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실수했다고 쳐도 당신은 잘했습니까?”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사람들 뒤에서 들려오자, 모든 사람들이 잇달아 뒤돌아보았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지난번 전시회에 왔던 남자였고 기성은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남자는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훤칠한 데다가 당당한 기질로 인해 한눈에 보아도 성공한 기업 총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 사람은 그가 눈에 익었지만 정확히 어디서 봤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장소월에게 뭐라고 하던 사람은 즉시 목을 움츠리고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둘러싸여 있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위해 길을 내주었다.장소월은 이 시점에 전연우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전현우는 장소월 옆으로 다가와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평소에 내 앞에서 말할 땐 목소리가 높더니 지금은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장소월은 삐쭉 나온 옷자락을 잡고 눈을 내리깔고는 말했다.“내 일에 신경 쓰지 마.”“양심도 없는 년, 돌아가서 혼내줄게.”서현은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저희 사무실 내부의 사적인 일이니 도와주고 싶으시면 그쪽 회사로 돌아가서 해결하세요. 저희 일을 방해하지 마시고요.”그러자 전연우가 말했다.“기성은.”“네, 대표님.”기성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제우(encounter) 게임 회사는 성세 그룹의 계열사이기 때문에 성세 그룹에서 이번 표절 사건에 관해 자세히 조사할 겁니다. 장소월 아가씨 해고 건에 관해서도요. 그런데 서현 씨는 무슨 자격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거죠?”그 한마디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제우가 성세 그룹의 계열사라고?장소월은 지금껏 제우 게임 회사가 허이준이 설립한 것인 줄로 알았다.허 교수와 허이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게다가... 허 교수는 외부의 주문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서현도 기성은의 물음에 이유를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저기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는데, 허 교수님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연우, 여기까지 와서 방해하지 마. 이미 충분히 머리 아프다고. 성세 그룹은 오빠 소유야. 나랑 하나도 상관없어. 난 오빠 도움도 필요 없어.”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표절 의혹 일으켜서 미안해요. 빠른 시일 내에 증명할게요.”장소월은 짐을 챙기고 떠나고 싶었지만 이때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당당한 건 좋은데... 지나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설명이 필요하댔죠. 제우 게임 회사의 대표로서 오늘 제대로 설명해 줄게요. 계약서 가져오세요.”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전연우의 눈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에게 물었다.“계약서도 없는 건 아니죠?”이때 박원근이 말했다.“있어요.”박원근은 곧 서현의 서랍에서 계약서를 찾아서 전연우에게 건넸다.전연우는 등을 뒤에 기댄 채 계약서를 다 읽고 내려놓으며 말했다.“계약서에 적혀 있듯이 원고 제출 시간은 세 주일이니까 아직 마감까지 4날 남았어요. 제우 게임 회사에서는 당신들에게 원고를 제출할 시간을 충분히 줬어요. 일찍 제출하는 건 좋은데 당신들만 완성하고 소월이가 아직 완성 못했으니 지장을 주는 것 같겠죠.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네요. 소월이가 할 수 있는 일, 당신들도 할 수 있어요?”“능력이 안 되면서 다른 사람한테서 문제를 찾아요? 허태현 씨도 반성해야겠네요. 학생들을 이 따위로 가르쳤으니!”전연우가 내뱉은 말은 서현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그녀는 즉시 반박했다.“소월 씨가 한 일을 우리가 왜 못해요? 학력을 따지면 우리는 전부 석사 졸업생들이라 소월 씨보다 못한 사람이 없어요.”전연우가 말했다.“확실해요?”장소월은 전연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해.”그녀는 서현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다.전연우는 고개를 돌려 장소월을 노려보며 말했다.“가만히 있어.”말투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한 관심은 느껴졌다.장소월은 겁먹고 바로 손을 거두었다.“능력이 있으면 왜 장소월 대신 일부 원고를 완성하고
“원고는 회사의 기밀인데 계약서에도 명확히 비밀 유지 계약을 체결하라고 썼죠. 만약 조사해 봐서 당신들 중 누군가가 회사 기밀을 외부에 유출했으면 성세 그룹에서는 끝까지 추궁할 거예요. 그리고 조사하는 기간 동안 제우 게임 회사는 스튜디오와의 모든 협력을 멈출 겁니다.”전연우는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손에 든 계약서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내 동생은 조금 멍청해도... 아무나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장소월은 멈칫하고 눈빛에 불만과 억울함, 의아함이 가득했다... 전연우 눈에 그녀는 확실히 단순하고도 멍청했다.그들의 행동 범위가 달랐기 때문에 전연우가 경험한 데 비하면 장소월은 성에 갇혀 사는 미숙한 공주와 다름없었다.서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에 침착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그럼 전연우 씨가 이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명확하게 조사해 주길 바랍니다.”전연우의 시선이 가볍게 서현을 스쳐 지나갔고, 주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오만하게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했다.그들이 떠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서현을 바라보았다.