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난 민용 씨를 사랑해. 내 마음은 전혀 더럽지 않아.” 서민용의 눈동자에 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더러운 건 더러운 거야! 체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혼 합의서에 사인해.” “배은란, 난 네가 역겨워.” 배은란은 울먹이며 말했다.“민용 씨... 나 정말 하나도 안 더러워...” “다신 안 그럴게, 마지막으로 기회 한 번만 주면 안 돼?” “민용 씨...” 서민용은 옆에 있던 서류 봉투에서 무언가 꺼내 그녀 앞에 던져놓았다. “이제 와서 변명할 거 없어. 난 너한테 손댄 적도 없는데, 배 속에 아기는 누구 애야?”본래 화상 자국이 가득했던 서민용의 얼굴은 치료 후 예전의 준수한 모습으로 회복했다. 대학 시절, 서민용은 금융과 최고 킹카로 유명했었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눈부시게 잘생겼다. 배은란은 눈앞에 던져진 선명하게 두 줄이 그어져 있는 임신 테스트기를 보자마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그녀는 심장이 고통으로 마비되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혼 합의서는 네 방에 놓아뒀어... 내일까지 사인 안 하면 그놈과 네가 했던 그 더러운 일을 만천하에 공표할 거야... 그럼 나 서민용의 아내가 얼마나 더럽고 걸레 같은 여자인지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배은란이 울부짖었다. “...민용 씨,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지만 내가 한 모든 일은 다 당신을 위해서야!” “난 그저 민용 씨가 살길 바랐고, 예전의 민용 씨로 돌아가길 바랐어. 그게 잘못이야?”“제발... 날 미워하지 마, 응?” “난 몸이 더럽혀진 것뿐이지, 마음은 깨끗해... 날 믿어줘! 난 정말 안 더럽단 말이야...”서민용은 잠시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나가!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고!” 배은란은 울면서 그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안 나갈 거야. 난 민용 씨를 떠날 수 없어...”하지만 서민용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단
“이제 그놈 찾아가. 아무도 널 막는 사람 없어.”그때, 서민용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한 통 전송되었다. “그놈도 여기 왔다니까 오늘 밤에 같이 가면 되겠네. 내일부터 이 별장은 네 것이야.”“왜 안 가? 내가 쫓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배은란은 온몸이 마비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눈물샘이 말라버렸는지 더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고 텅 비어 있었고, 흰자위는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결국 경호원이 배은란을 끌고 나가 던져버렸다.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향등을 끄지 않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끌려 나오는 여자를 본 서철용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부축했다.굳게 닫힌 문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배은란은 앞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나 좀 들여보내 줘, 민용 씨...”“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민용 씨, 나 버리지 마...”서철용이 안쓰러운 눈으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목놓아 울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다가갔지만 차마 그 몸에 손대지 못하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위층에서 휠체어를 탄 남자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도우미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만들어 드리라고 하신 죽입니다.”“거기에 놓으세요.”“도련님, 제가 이 말을 해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그의 침묵은 도우미의 말에 대한 긍정의 의미였다.도우미가 망설이다가 말했다.“도련님, 사실 그동안 사모님께선 많이 힘드셨어요. 노부인께서 계속 사모님을 괴롭히셨거든요.”“도련님께서 안 계실 때 노부인이 퍼부은 수많은 욕설들을 사모님께선 묵묵히 견뎌내셨어요..”“그리고 사모님의 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아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사모님께선 도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하지 않으셨어요.”“병원비도 모두 사모님이 부담하시고...”서민용은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먹
도우미가 옷방에서 나와 서민용에게 반지 상자를 건네며 물었다. “도련님, 이거 가져가실래요?”서민용은 창밖 껴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제야 도우미가 들고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이 반지는 두 사람이 결혼식 때 함께 골랐던 반지였다.저번 배은란과 크게 다퉈 그가 이 반지를 던져버렸을 때, 배은란은 울면서 밤새 마당을 찾아 헤맸었다. 하지만 사실 반지는 여전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서민용이 반지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지금의 그는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만 할 뿐이다.그녀에겐 아직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 쓸데없이 그에게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서민용은 파란 손수건을 입술에 대고 몇 번 기침했다. 내려다보니 손수건에는 선홍색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도우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피를 토하신 게 오늘 벌써 세 번째입니다...”“혹시...”서민용은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진단서는 다 가짜예요. 배은란으로 하여금 내겐 아직 한 가닥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도우미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본가로 돌아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면 가족 모두에게 내 사망 소식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아무도 내 이름을 묘비에 새기지 못하게 하고요. 내 무덤 앞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난초만 심어주면 돼요.”