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수는 국을 마시며 덤덤한 표정이었고, 소매를 걷어붙인 팔의 반쪽에는 청색 문신이 드러났다. 국을 마실 때마다 구불구불 솟아오른 힘줄이 매우 신비롭고 보기 좋았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그게 큰 사모님 쪽에...”오 집사는 말하면서 장소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강영수: “괜찮아, 말해.”본가에 있는 오래된 집사가 병가를 내서, 오부연은 최근 본가 별장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큰 사모님께서 요즘 감기에 걸려서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하세요. 그리고 소월 아가씨도요...”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다가 이 말을 듣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강가의 큰 사모님이 장소월을 만나려 한다?감기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강영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소월에게 물었다.“할머니한테 가보고 싶어?”장소월은 손을 내려놓고 즉시 옷자락을 움켜잡았다.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나... 미안해.”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숟가락도 바닥에 떨어졌다. 장소월은 재빨리 주워들고 말했다.“학원 수업 지각할 것 같아. 난 먼저 가볼게.”장소월은 가방을 챙겼다.강영수도 서둘러 일어났다.“내가 데려다줄게.”“괜찮아, 기사님이 바로 문 앞에 계셔. 나 혼자 가도 돼. 고마워.”“소월아!”강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소월은 이미 사라졌다.모처럼 두 사람이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었는데, 강영수가 서두르며 몰아붙여서 장소월은 겁을 먹고 도망가버렸다.강영수는 좌절했다.그는 이마를 짚고, 장소월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장소월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항상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를 장가로부터 구해서 강가에 데려온 지금에도...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외출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강영수도 그저 그녀를 데리고 나가 다른 곳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하지만 그의 행동마다 장소월은 더욱
장소월은 도피형 인격으로, 정서적 고통에 직면하면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의 평온함을 달래기 위해 혼자 있는 것을 선택했다. 심지어 망각에 의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마음이 조금 편할 수 있었다.그녀도 마주하고 싶었지만, 주변환경과 분위기가 그녀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강영수가 끊임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내면의 세계에서 끌어내려고 해도, 장소월은 해낼 수 없었다.강가에서 밥을 먹는 것 외에 장소월은 대부분 시간을 혼자 방에 가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다.그림 그리기, 공부하기, 노래 듣기...아무도 만나지 않았다.천하일성.온주원은 그녀에게 풍악정에서 만든 디저트를 갖다 주었다.“이것 먹으면서 잠시 쉬어요.”장소월은 골프채를 내려놓고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케이크를 받았다.“감사합니다.”“오전 내내 우울해 보이던데,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지도 몰라요.”장소월은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알았어요?”온주원은 옆에 있는 텀블러를 들고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별로 어렵지 않아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고,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요즘 학업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가 봐요. 골프 말고도 다른 흥취반 수업도 많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온주원은 왼쪽 다리를 오른쪽에 걸치고 두 손을 무릎에 깍지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음. 누구라도 스트레스를 받겠네요. 그런데 그중에 소월 씨가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나요?”장소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건 아버지가 못하게 하시니.”“혹시 그림 좋아해요? 저한테 그림 한 장이 있는데 보시겠어요?”“무슨 그림이요?”온주원이 팔목을 들어 시간을 보니 이미 수업시간이 지났다.“따라오세요.”온주원은 장소월을 데리고 위층의 전용 사무실로 올
장소월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해요.”온주원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웃었다. 드디어 장소월이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보아하니 그 친구가 절 속이지 않았네요. 그런데 소월 씨는 어떻게 이 그림이 진짜라고 확신하죠?”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모르겠어요. 그저 이 그림이 저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고 있어요. 하지만 이 그림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그렇군요.”온주원은 조용히 웃었다.“소월 씨가 진짜라고 하니 믿을게요.”“보아하니 오빠는 그림을 선물한 사람의 생명의 은인인가 봐요? 아니면 이렇게 가치 있는 그림을 선물할 리가 없죠.”“부끄럽네요. 제 것이 아닌 물건을 받는 것도 신세를 지는 것이니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죠.”“그건 맞아요. 생명의 은인이 맞나요?”온주원은 고개를 숙이고 가로저었다.“그만하고 우리 밥 먹으러 가죠. 저도 여기 오랜만에 왔어요. 새로운 메뉴가 많이 나왔다던데, 같이 가서 먹어볼까요?”“좋아요.”