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이런 일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인식 속에 돈과 지위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찾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장해진도 그렇고 전연우도 그렇고...장소월이 다시 한번 자신의 감정에 용기를 낸 것은, 강영수가 그녀에게 한 번도 얻지 못한 안정감을 줬기 때문이다.장소월이 묻지 않는다고 해서 신경 안 쓴다는 뜻은 아니었다.그저 강영수가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그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만약 강영수도 자신을 배신한다면, 장소월은 아마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물건을 차에 놓고 강영수는 그녀를 데리고 해변으로 갔다.그들은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고, 남자는 때때로 장소월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손깍지를 끼고 산책하는 앞의 사람들을 보며 장소월은 순간 삶이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추워?”“아니.”강영수는 그녀의 코트 단추를 채워줬다.“여기 맘에 들어?”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길을 계속 걷고 있었다.“응, 좋아. 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어. 고마워.”“못 와봤다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수업이 많아서 별로 나가 놀 시간이 없었어. 원래 작년 설 전에 겨울 캠프에 참가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 갔어.”겨울 캠프?강영수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난 겨울 캠프에 강용도 참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네, 이번에 졸업하면 나랑 여행 갈래?”강영수는 그녀가 승낙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거절했다.“아니야. 아버지가 흥취반 수업을 등록해줘서 이번 여름 방학 동안 아주 바쁠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해.”멀지 않은 곳에 검은 캡 모자를 쓴 남자가 손에 고급 카메라를 들고, 타이밍을 맞춰 두 사람의 모습을 여러 장 찍고 있었다. 앞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옆모습은 볼 수 있었다.남자는 잘생긴 옆모습을 갖고 있었고, 손깍지를 낀 옆 사람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아주 잘 어울리
창밖에서 날이 저물 때까지 자고 있던 장소월은 책을 넘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녀의 침대 옆에 강영수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고 목의 푸른 문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부드러운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떨어졌다.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전연우의 얼굴이 보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라 손을 짚고 일어나 거리를 두었고, 그의 얼굴을 완전히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강영수는 책을 덮고 말했다.“미안, 시끄러웠지?”장소월은 벌렁이는 가슴을 안고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아니야, 방금 악몽을 꿨어.”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이불을 껴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왜 여기 왔어?”“방금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통하더라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들어왔는데 자고 있어서, 잠시 보다가 가려고 했어.”장소월은 그의 다리 위에 똑같이 덮인 이불을 보았고, 강영수는 덤덤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그녀가 오해할까 봐 설명했다.“추워서, 담요를 못 찾았거든...”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듯 다가가 말했다.“또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거야? 내가 좀 주물러줄까?”강영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붙어 있으면 따뜻해서 안 아파.”장소월이 이번에 느낀 심장 박동은 놀라움이 아니라 두근거림이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손을 뻗어 머뭇거리다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것도 동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장해진 쪽에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번 한 번만.그의 다리 위에 놓인 책을 보며 물었다.“이 책 재밌어?”“그럭저럭, 소련 전쟁 시기 사랑 이야기인데 들어볼래?”“응, 듣고 밥 먹으러 갈래.”밤하늘의 달빛이 내리쬐고 은빛 빛이 어두운 방에 녹아들어 유리를 통해 창문 앞에 떨어졌다.따뜻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방에서 울려 퍼졌고, 남자는 여자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참으로 아늑한 모습이었다...같은 시각. 서울.백윤서는 상인들의 모임 규칙에 익숙하지 않고 술을 마실 줄도 몰랐기 때문에 혼자 조용
