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날이 저물 때까지 자고 있던 장소월은 책을 넘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녀의 침대 옆에 강영수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고 목의 푸른 문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부드러운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떨어졌다.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전연우의 얼굴이 보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라 손을 짚고 일어나 거리를 두었고, 그의 얼굴을 완전히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강영수는 책을 덮고 말했다.“미안, 시끄러웠지?”장소월은 벌렁이는 가슴을 안고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아니야, 방금 악몽을 꿨어.”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이불을 껴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왜 여기 왔어?”“방금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통하더라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들어왔는데 자고 있어서, 잠시 보다가 가려고 했어.”장소월은 그의 다리 위에 똑같이 덮인 이불을 보았고, 강영수는 덤덤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그녀가 오해할까 봐 설명했다.“추워서, 담요를 못 찾았거든...”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듯 다가가 말했다.“또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거야? 내가 좀 주물러줄까?”강영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붙어 있으면 따뜻해서 안 아파.”장소월이 이번에 느낀 심장 박동은 놀라움이 아니라 두근거림이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손을 뻗어 머뭇거리다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것도 동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장해진 쪽에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번 한 번만.그의 다리 위에 놓인 책을 보며 물었다.“이 책 재밌어?”“그럭저럭, 소련 전쟁 시기 사랑 이야기인데 들어볼래?”“응, 듣고 밥 먹으러 갈래.”밤하늘의 달빛이 내리쬐고 은빛 빛이 어두운 방에 녹아들어 유리를 통해 창문 앞에 떨어졌다.따뜻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방에서 울려 퍼졌고, 남자는 여자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참으로 아늑한 모습이었다...같은 시각. 서울.백윤서는 상인들의 모임 규칙에 익숙하지 않고 술을 마실 줄도 몰랐기 때문에 혼자 조용
“안돼, 안돼...”백윤서는 힘껏 몸부림쳤다.“순진한 척하지 마, 애기야.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이 오빠가 느끼게 해줄게.”“연우 오빠... 살려줘! 연우 오빠!”백윤서는 몸을 뒤틀며 연회장에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누군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누군가 들어와서 전연우의 시야를 가렸다.인시윤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백윤서는 절망적이었고, 입이 가려진 채로 물속에 끌려 들어갔다.그녀는 남자의 물건이 자신의 부드러운 곳에 닿는 것을 느꼈고, 황준엽은 흥분하며 성공을 예감했을 때, 여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백윤서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이 답답하여 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황준엽이 손을 놓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마치 물에 빠진 물고기처럼 조금도 허우적대지 않고 수영장으로 가라앉았다.‘젠장, 이 여자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야?’너무 놀란 황준엽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여자가 죽을까 봐 서둘러 도망쳤다. 하지만 그녀는 올라오지 않았고, 위에 둥둥 떠 있는 긴 머리카락만 보였다.전연우는 디저트 코너를 바라보았지만 백윤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눈빛이 차가워졌다.인시윤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에 든 샴페인을 흔들었다.“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소개해줬고 덕분에 큰 프로젝트까지 따냈는데, 저한테 어떻게 감사할 생각이에요?”전연우가 백윤서를 찾던 중 갑자기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악! 누가... 누가 사고를 당했어요!”전연우는 사라진 백윤서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술잔을 내려놓고 곧바로 뛰쳐나갔다.수영장 옆에서 여러 명이 함께 물에 빠진 백윤서를 구했다.전연우는 양복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모두 옆으로 물러섰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윤서야, 윤서야!”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구급차,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네, 알겠어요.”곧 수영장 옆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였다.