장소월은 온주원에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13살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니 이미 5년 동안 알고 지냈다. 5년 동안 온주원은 줄곧 그녀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고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장소월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적절한 선에서 장소월을 기쁘게 했다.마치 오늘의 그림처럼 말이다.장소월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을 온주원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에 도착했다.늘 먹던 자리였다.이 시간에 식사하러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가 아니면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천하일성은 누구나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음식을 주문하고 장소월은 화장실에 갔다.어두컴컴한 복도, 군자죽란 룸에서 장소월은 기성은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장소월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전연우도 천하일성에 있을 줄 몰랐다.볼일도 보지 못하고 장소월은 재빨리 화장실을 나왔다.“오빠,
장소월은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다른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몸에서 느껴지는 이상함을 참으며 말했다.“고객이랑 식사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서 방해해?”“문자를 보내도 되잖아?”전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장소월은 말문이 막혔고, 한참 후에야 말했다.“날 보면 이런 짓밖에 더 해?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여자의 말이 끝나자, 남자는 발정 난 짐승처럼 그녀의 귀밑머리를 뒤척였다.양복에 어느 여자의 향수가 남았는지, 짙은 향수 냄새에 장소월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남자는 끈적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뭘 좋아하는데? 키스?”말하면서 남자는 장소월의 턱을 잡고 그녀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거침없이 키스했다. 방금 술을 마신 전연우의 입에서는 쓴맛이 느껴졌다.어린 소녀의 몸부림을 느끼며, 그의 짐승 같은 욕망은 더욱 고조되었다.장소월은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안돼... 여기선... 미쳤어!”“꽉 잡아. 10분이면 돼.”“... 안 돼.”“말들어!”남자는 그녀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또 키스했다.바지의 지퍼가 스르륵 열렸다.“전연우! 나쁜 놈!”만나자마자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정말 장소월을 기생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30분 후,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전연우가 그의 몸을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전연우는 천천히 그녀를 닦아주었다. 욕망을 표출하고 나니 술도 어느 정도 깨었다.순간, 전연우는 다리에 힘이 풀린 장소월을 안아 올렸다.장소월은 얼굴의 홍조가 가시기도 전에 두 손으로 전연우의 목을 잡았다.“어디 가려는 거야?”목소리는 힘이 없었다.“계속 여기 있다가 들키고 싶어?”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전연우는 그녀를 다시 다른 룸으로 데려갔다. 전연우가 손님을 접대하는 룸은 바로 옆이었다.장소월은 혼자 룸에 앉아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많은 음식이
“들어오세요.”장소월은 외부인에게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남자는 역시 놓아주지 않았다.들어온 사람은 기성은이었다.“아가씨 옷 세탁이 끝났습니다.”전연우는 덤덤하게 말했다.“놓고 가세요.”“네.”옷을 놓고 기성은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장소월은 몸을 비틀었다.“이거 놔. 옷 갈아입을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꼬집었다.“같이 밥 좀 먹어줘.”장소월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국 좀 먹을래?”숟가락이 그녀의 입에 닿았다.“나 배불러. 얼른 먹어.”“말 들어. 응?”위협적인 말을 하더니, 눈을 찌푸리고 마침내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었다.남자의 시선은 날씬하고 매끄러운 여자의 뒷어깨에 향했다. 은은하게 키스 자국이 있고, 브이넥 중간에도 꽤 많은 자국이 있었다. 전연우는 자신의 걸작에 아주 만족했다.“배도 불렀다면, 우리...”전연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불순한 눈빛을 느낀 장소월은 기회를 타서 그의 다리에서 도망쳤다.“천천히 먹어. 나 오늘 시간 없어.”씻은 옷을 집어 들고 장소월은 재빨리 화장실로 가서 문을 잠갔다.10분 후, 옷을 갈아입은 장소월은 누더기 옷을 전연우의 얼굴에 던졌다.남자는 짜증 내지 않고 얼굴의 옷을 움켜쥐고 말했다.“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남자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옷에는 여전히 여자의 여온과 달콤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갑자기 아랫배가 팽팽해지더니, 욕망이 더욱 커졌다.그런 남자의 모습에 장소월은 귀밑까지 빨개지고 뜨거웠다.“미친놈!”정말 변태가 아닌가!장소월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천하일성에서 뛰쳐나왔다.나가기 전, 장소월은 몸에 조금의 흠집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차에 올랐다.차를 타고 천성 빌딩에 도착했다.세 시간 정도 훈련하고, 도서관에 갔다.강용은 언제 도착했는지, 장소월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몇 세트의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방학해도 장소월은 여유시간이 별로 없어 진도가 뒤처졌다.강