“만약 그 사람이 본가에 가 내 소식을 물으면...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갔다고 말해주세요.”“컥, 컥, 컥...”도우미가 다급히 말했다. “도련님, 이제 말씀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괜찮으실 겁니다...”서민용은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의 몸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화재가 났을 때 유독가스가 몸속으로 들어가 모든 장기를 망가뜨렸다. 당시 그는 병원 측에 부탁해 그녀가 단순한 화상으로 여길 수 있도록 진단서를 조작했었다.그녀의 성격상 그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배은란은 쓰러지자마자 배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하반신에 뜨거운 무언가가 전해졌다. 서철용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배은란, 괜찮아?”배은란은 역겨운 듯 그를 밀어내며 흐려진 안색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나... 나 민용 씨한테 갈 거야.”순간 서철용의 품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녀는 미친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차를 다시 쫓아가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흐르는 피도 무시한 채 한없이 불안하게 비틀거리면서 말이다.“이혼하고 싶지 않아,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민용 씨, 날 두고 가지 마.”“민용 끼 없이...난 어떻게 살아?”“나더러 어쩌라고...”서철용이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서철용은 앞으로 걸어가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있는 여자를 기절시켰다. 몸에 흥건히 묻은 핏자국을 보며 여자를 안아 조수석에 앉히고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 몸에서 풍기는 농후한 피 냄새가 아니었다면,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이 정도의 출혈은 생리 때문이 아니다...그보단...서철용은 핸들을 꽉 움켜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악셀을 밟았다.가장 빠른 속도로 엘리트 개인 병원에 도착했다.서철용은 미리 사람들에게 연락해 모든 것을 준비시켰다. 서철용은 그녀를 수술 침대에 눕혀놓고 수술실로 밀고 들어갔다...30 분 후 마스크를 쓴 여의사가 걸어 나왔다."서 선생님, 이분은 임신 2개월째인 임산부입니다. 방금 약물을 주사해 아이의 안전은 지켰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또 자극을 받으면 배 속의 아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서철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표정으로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이마에 흥건한 땀을 훔쳤다. “알았어요. 간병인을 찾아 잘 보살피게 할게요.”“네. 서 선생님.”수술이 끝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서철용의 머릿속은 온통 절망
별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이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안아 달라는 듯 계속 칭얼거렸다. 하여 은경애가 서둘러 아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대표님,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도련님은 옆방에 데려갈게요.”은경애는 서둘러 아이를 안고 옆 병실로 향했다.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그토록 젊은 나이에 암이라니!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못했건만.너무나도 착한 사람이 말이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에 가져가 온기를 느꼈다. “너무 오래 자지 말고, 빨리 일어나.”전연우가 기대했던 것은 역시나 허황한 꿈이었다.그는 당시 장소월이 강영수를 위해 했던 것처럼 매일 9,990개의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또한 남천 그룹과 성세 그룹의 이름으로 어린이 재단을 설립해 빈곤한 산악 지역에 방치된 아이들을 위한 캠퍼스를 설립하고 수십억의 물자를 기부했다.더 나아가 전국의 복지 기구에도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이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수많은 방송국 기자들이 성세 그룹 회장과의 인터뷰를 원했다.그러나...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모든 정부 기관들은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랐고, 성세 그룹과 남천 그룹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급등했다.전연우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늘 평소처럼 출근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처리했다.매일 그의 동선은 단 세 곳뿐이었다. 청연사, 병원, 그리고 사무실... 전연우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 기자가 몰래 그를 따라갔고, 다음날 청연사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전연우의 사진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이에 서울시 전체가 들썩였다. 사람들은 성세 그룹 회장이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매일 산에 올라가 부처님께 참배한다는 사실에 크나큰 호기심을 가졌다.전연우는 이미 서울시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무슨 이유로 부처님을 섬긴단 말인가.길을 수리해 놓으니 산에서 내려오