추워서 벌벌 떨며 얼굴에 핏기가 없는 백윤서를 바라보며, 전연우는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괜찮아, 이제 괜찮아.”“오빠, 너무 아파요. 연우 오빠.”“약 어딨어?”백윤서는 숨이 막힐 것 같았고,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가방, 가방에.”전연우는 서둘러 백윤서를 소파에 앉혔고, 하인은 백윤서의 가방을 가져왔다.남자는 가방을 열고 안에 든 약을 찾아 백윤서에게 두 알 먹였다.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백윤서는 약을 먹고 난 후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마침 구급차가 도착했고, 전연우가 백윤서를 안아 들자, 인시윤이 나섰다.“저도 같이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요.”전연우가 그녀를 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구급차에서 백윤서는 줄곧 전연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연우 오빠, 무서워요.”“괜찮아. 이제 괜찮아. 다 나으면 다시 얘기해.”전연우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사실을 알게 된 장해진은 크게 화를 냈다.인시윤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방 안의 물건들을 모두 박살 냈고, 바닥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하인들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나쁜 놈, 감히 나를 그렇게 대해? 내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번 파티에 올 자격도 없었다고! 고작 백윤서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내?”“내가 백윤서를 물에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 꼴을 보이냐고! 전연우! 미치겠네 정말!”하인 중 한 명이 다가가 위로하듯 말했다.“아가씨, 이런 일로 화내실 필요 없으세요. 사모님께서 분명히 잘 조사하실 겁니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네, 아가씨. 그분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잠시 말이 심하게 나왔을 거예요!”인정아가 밖에서 들어와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고작 남자 때문에 이 난리를 쳤어? 시윤아, 너 전에는 이런 애 아니였잖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거야?”인시윤은 서둘러 물었다.“엄마, 조사한 건 어떻게 됐어요? 누가 밀었어
월요일, 장소월은 지각하지 않고 아침 자율 학습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했다.교실에 도착했지만, 인시윤과 백윤서가 보이지 않았다.아침 자율 학습에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전 내내 백윤서가 보이지 않았다.‘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장소월은 백윤서가 사고를 당한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이미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점심에 소현아와 점심을 먹으며 식당에서 백윤서에 관해 물었다.소현아: “나도 너희 반 애들한테 들었는데 윤서 입원했대. 인씨네 집에서 실수로 수영장에 빠졌다고 하던데? 참, 나 오늘 강용도 못 봤어. 지난주 금요일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았어.”장소월은 담담하게 식사를 했다.“내 임무는 이미 완성했어. 서울대에 갈만한 성적을 받았으니, 퇴학한다고 해도 이제 나랑 상관없어. 그런데 넌 왜 강용에게 관심을 가져?”소현아는 고개를 숙였다.“너희 전엔 좋은 친구였잖아...”강용은 보나 마나 데이트를 하러 갔을 것이고, 백윤서가 수영장에 빠진 건, 과연 진짜 사고일까?장소월은 이 일이 절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소월아, 걱정되면 내가 병원에 같이 가줄까?”장소월은 소현아를 바라보았다.‘현아를 데리고 간다고? 그래. 현아가 있으면 전연우 그 인간도 나한테 허튼짓 못하겠지!’백윤서는 장가에서 십여 년을 살았다. 가문의 호적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확실히 장소월은 가야 하는 것이 맞다.“그래, 그럼 수고해줘.”“수고는 무슨. 우린 친구잖아! 네가 날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이 정도 일이야 당연히 도와야지.”소현아는 가방을 집어 들고 지퍼를 열며 말했다.“참, 소월아. 넌 내가 학교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야. 엄마 아빠가 너한테 주라고 챙겨줬어.그리고 가방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꺼내며 말했다.“이건 인삼, 녹용, 그리고 이 사프란... 전부 우리 집에서 직접 키운 거야.”“이렇게 비싼 물건은 받을 수 없어.”어쩐지 오늘 소현아의 가방이 불룩 튀어 나왔더라니!“아니야, 안 비싸
소현아는 장소월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명 내가 말해줬는데?’오 아주머니는 그들의 손에 있는 물건을 받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강한 그룹에서 회의를 하던 강영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고, 진봉은 말없이 에어컨 온도를 높였다.‘바닷바람을 쐬고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는데.’백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학교에서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지?”“전 금방 해성에서 돌아왔어요. 윤서 언니 별일 없으면 됐어요.”오 아주머니: “점심밥 드셨어요? 제가 뭐 좀 사 올까요?”장소월은 서둘러 말했다.“아녜요. 오기 전에 먹고 왔어요.”전연우는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고, 오 아주머니도 의자를 하나 가져왔다.“여기 앉으세요. 서 있기 힘들죠.”소현아: “괜찮아요. 안 힘들어요.”“윤서 언니 괜찮으면 됐어요. 저도 곧 학교로 돌아갈 거예요.”전연우: “마침 나도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데려다줄게.”장소월은 당연히 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우리 택시 타고 가면 돼.”“여기 오느라 돈도 많이 썼는데 연우 오빠가 너희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도 당연해. 소월아... 거절하지 말아줘.”백윤서가 이렇게 말하니 장소월도 거절할 도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세 사람은 오래 있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전연우는 조수석 문을 열었고 그의 뜻은 분명했다.“나랑 현아는 뒷좌석에 같이 앉으면 돼.”“내가 직접 앉혀줘?”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말투였다.소현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 입을 열었다.“괜찮아, 소월아. 나 혼자 앉아도 돼. 너 앞에 앉아.”소현아는 스스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가는 내내 차 안의 분위기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전연우가 풍기는 기운은 바깥 날씨처럼 차갑고 살을 에는 듯했다.장소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 백윤서를 해치려 했기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났을 것이다.학교 문 앞에 도착하고, 장소월은 바
