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이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안아 달라는 듯 계속 칭얼거렸다. 하여 은경애가 서둘러 아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대표님,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도련님은 옆방에 데려갈게요.”은경애는 서둘러 아이를 안고 옆 병실로 향했다.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그토록 젊은 나이에 암이라니!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못했건만.너무나도 착한 사람이 말이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에 가져가 온기를 느꼈다. “너무 오래 자지 말고, 빨리 일어나.”전연우가 기대했던 것은 역시나 허황한 꿈이었다.그는 당시 장소월이 강영수를 위해 했던 것처럼 매일 9,990개의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또한 남천 그룹과 성세 그룹의 이름으로 어린이 재단을 설립해 빈곤한 산악 지역에 방치된 아이들을 위한 캠퍼스를 설립하고 수십억의 물자를 기부했다.더 나아가 전국의 복지 기구에도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이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수많은 방송국 기자들이 성세 그룹 회장과의 인터뷰를 원했다.그러나...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모든 정부 기관들은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랐고, 성세 그룹과 남천 그룹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급등했다.전연우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늘 평소처럼 출근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처리했다.매일 그의 동선은 단 세 곳뿐이었다. 청연사, 병원, 그리고 사무실... 전연우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 기자가 몰래 그를 따라갔고, 다음날 청연사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전연우의 사진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이에 서울시 전체가 들썩였다. 사람들은 성세 그룹 회장이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매일 산에 올라가 부처님께 참배한다는 사실에 크나큰 호기심을 가졌다.전연우는 이미 서울시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무슨 이유로 부처님을 섬긴단 말인가.길을 수리해 놓으니 산에서 내려오
전연우는 은경애가 가져온 만둣국을 모두 비웠다. 예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오 아주머니가 만든 만두였다.그녀의 손맛은 여전했다.창밖 한동안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거위 깃털 같은 눈송이가 바닥에 두껍게 덮여 은백색 빛을 반짝였다.“나 암 의학 연구소에 투자했어. 서철용도 갔으니 너도 곧 깨어날 거야.”“보름쯤 지나면 별이가 말을 할 수 있대. 널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 거야...”“별이가 자라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소월아,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머리에 남아 있던 수술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녀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 옆에 누워 눈을 감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어쩌면 이것만이 그를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전연우는 이렇게까지 견디기 힘든 적이 없었다. 그녀가 서울을 떠난 4년의 시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유독 지난 3개월은 목숨 절반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괴로웠다...머지않은 곳의 병실에선 배은란이 공허한 눈동자로 초점 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 얼굴에 더는 괴로움이 보이지 않았고, 배가 살짝 불룩해져 있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배은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껴안았다.“...엄청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왜 이제야 돌아왔어?”“민용 씨, 보고 싶었어. 우리 아기도 보고 싶었대...”서철용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밥은 먹었어?”“먹었어.” 배은란은 그의 품에서 몸을 떼고 그를 끌어당겼다.“바빠서 밥 못 먹었을 줄 알고 조금 남겼어. 민용 씨가 좋아하는 거야.”서철용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병원 VIP 병동에는 기본적인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다. 간병인과 가족들의 편의를 위해 주방과 거실, 그리고 식탁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임신 중에는 이런 거 하면 안
“오늘 밤 떠나는 거야?” 배은란은 풀이 죽은 얼굴로 그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틀 뒤.”“안 가면 안 돼? 난 민용 씨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배은란은 그를 붙잡고 싶었다.서철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중요한 일이라 내가 가서 해야 해.”“그래, 응원할게. 우리 남편은 최고야. 꼭 더 강력한 항암제를 연구해내. 우리 아기와 난 민용 씨가 자랑스러워.”서철용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네가 혼자 집에 있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병원이 연구소와 가까우니까 시간 나면 자주 올게."“알았어, 민용 씨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서철용은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가 침대 옆 조명만 켜두고 잠을 청하려던 그때, 방문이 열리고 임산부 잠옷을 입은 배은란이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민용 씨... 나 여기서 같이 자도 돼? “서철용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은란은 이미 침대에 누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철용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밤 열한 시가 되어도 배은란은 원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엔 남자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민용 씨, 잠들었어?”“아니.” 서철용이 대답했다.“내가 옆에 있어서 잠이 안 오는 거야?”“아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서철용은 손을 뻗어 침대 옆 조명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그가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그리고 이 아이는...서민용... 이게 정말 네가 원했던 거야?서철용의 마음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그는 배은란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병동 밖으로 걸어 나갔다.15층 옥상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서철용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이렇게 서 있다간 망부석이 되겠어.”전연우
