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 가득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장소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가 바로 이것이었다.장소월은 검사실로 끌려들어갔다.기계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철용이 여자처럼 생긴 요염한 얼굴을 들이밀었다.“오랜만이에요! 꼬마 아가씨.”“왜 당신이 여기에!”장소월은 곧바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이 검사를 거부하려 했다.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꼬마 아가씨, 내가 보는 게 싫어요?”“저 검사 안 받겠어요.”서철용이 오른쪽 주먹을 말아쥐고 입 옆에 가져가고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담당의는 내가 아니니까. 맹세할게요. 절대 보지 않겠다고.”“아가씨, 창피해하지 말아요. 의사에겐 남녀구분이 없답니다. 이번 검사를 맡은 사람은 저예요. 서 선생님, 아가씨를 놀라게 하지 말고 이제 나가세요!”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 의사였다.장소월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서철용이 나간 뒤 검사가 진행되었다. 부끄러운 자세 때문에 장소월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발을 m자 모양으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파란색 천이 올려졌다. 순간 무언가 들어가는 듯한 불편함에 장소월이 살짝 몸을 움직였다.안에 자리 잡고 있는 투명한 막을 발견한 의사는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세상에. 오늘 환자가 너무 많아 아직 어린 소녀라는 걸 깜빡했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바로 바꿀게요.”장소월은 초음파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아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병실 밖 흡연 구역.방 안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바닥엔 적지 않은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목에 청진기를 건 서철용이 두 손을 가운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이미 너한테 말했잖아. 아무리 검사를 많이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고.”“지금으로선 자궁 척출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그토록 충고했는데 지금 네 상태를 좀 봐!”전연우가 차갑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말이 너무 많아!”서철용은 피
“보호자분의 의견은요?”전연우가 어두운 눈빛으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연우를 원망하며 분노하는 대신 아무 일도 아닌 듯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이 아이 뜻대로 해주세요.”대답을 마친 전연우는 마음이 복잡해져 자리를 박차고 문을 나섰다.서철용은 은은한 웃음을 지은 채 분노하며 멀어져가는 전연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그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전연우는 분명 후회할 거라고 말이다.서울 최고 미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여자아이를 옆에 두고 있는데, 속세를 떠난 스님이라고 해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그게 전연우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여자를 손에 넣지는 못한 듯하다!두 사람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거의 어두워져 있었다.장소월은 점심에 갖고 나왔던 우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약을 우유에 넣었었다니.우유와 관련된 음식이라면 죽을 때까지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다.전연우는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차 안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에 답답해진 장소월은 바람을 쐬러 창문을 열었다.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창문이 닫혀버렸다.“날이 추워 찬바람을 맞으면 안 돼. 감기 걸려.”장소월이 고개를 숙이고 반질반질한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렸다.“아버지한텐 알아서 숨겨줄 거지?”“뭐 사실 큰일도 아니야. 난 결혼 생각도 없으니까. 혼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늙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실버타운에 가면 되지. 죽으면 시신을 수습해주는 사람도 있고...”돌연 전연우가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멈춰 세웠다.“그래서... 너 날 미워하는 거야? 장소월... 너한테 무슨 미워할 자격이 있다고!”장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전부 죽어야 마땅하다.장소월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난 이미 한 번 죽었어. 그럼에도 여전히 증오가 남아있다면... 전연우! 나도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바로 러시아의 무르만스크였다.오로라 외, 사슴과 함께 찍은 셀카 사진도 있었다. 그는 검은색 패딩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마에 비집고 나온 앞머리엔 하얀 서리가 덮여 있기도 했다.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예쁘네. 고마워.」고마워란 말엔 강용이 보내온 모든 풍경 사진을 봤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사실 이곳 무르만스크엔 강용 혼자만 온 것이었다. 그의 뒤에 세워져 있는 텐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는 열다섯 시간을 거쳐 이곳에 도착했고 그 과정에서 여행객들을 만났다.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용, 밥 먹어.”(러시아 어)강용은 장소월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뒤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설 연휴.전연우와 백윤서는 유리창 곳곳에 풍선과 예쁜 전구를 달아놓았다. 얼마 되지 않아 집안에서 설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허리를 다쳤던 오 아주머니는 설 연휴에 맞춰 병원에서 장씨 저택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이번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도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있었지만 이대로 빈둥거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방을 메고 아래로 내려갔다.