“서현 선배, 우리가 소월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맞아요! 우리가 허 교수님이 맡은 프로젝트 주문을 망친 걸 아시고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지금도 여전히 서현의 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장소월은 허 교수님의 제자라는 점과 대표 오빠가 있다는 점을 이용해 우리 스튜디오를 만만하게 보고 있어요. 장소월이 며칠 동안 스튜디오에 오지 않은 걸 잊지 마요. 우리 진도에 지장을 준 건 분명히 장소월의 잘못이고, 표절을 한 것도...”장소월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의 휴대폰에 새 이메일이 도착한 알림이 울렸고 그녀가 확인을 해보더니 안색이 변하면서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서현 선배님, 누가 이메일을 보냈어요?”서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자신감은 즉시 모두 고갈되었다.“제우 게임 회사가 방금 이메일을 보
그동안 많이 참았던 박원근은 허리를 짚고 말했다.“솔직히 계약을 위반하지만 않았으면 우리가 장소월을 좀 기다려줘도 되잖아. 아팠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잖아. 그런데 넌 장소월에게 말도 안 하고 마음대로 임무를 이어서 완성하고 미리 제출했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뭐가 있어? 칭찬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어, 아니면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어? 이 며칠 동안 서현이의 한 마디 때문에 모든 직원이 야근하고 있어. 최산 씨는 병이 나서 입원까지 했어. 너도 제우 게임 회사가 우리에게 준 시간이 충분해서 전혀 야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잖아?”그러자 서현이 코웃음을 쳤다.“그럼 네 말뜻은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난 그저 팀원들이 얼른 원고를 마치고 한 동안 휴식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야! 네가 장소월의 환심을 사려는 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내가 장소월을 질투한다고? 내가 걔를 질투할 게 뭐가 있는데? 난 늘 공사구분을 잘 했어. 장소월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상사의 말을 안 듣는 걸로 뭐라고 하거나 무시한 적 없어. 교수님께서 스튜디오를 나에게 맡기셨으니 책임을 다 할 뿐이야. 만약 네가 보기에 내가 틀렸다면 나도 할 말이 없어.”주시윤은 서현 곁으로 가서 그녀를 위로했다.“화내지 마. 원근이는 장소월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려서 그래.”박원근이 말했다.“서현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 거야. 허 교수님이 스튜디오를 서현이에게 맡기실 때 뭐라고 말씀했는지 잊지 마. 우린 몇 년 동안 같은 팀에서 일했고 같은 편이야! 반드시 손잡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서현이의 한 마디 때문에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구분 못하고 바로 우리 팀에서 장소월을 내보내는 건 아니라고 봐!”“박원근!”서현도 화가 나서 그의 이름을 외쳤다.평소에 서현은 팀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고, 장소월을 제외하고는 능력도 가장 좋았다.오늘처럼 화가 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서현의 리더쉽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실 표절하고 유출한 건 서현이 너지...”짝!뺨을 때리는 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장소월이 나오자 전연우는 난폭하게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기성은은 운전석에 앉고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장소월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연우를 바라보았다.“그런 말은 왜 해? 오빠가 아까 한 말이 나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 줄 알아? 난 단 한 번도 오빠의 손을 빌려 뭘 완성하려고 한 적이 없어! 오빠 때문에 우리 사이가 더 나빠질 뿐이야. 전연우! 언제쯤이면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 있어?”전연우는 넥타이를 풀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 말했어?”장소월은 그를 노려보았다.전연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장소월은 즉시 시선을 거두었다.“네가 지난 4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했는데, 결국 예전과 똑같이 멍청할 줄이야. 남한테 괴롭힘 당하고도 아무 말도 안해? 나한테 소리치던 성질은 다 어디 간 거야? 누가 봐도 따돌리는 건데 넌 눈이 먼 거야, 아님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이번 일은... 내가 대신 처리할 테니까 넌 호텔에 가만히 있어. 어디도 가지 마. 또 오늘처럼 도망쳤다가는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장소월은 겁이 나서 몸을 떨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전생에 그녀는 전연우의 새장에 갇힌 새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가 없을 때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치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거리에서 변태에게 붙잡혀 하마터면 나쁜 일을 당할 뻔했었는데 마침 전연우가 파티를 참석하러 가다가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 주었다.그날 무슨 일인지 전연우는 화를 내며 장소월을 방 안에 가두고 사흘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았다. 하인이 제 때에 그녀가 방 안에서 쓰러진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전연우가 돌아왔을 때 말라 죽어가는 시체를 봤을 것이다.그때의 전연우는 집에 거의 있지 않았다.소유욕이 극도로 강했던 그는 절대 다른 사람의 터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소유물이라도 그가 얻지 못하는 것이라면 망가뜨려야 했다.그리고 이번
