끼 인형을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천천히 내려와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까지도 그녀는 강지훈을 발견하지 못한 듯 그의 곁에서 스쳐 지나갔다.문을 나서니 바깥에선 아직도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 갈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바람 속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정처 없이 걸어갔다.강지훈은 차분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걸음이 돌연 좁디좁은 창고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조명도 켜지 않은 어두운 창고 안에 들어가 한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강지훈은 이마를 찌푸리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었고 불쾌한 냄새까지 진동했다.강지훈이 음산하게 눈을 내리뜨렸다.“일어나.”소현아가 말했다.“말 잘 들을게. 나한테 먹을 것 안 주면 안 돼.”“말 잘 들을게...”그 말에 강지훈의 이마가 더 깊게 찌푸려졌다.“현아 때리지 마. 아파...”소현아는 인형을 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몽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늘 천진난만하던 소녀가 이렇게나 슬프게 울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어둠 속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남자가 허리를 굽혀 손으로 아직 울고 있는 소현아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널 지켜줄게.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 응?”“매일 약 안 먹어도 돼요? 현아 약 먹기 싫어요. 하지만 약 안 먹으면 현아는 영원히 총명해지지 않을 거예요...”“응. 먹기 싫으면 먹지
[사람은 내가 데려간다. 강지훈.]강지훈?소정국 또한 강지훈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현아가 어떻게 그런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인가?소정국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명세진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심장약을 꺼내 먹였다.서울 감옥.사방이 모두 쇠줄로 둘러싸여 있는 색바랜 건물, 그 주위는 총을 들고 경호를 서고 있는 군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위험천만한 함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새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경계가 삼엄해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무시무시했다.소현아가 깨어났을 때, 머리 위엔 진한 보라색 천장이 보였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 앉았다.“여긴 어디예요?”“제 엄마아빠는요?”“소현아 씨, 좋은 아침이에요...”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도우미 유니폼을 입고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으악! 당신 누구예요? 왜 여기에 있어요?”돌연 나타난 낯선 사람의 얼굴에 그녀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는 품에 토끼 인형을 꼭 안고 파르르 떨었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모셔오셨어요. 제가 세수시켜드리고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도우미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급스러운 대야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아두고는 파란색 손수건에 물을 적셔 물기를 짜낸 다음 소현아의 얼굴을 닦아내려 했다.소현아는 깜짝 놀라 펄쩍 뛰며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앞까지 달려나갔다.하지만 문을 열고 나간 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더더욱 경악스러웠다. 끝도 보이지 않도록 아득하게 펼쳐진 기나긴 복도, 바닥엔 보라색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엔 의미를 알 수 없는 흉악한 느낌의 그림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소현아는 어디로 뛰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 임의로 방향을 정해 급히 뛰어갔다. 그러다 다행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를 찾아 한달음에 6층까지 내려갔다. 그녀는 너무 힘들어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대체 누구 집이길래 이렇게
소현아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탓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손엔 토끼 인형의 귀를 잡고 있었다. 앙증맞고 귀여운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녀가 강지훈을 향해 달려가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소현아는 그의 허리에 찬 벨트를 잡고 그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강지훈이 그런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뻗자, 소현아는 그의 팔 사이로 머리만 들이밀고는 두 손으로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강지훈 씨... 저 나쁜 사람들이 절 이곳에 가두었어요. 조금 전 괴롭히기도 했어요.”강지훈 등 뒤의 부관들은 모두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주인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그녀를 보며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범인을 심문하던 사나운 눈빛이 모두 소현아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보통 여자였다면 일찌감치 겁을 먹고 잔뜩 움츠려졌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천진난만한 얼굴로 강지훈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말해봐. 누가 널 괴롭혔어?”강지훈이 눈을 내리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말에 도우미들은 염라대왕이 온다는 말이라도 들은 듯 아연실색했다.도우미가 다급히 걸어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어르신, 아가씨께서 의관이 정제하지 못하고, 신발도 신지 않아 챙겨드리려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신발을 안 신었어?”강지훈이 시선을 돌리자 소현아는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부끄러운 듯 목을 살짝 집어넣고 그를 쳐다보았다.소현아는 그가 화를 내는 줄 알고 얼른 그의 허리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려놓고 눈치를 살폈다.강지훈은 소현아를 번쩍 안아 들고는 거실로 들어갔다.“사람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어디에 쓰겠어.”도우미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듯한 한 마디였다.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주인님... 제발...”“주인님...”이곳에 있는 도우미들은 모두 반반한 미모를 갖고 있었고 나이도 고작 스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이제 그들에겐 말할 기회도 없었다. 이미 부관들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갔으니
