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는 제우 게임 회사를 중시하지 않았었는데 장소월 때문에 갑자기 회사에 나오자 직원들은 마치 큰 적을 만난 듯 긴장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으니 사건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기성은은 제우 게임 회사 현재의 책임자 케빈과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장소월 디자인팀의 직원을 찾았다.기성은이 말했다.“아가씨의 표절 사건은 홍보팀에서 이미 사람을 시켜 철회하도록 했습니다.”“대표님?”기성은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전연우를 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했다.그들이 프랑스에 온 뒤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장소월에게 썼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이 전부 흐트러졌다.전연우는 호텔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호텔 매니저는 말을 더듬거렸다.“전 대표님, 소월 아가씨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직원이 걱정돼서 방에 찾아갔을 때 아가씨가 옷방에서 쓰러져 계셨다고 합니다.”전연우는 갑자기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었다.“지금은 어때?”호텔 매니저가 말했다.“아가씨는 이미 깨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려고 합니다.”전연우는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오늘 안에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 와. 난 호텔에 다녀올게.”그러자 기성은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오후 한 시에 아주 중요한 파티가 있습니다.”“취소해.”전연우는 세 글자만 남기고 걸어 나갔다. 기성은 혼자 남아서 장소월이 저지른 일을 해결해야 했다.소피아 호텔에서.장소월은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주치의는 그녀의 몸을 검사하면서 물었다.“아가씨, 평소에 어디 자주 아픈 데 있었습니까? 아니면 병원에 가서 몸을 검사한 적은 있으셨어요? 제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아가씨 몸 상태는 아주 엉망입니다.”그는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만약 아가씨께서 저를 믿으신다면 이 병원에
이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장소월 씨, 두개골 쪽에서 종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보기에 악성은 같지 않은데 그래도 한동안 약을 드시는 걸 건의드립니다. 이 종양이 사라지는지 한번 봅시다. 3개월 지나면 다시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세요. 만약 종양이 점점 커진다면 수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의료 기술로는 치료를 일찍 시작하면 수술이 성공할 가능성도 큽니다.”사실 오늘이 마침 3개월째 되는 날이라 다시 검사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며칠 전 전연우가 그녀를 찾은 날에 장소월은 이미 그녀의 주치의에게서 답을 들었다.그녀의 뇌종양은 이미 점점 악화하고 있었고 암세포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보아하니... 여전히 전생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똑같은 삶을 다시 반복하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마자막에 장소월은 결국 전연우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데, 그렇다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코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 장소월은 약을 들고 얼른 몇 알을 집어삼킨 후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욕실로 갔다...전연우가 도착했을 때 장소월은 마침 바닥에 흘린 피를 닦고 있었다.“3까지 셀게. 문 열어. 아니면 알아서 해. 장소월, 문 열어!”장소월은 전연우가 이토록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에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문 앞에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그의 신분이 그렇게 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면을 잃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전연우가 문을 밀치려고 할 때 장소월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그의 성격에 만약 장소월이 계속 문을 열지 않으면 전연우는 바로 문을 차서 열 수도 있다.이미 피할 수도 없고 시간도 얼마 없기 때문에 차라리 받아들이는 게 마음이 훨씬 편했다.문밖에서 전연우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문을 쾅 닫아 버렸다.아픈 그녀의 모습을 보니 꾀병을 부리는 것 같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전연우는 그녀를 살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를 보는 순간 화가 가라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장소월의 표정이 냉담해서 전연우는 보자마자 그녀의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전연우는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것이다.장소월은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랐다. 전연우가 지난밤에 그녀의 몸에 남긴 흔적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백설같이 흰 피부에 아직도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연우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안고 한 팔로 그녀를 들어 올려 테이블 위에 앉혔다.“나한테 화풀이하려고 네 몸을 힘들게 하지 마. 난 네가 그러는 거 싫어. 알겠어?”부드러운 어조에 그렇지 않은 차가운 눈빛, 하지만 전생에 장소월을 대하는 전연우의 태도에 비하면 이번엔 많이 온화해진 듯했다.그는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눈을 피하려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뭐 먹고 싶어? 준비하라고 할게.”장소월은 힘이 없어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담담하게 한마디만 뱉었다.“다 괜찮아.”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옮겨 흰색 침대 시트로 향했다.“착하지.”전연우는 칭찬하는 의미로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그리고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해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다.30분도 안 되어서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갖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가지 요리와 디저트를 전부 테이블로 옮겼다.“소월 씨, 맛있게 드세요!”전연우는 통유리창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담배는 빨간빛을 내면서 연기를 뿜어냈고 방 안에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장소월은 입을 가리고 몇 번 기침했다. 전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소월을 돌아보더니 바로 담뱃불을 껐다.몇 마디를 한 후 전연우는 전화를 끄고 장소월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전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살펴보았다.“표절 사건은 기 비서가 해결했어. 네가 말만 잘 들으면 회사에 출근