“안돼, 안돼...”백윤서는 힘껏 몸부림쳤다.“순진한 척하지 마, 애기야.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이 오빠가 느끼게 해줄게.”“연우 오빠... 살려줘! 연우 오빠!”백윤서는 몸을 뒤틀며 연회장에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누군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누군가 들어와서 전연우의 시야를 가렸다.인시윤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백윤서는 절망적이었고, 입이 가려진 채로 물속에 끌려 들어갔다.그녀는 남자의 물건이 자신의 부드러운 곳에 닿는 것을 느꼈고, 황준엽은 흥분하며 성공을 예감했을 때, 여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백윤서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이 답답하여 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황준엽이 손을 놓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마치 물에 빠진 물고기처럼 조금도 허우적대지 않고 수영장으로 가라앉았다.‘젠장, 이 여자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야?’너무 놀란 황준엽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여자가 죽을까 봐 서둘러 도망쳤다. 하지만 그녀는 올라오지 않았고, 위에 둥둥 떠 있는 긴 머리카락만 보였다.전연우는 디저트 코너를 바라보았지만 백윤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눈빛이 차가워졌다.인시윤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에 든 샴페인을 흔들었다.“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소개해줬고 덕분에 큰 프로젝트까지 따냈는데, 저한테 어떻게 감사할 생각이에요?”전연우가 백윤서를 찾던 중 갑자기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악! 누가... 누가 사고를 당했어요!”전연우는 사라진 백윤서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술잔을 내려놓고 곧바로 뛰쳐나갔다.수영장 옆에서 여러 명이 함께 물에 빠진 백윤서를 구했다.전연우는 양복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모두 옆으로 물러섰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윤서야, 윤서야!”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구급차,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네, 알겠어요.”곧 수영장 옆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였다.
추워서 벌벌 떨며 얼굴에 핏기가 없는 백윤서를 바라보며, 전연우는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괜찮아, 이제 괜찮아.”“오빠, 너무 아파요. 연우 오빠.”“약 어딨어?”백윤서는 숨이 막힐 것 같았고,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가방, 가방에.”전연우는 서둘러 백윤서를 소파에 앉혔고, 하인은 백윤서의 가방을 가져왔다.남자는 가방을 열고 안에 든 약을 찾아 백윤서에게 두 알 먹였다.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백윤서는 약을 먹고 난 후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마침 구급차가 도착했고, 전연우가 백윤서를 안아 들자, 인시윤이 나섰다.“저도 같이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요.”전연우가 그녀를 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구급차에서 백윤서는 줄곧 전연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연우 오빠, 무서워요.”“괜찮아. 이제 괜찮아. 다 나으면 다시 얘기해.”전연우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사실을 알게 된 장해진은 크게 화를 냈다.인시윤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방 안의 물건들을 모두 박살 냈고, 바닥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하인들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나쁜 놈, 감히 나를 그렇게 대해? 내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번 파티에 올 자격도 없었다고! 고작 백윤서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내?”“내가 백윤서를 물에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 꼴을 보이냐고! 전연우! 미치겠네 정말!”하인 중 한 명이 다가가 위로하듯 말했다.“아가씨, 이런 일로 화내실 필요 없으세요. 사모님께서 분명히 잘 조사하실 겁니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네, 아가씨. 그분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잠시 말이 심하게 나왔을 거예요!”인정아가 밖에서 들어와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고작 남자 때문에 이 난리를 쳤어? 시윤아, 너 전에는 이런 애 아니였잖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거야?”인시윤은 서둘러 물었다.“엄마, 조사한 건 어떻게 됐어요? 누가 밀었어
월요일, 장소월은 지각하지 않고 아침 자율 학습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했다.교실에 도착했지만, 인시윤과 백윤서가 보이지 않았다.아침 자율 학습에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전 내내 백윤서가 보이지 않았다.‘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장소월은 백윤서가 사고를 당한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이미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점심에 소현아와 점심을 먹으며 식당에서 백윤서에 관해 물었다.소현아: “나도 너희 반 애들한테 들었는데 윤서 입원했대. 인씨네 집에서 실수로 수영장에 빠졌다고 하던데? 참, 나 오늘 강용도 못 봤어. 지난주 금요일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았어.”장소월은 담담하게 식사를 했다.“내 임무는 이미 완성했어. 