“지난 3개월 동안... 배은란은 줄곧 나를 형으로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어떤 쾌감도 느껴지지 않더라고. 이제야 어떤 것은 강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서철용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전연우까지도 처음에는 장씨 일가를 상대하는 도구로만 사용했었다. 이제 장해진이 죽고 장씨 가문에는 전연우만 홀로 남았다. 하지만 장해진에 대한 전연우의 증오는 서철용 못지않게 깊다.전연우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제 손으로 직접 제거했다. 누구에게나 자비하나 없이 무자비한 냉혈한이었던 전연우는 유독 장소월에게만큼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있다.전연우가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서철용이 대답했다.“천천히 한 걸음씩 해봐야지. 기억 속 고통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지 않겠어?”서철용은 서씨 집안 저택에서 서민용에게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사실 서민용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4년 전 우리 내기 아직 기억해?” 서철용은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찬바람이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자 가느스름한 그의 두 눈이 드러났다. 방탕하고 거칠었던 눈동자에 지금은 무언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분명 기억하고 있다. “그 내기, 우리 둘 다 졌어. 넌 장소월을 사랑하게 됐고, 난...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 “진 건 너야. 만약 나였다면, 그 둘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했을 거야.”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날이 밝아오는 창밖을 본 서철용이 말했다. “난 이만 돌아갈게. 시간이 늦었어. 쉬어.”전연우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창문 밖에 머무르고 있었다...어두운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며 밝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은빛이 점차 가라앉으며 눈도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크리스마스가 지나고 2주 뒤, 전연우는 화국 내 자선가 순위 1위에 올랐다. 그의 가치는 1
서문정은 흠칫 놀라더니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저를요? 무슨 일이죠?"“곧 알게 될 겁니다.”휴게실에 들어간 지 불과 20분 만에 누군가 서문정의 모든 정보를 그에게 보냈다.서문정이 들어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매력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소파에 앉아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서문정은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하며 귀에 걸친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선생님, 저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전연우가 서류에서 사진을 꺼내 그녀 앞에 내던졌다. “얼굴 성형 잘했네요.”서문정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돌처럼 굳어버렸다.“당... 당신이 어떻게 내 예전 사진을 갖고 있어요?”분명히 그녀는 아버지에게 모두 없애 달라고 부탁했었다.서문정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머릿속에 폭탄이 터진 것처럼 아찔해졌다.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소월이가 될 수 없어요.”“3일 시간을 줄게요. 언론에 모든 것을 밝히고 바로잡아요. 만약 3일 후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그땐 내가 직접 움직일 거예요.” 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정보 파일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가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이 얼굴 두 번 다시 보이지 말아요...”전연우가 휴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서문정이 눌러두었던 분노를 터뜨리며 돌연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내 일에 참견해요? 내가 장소월 얼굴로 성형했어도 그건 내 자유예요.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다고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것 같아요?”“여자 덕분에 어부지리로 얻은 자리잖아요. 인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장씨 집안 개에 지나지 않았을 사람이.”“우리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에요. 사업가는 정치인과 맞서지 못하는 법이죠. 당시 강씨 가문도 우리 아버지에겐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고작... 뒷배경 하나 없는 불량배 같은 사람이 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기성은은 전연우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장소월이 쓰러진 이후로, 그는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두 시간 후, 기성은이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지시하신 건 다 준비됐습니다.”전연우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을 닦은 뒤 다시 이불 속에 넣었다.“앞으로 중요한 서류에 사인하는 것 말고는 나 찾아올 필요 없이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했으니 회사 경영에 대해 가르쳐 줄 필요 없을 거야.”“정말 회사에 손 떼실 생각이십니까? 대표님께서 피땀으로 일군 회사입니다.” 