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실수했다고 쳐도 당신은 잘했습니까?”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사람들 뒤에서 들려오자, 모든 사람들이 잇달아 뒤돌아보았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지난번 전시회에 왔던 남자였고 기성은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남자는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훤칠한 데다가 당당한 기질로 인해 한눈에 보아도 성공한 기업 총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 사람은 그가 눈에 익었지만 정확히 어디서 봤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장소월에게 뭐라고 하던 사람은 즉시 목을 움츠리고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둘러싸여 있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위해 길을 내주었다.장소월은 이 시점에 전연우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전현우는 장소월 옆으로 다가와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평소에 내 앞에서 말할 땐 목소리가 높더니 지금은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장소월은 삐쭉 나온 옷자락을 잡고 눈을 내리깔고는 말했다.“내 일에 신경 쓰지 마.”“양심도 없는 년, 돌아가서 혼내줄게.”서현은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저희 사무실 내부의 사적인 일이니 도와주고 싶으시면 그쪽 회사로 돌아가서 해결하세요. 저희 일을 방해하지 마시고요.”그러자 전연우가 말했다.“기성은.”“네, 대표님.”기성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제우(encounter) 게임 회사는 성세 그룹의 계열사이기 때문에 성세 그룹에서 이번 표절 사건에 관해 자세히 조사할 겁니다. 장소월 아가씨 해고 건에 관해서도요. 그런데 서현 씨는 무슨 자격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거죠?”그 한마디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제우가 성세 그룹의 계열사라고?장소월은 지금껏 제우 게임 회사가 허이준이 설립한 것인 줄로 알았다.허 교수와 허이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게다가... 허 교수는 외부의 주문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서현도 기성은의 물음에 이유를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저기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는데, 허 교수님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연우, 여기까지 와서 방해하지 마. 이미 충분히 머리 아프다고. 성세 그룹은 오빠 소유야. 나랑 하나도 상관없어. 난 오빠 도움도 필요 없어.”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표절 의혹 일으켜서 미안해요. 빠른 시일 내에 증명할게요.”장소월은 짐을 챙기고 떠나고 싶었지만 이때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당당한 건 좋은데... 지나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설명이 필요하댔죠. 제우 게임 회사의 대표로서 오늘 제대로 설명해 줄게요. 계약서 가져오세요.”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전연우의 눈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에게 물었다.“계약서도 없는 건 아니죠?”이때 박원근이 말했다.“있어요.”박원근은 곧 서현의 서랍에서 계약서를 찾아서 전연우에게 건넸다.전연우는 등을 뒤에 기댄 채 계약서를 다 읽고 내려놓으며 말했다.“계약서에 적혀 있듯이 원고 제출 시간은 세 주일이니까 아직 마감까지 4날 남았어요. 제우 게임 회사에서는 당신들에게 원고를 제출할 시간을 충분히 줬어요. 일찍 제출하는 건 좋은데 당신들만 완성하고 소월이가 아직 완성 못했으니 지장을 주는 것 같겠죠.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네요. 소월이가 할 수 있는 일, 당신들도 할 수 있어요?”“능력이 안 되면서 다른 사람한테서 문제를 찾아요? 허태현 씨도 반성해야겠네요. 학생들을 이 따위로 가르쳤으니!”전연우가 내뱉은 말은 서현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그녀는 즉시 반박했다.“소월 씨가 한 일을 우리가 왜 못해요? 학력을 따지면 우리는 전부 석사 졸업생들이라 소월 씨보다 못한 사람이 없어요.”전연우가 말했다.“확실해요?”장소월은 전연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해.”그녀는 서현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다.전연우는 고개를 돌려 장소월을 노려보며 말했다.“가만히 있어.”말투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한 관심은 느껴졌다.장소월은 겁먹고 바로 손을 거두었다.“능력이 있으면 왜 장소월 대신 일부 원고를 완성하고
“원고는 회사의 기밀인데 계약서에도 명확히 비밀 유지 계약을 체결하라고 썼죠. 만약 조사해 봐서 당신들 중 누군가가 회사 기밀을 외부에 유출했으면 성세 그룹에서는 끝까지 추궁할 거예요. 그리고 조사하는 기간 동안 제우 게임 회사는 스튜디오와의 모든 협력을 멈출 겁니다.”전연우는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손에 든 계약서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내 동생은 조금 멍청해도... 아무나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장소월은 멈칫하고 눈빛에 불만과 억울함, 의아함이 가득했다... 전연우 눈에 그녀는 확실히 단순하고도 멍청했다.그들의 행동 범위가 달랐기 때문에 전연우가 경험한 데 비하면 장소월은 성에 갇혀 사는 미숙한 공주와 다름없었다.서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에 침착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그럼 전연우 씨가 이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명확하게 조사해 주길 바랍니다.”전연우의 시선이 가볍게 서현을 스쳐 지나갔고, 주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오만하게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했다.그들이 떠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서현을 바라보았다.