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불필요한 회의는 뒤로 미뤄.”“네. 대표님.”전연우는 그때에야 장소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경호원이 널 집으로 데려다줄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장소월은 전연우가 나간 뒤 눈을 내리뜨리고 한동안 말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경호원이 들어왔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출발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병원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입니다.”만일을 대비해 차도 바꿔탔다. 전연우가 보내준 차엔 위치 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그녀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그의 핸드폰에 전송될 테니 말이다.차 안, 경호원이 회색 유니폼과 마스크를 장소월에게 건넸다.“병원엔 대표님의 사람이 많아요. 때문에 간호사로 변장해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이 간호사 증도 목에 거세요.”“알겠어요.”경호원이 자리를 비켜주자 장소월은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장소월은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뒤 두 눈만 드러낸 채 마스크를 꼈다.엘리트 개인 병원에 도착하자 경호원이 그녀를 안내했다.그들은 한 VIP 병실에 들어섰다. 마스크를 뚫고 코를 찔리는 소독수 냄새에 심장이 떨려오고 숨이 턱 막혔다.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신분을 확인해야 하니 마스크를 벗어주세요.”“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모셔 온 간호사야. 들여보내.”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서 들려왔다. 장소월은 문틈으로 인시윤의 엄마인 인경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장소월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인경아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백발이 자라났는지 40세밖에 되지 않는 그녀가 족히 50세는 되어 보였다.경호원이 길을 비켜주었고 장소월은 그렇게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갔다.장소월이 마스크를 내리지 않아도 인경아는 이내 그녀를 알아보았다.“들어가요. 영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그 말 한마디가 장소월의 코끝을 시큰해지게 만들었다.장소월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아이... 어디에 갔는지 물어도 될까요?”“시윤이가
장소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한 마음을 안고 강영수의 병실 문을 열었다.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가 그녀의 신경까지 자극했다.병실에 들어선 그 순간,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야위었는지 앙상한 뼈마디가 보일 정도였고, 손등과 다리는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어 멀쩡한 피부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약 저곳에 누워있는 사람이 강영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장소월은 결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그의 옆으로 다가가고 싶었으나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그 순간 장소월의 귓가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영수는 너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너 때문에 사고가 난 거라고!만약 네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강영수가 심하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야.그녀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장소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영수야...”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손등을 만져보니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어서 빨리 깨어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구멍이 꽉 막혀버려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그녀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강영수, 나 돌아왔어!”“네가 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빨리 깨어나. 응?”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슬프게 흐느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려 바닥에 한 송이의 처량한 꽃을 수놓았다.시청 앞.인시윤이 레드 드레스 차림으로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늘은 단연 그녀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최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소녀처럼 꽃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옆에 서 있던 촬영사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 속에선 전연우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인시윤을 쳐다보고 있었고, 인시윤은 살짝 쑥스러운 듯 발그레해진 얼굴로 입꼬리를 예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영락없는 사랑이 흘러넘치는 신혼부부 그 자체였다.인시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그럼
전연우는 기성은에게서 펜을 받은 뒤 마지막 페이지에 사인했다.이어 곧바로 기성은에게 건넸다.“법무부에 제출해.”“네. 대표님.”전연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허울뿐인 결혼 따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그에게 있어 누구와 결혼하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밥은 됐어요.”“왜요? 회사에 가봐야 해요?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된 날이잖아요. 여보... 오늘은 저와 함께 있어 주면 안 돼요?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 적도 없잖아요. 절 위해 이번 한 번만 양보해 줘요. 네?”“인시윤 씨, 여기까지예요. 연극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그 한마디에 인시윤은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싸늘하게 차에 올라탔다.“대표님, 회사로 갈까요? 아니면 로즈 가든인가요?”전연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목적을 이루었건만, 가슴 속의 짜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이유는 전연우 자신 또한 알 수 없었다.“로즈 가든.”“네. 대표님.”전연우는 핸드폰을 켜고 화면 속 장소월의 위치를 확인했다.로즈 가든에 돌아간 뒤 전연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곧바로 안방에 들어갔다.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있는 장소월을 본 그의 눈동자가 한층 어두워졌다.전연우가 한 걸음 한 걸음 장소월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장소월의 시선이 남자의 긴 두 다리에 부딪혔다. 그녀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나지막한 세 글자가 새어 나왔다.“축하해.”전연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 보아내기라도 한 듯 말이다.