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블랙홀과도 같아서 도저히 그 무엇도 보아낼 수 없었다.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귄 지 꽤 되었음에도 백윤서는 그를 완전히 얻은 것 같지 않았고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손을 잡는 것 외에 연인 사이에서 흔히 하는 스킨쉽인 키스도 해본 적이 없었다.백윤서는 그저 자신이 너무 조급했다고 생각하며 애써 실망감을 숨겼다.전연우는 아직도 예전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를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전연우는 프런트에서 계산을 한 뒤 가게를 나섰다.오늘 그들은 가든 아파트가 아닌 장씨 저택으로 향했다.백윤서는 웅장하게 서 있는 별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오빠, 우리 집에 안 가?”백윤서는 해외에서 돌아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줄곧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더욱 싫었던 건 바로... 장해진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었다.“윤서는 여기가 싫어?”“아니요.”백윤서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거라 추측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빠한테 말해.”전연우의 눈빛은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백윤서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말했다.“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전연우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했다.“오빠, 잘 자요. 난 먼저 들어갈게요.”백윤서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차 문을 열고 부랴부랴 달려들어 갔다.남자의 얼굴엔 소녀가 남겨놓은 향기가 따스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연우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백윤서가 거실로 들어가 아직 깨어있는 강만옥에게 인사하고는 위층으로 총총 올라갔다.백윤서가 돌아왔다는 건... 전연우도 왔다는 걸 의미한다.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전연우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선반 위에 내려놓고 주방에 앉아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여자친구
강만옥은 그의 눈빛을 읽고 싶었으나 깊게 감춘 그의 속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그녀의 마음엔 비참함만 자리 잡았다.“질투하는 거야?”전연우가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정장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어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슥슥 닦고는 바닥에 버렸다.강만옥이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맞아. 원하는 남자를 얻지 못했으니 당연히 질투가 나지.”전연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하찮은 듯 쳐다보았다.“내 옆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어 놓고 고작 알아낸 게 그거야? 아쉽네. 난 깨끗한 여잘 좋아하거든.”가볍게 툭 뱉어낸 그의 말이 강만옥의 심장을 후벼팠다. 힘들게 봉합된 상처에서 또다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그렇다. 확실히 그녀의 몸은 더럽혀졌다. 더욱이... 그녀는 전연우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마. 역겨우니까.”이 말은 장소월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에게도 그 말 곧이곧대로 다른 사람에게 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장소월이 강씨 저택에서 산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녀를 돌아오게 할 몇백 가지의 방법이 있다.“전연우, 우린 같은 류의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최선을 다해 백윤서를 보호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지금까지 했던 그 모든 일들을 알고도 네 옆에 있어 줄 것 같아?”“그리고 장소월... 만약 네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장씨 집안에 들어온 목적이 이곳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라는 걸 안다면 어떻게 될까? 강씨 집안을 이용해 네 목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겠지.”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어디 한 번 해봐. 내가 먼저 죽는지 네가 먼저 죽는지 보자고.”...다음날은 주말이었다.전연우는 백윤서와 함께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은 누군가의 카메라에 찍혀 한장 한장 장해진의 눈앞에 놓였다.분노에 휩싸인 장해진의 가슴팍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밥까지 먹고 나서야 전연우는 백윤서를 데리고 가든 아파트로 향했다.백윤서에게 오늘은 가장 기쁜 날이었다. 하여 그녀는 들뜬 마음에 와인도 몇 잔 마셨다.돌아올 땐 술에 취한 탓에 전연우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집에 들어온 뒤 전연우는 발로 문을 닫았다.백윤서는 몸을 돌려 전연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몽롱한 두 눈동자엔 취기가 잔뜩 어려있었다.“오빠... 약속해. 나랑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쿵.’그때 방안에서 돌연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움직임은 작았지만 전연우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이내 그의 시선이 문틈으로 향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안에 누군가 있는 듯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장소월이었다.장소월은 부딪힌 이마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백윤서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나온 순간 환히 불빛이 켜져 있는 거실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두 사람의 친밀한 자세를 보니 무언가 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황급히 사과했다.“미안해요! 전에 이곳에 둔 옷을 가지러 온 거예요. 찢어진 윤서 언니의 필기 노트는 내가 모두 새로 베낀 뒤 책상에 놓아두었어요. 그럼 계속해요. 전 이만 갈게요.”