“좋아요. 좋아요.”소현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끌려갔던 도우미는 모두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었다. 다들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도우미 유니폼을 입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음식 솜씨 또한 좋아 빠르게 점심상을 차렸다.소현아는 도우미가 위층에서 갖고 내려온 신발을 신고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해맑게 밥상에 앉아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다.이곳 도우미들은 모두 지하성에서 골라온 사람들이었는데, 한 달 월급이 일반인의 연봉에 버금갈 만큼 어마어마했다.집안일 외, 도우미들은 밤에 주인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녀들 또한 주인님과 함께하는 밤을 즐겼다.여기는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용모, 몸매, 그리고 요리 실력까지 모든 면에서 엄격한 검증을 통과해야만 한다.도우미는 은수저를 들고 강지훈의 다리에 앉아 그에게 음식을 먹여줬고, 다른 한 명의 도우미는 그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소현아는 강지훈에겐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소현아 옆에 있던 도우미가 다섯 그릇째 건네주던 순간, 사람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막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종래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소현아는 마지막 그릇까지 비운 뒤 국까지 한 그릇 마시고 나서야 빙그레 웃으며 트림을 했다.이어 그녀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배를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강지훈 씨, 저 배불러요. 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올라가 잘게요.”소현아는 블루베리 케이크를 들고 아이처럼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사실 옆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그녀는 발견하지 못했다.소현아가 올라간 뒤, 강지훈의 무릎에 앉아있던 금발의 여자가 가슴을 남자의 가슴팍에 비비며 교태를 부렸다.“주인님, 저 여자 누구예요? 약간 어리바리해 보이네요.”강지훈은 품 안 여자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애완동물은 총명할
희미한 조명이 밝히고 있는 유럽식 인테리어의 서재 안, 예수 동상이 놓여있는 어두운색의 책상 앞에 그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앉아있었다.부관이 맞은 편에 서서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말했다.“감옥장님, 이 사람을 찾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습니다.”“어쩌면 저희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에 찾았던 단서도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강지훈은 의자에 앉아 날카롭게 번뜩이는 작은 칼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위치가 어디야?”“토성촌입니다. 저희가 갔을 땐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내 명령이라고 전해. 살았으면 사람을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체라도 가져와.”“네.”강지훈은 돌연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됐어. 내가 직접 가.”“차 준비해.”...남원 별장.낮잠을 자고 있던 장소월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잠이 깨어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머릿속에 문득 무언가 떠오른 그녀는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가 털 슬리퍼를 신고 옆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원래 그녀가 옷방으로 사용하던 곳이었기에 대부분 장소월의 옷으로 채워져 있었다. 공간이 커 많은 물건을 이곳에 놓아두었다.강영수가 그녀에게 주었던 사진첩도 전연우가 찾아낼까 봐 두려워 이곳에 숨겼었다.그녀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 담긴 철로 만든 박스를 꺼냈다.그녀는 국내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일 아이디가 로그인되어있는 예전 사용했던 핸드폰을 꺼냈다.전원을 켜보니 아직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다만 조금의 배터리밖에 남지 않았다.장소월은 곧바로 메일을 열었다.강용이 보내온 수많은 영상 메일이 담겨 있었다.하나씩 내려보던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음속에서 저릿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몇 년이 지나도록 그는 줄곧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꿋꿋이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장소월의 부르르 떨리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을
방 안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던 은경애가 문 앞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옷방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대표님 오셨어요.”은경애의 귀띔에 장소월은 얼른 핸드폰을 박스 안에 넣고는 원래 위치에 숨겨 놓았다.전연우는 약간 어수선한 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 들어섰다. 음산한 눈빛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장소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은경애는 이제야 그를 발견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아! 아가씨께선 드레스룸에서 옷을 고르고 계십니다. 옷장 안에 있는 옷에 싫증이 난다며 새 옷을 입고 싶으시답니다.”전연우는 티 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장소월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벌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전연우가 옷방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안에서 걸어 나오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그녀는 손에 예전 입었던 잠옷을 들고 있었는데 전연우의 관심은 그곳에 가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얼굴 위 눈물이었다.전연우가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닦아주며 말했다.“울었어?”장소월은 머리를 움직여 그의 손길을 피하고는 행여 그가 무언가 눈치챌까 봐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벌레가 눈에 들어와서 그래.”“봐봐.”전연우는 자세히 살펴보려 허리를 굽혔다.“됐어. 이제 괜찮아.”장소월은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그때 별이가 발밑까지 기어와 그녀의 바짓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엄... 엄마...”아이가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이를 안고 전연우가 있는 방을 떠났다.전연우 역시 그녀의 감정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간 뒤, 전연우의 날카로운 눈빛이 은경애에게 쏘아졌다. 순간 그녀는 오금이 저려왔다.“아이고, 대표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전연우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아가씨가 집에서 늘 이러고 계신다는 거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아까도 갑자기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