“그리고?”“행복한 신혼 생활 보내.”전연우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잡아 올렸다. 검디검은 눈동자에 한기가 위험하게 일렁거렸다.“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전연우는 인시윤과 혼인신고를 한 이후에도 줄곧 로즈 가든에 머물렀다. 다만 장소월은 더는 그와 함께 회사에 가지 않았다.장소월의 출현은 이미 적잖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었다.인시윤이 성세 그룹의 안주인이 된 지금, 그녀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떠들어댈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전연우와 인시윤의 결혼식 3일 전부터 서울시 전체는 성세 그룹과 인하 그룹이 사돈을 맺었다는 소식으로 뜨겁게 들끓었다.두 사람의 예식장은 서울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호텔 측에선 아예 3일 동안 문을 닫고 결혼식 준비에 매진했다.장소월은 인시윤이 보낸 경호원의 도움으로 또다시 청연사로 향했다. 오직 강영수를 위해 날씨가 좋지 않은 날 빼고는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산에 올랐다.어젯밤 전연우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어둑한 새벽 일찍 출발했고 산봉우리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떠올라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오늘 청연사엔 불경을 드리러 온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장소월은 처음으로 청연사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고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이 걸어 나왔다.“아미타불, 장 시주.”장소월이 매일 절에 드나든 탓에 많은 스님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다.장소월은 늘 그랬던 것처럼 불상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두 번째 이곳에 왔을 땐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다...세 번째,네 번째.다섯 번째...항상 강영수가 하루빨리 의식을 되찾고 몸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그가 깨어날 때까지 매일 매일 이곳에 올 생각이었다.하지만... 강영수의 상황은 하루하루 더 악화 됐다. 신장 등 장기 기능까지 천천히 퇴화하여 갔다. 의사 선생님은 이후 닷새 안에 깨어나지 못한다면 가망이 없으니 치료를 지속해 나갈 필요도 없다고 통보했다.주지 스님이 걸어 나왔다.“장 시주, 애쓰지 말고 그냥 하늘의 뜻에 순응하십시오. 아미타불.”장소월이 간신히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예전 운명 같은
그때, 돌연 불어온 바람에 휩쓸려 운을 점치는 대나무가 꽂혀있던 통이 쓰러졌다.주지 스님이 급히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를 주워보니 엄청난 길운을 의미하는 대나무였다.장소월은 산에서 내려온 뒤 병원으로 향했다.매번 그녀가 올 때마다 인경아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하산하던 중 장소월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 피를 토해냈다. 이어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요즘 장소월은 줄곧 자기 몸을 혹사했다.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경호원은 급히 장소월을 업고 아래로 내려가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장소월은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다.배드에 누워 응급실로 향하는 순간, 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왔다.그녀의 눈에 보고 싶지 않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서철용!그는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몸을 검사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검사실 준비 마쳤습니다.”“그래요.”서철용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마주하고는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소월 씨, 우리 또 만났네요?”간호사는 옆에서 장소월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고 있었다.그때, 다른 간호사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 선생님, 이제 환자분 들여보내도 됩니다.”배드 바퀴가 굴러감과 동시에 장소월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검사할 필요 없어요. 뇌암 말기예요. 이제 치료도 못 해요.”두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서철용이 요사스러운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말했다.“우리 소월 씨는 농담도 잘한다니까요. 알겠어요... 연우가 모레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니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죠?”장소월이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목숨으로 당신과 장난칠 사람으로 보여요?”그녀는 시선을 돌려 머리 위 하얀색 벽을 보며 말했다.“제 가방에 약이 있어요. 그리고 새 옷 좀 부탁드릴게요. 감사해요.”장소월은 입을 여는 순간 농후한 피 냄새를 느꼈다.그녀는 이런 불쾌한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서철용은 고집대로 그녀
서철용은 전연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왔네.”그가 뭐라 말했던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시간 문제라 하지 않았던가.친자 감정서까지 확인했음에도 장소월을 사랑해 버리고 말았다.전연우와 인시윤은 모두 장소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줄곧 서철용에게 멈춰 있었다. 인시윤이 다가가 장소월의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병원에 온 거야? 어디 아파?”인시윤은 장소월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녀의 병을 숨기려 한 말일 뿐이었다.장소월이 시선을 거두었다. 서철용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장소월은 알고 싶었다. 서철용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어떻게 어머니를 아는 걸까?설마 어머니의 무덤 앞에 있던 그 꽃이 서철용이 가져다 놓은 건가?전생에서 장소월은 서철용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녀를 낳을 때 과다 출혈로 돌아가셨다 하지 않았던가?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전생에선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산에서 내려올 때 조심하지 않아 삐끗해서 넘어졌어.”이건 경호원, 인시윤, 그리고 장소월이 사전에 맞춰두었던 이유였다.옆에 있던 서철용은 모든 걸 알아보았는지 혼자 은밀한 웃음을 지었다.전연우의 음산한 눈빛이 서철용에게로 향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검사 보고서는?”서철용이 아무 일도 없는 척 어깨를 들어 올리며 가볍게 말했다.“소월 씨가 얘기했잖아? 그냥 넘어진 것뿐이니까 별문제 없어. 우리 소월 아가씨는 몸이 너무 약해. 앞으론 얌전히 집에만 있고 어디든 안 나가는 게 좋겠어.”사람들의 말에 장소월은 짜증이 밀려왔다.“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 이 링거만 다 맞으면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인시윤이 걱정스레 말했다.“여보, 먼저 가요. 오후 회의가 있다고 했잖아요. 병원엔 제가 있으면 돼요. 집에 돌아가면