“영수야, 그러지 마...”손을 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꽉 쥐어졌다.전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악몽을 꾸고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입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가지 마...”“싫어!”장소월은 악몽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강영수는 수척해진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겨우 숨을 쉬고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있었다. 장소월은 병실에 쳐들어가서 의사를 찾고 싶었지만 병원 전체를 뛰어다녔지만 텅 비어 있고 한 사람도 없었다.그러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강영수는 자신이 곧 죽는다고 말하면서 그녀와 작별 인사하러 왔다고 했다. 심장이 저릿해 나는 게 꼭 현실 같았다.장소월은 그를 잡고 싶었지만 아무리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강영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남았던 한 줄기 빛마저 사라지고 장소월도 점차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전연우의 표정은 마치 폭풍우 전의 고요함 속에서 살랑살랑 부는 찬 바람 같이 냉랭하고 어두웠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와서 깨어났는데 옆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숨을 참으며 손으로 침대를 바치고 벌떡 일어났다. 손에 쥐여 있던 책장은 찢겨 나갔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를 보고 장소월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눈빛은 그녀로 하여금 겁이 나 떨게 했다.그러나 전연우 눈가의 냉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장소월은 마치 자신이 방금 헛것을 본 줄 알았다.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흘러내린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악몽 꿨어?”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고 곁눈질로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화장실 가서 세수해야겠어.”“그래.”전연우는 아무 감정도 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소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걸어갔다. 수도꼭지를 틀고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자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방금 꿨던 꿈을 돌이켜보니 왜 그렇게 현실적이었는
장소월은 하루 종일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하지만 그런데도 전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소월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다.해먹 소파는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장소월은 뒤에서 걸어오는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장소월은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나 혼자 있고 싶어.”전연우는 정장을 벗고 검은 셔츠만 입고 있었다.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건장하고 힘 있는 팔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녀의 흰 피부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시각적으로 힘 차이가 크게 나는 듯 보였다. 장소월의 힘없어 보이는 가녀린 팔은 그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이런 연약한 모습은 남자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전연우는 고개를 떨구고 장소월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만지다가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가 오늘 몸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전연우는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욕망으로 인해 여기에서 바로 그녀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기 때문에 전연우는 욕망을 억눌렀다.“오늘 기 비서더러 파티에 등장하는 액세서리들을 전부 사라고 했어. 있다가 가지고 올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주는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만약 정말로 가지면 두 사람이 스폰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 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애인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장소월은 그에게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전연우는 그녀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안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난 앞으로 몇 년 동안 유럽에 사업 중점을 둘 생각이야. 그래서 당분간 돌아갈 계획이 없는데, 넌 어디 가고 싶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자. 난 여기도 좋은데, 넌 어때? 마침 네 명의로 된 방을 구매할 계획이었어. 네가 전에 있던 곳은 기 비서더러 퇴실 처리하라고 했어.”장소월은 당황해했고 화도 난 듯했다.“오빠는 왜 항상 제멋
그녀의 아버지는 장소월이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전연우를 후계자로 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후계자가 있으니 장소월을 완전히 포기했다.전연우는 송시아의 도움으로 성세 그룹을 손에 쥐게 되었다.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는데, 오직 장소월만이 도망치지도, 피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돌아간다고 해도 곁에 아무 가족도 없고 혼자다.가슴이 막막하고, 답답했으며 괴롭고 질식할 것 같았다...장소월은 자신도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뒤돌아보면 집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면 했다.전연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을 때리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그는 이미 장씨 가문을 충분히 봐줬고 언제든지 원하면 장해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십여 년을 견뎌왔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연우는 여유로운 듯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오빠는 소월이가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그냥 오빠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장소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왔다.전연우는 아주 쉽게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번생엔 그의 새장에 갇혀지내야 했다.“오빠가 이렇게 하면 4년 전에 오빠가 나에게 했던 짓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오빠가 나한테 한 짓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난 오빠의 소유물이 아니야. 그리고 절대 오빠에게 의지하지도 않을 거야.”전연우... 송시아가 다시 태어나서도 말 안 했지? 전생에 당신은 날 죽도록 싫어했어. 심지어 나한테 눈길 한번도 주지 않았지. 그리고... 매번 날 힘들게 했고.나를 발밑에 짓밟고,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하찮게 생각했었지.이번 생에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모두 부드러운 함정 같은 거야. 날 그 깊은 심연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겠지.“전연우... 모든 게 곧 끝날 거야.”그러나
“그거 말고 너한테 또 무슨 얘기를 했어?”장소월은 거울 속에 비친 전연우를 보며 그의 표정을 통해 마음에 찔려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그는 포커페이스에 능숙하여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시아가 장소월을 찾았을 때 이미 자신도 환생했다고 고백했다.송시아의 성격 상 전연우에게 모든 것을 말했을 게 뻔했다. 그에게 전생에 그가 어떻게 장소월을 포기하고, 어떻게 비밀리에 일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시아와 함께 했는지 말이다.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전연우는 전생처럼 이 이유만으로도 그녀와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다.“내가 뭘 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장소월은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백윤서와 송시아만이 오빠 마음속에서 중요한 존재야. 오빠는 그 두 사람만 신경 쓰면 돼. 나한테 이러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야. 난 사흘 뒤에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이미 예약했어.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오빠가 날 지켜보는 것도 소용없어. 내 집이 사라졌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 혼자여도 괜찮아. 지금의 난 스스로도 모든 걸 할 수 있어. 누구한테 의지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전연우,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장씨 가문을 벗어났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 마.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여기서 끝인지 아닌지는 네가 정할 게 아니야.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냥 견뎌야 해. 네가 떠나고 싶어도 결정권은 나한테 있어.”전연우는 장소월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돌아세웠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협박했다.“제운으로 돌아가서 다시 강영수랑 만날 망상은 하지 마. 지금의 강씨 가문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소월이 착하지? 오빠 말 잘 들어.”장소월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전연우, 영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고 악마 같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