“무슨 자리를 빼앗았는데?”장소월은 강용을 보며 물었다.강용은 그녀의 책을 두드렸고, 장소월은 그의 말을 알아차렸고,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윤서 언니 성적 잘 나왔잖아.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것도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으로 들어간 거야. 원래 성적이 좋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잖아?”“네가 윤서보다 못하진 않잖아?”장소월은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가고, 서울대 입학권을 갖는 건, 그녀의 학력에 금빛 이력을 더했을 뿐, 그녀가 팀을 나온다고 해서 그녀의 최종 목표가 변하는 건 아니었다.“너 윤서 언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아니야?”장소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당시 백윤서가 외국에서 돌아와 서울제2중학교로 갔을 때, 강용과 백윤서의 스캔들은 온 학교에 퍼졌었다.강용이 수업을 빼먹고 늘 백윤서의 곁을 맴돌았다.길에서, 술집에서, 그리고... 도원촌의 그 방 베란다에서 두 사람은 키스를 하지 않았던가?백윤서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을 때, 강용이 장소월을 어떻게 대했었는가?장소월의 목을 조르고 벽에 밀치고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다.만약 이 모든 일이 강용이 백윤서를 좋아한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면, 장소월은 더 이상 증거가 없었다.‘지금 젊은이들은 어리고 경솔해, 감정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니까!’“당연히 아니지!”“그래, 알았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제집을 풀었다.“나한테 더 궁금한 거 없어?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아?”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평온한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일이야.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나도 다른 사람 사생활에는 관심 없으니까. 널 서울대로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네 성적을 올리는 것 외에 다른 일들은 나랑 상관없어.”“사실 감정이라는 건 힘이 없어. 우리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너한테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거야. 그러
장소월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괜한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날씨 때문인지, 강가를 떠난 후 항상 숨이 차서 견딜 수 없었다.강영수의 메시지를 받지 못해서 서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에 얹혀사는 억압감 때문이었다.장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엄연한 자신의 집이었다.하지만 강가는 필경 남의 집이다.오늘 아침, 강영수가 단지 할머니를 보러 가자고 했을 뿐인데, 장소월이 도망갔으니,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강가에 며칠이나 묵었지만, 이렇게 간단한 일도 할 수 없다니...이런 일에 부딪히면, 장소월은 늘 혼자 헛된 생각을 했다.오부연: “도련님, 소월 아가씨 오셨어요.”강영수: “그래.”벤틀리는 문 앞에 멈추었다. 강영수는 짙은 체크 무늬 스웨터를 입고, 넓은 어깨와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손에 검은 우산을 들고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장소월은 그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비는 방금처럼 크게 내리지 않았다.“잘 다녀왔어?”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응.”강영수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거실 현관으로 들어가며 우선을 접어 오부연에게 건넸다.강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머리가 왜 이렇게 젖었어? 가서 마른 수건 좀 가져와.”“괜찮아, 별로 안 젖었어. 금방 마를 거야.”말이 끝나기 바쁘게 장소월은 재채기를 했다.강영수: “아줌마, 가서 생강차 좀 끓이세요. 너무 쓰면 안 돼요.”“네, 도련님.”장소월은 자신의 집에서 종래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요. 감기약 먹고 자면 돼요.”하인이 마른 수건을 가져오자 강영수는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었다.주변 사람들은 상황을 보고 모두 자리를 떠났고,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장소월은 긴장한 나머지 옷자락을 움켜쥐고, 우두커니 서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눈을 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아니야. 내 잘못이야. 사람 만나는 게 익숙하지 않아
9시,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잘 준비를 했다.갑자기 침대 옆 캐비닛에 충전하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장소월은 머리를 닦으며, 흰색 털 잠옷을 입고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눈빛은 차가워지더니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놓고 무시했다.상대방의 전화는 끊임없이 한 번 또 한 번 끈질기게 걸려왔다.다섯 번째 전화가 자동으로 끊겼다.‘띵.’메시지가 도착했다.장소월이 확인하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온몸이 싸늘한 추위에 휩싸인 듯 손이 떨리고 있었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더러운 사진이었다.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다시 휴대폰이 울리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도대체 어쩌자는 거야?”낮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뭐 하고 있었어?”“그런 사진을 보내고 고작 한다는 말이 이거야? 전연우, 진짜 한가해?”그쪽은 아주 조용했다. 이 시간이면 아마 서재에 있을 것이다.“보고 싶어...”전연우의 쉰 목소리가 약간 애틋하게 들려왔다.장소월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연우는 종래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네 향기가 그립고, 그리고... 네 몸도...”역시나! 전연우는 여전했다!“그만해! 나 지금 영수랑 같이 있어. 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다면 입 닥치라고!”“영수랑? 둘이 뭐해?”장소월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나한테 과외해주는 것 빼고 뭐가 더 있겠어? 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더러운 짓만 하는 줄 알아? 영수 나왔어, 끊을게.”장소월은 말을 마치고, 전연우가 보낸 사진을 삭제하고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가든 아파트.누군가 전연우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전연우는 동영상을 끄고 말했다.“들어와.”“오빠, 아주머니가 아직 아프셔서 내가 야식을 준비했어요.”백윤서는 말하면서 문제집 한 권도 들고 들어왔다.“그리고, 나 모르는 문제가 있는데 오빠가 가르쳐주면 안 돼요?”“어느 문제?”“이거. 몇 번이나 계산했는데 답이 안 나와요.”백윤서는 의자를 옆으로 끌어당겨 그의 왼쪽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