전연우는 은경애가 가져온 만둣국을 모두 비웠다. 예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오 아주머니가 만든 만두였다.그녀의 손맛은 여전했다.창밖 한동안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거위 깃털 같은 눈송이가 바닥에 두껍게 덮여 은백색 빛을 반짝였다.“나 암 의학 연구소에 투자했어. 서철용도 갔으니 너도 곧 깨어날 거야.”“보름쯤 지나면 별이가 말을 할 수 있대. 널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 거야...”“별이가 자라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소월아,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머리에 남아 있던 수술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녀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 옆에 누워 눈을 감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어쩌면 이것만이 그를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전연우는 이렇게까지 견디기 힘든 적이 없었다. 그녀가 서울을 떠난 4년의 시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유독 지난 3개월은 목숨 절반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괴로웠다...머지않은 곳의 병실에선 배은란이 공허한 눈동자로 초점 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 얼굴에 더는 괴로움이 보이지 않았고, 배가 살짝 불룩해져 있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배은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껴안았다.“...엄청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왜 이제야 돌아왔어?”“민용 씨, 보고 싶었어. 우리 아기도 보고 싶었대...”서철용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밥은 먹었어?”“먹었어.” 배은란은 그의 품에서 몸을 떼고 그를 끌어당겼다.“바빠서 밥 못 먹었을 줄 알고 조금 남겼어. 민용 씨가 좋아하는 거야.”서철용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병원 VIP 병동에는 기본적인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다. 간병인과 가족들의 편의를 위해 주방과 거실, 그리고 식탁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임신 중에는 이런 거 하면 안
“오늘 밤 떠나는 거야?” 배은란은 풀이 죽은 얼굴로 그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틀 뒤.”“안 가면 안 돼? 난 민용 씨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배은란은 그를 붙잡고 싶었다.서철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중요한 일이라 내가 가서 해야 해.”“그래, 응원할게. 우리 남편은 최고야. 꼭 더 강력한 항암제를 연구해내. 우리 아기와 난 민용 씨가 자랑스러워.”서철용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네가 혼자 집에 있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병원이 연구소와 가까우니까 시간 나면 자주 올게."“알았어, 민용 씨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서철용은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가 침대 옆 조명만 켜두고 잠을 청하려던 그때, 방문이 열리고 임산부 잠옷을 입은 배은란이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민용 씨... 나 여기서 같이 자도 돼? “서철용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은란은 이미 침대에 누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철용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밤 열한 시가 되어도 배은란은 원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엔 남자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민용 씨, 잠들었어?”“아니.” 서철용이 대답했다.“내가 옆에 있어서 잠이 안 오는 거야?”“아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서철용은 손을 뻗어 침대 옆 조명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그가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그리고 이 아이는...서민용... 이게 정말 네가 원했던 거야?서철용의 마음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그는 배은란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병동 밖으로 걸어 나갔다.15층 옥상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서철용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이렇게 서 있다간 망부석이 되겠어.”전연우
“지난 3개월 동안... 배은란은 줄곧 나를 형으로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어떤 쾌감도 느껴지지 않더라고. 이제야 어떤 것은 강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서철용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전연우까지도 처음에는 장씨 일가를 상대하는 도구로만 사용했었다. 이제 장해진이 죽고 장씨 가문에는 전연우만 홀로 남았다. 하지만 장해진에 대한 전연우의 증오는 서철용 못지않게 깊다.전연우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제 손으로 직접 제거했다. 누구에게나 자비하나 없이 무자비한 냉혈한이었던 전연우는 유독 장소월에게만큼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있다.전연우가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서철용이 대답했다.“천천히 한 걸음씩 해봐야지. 기억 속 고통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지 않겠어?”서철용은 서씨 집안 저택에서 서민용에게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사실 서민용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4년 전 우리 내기 아직 기억해?” 서철용은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찬바람이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자 가느스름한 그의 두 눈이 드러났다. 방탕하고 거칠었던 눈동자에 지금은 무언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분명 기억하고 있다. “그 내기, 우리 둘 다 졌어. 넌 장소월을 사랑하게 됐고, 난...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 “진 건 너야. 만약 나였다면, 그 둘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했을 거야.”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날이 밝아오는 창밖을 본 서철용이 말했다. “난 이만 돌아갈게. 시간이 늦었어. 쉬어.”전연우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창문 밖에 머무르고 있었다...어두운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며 밝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은빛이 점차 가라앉으며 눈도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크리스마스가 지나고 2주 뒤, 전연우는 화국 내 자선가 순위 1위에 올랐다. 그의 가치는 1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