오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곧 식사 시간인데 어디에 가려고요?”장소월이 대답했다.“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가려고요.”“방학도 했는데 또 공부하려고요? 집에서 쉬어요. 만두가 곧 완성돼요.”“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도우미 한 명이 두꺼운 편지 봉투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지금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네요. 정말 신기해요. 그것도 러시아에서 보낸 거예요.”도우미의 말을 들은 장소월의 머릿속에 단번에 강용이 떠올랐다.장소월이 편지를 받아든 순간, 물건을 사러 갔던 전연우와 백윤서가 두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도우미가 그들을 맞이했다.“도련님.”전연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장소월은 보지 않아도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이게 그의 새해 선물인가?오 아주머
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순간 마음속에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 피어올랐다.기차 창밖엔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용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느리게 편집해 영상을 만들었다. 그녀가 편히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장소월은 그가 보내온 영상을 모두 보았지만 그녀의 갈증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다시 여러 차례 돌려보고 나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되어갔다.그녀는 도서관을 나서며 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왜? 무슨 일이야?”장소월이 말했다.“강용, 네가 보낸 편지 잘 받았어. 고마워! 사진과 영상 모두 다 봤어. 정말 예쁘더라.”핸드폰 너머 강용의 목소리는 갓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그래. 알았어.”그의 대답은 아주 차가웠다.“다른 용건 있어? 나 잘 거야.”“편집하지 않은 원본 볼 수 있을까?”“무슨 요구가 그렇게 많아. 없어! 끊어.”그 말을 끝으로 강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장소월은 이런 일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온 다음 다시 얘기해보면 될 일이다.마지막 수업인 두 시간의 피아노 수업이 끝났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소월은 문방구에 들러 사진을 보관할 사진첩을 구매했다.그때 돌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바닥에 떨어진 뒤 이내 녹아내렸다.도우미가 그녀에게 전화해 집에 손님이 왔으니 빨리 집에 돌아오라고 말했다.장소월은 걸음을 재촉해 집에 도착했다.마당엔 익숙한 차가 세워져 있었다.이건...장소월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평소 같지 않은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다.거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우미가 그녀를 반겼다.“아가씨.”강영수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도우미에게 건넸다.“제 방에 가져가 주세요. 조심하세요.”“네. 아가씨.”강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왔어?”장해진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그녀를 책망했다.“설인데 무슨 수업이야!
장소월은 오늘 기분이 꽤 좋았다. 그녀는 주방에 들어가 앞치마를 맨 뒤 냉장고에서 식자재들을 꺼내 직접 밤 케이크를 만들 준비를 했다.오 아주머니가 다가왔다.“제가 도울까요?”장소월이 거절했다.“아니에요. 몇 번이나 해봤으니 할 수 있어요. 아주머니도 바쁘잖아요.”“그래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절 불러요.”“네.”밤 케이크는 그리 어려운 음식이 아니다.그때 백윤서가 들어와 바삐 돌아치는 장소월을 보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소월아, 너 언제부터 밤 케이크를 만들 줄 알았던 거야? 나한테 가르쳐주면 안 돼?”“이것도 오 아주머니한테서 배운 거예요. 배우고 싶으면 내가 레시피를 보내줄게요. 어렵지 않아요.”“좋아! 아니면 지금 옆에서 네가 만드는 것을 볼까? 난 저분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겠어서 여기로 왔어. 내가 거들어줄까?”“그럼 일단 이 그릇을 씻어줘요. 이미 반은 완성했어요. 조심해요.”“그래.”백윤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를 거둬 올리고 물 온도를 체크했다.“소월아, 강 대표님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널 좋아하는 게 내 눈에도 보여.”장소월은 고개를 떨구고 푹 삶아진 밤을 열심히 으깨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올림피아드 팀은 어때요? 내가 다닐 때 고 선생님이 주신 문제집은 너무 어려워 아직도 절반 밖에 못 풀었어요.”백윤서가 대답했다.“괜찮아. 하지만 1반 공부 열기가 너무 뜨거워 매일 문제를 푸는 것 외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어.”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풀지 못하는 문제는 고 선생님이나 오빠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데 요즘 오빠가 귀가 시간이 늦어 그대로 두고 있어.”“너 내가 네 자리에 들어간 것 때문에 날 원망한 적 없어? 나 때문에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가지 못한 거잖아.”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언니를 왜 원망하겠어요. 승자는 생존하고 패자는 탈락하는 거, 그게 1반의 방식이에요. 성적만 좋으면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하죠. 어디든 길이 있
