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전연우가 처음으로 지킨 약속이었다.그날 밤, 전연우는 확실히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줄곧 그녀의 몸을 만지작거렸다.다음 날 새벽, 장소월은 여전히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 돌연 하반신에서 통증이 전해졌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가 욕정 분출을 어서 끝내기를 기다렸다.장소월은 이제 온몸에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버렸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 씻긴 뒤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장소월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약을 발라주었는지 한숨 자고 나니 근육통 외엔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옷을 입고 힘없이 문밖으로 걸어 나가보니 식탁 위에 전연우가 만든 요리가 놓여있었다.대충 몇 술 뜨고 나니 어느덧 점심 12시가 되었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가 그녀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있어 나가야 하니 아가씬 편히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어요. 이건 대표님께서 남겨주신 현금입니다.”도우미가 돈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족히 몇백만 원은 되어 보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같이 자고 난 뒤 돈을 주다니, 그녀를 술집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건가?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청연사.그녀는 예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청연사였다.그녀가 문을 나서니 경호원이 뒤를 따랐다.차를 타고 청연사를 품고 있는 산자락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니 고풍스러운 대문과 그 위 검은색으로 새겨져 있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난 지라 당시 봤을 때보다 많이 낡아 있었다.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위로 올라가실 생각이라면 케이블카를 타시죠.”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직접 발로 올라야 부처님도 절 살펴주실 거예요. 걷기 싫으면 절 따라올 필요 없어요.”“아가씨, 대표님께서 조금도 아가씨의 곁에서 떨어져 있지 말라고 분부하셨
그녀의 말대로 걷는다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문드러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장소월은 장장 3시간을 올라 산꼭대기에 도착했다.그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드리러 오가고 있었고 주지 스님은 거대한 금색 불상 앞에 서 있었다.장소월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아니,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가족의 평안?그녀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친구...그들은 이미 꿈을 이루고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다.애인...장소월은 이미 죽을 때까지 다시는 결혼이라는 것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지금 그녀는 혈혈단신이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건강?그녀가 언제까지 이렇게 호흡하며 살아가겠는가?“아미타불, 장 시주.”주지 스님이 돌연 입을 열었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절 기억하세요?”“4년 전 이곳에 오셨잖아요. 이번에도 바라는 바가 있어서 오셨나요? 아니면 예참을 하시려는 건가요?”경호원은 그녀에게서 향을 건네받은 뒤 향로에 꽂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망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때 전 제 주변 사람들이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빌었어요. 지금 그들은 아주 잘살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이번엔 온 건 저 자신을 위해 치성을 드리기 위함이었어요. 하지만... 올라오고 보니 전 아무것도 원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어요.”“아미타불, 장 시주께선 소승이 오래전 알던 사람과 정말 비슷하네요. 당시 그 사람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아이의 평안을 위해 빌고 또 빌었어요.”“그때 소승이 물었었죠. 왜 자신을 위해선 치성을 드리지 않냐고.”“그 여 시주의 대답도 장 시주와 마찬가지였어요. 두 사람 모두 착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에요.”장소월이 호기심에 물었다.“그 이후, 그분은 다시 오셨나요?”주지 스님이 고개를 저었다.“장
청연산 높은 산봉우리에 서 있으니 아름다운 석양이 한눈에 들어왔다.은은한 노을빛이 장소월의 몸을 비추던 그때, 전연우와의 통화를 마친 경호원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아가씨, 대표님께서 하실 말씀 있으시답니다.”장소월이 핸드폰을 받아 귓가에 가져갔다.“무슨 일이야?”“일찍 집에 가. 나 걱정하게 하지 말고. 하산하는 길은 위험하니까 케이블카 타고 내려가. 응? 알겠지?”그 뒤를 이어 인시윤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연우 씨, 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의상으로만 촬영하면 끝나요.”장소월이 전화를 끄고 핸드폰을 경호원에게 돌려주었다.“이제 돌아가죠.”“아가씨, 케이블카 위치는 이쪽입니다.”하지만 장소월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이미 날은 어둑해지고 있다. 불과 발끝 아래 길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경호원들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전부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장소월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아가씨, 조금만 쉬시죠. 대표님께서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계속 이렇게 내려가다간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전등을 환히 비추며 산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얼마 후, 전연우가 어두운 얼굴로 장소월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고 있던 정장을 그녀에게 입혀주었다.“다음에도 또 이러면 집 밖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장소월은 그가 정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이 시간엔 인시윤과 함께 있을 거라 짐작했으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있었다.전연우는 곧바로 그녀를 안고 걸어갔다. 본래 두 시간 정도 걸려야 할 여정이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니 산자락에 도착했다.차 문을 열어보니 인시윤이 앉아있었다.장소월을 본 인시윤은 곧바로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이거 마시고 몸을 좀 녹여. 이렇게 추운 날씨에 산길은 위험해. 나랑 연우 씨가 걱정 많이 했어.”장소월은 차에 올라타 인시