자신더러 그의 애인을 하라니, 이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어이없어 보이진 않는가?“내가 죽어도 이번 생에... 오빠랑 만나는 일은 없어! 난 오빠 주변의 애매한 관계의 여자들을 혐오하고 오빠가 더럽다고 생각해. 내가 왜 도망쳤는지 정말 몰라? 오빠를 피하려고 그런 거잖아! 이젠 매일 오빠만 보면 역겨워 죽겠어. 오빠 때문에 난 아이를 잃었고 엄마가 될 기회를 잃었어! 나한테 약을 먹이다니, 자궁을 적출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도 아직 부족해? 어떻게 아직도 날 괴롭힐 수 있어? 난 이제 임신도 못 한다고, 전연우!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몇 번이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걸 영원히 잊을 수 없다.그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전연우!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장소월은 차라리 그와 한 번도 엮이지 않는 인생을 선택했을 것이다.“내가 보상해 줄게. 그런데 네가 떠나는 건 절대 용납 못해, 알겠어?!”전연우는 그녀의 뾰족한 턱을 잡고 말했다.“받아들이지 못해도 견뎌.”장소월은 그의 손을 잡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만약 계속 나를 가둬두려는 거면 차라리 날 죽여. 오빠 곁에 있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아.”“죽겠다고? 죽는 것도 사치라고 느끼게 해줄게!”전연우는 장소월의 목을 졸랐고 그녀는 고통스러워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차 안의 칸막이를 치는 버튼을 눌러 개인공간을 만들었다.“미쳤어? 이거 놔!”“싫어!”넓은 좌석에 장소월은 그에게 몸이 짓눌리고 옷이 찢겨 나가서 흰 피부를 드러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던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사냥감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눈가에는 소유욕이 가득했다...전연우의 비서 앞에서 장소월은 자존심이 발밑에 짓밟히면서 무모한 모욕을 당했다.호텔 로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남자가 품에 예쁘지만 생기가 전혀 없는 여인을 안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에 양복만
“내가 아침 식사는 좀 늦게 보내라고 말해둘게.”전연우는 그녀가 이미 깨어난 걸 모르진 않았지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잘 지켜보고 있어.”경호원이 대답했다.“네.”전연우는 떠나면서 여전히 경호원더러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아침 8시에 종업원이 아침 메뉴를 밀고 와서 호텔 방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전 대표님께서 부탁하신 아침 식사가 왔습니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안에서 장소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지 말고 나가요!”종업원이 난감해하면서 말했다.“하지만 전 대표님께서 저더러 직접 아가씨가 아침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라고 하셨어요.”장소월의 눈가는 살짝 빨갰고 침대에 앉아 귀를 틀어막고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방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밖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호텔 방 밖에서 사람이 말하는 소리 외에 침대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윙윙 진동하는 소리도 있었다.박원근은 몇 번이나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받지 않았다.“교수님, 소월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지금껏 많은 풍파를 겪어봤던 허태현은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양쪽 구레나룻에 흰머리가 자랐고 눈도 움푹 파여 들어갔다.사무실에 허태현과 박원근 외에 서현도 있었다.허태현이 손으로 주먹을 반쯤 쥐고 기침을 하자 서현은 바로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그러자 허태현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표절은 심각한 일인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소월이를 자르려고 했어? 언제부터 그렇게 막무가내가 된 거야?”물잔을 들고 있는 서현의 손이 흔들려 하마터면 물을 쏟을 뻔했다. 그래도 다행히 테이블 위에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서현은 허태현의 사무실 테이블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제우 게임 회사에서 낸 표절 관련 공지였습니다. 장소월의 원고와 매우 흡사했고요. 저는
전연우는 제우 게임 회사를 중시하지 않았었는데 장소월 때문에 갑자기 회사에 나오자 직원들은 마치 큰 적을 만난 듯 긴장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으니 사건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기성은은 제우 게임 회사 현재의 책임자 케빈과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장소월 디자인팀의 직원을 찾았다.기성은이 말했다.“아가씨의 표절 사건은 홍보팀에서 이미 사람을 시켜 철회하도록 했습니다.”“대표님?”기성은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전연우를 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했다.그들이 프랑스에 온 뒤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장소월에게 썼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이 전부 흐트러졌다.전연우는 호텔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호텔 매니저는 말을 더듬거렸다.“전 대표님, 소월 아가씨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직원이 걱정돼서 방에 찾아갔을 때 아가씨가 옷방에서 쓰러져 계셨다고 합니다.”전연우는 갑자기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었다.“지금은 어때?”호텔 매니저가 말했다.“아가씨는 이미 깨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려고 합니다.”