남자는 고분고분 자기 말에 잘 따라주는 여자를 좋아한다. 혼인신고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모레면 결혼식까지 해야 하니, 인시윤은 전연우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인시윤이 나가자 병실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장소월은 밀폐된 공간에서 전연우와 단둘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숨 막힐 듯한 침묵이 온몸을 옥죄어왔다.장소월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누가 봐도 넘어져서 입원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전연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지금까지 줄곧 그놈과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오빠,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에 새언니한테 잘해주는 낫지 않아? 여동생한테 더러운 짓도 그만해. 소문나면 내 이름만 더럽혀져.”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렸다.“꼭 그런 식으로 나한테 말해야겠어?”장소월은 덤덤히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내 말이 틀렸어? 이 세상에 너보다 역겨운 사람은 없어. 전연우!”“네가 내 몸을 만질 때마다 역겨워 미치겠다고.”“걱정하는 척 연기하지 마. 내 몸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어느 날 내가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건 분명 너 때문일 거야.”전연우가 그녀의 옆으로 성큼 걸어가 손을 들어 올렸다.“내 몸에 손대지 마.”전연우의 손이 경직되어 허공에 멈추었다.“소월아, 인시윤과는 그냥 결혼한 척 연극을 하는 것뿐이야.”“연극이든 뭐든 상관없어. 난 그냥 네가 나에게서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어.”“됐어. 나가. 더는 널 보고 싶지 않아.”“나가라고!”인시윤은 바깥에서 주름이 생길 정도로 드레스를 꽉 움켜쥐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안에서 전연우가 나오자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저기...”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연우가 말했다.“잘 보살펴 줘요.”“네.”인시윤이 병실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아직은 장소월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수 없었다.더욱이 곧 죽을 사람이 어떻게 그녀의 경쟁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정말
“그건 걱정하지 마. 연우 씨는 절대 오빠를 해치지 못해. 이젠... 내 오빠이자 연우 씨의 형님이기도 하잖아.”인시윤의 확신에 찬 말투에 장소월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안전하게 강영수와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장소월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인시윤은 떠나기 전 약속대로 아래층 약국에서 약을 받아왔다. 장소월은 곧바로 그 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전연우와 한패인 이 더러운 병원에서 준 약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장소월은 강영수를 보러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많이 호전되었다.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면봉에 물을 적셔 그의 입술에 발라주고는 죽은 사람과도 같이 생기 하나 없는 강영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이 사소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오늘 대사님께서 경서 하나를 주셨어. 넌 부처님의 은총을 받는 관상을 갖고 있어서 머지않아 몸을 회복할 거라고 하셨어.”“넌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있었어. 이제 더는 자지 마. 응?”“영수야, 몇 개월만 더 지나면 서울에도 눈이 내릴 거야...”“학교 조각상 뒷면에 새겨진 글자 봤어. 내 이름이더라고.”장소월이 약간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 지난 4년 동안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얘기했어. 너 듣고 있는 거야? 나 정말 네가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어. 예전의 그 강영수를 보고 싶단 말이야.”“김남주와의 일은 더는 문제 삼지 않을게. 그러니까 얼른 깨어나, 응?”장소월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초췌한 얼굴에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피부에 닿은 순간, 강영수의 몸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다.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은 빠르게 눈물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었다.경호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대표님께서 이미 로즈 가든에 도착해 저희더러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알겠어요.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장소월이 창밖을 내다보
“네가 예전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해! 또다시 소월 씨 주변 사람들을 해치면, 소월 씨한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분명히 말했으니까, 일이 잘못돼도 나 찾지 마!” “뚜뚜...” 서철용은 화가 치밀어 올라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 주변 사람들을 해친다고?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친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전연우는 그저 그의 아내만을 원할 뿐이다. “리샬!”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세 사람을 잘 감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그 말을 들은 리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연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지시한 일은 120%의 정신력으로 처리해야 했다. “보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임무 반드시 완벽하게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도련님께서 계속 사모님을 찾으며 울고 계십니다. 도저히 달랠 수가 없습니다.” 전연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데려와.” 리샬이 엉엉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앞에 데려왔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만약 별이가 우리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네 마음이 약해질까?’ 전연우는 감히 자신 앞에서 울지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는 별이를 보니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소월이는 분명 마음 아파할 거야.” 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얌전히 기대앉아 있다가 그가 장소월을 언급하자 입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별이는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잠이 들었고, 전연우는 직접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장소월과 소현아, 강용 세 사람은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다. 별장 주인이 친절하게 그들을 대접했지만, 불안한