차는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도착했다. 주위는 산들로 이어져 있는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오는 길에 카메라 한 대도 없고, 차도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추자 장소월은 안전벨트를 잡고 몸을 움츠렸다.“뭐 하려는 거야?”남자의 하얀 손가락은 핸들에 살짝 걸치고 있었다.“윤서 언니 일은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백윤서이니, 장소월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설명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몸을 숙이더니 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읍!”장소월은 가볍게 소리를 내고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교복도 그에 의해 헝클어지고 말았다.단추가 열리는 것을 느낀 그녀는 힘껏 그를 밀어내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에 뺨을 한 대 때렸다. 입고 있는 옷을 꽉 움켜쥐고 속눈썹에 영롱한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했다.“전연우. 제발 이러지 마! 윤서 언니랑 사귀고 있잖아!”전연우의 눈빛은 너무 어둡고 깊어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입꼬리를 올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 입가의 액체를 닦아주었다.“그게 뭐 어때서? 너도 좋아하잖아? 네 몸이 반응하고 있어. 대체 뭐가 무서운 거야? 소월이는 오빠를 가장 좋아하잖아.”“난... 아니야!”장소월은 시선을 돌리며 그의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 했다.“거짓말.”전연우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만지지 마!”여자의 체향을 맡았지만 예전의 달콤한 향기는 사라지고 다른 남자의 차가운 냄새만 가득했다.남자의 눈에는 온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강한 소유욕만 타올랐다.그의 손이 치마 안으로 들어가 얇은 옷감을 헤치고, 거친 손바닥이 민감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장소월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내가 영수한테 말할까 봐 겁나지도 않아?”강영수라는 이름을 듣고, 남자는 동작을 멈추었다.장소월은 여전히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고 흐느꼈다.“대체 왜... 전에는
백윤서를 제외하고 그는 거의 아무런 약점이 없었다.하지만 이런 이유로 백윤서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전연우와 백윤서가 사귀게 된 것은 장소월이 예상했던 일이다.만약 백윤서가 없었다면 전연우는 반드시 인시윤과 사귀었을 것이고, 그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것이다.그의 수단은 늘 다른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다.“언제부터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알았지? 응?”전연우는 아무 감정 없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눈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가 이런 모습일수록 전연우는 더 더럽히고 싶었고,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혀 죽도록 울리고 싶었다.이런 더러운 마음은 그의 꿈에 종종 나타나곤 했다.하지만 아직은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지금 전연우의 마음은 마치 하수구에 있는 도랑에서 뒤틀리는 구더기 같았다. 장미꽃 가지 위로 조금씩 기어올라 그 꽃잎을 천천히 먹어 자신의 일부로 만들려 했다.“소월아, 잊지 마.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전연우의 갑작스러운 부드러운 행동에 장소월은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강영수... 진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어? 왜 여전히 이렇게 순진해?”장소월은 단번에 반박했다.“영수는 날 해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으니까. 너만 계속 나한테 상처를 주고 있어. 내가 수술을 했을 때, 영수는 내가 아이를 못 가져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어. 나와 결혼하는 날을 기다린다고 했어.”“그래서 흔들렸어?”“맞아!”장소월은 그를 바라보며 목소리가 떨려왔다.“지금 상황을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난 어떤 처지에 이를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영수는 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한테 흔들리는 건 당연하잖아? 적어도 영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지 않아!”“넌 절대 영수랑 비교가 안 돼!”만약 전연우가 오늘 정말 여기서 그녀에게 무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녀는 높은
장소월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소현아는 주위를 돌려본 후에야 장소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강용이 6반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설채윤도 함께 갔어.”이 소식을 들은 장소월은 담담했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강용의 일은 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돼. 나 화장실 갔다 올게.”...“이건 왜 찾는 건데? 아무리 찾아도 답은 똑같아.”서철용은 들고 있던 노란 서류 가방을 맞은편 남자 앞에 놓았다.맞은 편 남자의 어두운 안색을 바라보며, 서철용은 더욱 흥이 났다.타인의 고통은 곧 그의 희열이었다.그는 옆에 있는 요염한 옷을 입은 여자를 껴안고 다리를 꼬았다.“네 요구대로 십여 번을 반복 검사했어. 결과는 다 똑같아. 만약 못 믿겠다면 촬영한 영상을 보내줄까?”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입 조심해.”“걱정 마, 나 입 무거워. 전연우, 조심해.”전연우가 떠나고, 옆에 있던 여자가 남자의 품에서 아양을 떨었다.“자기야, 저 사람한테 뭐 준 거야?”서철용은 여인의 귀에 대고 숨 쉬며 따뜻한 온기로 말했다.“비밀!”곧 옆방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서철용을 보더니 안색이 급변하여 옆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더니 급하게 화장실로 갔다.서철용은 옆에 있던 여자를 두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따라나섰다.“자기야, 어디가?”서철용은 대답하지 않았다.배은란은 화장실에 꽤 오래 머물렀다. 지난번, 누군가 그녀의 술에 약을 탔고, 서철용과 관계를 맺었다.그녀는 서철용의 형수였으니,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 관계였다.30분이 지난 후, 배은란은 그가 이미 떠났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하지만 출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남자를 보았다.배은란이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돌려 뛰려 하자, 남자는 빠른 속도로 그녀를 반대편 비상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남자는 그녀의 두 손을 벽에 누르고, 여자의 목덜미에 키스했다.배은란은 꼼짝도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여자... 충고하는데, 당장 내쫓거나 아니면 단체 여행이라도 보내요. 최대한 멀리요. 그 여자가 소월 씨 곁에 있으면, 강지훈이 언젠간 반드시 찾아갈 거예요.”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서철용의 말투에 장소월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잖아요. 