당시 남원별장에서 인테리어를 할 때 그녀는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다. 당시 꽤 많은 물건을 가져왔었는데 그중엔 그녀가 평소 자주 입던 옷과 올림피아드 반에서 받은 자료들도 있었다. 그 후 너무 급히 떠난 탓에 물건을 가져갈 겨를이 없었었다.그녀는 오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오는 길에 이곳에 들린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모두 챙기고 방을 나서려고 할 때, 전에 침대 밑에 떨어뜨렸던 영어 테이프가 생각났다.하여 손을 뻗어 줍는 과정에서 이마를 부딪친 것이다.그때 마침 그들이 집에 돌아왔다.그녀는 오기 전 전연우의 집에 전화를 걸어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곳에 발을 들였다.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윤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길까 봐 크나큰 두려움이 엄습했다.가장 큰 감정은 바로 질투였다.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반면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심지어 역겨운 눈빛까지 참아내야 했다.장소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행여 그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그녀가 차에 타자 운전기사가 물건을 트렁크에 실었다.“아가씨, 물건은 모두 챙기셨나요?”“네. 얼른 가죠!”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테이프였다. 이곳에 있었으니 며칠 내내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강씨 저택.장소월이 돌아왔을 때, 저번 그 노부인이 또다시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노부인이 지팡이를 잡고 현관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동으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두 개의 끈이 양쪽으로 드리워져 있었다.“할머니,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 몸이 늙어 또 길을 잃었네요. 집에 먹을 거 있어요? 너무 배고프네요.”장소월이 집안을 둘러보니 도우미들은 보이지 않았다.“제가 지금 차려드릴게요.”장소월이 목에 둘렀던 수건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녀는 안에 입은 아이보리색 니트 소매를 거두며 주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가져와 노부인의 앞에 놓아주었다.“일단 물을 마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허기를 달래세요. 제가 최대한 빨리 만들게요.”장소월은 평소 항상 꺼져있던 텔레비전을 켜고 드라마 채널로 돌렸다.“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예전 할머니와 한동안 산 적 있는데 저희 할머니도 드라마를 좋아하셨어요.”노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소월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오늘도 혼자 있는 거예요? 도련님은요?”“출장 갔어요. 며칠 뒤에야 돌아올 거예요.”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식자재들을 가득 꺼냈다.노부인이 물었다.“도련님이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집에 데려온 건 처음 봤어요. 두 사람 사귀는 거예요?”장
장소월이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은 늘 그랬듯 밥은 먹었냐, 뭘 먹었냐 등 일상적인 대화였다. 강영수는 매일 시간을 보며 그녀의 일정을 체크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강영수가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면 장소월은 핸드폰을 별로 쓰지 않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문자를 보냈다.7,8분 뒤 면이 거의 익자 장소월은 젓가락으로 냄비에서 면을 꺼내 그릇에 담았다.“강 대표님, 파티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열어 죄송해요. 저한테 함께 술 한 잔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마 해성 명문가의 아가씨일 것이다.장소월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조심하지 않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었다.조금 전 파티장에서 걸어 나온 허이경은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입을 닫았다.강영수가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자 허이경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가 설명하려고 할 때, 장소월이 말했다.“바쁜 것 같으니까 더 방해하지 않을게. 얼른 호텔에 돌아가 쉬어.”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분명 똑똑히 들었음에도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순간 강영수에게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의 눈동자엔 약간의 실망감도 스쳐 지나갔다.강영수가 핸드폰을 정장 호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으며 허이경을 무시해버린 채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통화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강영수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조심하세요. 당신은 아직 나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해요.”그때 밖에 나갔던 진봉이 핑크색 선물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소월 아가씨가 원하셨던 선물 사 왔습니다. 하지만 무슨 맛을 원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종류별로 모두 사 왔습니다.”강영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잘했어.”그날의 통화 이후 두