“서현 선배, 우리가 소월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맞아요! 우리가 허 교수님이 맡은 프로젝트 주문을 망친 걸 아시고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지금도 여전히 서현의 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장소월은 허 교수님의 제자라는 점과 대표 오빠가 있다는 점을 이용해 우리 스튜디오를 만만하게 보고 있어요. 장소월이 며칠 동안 스튜디오에 오지 않은 걸 잊지 마요. 우리 진도에 지장을 준 건 분명히 장소월의 잘못이고, 표절을 한 것도...”장소월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의 휴대폰에 새 이메일이 도착한 알림이 울렸고 그녀가 확인을 해보더니 안색이 변하면서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서현 선배님, 누가 이메일을 보냈어요?”서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자신감은 즉시 모두 고갈되었다.“제우 게임 회사가 방금 이메일을 보
그동안 많이 참았던 박원근은 허리를 짚고 말했다.“솔직히 계약을 위반하지만 않았으면 우리가 장소월을 좀 기다려줘도 되잖아. 아팠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잖아. 그런데 넌 장소월에게 말도 안 하고 마음대로 임무를 이어서 완성하고 미리 제출했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뭐가 있어? 칭찬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어, 아니면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어? 이 며칠 동안 서현이의 한 마디 때문에 모든 직원이 야근하고 있어. 최산 씨는 병이 나서 입원까지 했어. 너도 제우 게임 회사가 우리에게 준 시간이 충분해서 전혀 야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잖아?”그러자 서현이 코웃음을 쳤다.“그럼 네 말뜻은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난 그저 팀원들이 얼른 원고를 마치고 한 동안 휴식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야! 네가 장소월의 환심을 사려는 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내가 장소월을 질투한다고? 내가 걔를 질투할 게 뭐가 있는데? 난 늘 공사구분을 잘 했어. 장소월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상사의 말을 안 듣는 걸로 뭐라고 하거나 무시한 적 없어. 교수님께서 스튜디오를 나에게 맡기셨으니 책임을 다 할 뿐이야. 만약 네가 보기에 내가 틀렸다면 나도 할 말이 없어.”주시윤은 서현 곁으로 가서 그녀를 위로했다.“화내지 마. 원근이는 장소월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려서 그래.”박원근이 말했다.“서현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 거야. 허 교수님이 스튜디오를 서현이에게 맡기실 때 뭐라고 말씀했는지 잊지 마. 우린 몇 년 동안 같은 팀에서 일했고 같은 편이야! 반드시 손잡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서현이의 한 마디 때문에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구분 못하고 바로 우리 팀에서 장소월을 내보내는 건 아니라고 봐!”“박원근!”서현도 화가 나서 그의 이름을 외쳤다.평소에 서현은 팀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고, 장소월을 제외하고는 능력도 가장 좋았다.오늘처럼 화가 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서현의 리더쉽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실 표절하고 유출한 건 서현이 너지...”짝!뺨을 때리는 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장소월이 나오자 전연우는 난폭하게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기성은은 운전석에 앉고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장소월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연우를 바라보았다.“그런 말은 왜 해? 오빠가 아까 한 말이 나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 줄 알아? 난 단 한 번도 오빠의 손을 빌려 뭘 완성하려고 한 적이 없어! 오빠 때문에 우리 사이가 더 나빠질 뿐이야. 전연우! 언제쯤이면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 있어?”전연우는 넥타이를 풀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 말했어?”장소월은 그를 노려보았다.전연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장소월은 즉시 시선을 거두었다.“네가 지난 4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했는데, 결국 예전과 똑같이 멍청할 줄이야. 남한테 괴롭힘 당하고도 아무 말도 안해? 나한테 소리치던 성질은 다 어디 간 거야? 누가 봐도 따돌리는 건데 넌 눈이 먼 거야, 아님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이번 일은... 내가 대신 처리할 테니까 넌 호텔에 가만히 있어. 어디도 가지 마. 또 오늘처럼 도망쳤다가는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장소월은 겁이 나서 몸을 떨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전생에 그녀는 전연우의 새장에 갇힌 새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가 없을 때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치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거리에서 변태에게 붙잡혀 하마터면 나쁜 일을 당할 뻔했었는데 마침 전연우가 파티를 참석하러 가다가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 주었다.그날 무슨 일인지 전연우는 화를 내며 장소월을 방 안에 가두고 사흘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았다. 하인이 제 때에 그녀가 방 안에서 쓰러진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전연우가 돌아왔을 때 말라 죽어가는 시체를 봤을 것이다.그때의 전연우는 집에 거의 있지 않았다.소유욕이 극도로 강했던 그는 절대 다른 사람의 터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소유물이라도 그가 얻지 못하는 것이라면 망가뜨려야 했다.그리고 이번