강영수가 한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맛있네.”이 모든 건 장해진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강씨 저택에서 머물렀을 땐 대부분 강영수가 그녀를 챙겼었다.“예전 집에선 이렇게 잘해주지 않았었잖아. 오늘은 왜 이렇게 친절해?”그녀를 바라보는 강영수의 눈동자에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깊은 바다의 소용돌이가 일렁였다.누가 봐도 순수하지 않은 눈빛이었다.강영수가 말한 집이란 물론 강씨 저택이다.장소월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충 얼버무렸다.“여긴 우리 집이고 넌 손님이잖아. 당연히 잘 대접해줘야지. 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어.”이번 식사는 장소월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식사였다. 장장 두 시간이나 지속되었으니 말이다.사람들은 이미 적잖게 취해 있었다. 장해진은 귀중하게 보관해두었던 몇천만 원짜리 와인과 위스키를 가져왔고 세 사람은 모든 술을 깡그리 마셔버렸다.장해진은 너무 취해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강영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그가 다리 병증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또 고질병이 발작하기 때문에 절대 과음을 해서는 안 된다.저녁 아홉 시.장소월은 강영수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은경애가 오 아주머니가 만든 해장국을 가져왔다.“오빠, 오빠도 술을 많이 마셨으니 해장국 먹어요.”“됐어. 난 방에 돌아가 잘 거야. 너도 일찍 쉬어.”백윤서가 듣기에 전연우의 목소리는 조금 차가웠다. 심지어 그녀를 보는 눈빛까지도 평소처럼 부드럽지 않았다.장소월 때문일까?하지만 오빠는 장소월을 좋아하지 않는다.이는 그녀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예전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하는 마음에 갖은 미친 행동을 할 때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아마... 그녀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알았어요. 오빠.”조금 전 밥상에선 큰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왜 기뻐하지 않는 걸까?장해진과 전연우는 술자리에서 일을 성사시키는 베테랑이나 다름없었다.장소월이 해장
“하지만 절대 그럴 필요 없어... 나한테 뭘 해주지 않아도 넌 내 최고의...”친구야!마지막 세 글자가 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밖에서 거대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금빛 찬란한 빛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오색찬란하게 피어나는 불꽃이 강영수의 준수한 얼굴을 밝혔다. 그는 멍하니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장소월은 몸을 돌려 다 하지 못한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됐어. 다 나으면 말하자.“먼저 해장국을 마시고 폭죽 보러 갈래?”강영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남원 별장 후원 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고 밤하늘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즐겼다.“난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앉아 불꽃놀이를 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어. 그래서 매일 불꽃놀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예전엔 항상 오 아주머니가 나와 함께...”강영수의 문신이 새겨진 손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사실 난 오래전에 널 봤었어.”“오래전? 언제?”장소월이 그를 쳐다보았다.장씨 저택 뒷마당 맞은 편이 바로 강영수의 별장이었다. 불빛 하나 없이 텅 빈 곳이라 밖에서 보면 고독과 어둠에 짓눌려있는 유령의 집 같았다.강영수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3년 전,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절, 너무 힘들어 숨쉬기 조차 힘들 때였어.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적막한 내 방에 네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 그날도 아마 설날이었지...”“넌 정말 잔뜩 신이 나 웃고 있었어. 대체 뭐가 널 그토록 기쁘게 만들었는지 호기심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어.”“넌 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하루종일 인형과 말을 하고 있더라고. 네 엄마가 남겨준 인형 같았어.”“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난 늘 네가 마당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3년 전 그는 몇 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었다. 그날도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유리 조각으로 팔목을 긋고는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못 하는 게 없지.”서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강한 그룹의 대표인 강영수다. 장소월은 그가 다시는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소월아... 너 계속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강영수가 그녀를 빨아들일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은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나 지금도 계속 네 옆에 있잖아?”“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장소월은 알아듣지 못한 척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뭐라고?”강영수가 손을 뻗어 그녀의 긴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얼굴을 쓸어내린 뒤 아래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장소월은 점점 더 그의 깊은 눈동자에 빠져들어갔다...그가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장소월의 눈을 막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차갑고 부드러운 남자의 입술이 느껴졌다.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고 머릿속은 온통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남자가 격렬히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바닥에 그려진 두 그림자가 친밀히 서로를 끌어안았다.오늘 밤의 달빛은 평소보다 더욱 은은하고 부드러웠다.강영수는 이미 십여 분 전 술이 깼지만 진봉은 강영수를 데리러 이곳에 왔다. 음주운전은 위험할뿐더러 하면 안 되는 것이니 말이다.장소월이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도우미들도 모두 퇴근해 희미한 불만 켜져 있었다.은옥매는 아직 의자에 앉아 아래턱을 괴고 애써 졸음을 참고 있었다.장소월이 걸어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아주머니, 이만 들어가 쉬세요.”은경애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어머, 어머... 오셨네요.”“전 올라갈게요. 얼른 들어가세요.”“네.”장소월은 복도 난간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대체 왜... 그녀는 응당 그를 밀어내야 했다...하지만 강영수의 그 말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었다.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구했던 것이다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