“오빤 이제 괜찮아.”전연우와 한 공간에 있었던 탓에 그의 눈치를 보느라 뜻대로 말하지 못했다.사실 인시윤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소월이 강영수에 대해 물었다는 건 아직 그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강영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의식도 차리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면서도 오매불망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다행히 괜찮아졌구나.’장소월은 그제야 오랫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전연우는 먼저 인시윤을 집에 데려다주었다.인시윤은 처음엔 전연우와 장소월더러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역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소월아,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차 문이 닫히는 순간, 전연우는 독기 오른 맹수처럼 장소월의 아래턱을 움켜쥐었다.“아직도 그 자식을 못 잊어서 안달인 모양새라니. 소월아, 오빠가 요즘 널 너무 오냐오냐해줬지? 감히 내 앞에서 그놈의 이름을 입밖에 내뱉고 말이야.”전연우의 불같은 분노를 마주했음에도, 장소월은 오히려 더없이 평온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또 차 안에서 날 모욕하려고? 아니면 또 영수를 해치려고? 네 행동은 늘 그렇게 더럽고 비겁했잖아.”“내가 정말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누가 준 것인지 잊지 마.”장소월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그걸 중요하게 여길 거로 생각해?”“다시 한번 강영수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면 마지막 남은 숨통까지 끊어놓을 거야. 소월아, 넌 앞으로 나한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로즈 가든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또다시 집에 갇혀 버렸다. 전연우는 이번엔 그녀를 집 밖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가둬버렸다.심지어... 그의 시선 속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회사에 출근할 때에도 늘 그녀를 옆에 두었다.전연우와 인시윤의 웨딩 촬영 소식이 알려지자 모
하지만 인시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잠시 뒤 전연우와 혼인신고를 마치고 나면 당당한 성세 그룹 안주인이 될 테니 말이다.전연우의 유일한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다.그 누구도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순 없다.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인시윤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그리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결혼만 하면 몰래 장소월을 출국시킬 수 있을 것이다.인시윤이 장소월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사실... 오빠는 애초부터 김남주와 결혼할 생각 따위 없었어.”“네가 떠나기 전 오빠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 네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김남주는 강씨 집안에서 쫓아낼 거라고 말이야.”“2년 전 네가 들었던 오빠의 결혼 소식은 가짜야. 인터뷰 역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김남주가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꾸며낸 거고.”“내가 너한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어. 김남주는 2년 전 그 차 사고에서 죽었어.”“오빠가 널 찾으러 러시아에 갔을 때 김남주도 따라갔었어. 러시아에서 배회하던 중 차 안에서 몸싸움을 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대.”“다행히 오빠는 목숨을 건졌어. 하지만 여전히 병원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고 있어.”그 소식을 들은 장소월은 경악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뭐... 뭐라고?”“미안해. 그날은 연우 씨가 있어서 솔직히 말하지 못했어.”“이 세상에 연우 씨를 막을 사람은 없어. 연우 씨는 강씨 가문에 관한 모든 소식을 단절시켰어.”“매체 기자들에게도 강씨 집안에 대한 어떠한 보도도 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경고했고.”“강한 그룹은 당시의 금융 위기를 버텨내지 못했어. 강한 그룹의 주식마저 산산이 조각나버렸고 이제 강씨 집안에 남은 거라곤 저택 하나 단 하나야.”장소월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시윤이 곧바로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장소월이 그녀를 쳐다보며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당시 오빠가 병원에 실려
“오후 불필요한 회의는 뒤로 미뤄.”“네. 대표님.”전연우는 그때에야 장소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경호원이 널 집으로 데려다줄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장소월은 전연우가 나간 뒤 눈을 내리뜨리고 한동안 말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경호원이 들어왔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출발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병원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입니다.”만일을 대비해 차도 바꿔탔다. 전연우가 보내준 차엔 위치 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그녀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그의 핸드폰에 전송될 테니 말이다.차 안, 경호원이 회색 유니폼과 마스크를 장소월에게 건넸다.“병원엔 대표님의 사람이 많아요. 때문에 간호사로 변장해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이 간호사 증도 목에 거세요.”“알겠어요.”