자신더러 그의 애인을 하라니, 이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어이없어 보이진 않는가?“내가 죽어도 이번 생에... 오빠랑 만나는 일은 없어! 난 오빠 주변의 애매한 관계의 여자들을 혐오하고 오빠가 더럽다고 생각해. 내가 왜 도망쳤는지 정말 몰라? 오빠를 피하려고 그런 거잖아! 이젠 매일 오빠만 보면 역겨워 죽겠어. 오빠 때문에 난 아이를 잃었고 엄마가 될 기회를 잃었어! 나한테 약을 먹이다니, 자궁을 적출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도 아직 부족해? 어떻게 아직도 날 괴롭힐 수 있어? 난 이제 임신도 못 한다고, 전연우!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몇 번이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걸 영원히 잊을 수 없다.그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전연우!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장소월은 차라리 그와 한 번도 엮이지 않는 인생을 선택했을 것이다.“내가 보상해 줄게. 그런데 네가 떠나는 건 절대 용납 못해, 알겠어?!”전연우는 그녀의 뾰족한 턱을 잡고 말했다.“받아들이지 못해도 견뎌.”장소월은 그의 손을 잡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만약 계속 나를 가둬두려는 거면 차라리 날 죽여. 오빠 곁에 있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아.”“죽겠다고? 죽는 것도 사치라고 느끼게 해줄게!”전연우는 장소월의 목을 졸랐고 그녀는 고통스러워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차 안의 칸막이를 치는 버튼을 눌러 개인공간을 만들었다.“미쳤어? 이거 놔!”“싫어!”넓은 좌석에 장소월은 그에게 몸이 짓눌리고 옷이 찢겨 나가서 흰 피부를 드러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던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사냥감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눈가에는 소유욕이 가득했다...전연우의 비서 앞에서 장소월은 자존심이 발밑에 짓밟히면서 무모한 모욕을 당했다.호텔 로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남자가 품에 예쁘지만 생기가 전혀 없는 여인을 안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에 양복만
“내가 아침 식사는 좀 늦게 보내라고 말해둘게.”전연우는 그녀가 이미 깨어난 걸 모르진 않았지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잘 지켜보고 있어.”경호원이 대답했다.“네.”전연우는 떠나면서 여전히 경호원더러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아침 8시에 종업원이 아침 메뉴를 밀고 와서 호텔 방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전 대표님께서 부탁하신 아침 식사가 왔습니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안에서 장소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지 말고 나가요!”종업원이 난감해하면서 말했다.“하지만 전 대표님께서 저더러 직접 아가씨가 아침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라고 하셨어요.”장소월의 눈가는 살짝 빨갰고 침대에 앉아 귀를 틀어막고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방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밖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호텔 방 밖에서 사람이 말하는 소리 외에 침대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윙윙 진동하는 소리도 있었다.박원근은 몇 번이나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받지 않았다.“교수님, 소월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지금껏 많은 풍파를 겪어봤던 허태현은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양쪽 구레나룻에 흰머리가 자랐고 눈도 움푹 파여 들어갔다.사무실에 허태현과 박원근 외에 서현도 있었다.허태현이 손으로 주먹을 반쯤 쥐고 기침을 하자 서현은 바로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그러자 허태현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표절은 심각한 일인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소월이를 자르려고 했어? 언제부터 그렇게 막무가내가 된 거야?”물잔을 들고 있는 서현의 손이 흔들려 하마터면 물을 쏟을 뻔했다. 그래도 다행히 테이블 위에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서현은 허태현의 사무실 테이블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제우 게임 회사에서 낸 표절 관련 공지였습니다. 장소월의 원고와 매우 흡사했고요. 저는
전연우는 제우 게임 회사를 중시하지 않았었는데 장소월 때문에 갑자기 회사에 나오자 직원들은 마치 큰 적을 만난 듯 긴장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으니 사건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기성은은 제우 게임 회사 현재의 책임자 케빈과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장소월 디자인팀의 직원을 찾았다.기성은이 말했다.“아가씨의 표절 사건은 홍보팀에서 이미 사람을 시켜 철회하도록 했습니다.”“대표님?”기성은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전연우를 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했다.그들이 프랑스에 온 뒤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장소월에게 썼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이 전부 흐트러졌다.전연우는 호텔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호텔 매니저는 말을 더듬거렸다.“전 대표님, 소월 아가씨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직원이 걱정돼서 방에 찾아갔을 때 아가씨가 옷방에서 쓰러져 계셨다고 합니다.”전연우는 갑자기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었다.“지금은 어때?”호텔 매니저가 말했다.“아가씨는 이미 깨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려고 합니다.”전연우는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오늘 안에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 와. 난 호텔에 다녀올게.”그러자 기성은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오후 한 시에 아주 중요한 파티가 있습니다.”“취소해.”전연우는 세 글자만 남기고 걸어 나갔다. 기성은 혼자 남아서 장소월이 저지른 일을 해결해야 했다.소피아 호텔에서.장소월은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주치의는 그녀의 몸을 검사하면서 물었다.“아가씨, 평소에 어디 자주 아픈 데 있었습니까? 아니면 병원에 가서 몸을 검사한 적은 있으셨어요? 제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아가씨 몸 상태는 아주 엉망입니다.”그는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만약 아가씨께서 저를 믿으신다면 이 병원에