서울대에 갈만한 성적을 받았으니, 퇴학한다고 해도 이제 나랑 상관없어. 그런데 넌 왜 강용에게 관심을 가져?”소현아는 고개를 숙였다.“너희 전엔 좋은 친구였잖아...”강용은 보나 마나 데이트를 하러 갔을 것이고, 백윤서가 수영장에 빠진 건, 과연 진짜 사고일까?장소월은 이 일이 절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소월아, 걱정되면 내가 병원에 같이 가줄까?”장소월은 소현아를 바라보았다.‘현아를 데리고 간다고? 그래. 현아가 있으면 전연우 그 인간도 나한테 허튼짓 못하겠지!’백윤서는 장가에서 십여 년을 살았다. 가문의 호적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확실히 장소월은 가야 하는 것이 맞다.“그래, 그럼 수고해줘.”“수고는 무슨. 우린 친구잖아! 네가 날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이 정도 일이야 당연히 도와야지.”소현아는 가방을 집어 들고 지퍼를 열며 말했다.“참, 소월아. 넌 내가 학교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야. 엄마 아빠가 너한테 주라고 챙겨줬어.그리고 가방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꺼내며 말했다.“이건 인삼, 녹용, 그리고 이 사프란... 전부 우리 집에서 직접 키운 거야.”“이렇게 비싼 물건은 받을 수 없어.”어쩐지 오늘 소현아의 가방이 불룩 튀어 나왔더라니!“아니야, 안 비싸
소현아는 장소월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명 내가 말해줬는데?’오 아주머니는 그들의 손에 있는 물건을 받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강한 그룹에서 회의를 하던 강영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고, 진봉은 말없이 에어컨 온도를 높였다.‘바닷바람을 쐬고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는데.’백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학교에서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지?”“전 금방 해성에서 돌아왔어요. 윤서 언니 별일 없으면 됐어요.”오 아주머니: “점심밥 드셨어요? 제가 뭐 좀 사 올까요?”장소월은 서둘러 말했다.“아녜요. 오기 전에 먹고 왔어요.”전연우는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고, 오 아주머니도 의자를 하나 가져왔다.“여기 앉으세요. 서 있기 힘들죠.”소현아: “괜찮아요. 안 힘들어요.”“윤서 언니 괜찮으면 됐어요. 저도 곧 학교로 돌아갈 거예요.”전연우: “마침 나도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데려다줄게.”장소월은 당연히 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우리 택시 타고 가면 돼.”“여기 오느라 돈도 많이 썼는데 연우 오빠가 너희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도 당연해. 소월아... 거절하지 말아줘.”백윤서가 이렇게 말하니 장소월도 거절할 도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세 사람은 오래 있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전연우는 조수석 문을 열었고 그의 뜻은 분명했다.“나랑 현아는 뒷좌석에 같이 앉으면 돼.”“내가 직접 앉혀줘?”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말투였다.소현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 입을 열었다.“괜찮아, 소월아. 나 혼자 앉아도 돼. 너 앞에 앉아.”소현아는 스스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가는 내내 차 안의 분위기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전연우가 풍기는 기운은 바깥 날씨처럼 차갑고 살을 에는 듯했다.장소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 백윤서를 해치려 했기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났을 것이다.학교 문 앞에 도착하고, 장소월은 바
차는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도착했다. 주위는 산들로 이어져 있는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오는 길에 카메라 한 대도 없고, 차도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추자 장소월은 안전벨트를 잡고 몸을 움츠렸다.“뭐 하려는 거야?”남자의 하얀 손가락은 핸들에 살짝 걸치고 있었다.“윤서 언니 일은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백윤서이니, 장소월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설명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몸을 숙이더니 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읍!”장소월은 가볍게 소리를 내고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교복도 그에 의해 헝클어지고 말았다.단추가 열리는 것을 느낀 그녀는 힘껏 그를 밀어내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에 뺨을 한 대 때렸다. 입고 있는 옷을 꽉 움켜쥐고 속눈썹에 영롱한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했다.“전연우. 제발 이러지 마! 윤서 언니랑 사귀고 있잖아!”전연우의 눈빛은 너무 어둡고 깊어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입꼬리를 올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 입가의 액체를 닦아주었다.“그게 뭐 어때서? 너도 좋아하잖아? 네 몸이 반응하고 있어. 대체 뭐가 무서운 거야? 소월이는 오빠를 가장 좋아하잖아.”“난... 아니야!”장소월은 시선을 돌리며 그의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 했다.“거짓말.”전연우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만지지 마!”여자의 체향을 맡았지만 예전의 달콤한 향기는 사라지고 다른 남자의 차가운 냄새만 가득했다.남자의 눈에는 온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강한 소유욕만 타올랐다.그의 손이 치마 안으로 들어가 얇은 옷감을 헤치고, 거친 손바닥이 민감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장소월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내가 영수한테 말할까 봐 겁나지도 않아?”강영수라는 이름을 듣고, 남자는 동작을 멈추었다.장소월은 여전히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고 흐느꼈다.“대체 왜... 전에는