전연우는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오늘 안에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 와. 난 호텔에 다녀올게.”그러자 기성은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오후 한 시에 아주 중요한 파티가 있습니다.”“취소해.”전연우는 세 글자만 남기고 걸어 나갔다. 기성은 혼자 남아서 장소월이 저지른 일을 해결해야 했다.소피아 호텔에서.장소월은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주치의는 그녀의 몸을 검사하면서 물었다.“아가씨, 평소에 어디 자주 아픈 데 있었습니까? 아니면 병원에 가서 몸을 검사한 적은 있으셨어요? 제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아가씨 몸 상태는 아주 엉망입니다.”그는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만약 아가씨께서 저를 믿으신다면 이 병원에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
전연우가 어떻게 성세 그룹 주식 매각을 허락할 수 있지? 혹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파도가 넘실거리며 해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해초와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를 질근 묶고는 조개껍데기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손에 들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장소월 앞으로 걸어와 유창한 러시아어를 말했다. 이곳은 외딴곳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예쁜 언니, 이 목걸이 선물로 줄게요.” 전설에 따르면, 예전 이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는데, 신의 딸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찾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바다가 되어 이 해역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선 조개껍데기와 소라를 신의 은총을 받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다. 이걸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하면 상대방이 신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남녀가 서로에게 프러포즈 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휴대폰에 서철용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낸 팔찌, 전연우가 아주 좋아하네요. 수고했어요.] 장소월은 그의 상황을 묻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는데도 전연우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유일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유튜브 계정에서 올린 결혼식 다음 날 그녀와 전연우가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영상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이곳에 머무른 이후로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산장 신혼 방에서 칼날을 전연우의 가슴에 꽂아 넣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시뻘건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었다. 그날 밤 손바닥에 스며든 붉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장소월은 한참을 갈등하다가 휴대폰을 들어 한마디 물었다. [그 사람은 괜찮나요?] 어린 소녀가 말했다. “언니, 나랑 같이 놀러
기성은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다면, 전연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잔혹한 그의 출신이 늘 발목을 잡았다. 모든 사람의 출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은도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픈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저 과거라는 단어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소민아가 정말로 기성은과 함께하려 한다면,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그들 손으로 직접 극복해야 할 것이다. 소민아는 이 난관을 스스로 떨쳐내고 성장해야 한다. 그녀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전혀 몰랐다. 송시아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대표 사무실. 소민아는 결국 송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분명히 따져 묻기로 했다. 송시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회사 경영이 좀 힘들어서 누군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소민아가 말했다. “전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예요. 지금 이 행동은 회사를 망치는 거예요.”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팔려고 내놓은 주식은 내가 갖고 있던 거야. 문제 있어?” “혹시 다른 일 없으면, 언니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당신을 보면, 입맛이 뚝 떨어져요.” 소민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가 한 말은 단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대체 왜 주식을 팔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중, 마케팅팀 직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민아는 구석에 서 있었던지라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다음 주부터 연차 시작이에요. 외국에 다녀올 생각인데, 지유 씨는요? 연차 다 썼어요?” “아직이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너무 짜증 나요!” 그 순간 소민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