“나도 갈 거야. 나도 그 나쁜 놈한테 잡혀가기 싫어. 소월이랑 강용이 어디를 가든, 현아도 함께 따라갈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겉으로는 즐겁고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장소월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찍혀버렸으니, 분명 헤쳐나가기 힘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어쩌면...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죽을 때까지 전연우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연우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장소월은 떠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정말이지 서울이라는 감옥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곳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강용이 대답했다. “있어. 이미 연락했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자. 내일 친구가 헬리콥터 보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여기에 친구가 있다고?” 강용은 바닥에 앉아 다리 한쪽을 세우고 손을 머리 뒤에 받힌 채 산야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 그 무리에게 쫓겨 이곳까지 흘러오게 됐는데, 그러다 조난당한 사람을 만났어. 큰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어서 내가 구해줬어. 나중에 그 사람도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어. 그렇게 우정을 쌓아갔지.” “어젯밤 내가 물어봤는데, 늦어도 내일은 도착한다고 하더라고. 빠르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도 있어.” 장소월은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다니. 결국 우리가 너한테 민폐를 끼쳤네.” “강용,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가 잘못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줄기 빛이 얼굴에 쏟아지자 그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정처 없이,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 뭐.”“이게 네가 원했던 자유로운 삶 아니야?” 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자유로움 뒤에는 늘 외로움이 동반하는 법이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
결코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강용, 그만해.” “대체 누가 우리 위치 폭로한 거지? 바보야, 혹시 누구한테 메시지 보냈어?” 강용의 추궁에 소현아는 즉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민아가 물어봤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단 말이야.” “소월이 말대로 핸드폰 유심칩도 이미 버렸어.” “아빠 엄마 전화번호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적어놨어.”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군지 알 것 같아.”“서철용일 거야. 그 사람 말고는 내가 있는 곳 아는 사람 없어. 신분증도 모두 그 사람 도움으로 만든 거잖아. 진작에 예상했어야 했어. 서철용은 전연우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나 찾지 못했을 거야.” “전에 네가 말했던 그 의사 말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네가 말했지, 전연우 외에 또 다른 무리가 너 쫓았었다고. 나 이제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 정리가 거의 끝나가자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무리가 강지훈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못마땅한 듯 삐딱한 태도로 소현아에게 말했다. “야, 바보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소현아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강용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강용.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소월이 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너인데,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너 괴롭히게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시킨 거 아니야. 강지훈은 정말 나쁜 놈이야... 전에 쇠사슬로 사람을 때리는 거 봤는데, 배 속에 있는 창자까지 다 드러나고 바닥엔 피가 흥건했어.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악몽 꾸고, 무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강용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푹 널브러지고는 소현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대단해!”“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현아, 내가 어쩌다 널 만났을까. 우리 강씨 가문이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