기성은이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종래로 오늘처럼 불안했던 적이 없다. “아가씨는 괜찮을 겁니다. 끝까지 안 깨어나면 평생 이러고 사실 생각이십니까?”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이건 내가 소월이한테 진 빚이야.”“됐어.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기성은은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회사는 내팽개치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다...그야말로 미친 짓이다!전연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회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장소월을 돌보는 데에만 몰두했다. 지난번 누군가 장소월의 링거 관에 독을 주입한 일이 있은 이후로 전연우는 더더욱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장소월은 식물인간이 됐지만, 서철용은 그녀의 뇌가 아직 활동 중이라, 외부 자극이 있어야만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다음 날 아침, 전연우는 장소월의 침대 옆에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틀어주었다. 모두 장소월의 예전 침실에서 가져온 카세트테이프였다.전연우가 침대 옆에서 사과 껍질을 깎고 있을 때, 경호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밖에 소현아라는 분이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안 돼.”“네, 대표님.”“참.” 전연우가 그를 불렀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면 말씀하십시오.”전연우의 음산한 눈빛 아래 얼음장 같은 냉기가 번뜩였다.“지금부터 15층
소현아는 줄곧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가 장소월에게 그 쪽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장소월은 아무 일 없지 않았을까?허이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밖으로 나온 소현아는 눈물을 닦으며 허이준을 밀쳐냈다. “다 네 탓이야. 네가 소월이한테 몰래 쪽지를 전해달라고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흑흑... 소월이 돌려내.”허이준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그녀는 분명 메일을 읽었을 것이다.허이준도 자신이 정말 잘못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몰랐다고? 소월이가 아프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왜 또 자극한 건데? 강영수는 이미 죽었잖아. 되돌릴 수도 없어. 왜 소월이가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하지 않았어? 나 조금 전 의사한테 물어봤어. 소월이가 깨어나는 건 불가능하대. 정말 못 깨어나면 어떡해? 나한테 친구는 소월이밖에 없단 말이야.”“다 네 잘못이야, 다신 너랑 말 안 할 거야.”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간호사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병원에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허이준은 도망가는 소현아의 뒷모습을 보며 간호사에게 미안함을 전했다.허이준이 병원을 나설 때쯤 소현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소현아는 엉엉 울며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현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유니폼에 검은 장화를 신은 남자가 다리 사이에 검은 속옷만 입은 나체의 여자를 무릎 꿇려놓고 있었던 것이다.“재밌어요?” 강지훈이 위험한 눈동자를 굴리며 눈앞에 멍하니 얼어붙은 여자를 쳐다보았다.소현아는 잠시 울음도 잊은 채 너무 무서워 차 문을 쾅 닫고 곧장 돌아서 달려갔다.그녀의 차 아니었나?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아가씨, 여기요.”소현아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보자마자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머금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아저씨, 차 위치 왜 바뀐 거예요?”“경비 아저씨가 와서 그 자리엔 주차할 수
진실이라는 건 늘 이런 법이다. 아무리 잔인한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만 한다.“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상관없으니 살려내.”“지금은 깨어나지 않으려 치료를 거부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신도 치료할 수 없을 거야.”전연우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서울에서 못 고치면 외국으로 데려갈 거야. 세상에 병원이 이렇게나 많은데 해결책을 찾아줄 사람이 한 명은 있겠지.”서철용의 생각이 맞았다. 그는 정말 미쳐버렸다.“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을지도 몰라.”서철용은 전연우가 장소월의 출생의 비밀과 한씨 집안의 존재를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한의준을 찾아갔다.“...아저씨, 지금 상황이 이러합니다. 예진 이모에 대한 얘기 많이 해 주세요. 그럼 소월 씨가 깨어날지도 모르잖아요.”수술 후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한의준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듣고 난 뒤 낙담한 얼굴로 말했다.“철용아, 넌 너무 성급했어. 명확하게 조사하지도 않고 약을 먹이다니.”“난 저승에 가서 아가씨를 뵐 얼굴이 없구나.”서철용은 죄책감에 휩싸인 한의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모든 게 제 잘못이에요. 제가 예진 이모 딸을 해쳤어요. 삼촌, 제발 도와주세요.”한의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등을 돌리고는 통유리창 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해서 소월 씨가 깨어날 수 있다면 한 번 해볼게.”“이제 장해진이 죽고 복수도 모두 마쳤으니 난 여한이 없어.”한의준이 장소월의 병실에 들어서자 서철용은 전연우를 뒤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저었다.“한 번 해보자.”한의준의 말투엔 불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지만 넌 안 돼.”“장해진이 낳은 씨앗은 다 쓰레기야.”한의준은 한바탕 저주를 퍼부은 뒤 병실 문을 닫았다.전연우는 그를 향해 위험한 눈동자를 번뜩였다.“날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의 괴팍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서철용은 곧바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전연우는 한의준의 정체와 관련해서는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