경호원이 자리를 비켜주자 장소월은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장소월은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뒤 두 눈만 드러낸 채 마스크를 꼈다.엘리트 개인 병원에 도착하자 경호원이 그녀를 안내했다.그들은 한 VIP 병실에 들어섰다. 마스크를 뚫고 코를 찔리는 소독수 냄새에 심장이 떨려오고 숨이 턱 막혔다.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신분을 확인해야 하니 마스크를 벗어주세요.”“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모셔 온 간호사야. 들여보내.”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서 들려왔다. 장소월은 문틈으로 인시윤의 엄마인 인경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장소월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인경아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백발이 자라났는지 40세밖에 되지 않는 그녀가 족히 50세는 되어 보였다.경호원이 길을 비켜주었고 장소월은 그렇게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갔다.장소월이 마스크를 내리지 않아도 인경아는 이내 그녀를 알아보았다.“들어가요. 영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그 말 한마디가 장소월의 코끝을 시큰해지게 만들었다.장소월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아이... 어디에 갔는지 물어도 될까요?”“시윤이가
장소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한 마음을 안고 강영수의 병실 문을 열었다.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가 그녀의 신경까지 자극했다.병실에 들어선 그 순간,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야위었는지 앙상한 뼈마디가 보일 정도였고, 손등과 다리는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어 멀쩡한 피부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약 저곳에 누워있는 사람이 강영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장소월은 결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그의 옆으로 다가가고 싶었으나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그 순간 장소월의 귓가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영수는 너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너 때문에 사고가 난 거라고!만약 네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강영수가 심하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야.그녀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장소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영수야...”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손등을 만져보니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어서 빨리 깨어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구멍이 꽉 막혀버려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그녀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강영수, 나 돌아왔어!”“네가 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빨리 깨어나. 응?”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슬프게 흐느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려 바닥에 한 송이의 처량한 꽃을 수놓았다.시청 앞.인시윤이 레드 드레스 차림으로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늘은 단연 그녀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최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소녀처럼 꽃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옆에 서 있던 촬영사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 속에선 전연우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인시윤을 쳐다보고 있었고, 인시윤은 살짝 쑥스러운 듯 발그레해진 얼굴로 입꼬리를 예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영락없는 사랑이 흘러넘치는 신혼부부 그 자체였다.인시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그럼
전연우는 기성은에게서 펜을 받은 뒤 마지막 페이지에 사인했다.이어 곧바로 기성은에게 건넸다.“법무부에 제출해.”“네. 대표님.”전연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허울뿐인 결혼 따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그에게 있어 누구와 결혼하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밥은 됐어요.”“왜요? 회사에 가봐야 해요?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된 날이잖아요. 여보... 오늘은 저와 함께 있어 주면 안 돼요?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 적도 없잖아요. 절 위해 이번 한 번만 양보해 줘요. 네?”“인시윤 씨, 여기까지예요. 연극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그 한마디에 인시윤은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싸늘하게 차에 올라탔다.“대표님, 회사로 갈까요? 아니면 로즈 가든인가요?”전연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목적을 이루었건만, 가슴 속의 짜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이유는 전연우 자신 또한 알 수 없었다.“로즈 가든.”“네. 대표님.”전연우는 핸드폰을 켜고 화면 속 장소월의 위치를 확인했다.로즈 가든에 돌아간 뒤 전연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곧바로 안방에 들어갔다.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있는 장소월을 본 그의 눈동자가 한층 어두워졌다.전연우가 한 걸음 한 걸음 장소월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장소월의 시선이 남자의 긴 두 다리에 부딪혔다. 그녀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나지막한 세 글자가 새어 나왔다.“축하해.”전연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 보아내기라도 한 듯 말이다.“그리고?”“행복한 신혼 생활 보내.”전연우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잡아 올렸다. 검디검은 눈동자에 한기가 위험하게 일렁거렸다.“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