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는 책상 위의 야식 대신 아직 처리하지 않은 서류를 펼쳤다.“이건 2학년 상학기 지식 범위 아니야? 너한테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네가 이런 문제조차 풀지 못한다면 오래 버티기 어려울 거야. 혼자 어렵다면 오빠가 과외 선생님을 찾아줄까?”백윤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빠도 내가 소월이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요? 소월이보다 예쁘지 않고, 집안도, 성적도 모두 뒤떨어진다고 생각해요?”전연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윤서야, 언제부터 너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한 거야?”“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요. 소월이 앞에만 있으면 난 항상 열등감을 느껴요. 어디를 가든, 학교에 가면 다들 날 장가의 입양 딸로만 생각해요. 주위 친구들도 전부 장소월과 얽혀있고.”전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너고, 소월이는 소월이야. 소월이랑 비교할 필요 없어. 내 눈에는 우리 윤서가 최고야. 시간이 늦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돌아가서 쉬어.”“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먼저 가서 자. 난 아직 볼 서류가 남았어.”“오빠 이미 며칠 동안 잘 쉬지 못했어요. 장가의 일에 왜 이렇게 필사적이에요? 장가는 어차피 장소월 거잖아요.”전연우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경고했다.“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백윤서는 깜짝 놀랐다.“미안, 난 그저 오빠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너무 힘들게 일하잖아요.”“그만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가서 쉬어.”“알... 알았어요.”백윤서는 황급히 서재를 나와 문을 닫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장가? 고작 장가 때문에...’장해진은 음력설 전에 강만옥을 데리고 돌아왔다.장소월은 이 소식을 오부연을 통해 전달받았다.내일 장소월은 당연히 집에 돌아가야 했다.“집사님, 이미 충분해요. 더 이상 챙길 필요 없어요.”“모두 도련님께서 설날 선물로 보내라고 분부하신 물건입니다. 내일 도련님은 해
식탁에서 장소월은 그릇에 담긴 밥을 쿡쿡 찌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자초지종을 장해진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됐어요.”장소월의 설명을 들은 장해진은 강가의 후계자가 줄곧 옆집에 사는 줄 몰랐다.이 점에 그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식사 예절 선생님께서 널 어떻게 가르쳤어? 식탁에서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했잖아! 강가에서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면 안 돼!”“알겠어요, 아버지.”꾸중을 들은 장소월은 바로 등을 곧게 펴고 단정하게 앉았다. 장해진의 말투는 이전처럼 매섭지 않고 조금 온화했다.“집에서는 이렇게 엄하게 굴 필요 없잖아요.”뒤에서 걸어오는 백윤서는 장소월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오랜만에 만난 백윤서는 훨씬 예뻐졌다.야윈 얼굴에는 살이 좀 올라 이목구비가 더 또렷해졌다.전연우는 손에 찻잎 두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최고급 군산 찻잎이에요.”“신경 써줘서 고맙구나.”“당연한걸요.”하인은 찻잎을 받아갔고, 전연우는 양복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장소월의 앞에 앉았다.“딱 맞춰 왔구나. 밥은 먹었냐?”“아직이요. 방금 윤서를 데리러 갔다가 집에 와서 밥 먹으려고요.”하인은 재빨리 식기 두 세트를 더 가져왔다.“잘됐구나. 그럼 함께 먹자. 집에서는 너무 예의를 갖출 필요 없어.”“네.”장소월은 전연우와 장해진이 나누는 회사의 근황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식사했다.남천 그룹은 강한 그룹의 공사를 도맡아 새로운 부지를 개발하고 있었다. 오래된 주택단지를 쇼핑몰로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치를 들으며 장소월은 대략 어디쯤인지 짐작했다.그곳은 앞으로 서울 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 구역이 될 것이다. 바로 10년 후에...심지어 거리 전체의 가치는 20배를 뛰어넘을 것이다.강영수는 역시 안목이 있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전연우보다 먼저 이 땅을 선점했으니 말이다. 전생에 전연우도 이 땅을 시작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이번 생에는 강영수가 먼저 이 땅을 차지했다.“하지만, 강한 그룹과 얘
장소월은 하인의 표정을 보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은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전생에 강만옥은 확실히 요맘때 아파서 병원에 보름 넘게 입원했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이번엔... 왜 집에 있지?’그녀가 다시 태어난 후, 분명히 뭔가 바뀐 것 같았지만, 또 변하지 않은 듯했다.사건의 방향은 애초에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이런 상황이 장소월은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 전연우가 자신에게 약을 먹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현재 자신의 몸 상태를 알지 못했다. 자궁 기형 외에 또 다른 병이 있을지도 모른다.‘암세포 병변일까?’장소월도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보름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있었다.5층으로 올라가자, 자신의 문이 이미 뜯겨 일반 방문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녀의 캐비닛과 욕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침대의 위치가 바뀌었다. 다른 변화들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그녀의 침대는 강가로 옮겨 갔으니, 이 침대는 아마 새로 산 모양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그림들이었다.하인이 그녀의 물건을 옮기고 있을 때, 장소월이 서둘러 물었다.“제 그림은요? 어디 갔어요?”“아가씨, 그건 모르겠네요.”그림책!강영수가 선물한 그림책...장소월은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달려가 캐비닛 맨 아래, 가장 깊이 숨겨져 있는 물건을 찾았다.중요한 물건을 발견한 장소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사해서 다행이야.”방안의 발소리를 들은 장소월은 재빨리 자신의 그림을 숨겨 옷으로 덮고 서랍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전연우는 그녀의 방을 훑어보았다.“인테리어 괜찮네. 저녁에 바람이 많이 부니 감기 걸리지 않게 이불 잘 덮고 자.”장소월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전연우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책가방에 있는 문제집을 책상 위에 놓고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장소월은