리샬은 조용히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 이곳의 부동산은 대부분 전연우의 소유였다.모두 예전 세계 경제 위기 때 그가 매입한 것들이었다. 전연우는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는 장소월의 말을 기억하고 전국 각지에 집을 마련해 놓았다. 그녀가 가겠다고만 하면, 수시로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아이와 함께, 설사 그들뿐이라 해도... 전연우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계획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연우는 적잖게 술을 마셨고, 점점 더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소월아,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피할 생각이야.”장소월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감금되어 있었고, 전연우와 송시아는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서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다른 여자들과 끈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소월은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났다. 너무나도 괴로운 감정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전연우, 지금 네 부와 권력이라면 그 어떤 여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잖아. 네가 남의 감정을 어떻게 농락하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왜 아직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야...’ 장소월은 휴대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번호를 눌렀다. 서철용은 한창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배은란은 얼마 전에 그녀와 눈매가 닮은 딸을 출산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아이를 내려놓고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거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서철용은 허탈한 얼굴로 문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 감시당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놈이... 기어이 소월 씨 찾아냈네요.” “참 뻔뻔하시네요. 그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전해주세요.” “제가 언젠간 강제로 끌려가는 날이 온다면, 그건 분명 시체일 거라고.” “이제 저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때문에 협박
“나도 갈 거야. 나도 그 나쁜 놈한테 잡혀가기 싫어. 소월이랑 강용이 어디를 가든, 현아도 함께 따라갈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겉으로는 즐겁고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장소월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찍혀버렸으니, 분명 헤쳐나가기 힘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어쩌면...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죽을 때까지 전연우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연우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장소월은 떠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정말이지 서울이라는 감옥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곳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강용이 대답했다. “있어. 이미 연락했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자. 내일 친구가 헬리콥터 보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여기에 친구가 있다고?” 강용은 바닥에 앉아 다리 한쪽을 세우고 손을 머리 뒤에 받힌 채 산야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 그 무리에게 쫓겨 이곳까지 흘러오게 됐는데, 그러다 조난당한 사람을 만났어. 큰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어서 내가 구해줬어. 나중에 그 사람도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어. 그렇게 우정을 쌓아갔지.” “어젯밤 내가 물어봤는데, 늦어도 내일은 도착한다고 하더라고. 빠르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도 있어.” 장소월은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다니. 결국 우리가 너한테 민폐를 끼쳤네.” “강용,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가 잘못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줄기 빛이 얼굴에 쏟아지자 그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정처 없이,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 뭐.”“이게 네가 원했던 자유로운 삶 아니야?” 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자유로움 뒤에는 늘 외로움이 동반하는 법이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
결코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강용, 그만해.” “대체 누가 우리 위치 폭로한 거지? 바보야, 혹시 누구한테 메시지 보냈어?” 강용의 추궁에 소현아는 즉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민아가 물어봤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단 말이야.” “소월이 말대로 핸드폰 유심칩도 이미 버렸어.” “아빠 엄마 전화번호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적어놨어.”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군지 알 것 같아.”“서철용일 거야. 그 사람 말고는 내가 있는 곳 아는 사람 없어. 신분증도 모두 그 사람 도움으로 만든 거잖아. 진작에 예상했어야 했어. 서철용은 전연우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나 찾지 못했을 거야.” “전에 네가 말했던 그 의사 말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네가 말했지, 전연우 외에 또 다른 무리가 너 쫓았었다고. 나 이제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 정리가 거의 끝나가자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무리가 강지훈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못마땅한 듯 삐딱한 태도로 소현아에게 말했다. “야, 바보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소현아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강용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강용.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소월이 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너인데,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너 괴롭히게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시킨 거 아니야. 강지훈은 정말 나쁜 놈이야... 전에 쇠사슬로 사람을 때리는 거 봤는데, 배 속에 있는 창자까지 다 드러나고 바닥엔 피가 흥건했어.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악몽 꾸고, 무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강용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푹 널브러지고는 소현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대단해!”“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현아, 내가 어쩌다 널 만났을까. 우리 강씨 가문이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