전 현아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게다가 현아는 임신까지 했는 걸요.”“뭐, 뭐라고요?” 서철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여자가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어요!”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이미 뱉어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 강지훈이 나한테 피임약을 달라고 했었어요. 소현아에게 먹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만약 약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피임을 하지 못했고 지금 임신까지 했다면, 아이는 90% 확률로 기형아거나 사산아로 태어날 거예요. 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아이를 지우게 해야 해요.”그 소식을 들은 순간 장소월은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휴대폰이 미끄러 떨어졌다.서철용도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소현아가 임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강지훈이 소현아를 러시아에 보낸 건, 뇌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내가 확인해봤는데, 소현아가 맞은 약물은 뇌 속의 어혈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그 아이는 낳으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소현아의 가족 쪽은...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서철용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잔인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강용은 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급히 위층으로 달려갔다. 장소월의 방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는 걸 알
강용은 자신의 자리를 뺏기자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장소월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할게. 너는 좀 쉬어.” 강용은 장소월이 하던 일을 빼앗았다.장소월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손이준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기에, 흔쾌히 그에게 일을 넘겨주기로 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 현아 짠 거 잘 못 먹어.”“알았어.”이제 한가해진 장소월이 강용에게 물었다.“방 청소해 줄까?”강용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대충 치워주면 돼.”“그래.”강용은 성격이 깔끔한 편이라 방 청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현아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장소월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깨웠다. 소현아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장소월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침구 세트를 본 그녀는 잔뜩 신이 난 듯 장소월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고마워, 소월아.”“됐어. 얼른 쉬어. 밥 다 되면 깨워줄게.”소현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약간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월아, 나 방금 엄청 무서운 꿈 꿨어. 강지훈이 내가 몰래 도망친 걸 알고 엄청 화냈어. 날 잡아서 가둬놓고 다시는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더라고.”“소월아, 나 강지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장소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그녀는 이토록 걱정에 잠겨 있는 소현아의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소현아는 만날 때마다 마냥 즐거워만 보였는데... 아무래도 북경 감옥에 있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괜찮아, 현아야. 여긴 강지훈이 없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이 널 붙잡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전화하면 되잖아.”소현아는 걱정스러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몰래 전화 해봤는데, 강지훈이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어. 소월아... 나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너무 무서워.”“강지훈은 항상 날 괴롭히기만 해.”
월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양념을 만들던 장소월은 시커멓게 변해버린 밀가루 반죽을 입에 넣고 있는 월이를 발견했다.“월아, 안 돼!”장소월은 재빨리 뛰쳐나가 월이의 입안에 있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용, 냉장고에 뭐 먹을 거 있나 봐 봐. 배고픈 것 같으니까 뭐라도 좀 줘야겠어.”강용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고 냉장고에서 오이 하나와 삶은 감자 하나를 찾아냈다.강용은 감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운 후 휴지로 감싸서 전해줬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투덜거렸을 텐데, 오늘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여기.”장소월은 감자를 건네받아 월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많이 먹으면 안 돼. 탈 날 수도 있으니까 꼭꼭 씹어 먹어. 조금만 기다리면 밥 먹을 수 있어.”월이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한입 크게 베어 물려고 했지만 그 작은 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입가에 침만 잔뜩 흘리고 말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의 눈에 강용의 얼굴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하얀 밀가루가 들어왔다. 아까 만두피를 밀 때 실수로 묻은 듯했다. 장소월은 손을 뻗었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머리 숙여 봐.”강용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숙였다.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이준은 빨래한 옷을 쾅 하고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그 소리에 소파에 누워 쉬고 있던 소현아까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눈을 떴다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장소월은 강용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며 말했다. “됐어.”“오빠, 오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장소월은 강용에게 말했다. “빨래 너는 거 좀 도와줄 수 있어?”강용은 기분 좋게 걸어가며 말했다.“그렇게 하지, 동생.”강용도 장소월이 곧 생리를 시작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