그들 사이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예정된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는 장소월의 신분도 마찬가지였다.그 후 보름 동안 장소월은 송시아를 보지 못했고 그녀는... 이미 프랑스를 떠난 것 같았다.장소월은 결국 어머니의 기일도 놓쳤다.이 기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장소월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숨겼다. 어젯밤 전연우는 또 밤새도록 그녀를 원했고 깨어났을 때 창 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전연우가 그녀를 돌보기 위해 고용한 하인도 그녀를 안타까워했다.장소월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마리아는 가디건을 가져다가 장소월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오늘 호텔에서 분수쇼가 있으니 꼭 보러 가세요. 방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면 병에 걸릴 거예요.”장소월은 기운 없이 어두운 밤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팠어요. 마리아, 돌아가셔도 돼요.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요.”“하지만 전 대표님은 제가 당신을 돌봐주길 원해요.”“괜찮아요. 당신을 탓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날 좀 내버려둬요.”“알았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요. 언제든지 연락 주면 올게요.”마리아가 떠난 후 장소월은 불이 켜지지 않은 발코니 소파에 앉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어둠 속에서 장소월은 환각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는데... 엄마, 나중에 죽으면 나도 별이 될까요?”“소월아, 사람이 죽으면 바람도 될 수 있고 햇빛도 될 수 있는 거란다... 마음으로 원하면 그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지금처럼 소월이가 마음속으로 엄마를 그리워할 때면 엄마는 네 곁에 나타날 거야.”“만약 언젠가... 내가 못 버티면 엄마는 날 원망할 거예요?”“너에겐 자유가 있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전연우는 파티에서 돌아와 술냄새가 몸에 배어 있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코니쪽으로 걸어가자 밖에 홀로 앉아 허공을 바라보
“나도 갈 거야. 나도 그 나쁜 놈한테 잡혀가기 싫어. 소월이랑 강용이 어디를 가든, 현아도 함께 따라갈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겉으로는 즐겁고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장소월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찍혀버렸으니, 분명 헤쳐나가기 힘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어쩌면...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죽을 때까지 전연우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연우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장소월은 떠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정말이지 서울이라는 감옥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곳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강용이 대답했다. “있어. 이미 연락했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자. 내일 친구가 헬리콥터 보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여기에 친구가 있다고?” 강용은 바닥에 앉아 다리 한쪽을 세우고 손을 머리 뒤에 받힌 채 산야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 그 무리에게 쫓겨 이곳까지 흘러오게 됐는데, 그러다 조난당한 사람을 만났어. 큰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어서 내가 구해줬어. 나중에 그 사람도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어. 그렇게 우정을 쌓아갔지.” “어젯밤 내가 물어봤는데, 늦어도 내일은 도착한다고 하더라고. 빠르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도 있어.” 장소월은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다니. 결국 우리가 너한테 민폐를 끼쳤네.” “강용,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가 잘못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줄기 빛이 얼굴에 쏟아지자 그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정처 없이,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 뭐.”“이게 네가 원했던 자유로운 삶 아니야?” 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자유로움 뒤에는 늘 외로움이 동반하는 법이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
결코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강용, 그만해.” “대체 누가 우리 위치 폭로한 거지? 바보야, 혹시 누구한테 메시지 보냈어?” 강용의 추궁에 소현아는 즉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민아가 물어봤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단 말이야.” “소월이 말대로 핸드폰 유심칩도 이미 버렸어.” “아빠 엄마 전화번호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적어놨어.”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군지 알 것 같아.”“서철용일 거야. 그 사람 말고는 내가 있는 곳 아는 사람 없어. 신분증도 모두 그 사람 도움으로 만든 거잖아. 진작에 예상했어야 했어. 서철용은 전연우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나 찾지 못했을 거야.” “전에 네가 말했던 그 의사 말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네가 말했지, 전연우 외에 또 다른 무리가 너 쫓았었다고. 나 이제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 정리가 거의 끝나가자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무리가 강지훈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못마땅한 듯 삐딱한 태도로 소현아에게 말했다. “야, 바보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소현아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강용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강용.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소월이 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너인데,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너 괴롭히게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시킨 거 아니야. 강지훈은 정말 나쁜 놈이야... 전에 쇠사슬로 사람을 때리는 거 봤는데, 배 속에 있는 창자까지 다 드러나고 바닥엔 피가 흥건했어.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악몽 꾸고, 무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강용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푹 널브러지고는 소현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대단해!”“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현아, 내가 어쩌다 널 만났을까. 우리 강씨 가문이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