장소월의 존재가 강영수에게 구원이라면, 소현아는 장소월에게 치유 같은 존재였다.그녀는 소현아의 성적을 본 적이 있다. 2반에서 가장 마지막 등수였고 심지어 6반에서도 꼴등일 것이다.장소월은 성적이 가장 낮은 학생이 강용인 줄로 알았으나 알고 보니 소현아였다.소현아는 몸이 아파 저번 기말고사를 보지 못했다. 하여 공표란에 그녀의 성적이 없었던 것이다.이런 성적이라면 2반이 아니라 6반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 원인에 대해 장소월은 묻지 않았다.점심밥을 먹고 난 뒤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예전 그녀는 매일 강용에게 과외를 해주었지만 이젠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만 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 그의 성적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다. 그는 저번 시험에서 2반 10등 안쪽에 진입하기도 했다.최근 며칠간 강용은 계속 여자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왔고 장소월은 마치 방해꾼과도 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었다.오늘 장소월은 먼저 도서관에 도착해 강용이 오기 전까지 소현아를 가르쳤다.소현아는 정말...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소현아는 펜을 잡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소월아, 나 진짜 멍청하지?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잖아.”“나 여러 차례 반을 바꿨었어. 그때마다 친구들이 다 날 바보라고 놀리더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머리가 나빴던 건 아니었어. 예전엔 진짜 총명했거든. 하지만 어렸을 적 고열을 앓았을 때, 가정형편이 너무 가난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바람에 뇌를 다쳤고 기억력이 퇴화한 거야. 소월아, 걱정하지 마. 난 꼭 너처럼 노력할 거야. 저번에 네가 가르쳐준 문제는 이제 풀 수 있어.”장소월이 물었다.“반을 바꿨다고?”소현아는 한껏 고개를 떨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친구들이 날 바보라고 놀리고 괴롭혀서 연속 반을 바꿨어. 2반에 오니까 별로 괴롭히지 않더라고. 선생님께서 다시 반을 바꾸면 퇴학시키겠다고 하셨어.”그런 거였구나.“걱정하지 마. 이젠 아무도 널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강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꽤 높은 성적을 받았으니 이제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그때 여학생 몇 명이 책을 안고 장소월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너 아까 봤어? 강용의 3점 슛 진짜 멋있었어!”“봤어. 정말 멋있더라!”“같이 있던 여학생은 2반 설채윤이지?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일 오래 사귄 여자친구지? 예전 만났던 퀸카들은 다 일주일도 넘기지 못했잖아.”장소월의 존재를 눈치챈 그중 한 명의 여학생이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친구는 깜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장소월은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루고 집중적으로 소현아를 가르쳤다.한 번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알아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반복했다. 가끔씩 화가 날 때에도 그녀의 순진한 눈빛을 보면 이내 사르르 녹아내렸다.소현아를 가르치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시간 동안 한 페이지의 연습 문제 중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소월아, 나 너무 멍청하지?”소현아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장소월을 쳐다보았다.“아니야. 넌 총명해. 그저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네 성적은 예전의 강용보다 훨씬 더 높아. 당시 강용의 성적은 몇 개 과목을 합쳐도 몇십 점밖에 되지 않았어.”“정말이야?”장소월의 말에 위안을 받은 소현아가 물었다.“응. 강용이 해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 오늘 내가 가르쳐줬던 것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풀어봐. 먼저 풀이 방법을 구상한 다음 펜을 들어.”“앞으로 또 나랑 도서관에 와줄 수 있어?”장소월은 소현아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그래.”전생에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성장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소현아처럼 귀여운 모습이겠지.만약 이런 딸이 있다면 장소월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쥐여줄 것이다.30분 뒤면 다음 수업이 시작된다.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서 나왔다. 1미
“야, 장소월, 네가 뭔데 우리 2반 일에 참견이야?”허경아가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친구들의 편에 서서 장소월을 비난했다. 장소월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설채윤과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였다.“그러니까! 우린 소현아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지 너한테 시킨 게 아니야! 당장 너희 반으로 꺼져.”소현아는 덜컥 겁이 나 장소월의 앞을 막아섰다.“소월이는 괴롭히지 마. 내가 지금 가서 사 올게.”그녀는 이어 조심스레 장소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소월아, 난 괜찮으니까 돌아가. 이미 너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나 때문에 너한테 피해를 줄 순 없어.”그들과 맞서던 3, 5명의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장소월의 노트를 펼쳐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같은 바보가 이해할 수 있겠어?”“만지지 마. 그건 장소월의 노트야.”소현아가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그들은 원숭이를 놀리는 것처럼 노트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녀를 농락했다.“네가 만지지 말라고 하면 만지지 말아야 해? 난 찢기까지 할 건데?”소현아가다급히 말했다.“안 돼.”다른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상대가 도발적인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노트 위쪽을 살짝 찢었다.장소월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찢기 전에 첫 장을 펼쳐봐. 누구 이름이 쓰여 있을까?”“잘난 척하기는. 고작 누더기 노트일 뿐이면서.”첫 장을 펼쳐 본 허정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뭐 대단한 거라고.”허정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다시 노트를 내려놓고 돌아섰다.장소월이 말했다.“거기 서!”“너... 또 뭘 하려는 건데?”“현아한테 사과해.”“내가 왜 사과까지 해야 하는데?”“누구의 이름이 쓰여있는지 봤잖아.”장소월이 단호히 말했다.허정아는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소현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소현아.”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마음속으론 장소월을 인정하지 않았다. 몸을 팔며 남자에게 꼬리친 주제에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