“다 안다고? 그럼 어젯밤에는 왜 영수한테 물어봤는데?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응?”전연우는 장소월의 턱을 움켜쥐고, 그녀를 마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면, 소월이는 오빠가 가르쳐주는 게 싫어?”그는 벌을 주듯 장소월의 허리를 꼬집었다.장소월은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그녀의 허리를 꼬집은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다.“오해야, 그 문제들은 수업 범위를 벗어난 부분이었어.”“그래? 그럼 한 번 봐봐.”장소월은 시선을 피하며 점점 짜증 나는 말투로 말했다.“전연우, 계속 이러면 나 진짜 피곤해. 나도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날 쳐다보지 말아 줄래? 한가해? 그냥 윤서한테 가 봐.”전연우는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넌 너고, 윤서는 윤서야. 너랑 놀아주려고 왔는데 왜 화를 내?”전연우는 장소월의 거짓말을 한눈에 알아챘다.장소월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좋아했고, 거짓말을 할 때 늘 상대를 쳐다보지 못했다.이것이 그녀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장소월은 그의 눈에 서리가 낀 것을 알아차렸다. 단둘이 있을 때 장소월이 백윤서를 언급하면, 그의 눈은 늘 이렇게 차가워졌다.지금처럼.장소월은 지금 집에 있는 이상, 전연우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확실할 수 없었다. 전연우처럼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소심한 남자를 계속 긁으면 이득이 없었다.장소월은 자신의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그럼 이거 놔.”전연우는 순순히 손을 뗐고, 장소월은 책상에 앉아서 구겨진 옷을 정리했다. 고건우가 준 문제집을 꺼내어 표시했다.“이거.”장소월은 손가락으로 짚었다.전연우는 필통에서 펜 하나를 꺼내 들고 문제를 보았다.“대학교 미적분?”그는 책을 집어 들고 표지를 보았다.“이건 너무 어려워. 너한테 맞지 않아.”장소월은 전연우의 학력이 결코 높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그는 무엇을 하든 독학으로 이해하고 행동했다.전연우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연우 오빠!”두 사람의 분위기가 굳어졌을 때 복도에서 백윤서의 목소리가 들렸다.곧 그녀의 모습은 문밖에 나타났다.전연우: “무슨 일이야?”백윤서: “아저씨가 오빠더러 서재로 오라고 하셔.”“알겠어!”장소월: ‘할렐루야!’전연우와 백윤서가 함께 떠난 후, 장소월은 즉시 방문을 잠갔다.서재.“부르셨어요?”장해진은 향을 세 개 피워 이마 앞에 놓고 경건하게 세 번 절하고는 향로에 꽂고 돌아섰다.“내가 없는 동안 회사에 많은 일들이 생겼다며? 나한테 보고할 것 없어?”“도원촌 일은 확실히 제가 소홀했어요. 제가 소월이를 잘 보호하지 못했어요. 어떤 처벌도 기꺼이 받겠습니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였다.“누구 짓인지 조사했어?”“모두 진열의 사람들이었어요. 전에 수단을 써서 감옥에 들여보냈더니,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소월이를 노렸어요.”장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때 어떻게 들여보냈으면, 지금 같은 방법으로 다시 들여보내면 그만이다. 필요하면 강씨 집안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해. 그 집안이 나서면,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네.”“서울에서 발붙이고 자리를 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 소월이를 도와 강가에 시집 보내야 앞으로 네가 내 자리를 인수해도 뒤탈이 없어.”“네, 알겠습니다.”전연우의 검은 눈에는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소월이 일 말고도 네 일도 잊지 말아. 인씨 가문의 일도 서둘러.”“안심하세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나가 봐.”“네.”“밖에 있는 여자 잘 처리해. 절대 네 앞길을 막아서는 안 돼.”전연우가 나온 후, 입구에서 엿듣고 있던 백윤서를 만났다.남자는 무섭게 눈살을 찌푸리고, 백윤서의 손목을 덥석 잡고 2층 베란다 쪽으로 끌고 갔다.“누가 너더러 엿들으라고 했어? 아저씨가 모를 것 같아?”백윤서는 상처 입은 눈으로 바라보았다.“내가 엿듣지 않았으면, 오빠랑 인시윤 일 절대 나한테 말해주지 않을 거지? 분명 약속했잖아요. 나 혼자 내버려 두지
장소월은 그들의 대화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끝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여 간식거리를 가지러 아래층에 간 것인데 그와 맞닥뜨릴 줄이야.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윤서 언니한테 무슨 일 있어? 조금 전에 2층으로 뛰어 올라가던데.”전연우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묻지 마.”그녀는 그저 화제를 만들어 조금 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던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싶었을 뿐이었다.“방금 밥 먹었잖아. 왜 또 배고픈 거야?”그녀가 빵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그냥 입이 좀 심심해서.”“그럼 난 올라갈게.”장소월이 한 발을 채 떼기도 전에 전연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그녀가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뭘 하려는 거야?”“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싫어!”