백윤서를 제외하고 그는 거의 아무런 약점이 없었다.하지만 이런 이유로 백윤서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전연우와 백윤서가 사귀게 된 것은 장소월이 예상했던 일이다.만약 백윤서가 없었다면 전연우는 반드시 인시윤과 사귀었을 것이고, 그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것이다.그의 수단은 늘 다른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다.“언제부터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알았지? 응?”전연우는 아무 감정 없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눈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가 이런 모습일수록 전연우는 더 더럽히고 싶었고,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혀 죽도록 울리고 싶었다.이런 더러운 마음은 그의 꿈에 종종 나타나곤 했다.하지만 아직은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지금 전연우의 마음은 마치 하수구에 있는 도랑에서 뒤틀리는 구더기 같았다. 장미꽃 가지 위로 조금씩 기어올라 그 꽃잎을 천천히 먹어 자신의 일부로 만들려 했다.“소월아, 잊지 마.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전연우의 갑작스러운 부드러운 행동에 장소월은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강영수... 진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어? 왜 여전히 이렇게 순진해?”장소월은 단번에 반박했다.“영수는 날 해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으니까. 너만 계속 나한테 상처를 주고 있어. 내가 수술을 했을 때, 영수는 내가 아이를 못 가져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어. 나와 결혼하는 날을 기다린다고 했어.”“그래서 흔들렸어?”“맞아!”장소월은 그를 바라보며 목소리가 떨려왔다.“지금 상황을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난 어떤 처지에 이를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영수는 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한테 흔들리는 건 당연하잖아? 적어도 영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지 않아!”“넌 절대 영수랑 비교가 안 돼!”만약 전연우가 오늘 정말 여기서 그녀에게 무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녀는 높은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
병원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뒤, 소민아가 쭈뼛거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변장 안 해도 돼요? 송시아의 사람들이 알아봐도 괜찮은 거예요?”“그 생각을 민아 씨만 한 것 같아요?”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병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아래에서 감시하던 놈이 이미 송시아한테 보고했을 거예요.”소민아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서철용은 습관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과 같이 와서 놀려고요.”“뭐라고요? 서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장난을 쳐요!”서철용은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신이랑을 쳐다보았다. 소민아 약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니 경호원들이 당장이라도 서철용을 잡아 누를 듯 위풍당당한 기세로 걸어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는 아무도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호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민아 아가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그냥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우리 셋이 같이 온 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빛을 보냈다.경호원 한 명이 막아서려 했으나, 다른 경호원이 그를 제지했다.순조롭게 경호원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병실 문 앞까지 도착한 뒤, 서철용은 걸음을 멈추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 수호신 두 명이 이렇게까지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됐어요! 이젠 문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저기!”소민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문은 쾅 하고 닫혀버렸다.그녀가 옆에 있는 신이랑을 보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대체 왜 우릴 불러놓고 들어오지도 말라는 걸까요?”신이랑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민아 씨가 있어서 송시아가 서철용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제야 서철용의 의도를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