송시아에게 약을 발라주려 병실에 들어가려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겁을 먹고 문 앞에 멈춰 섰다.여자의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왜! 대체 왜 다들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한의준은 이마를 조금 찌푸릴 뿐 별다른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맺어왔지만 송시아는 여전히 한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의준은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자신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내가 말했잖아. 넌 편히 쉬면서 우리 아이를 낳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송시아의 눈엔 시뻘건 핏줄이 가득 서려 있었다.“우리 첫 아이도 그놈 손에 죽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그녀는 남자의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올려놓았다.“나도 당신만큼 아이를 원한다는 거 알고 있죠?”송시아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고,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남자의 과거는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단순히 그녀와 아이를 낳기 위해 찾아왔다. 송시아는 그의 일 처리 방식을 목격한 뒤에야 그가 그리 간단한 사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면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 어떤 지하 조직과도 마음대로 왕래한다.그토록 신비롭고 은밀한 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그건... 내가 하나씩 모두 갚아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더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병원에서 치료나 잘 받고 있어.”“언제까지 듣고 있을 거야! 들어와!”간호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천천히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이 흥분하신 것 같아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환자분, 지금 임신 2개월 째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치료하셨어요.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곧 퇴원할 수 있으실 거예요.”“뭐라고요? 임신했다고요?”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송시아의 눈동자가
향기로운 갈비찜 냄새에 소민아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보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신이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슬리퍼를 신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갈비를 들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신이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다가갔다.“천천히 먹어요. 다 민아 씨 것이에요. 아무도 빼어가지 않아요.”“이랑 씨, 저 밥 먹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밥 가져다줄게요.”신이랑은 그녀에게 밥이 가득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는 소민아의 습관까지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세 그릇을 먹어서야 공허했던 배를 채웠다.마지막으로 국 한 그릇까지 마시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신이랑이 그녀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더 먹을래요?”“이제 배불러요.”“너무 고마워요. 이랑 씨가 없었다면, 쓰러져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을 거예요.”“어젯밤 내가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어디에 갔었어요?”“병원에 갔었어요. 대표님께서 수술을 하셨는데 가족 사인이 필요해서요. 참, 집에 돌아왔을 때 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신이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민아 씨 기다리고 싶었어요. 밤새 안 들어오길래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어요.”소민아는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다시 삼켜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면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이랑이 해준 밥도 먹었고, 쓰러졌을 때 신이랑의 보살핌도 받았으니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참, 송시아 최근 뭐 하고 있는지 알아요? 대표님에게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왜 병원에 안 나타난 거예요?”신이랑이 말했다.“나도 민아 씨한테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송시아는 독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대요.”소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독약이라고요? 누가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