장소월이 단호히 거절했다.전연우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리고 있는 장소월을 보고는 그녀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장소월은 손에 쥐고 있던 컵 안 위태롭게 출렁이는 우유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이렇게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돼? 우유를 쏟잖아!”하마터면 그녀의 손이 데일 뻔했다.“차에 타서 마셔.”장소월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연우는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는 허리를 굽혀 안전벨트를 매준 뒤 운전석에 탔다.장소월이 우유컵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병원에 갈 필요 없어. 이미 서울시 모든 병원에 가봤는데 소용없었어.”“내 몸에 약을 넣을 때 고려했어야지. 후천적 자궁 결함은 치료가 안 된다는 걸.”장소월은 한 번도 그를 완전히 이해해본 적이 없다. 그는 분명 여러 차례 그녀에게 지독한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녀를 걱정한단 말인가?여기에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왜 하필 오늘 급히 병원에 가자고 하는 걸까! 장해진과의 대화를 끝마친 직후인 지금 이 시간에 말이다.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원 별장을 떠났다.장소월이 고개를 떨구고 내내 손에
전연우는 총칼이 빗발치는 피로 얼룩진 어둠의 세계를 진정으로 경험해온 사람이다. 장해진에게 그동안 해온 끔찍한 일로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아마 그중 절반은 전연우가 짊어져야 할 것이다.반면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부잣집 귀한 아가씨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왔다.그녀는 어쩌면 말싸움에서조차 다른 사람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변에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어 다들 그녀만 보면 멀찌감치 피해 다녔으니 말이다.그녀는 그렇게 일생을 걱정 하나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전생에서 송시아가 그녀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라고 도발한 적이 있었다.사실 송시아의 말이 맞다. 그녀는 쓰레기에 불과하다.전연우의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제외하면, 그저 먼지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예전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수많은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었다. 당시 사람들은 송시아처럼 능력 있는 여자야말로 전연우와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도, 사업적으로도 가장 최선의 파트너일 테니 말이다.그들의 시선 속에서 장소월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때문에 그의 옆에 있을 때마다 늘 무력감과 비참함에 몸부림쳤었다.“5년 전.”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전연우는 심장을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맞는 것만 같았다.5년 전?당시 그녀는 고작 13살이었다.그토록 어린아이를 상대로 시작했었구나...“약은 어디에 넣은 거야? 내가 먹는 음식 안에? 아니면 물 안?”“도착했어! 내려.”병원 건물 꼭대기에 걸려있는 서울 강남 병원이라는 여섯 글자가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전연우는 안전벨트를 풀었지만 장소월은 자리에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죽을 때 죽더라도 왜 죽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전연우는 순간 담배 갈증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가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손을 창문에 걸쳤다.“그걸 안다고 한들 네가 바꿀 수 있는 게 뭔데!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줄게. 우유에 넣었어. 그리고 그 약은 외국산
입안 가득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장소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가 바로 이것이었다.장소월은 검사실로 끌려들어갔다.기계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철용이 여자처럼 생긴 요염한 얼굴을 들이밀었다.“오랜만이에요! 꼬마 아가씨.”“왜 당신이 여기에!”장소월은 곧바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이 검사를 거부하려 했다.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꼬마 아가씨, 내가 보는 게 싫어요?”“저 검사 안 받겠어요.”서철용이 오른쪽 주먹을 말아쥐고 입 옆에 가져가고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담당의는 내가 아니니까. 맹세할게요. 절대 보지 않겠다고.”“아가씨, 창피해하지 말아요. 의사에겐 남녀구분이 없답니다. 이번 검사를 맡은 사람은 저예요. 서 선생님, 아가씨를 놀라게 하지 말고 이제 나가세요!”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 의사였다.장소월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서철용이 나간 뒤 검사가 진행되었다. 부끄러운 자세 때문에 장소월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발을 m자 모양으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파란색 천이 올려졌다. 순간 무언가 들어가는 듯한 불편함에 장소월이 살짝 몸을 움직였다.안에 자리 잡고 있는 투명한 막을 발견한 의사는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세상에. 오늘 환자가 너무 많아 아직 어린 소녀라는 걸 깜빡했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바로 바꿀게요.”장소월은 초음파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아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병실 밖 흡연 구역.방 안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바닥엔 적지 않은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목에 청진기를 건 서철용이 두 손을 가운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이미 너한테 말했잖아. 아무리 검사를 많이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고.”“지금으로선 자궁 척출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그토록 충고했는데 지금 네 상태를 좀 봐!”전연우가 차갑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말이 너무 많아!”서철용은 피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
송시아에게 약을 발라주려 병실에 들어가려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겁을 먹고 문 앞에 멈춰 섰다.여자의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왜! 대체 왜 다들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한의준은 이마를 조금 찌푸릴 뿐 별다른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맺어왔지만 송시아는 여전히 한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의준은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자신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내가 말했잖아. 넌 편히 쉬면서 우리 아이를 낳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송시아의 눈엔 시뻘건 핏줄이 가득 서려 있었다.“우리 첫 아이도 그놈 손에 죽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그녀는 남자의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올려놓았다.“나도 당신만큼 아이를 원한다는 거 알고 있죠?”송시아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고,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남자의 과거는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단순히 그녀와 아이를 낳기 위해 찾아왔다. 송시아는 그의 일 처리 방식을 목격한 뒤에야 그가 그리 간단한 사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면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 어떤 지하 조직과도 마음대로 왕래한다.그토록 신비롭고 은밀한 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그건... 내가 하나씩 모두 갚아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더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병원에서 치료나 잘 받고 있어.”“언제까지 듣고 있을 거야! 들어와!”간호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천천히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이 흥분하신 것 같아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환자분, 지금 임신 2개월 째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치료하셨어요.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곧 퇴원할 수 있으실 거예요.”“뭐라고요? 임신했다고요?”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송시아의 눈동자가
향기로운 갈비찜 냄새에 소민아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보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신이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슬리퍼를 신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갈비를 들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신이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다가갔다.“천천히 먹어요. 다 민아 씨 것이에요. 아무도 빼어가지 않아요.”“이랑 씨, 저 밥 먹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밥 가져다줄게요.”신이랑은 그녀에게 밥이 가득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는 소민아의 습관까지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세 그릇을 먹어서야 공허했던 배를 채웠다.마지막으로 국 한 그릇까지 마시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신이랑이 그녀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더 먹을래요?”“이제 배불러요.”“너무 고마워요. 이랑 씨가 없었다면, 쓰러져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을 거예요.”“어젯밤 내가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어디에 갔었어요?”“병원에 갔었어요. 대표님께서 수술을 하셨는데 가족 사인이 필요해서요. 참, 집에 돌아왔을 때 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신이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민아 씨 기다리고 싶었어요. 밤새 안 들어오길래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어요.”소민아는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다시 삼켜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면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이랑이 해준 밥도 먹었고, 쓰러졌을 때 신이랑의 보살핌도 받았으니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참, 송시아 최근 뭐 하고 있는지 알아요? 대표님에게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왜 병원에 안 나타난 거예요?”신이랑이 말했다.“나도 민아 씨한테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송시아는 독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대요.”소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독약이라고요? 누가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