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그의 뒤를 따라 학교 문을 나설 때, 강영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늘 방학했지? 진봉한테 널 데리러 가라고 했어. 우리 같이 점심 먹을까?”장소월이 말했다.“나... 오 아주머니가 아프셔서 오빠 집에 가봐야 해.”“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가. 저녁에 데리러 갈게.”“응. 그래.”장소월이 전화를 끊고 차 옆에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려고 한 순간, 전연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앞에 앉아.”장소월은 그제야 쭈뼛거리며 조수석에 앉았다.돌연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장소월은 긴장감에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에게는 뼛속까지 깃든 두려움을 품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나청하의 죽음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집으로 가는 동안 그 누구도 나청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가든 아파트에 도착한 뒤, 전연우는 건물 아래 슈퍼 문 앞에 차를 세웠다.“내려. 마트 가야 해.”“난 안 갈래. 차에서 기다릴게.”“부탁이라도 해야 해?”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결국 차에서 내렸다.예전 그녀가 마트에 가자고 전연우를 졸랐을 땐 종래로 와준 적이 없다. 반면 백윤서와는 백화점 쇼핑도 종종 함께하곤 했었다.이제 그녀는 전연우에게 조금의 바람도 없었다.전연우는 해산물 구역으로 가 해산물을 가득 담은 뒤 채소와 과일도 꽤나 집었다.장소월은 옆에 서 있는 해산물 구역 책임자에게 양념장과 마늘을 요구했다. 이곳 해산물은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니 당연히 서비스를 조금은 넣어줄 수 있다. 처음으로 그와 함께 마트에 온 오늘, 장소월은 그는 정말 장을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변질된 것들, 시든 것들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하여 대부분은 모두 장소월이 고른 것이었다.이어 전연우는 그녀를 데리고 간식 구역으로 걸어갔다.“뭐 먹고 싶어?”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난... 이런 거 먹으면 안 돼.”장소월의 몸
“아니에요. 영수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 매일 등교, 하교 때마다 절 데려다준다니까요.”“그럼 마음을 놓을 수 있겠네요.”오 아주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도련님과 함께 온 거예요?”“네.”“밥 먹었어요? 내가 지금 만들어줄게요.”오 아주머니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장소월이 다시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제가 하면 돼요. 강씨 저택에서 심심할 때 저도 음식을 해봤어요.”“그럼 안 되죠. 아가씨가 도우미한테 밥상을 차려주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장씨 집안에서만 아가씨예요. 지금은 오빠 집에 있으니까 그저 장소월일 뿐이에요. 금방 할 수 있으니까 기다려요.”장소월은 방을 나선 뒤 잊지 않고 문을 닫았다.그녀는 주방에 들어가 앞치마를 입고는 냉장고에서 식자재를 꺼냈다. 시간이 늦었으니 간단한 국수 요리를 할 생각이었다.청경채와 고기를 썰었다.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온 전연우의 눈에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장소월의 모습이 들어왔다.그는 몇 번이나 이 광경을 꿈속에서 마주했다.매번 몸을 돌릴 때마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른거렸다.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남자는 마음속의 복잡함을 감추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윽...”장소월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칼에 베인 것이다.순간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수도꼭지에 가져갔다.차가운 물이 상처에 닿으니 배로 더해지는 통증에 그녀가 손을 움츠렸다.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렸다.“칼질도 못 하면서 사람을 보살피겠다고?”그는 힘이 너무 강했다. 장소월이 몇 번이고 손을 빼내려 했으나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영수가 날 주방에 가지 못하게 했어.”장소월이 말했다.“그래서 집에 오지 않은 거야?”전연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왜 그 집에 갔는지 알아? 영수는 종래로 나한테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이야.”날 해치는 건 전연우 당신뿐이거든.전연우는 돌연 무슨 생각이
한 시간이 지나서야 국수가 오 아주머니 앞에 차려졌다.전연우는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서 교복이 처참하게 찢긴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도가 지나쳤다. 단추는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두 뜯겨 있었다.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해 너무나도 가엾은 모습이었다.전연우를 본 장소월은 옆에 있던 베개를 그에게 던져버렸다.“전연우, 넌 짐승이야!”전연우는 단번에 베개를 손에 잡고는 말했다.“넌 내가 짐승이라도 좋아하잖아?”“지금은 아니야! 전연우! 이제 널 좋아하지 않아!”장소월이 울부짖었다.“좋아하고 안 하고는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강씨 집안에 들어갔다고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전연우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눈물에 젖어 얼굴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말했다.“강씨 집안? 계속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장소월, 네 성이 무엇인지 잊지 마!”장소월이 힘껏 그의 손을 밀쳐냈다. 목에 나 있는 붉은 상처는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전연우, 너 벌 받을 거야!”남자의 눈에 어둡고 위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고집스럽고 완강한 그녀의 모습 때문에 더더욱 짜증이 밀려왔다.그녀의 말은 전연우로 하여금 그 일을 떠올리게 했다.그녀가 다 알았을까?그럴 리가 없다.정말 알고 있다면 그와 한없이 멀어졌을 것이다.그 일은 죽을 때까지 깊은 땅속에 묻고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그녀는 장씨 집안 아가씨이고, 그는 장씨 집안에서 기른 입양아다.처음부터 그녀를 해치지 않고 평생 곁에 둔 채 자신을 의지하며 살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옥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널 데리고 갈 거야. 장소월... 넌 날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어. 아니야?”그의 말은 마치 저주처럼 그녀의 귀를 휘감았다.“소월이가 고분고분 말만 잘 듣는다면 이 오빠도... 널 좋아할 거야.”장소월이 반항했다.“네 사랑 따위 필요 없어! 더러워!”그녀가 이 공간에서 벗어나려
장소월은 의식을 상실한 낡은 인형처럼 공허한 눈으로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남자는 옷장에서 검은색 셔츠를 꺼내 침대에 던졌다.“옷을 벗어서 세탁해. 더러워진 침대 시트도 함께.”전연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얀색 양말을 의자에 걸쳐놓고는 방에서 나간 뒤 문을 닫았다.장소월은 더는 그의 방에 머무르지 않고 백윤서와 함께 썼던 방에 들어가 입고 있던 교복을 모두 벗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는 욕실에 들어가 더러워진 다리를 끊임없이 씻어냈다.절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남자가 성욕을 분출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던 광경이 떠울랐다.다행히 그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오늘 전연우가 그녀에게 했던 모든 건 그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악몽으로 자리 잡았다.만약 그가 정말... 그녀를 범했다면!그녀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장소월은 샤워를 마친 뒤 예전 이곳에서 입었던 옷을 입었다. 그의 물건이라면 손을 대는 것조차 역겨웠다.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전연우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얼굴로 국수를 밥상에 내려놓았다.“빨리 와서 밥 먹어.”“먹고 싶지 않아. 난 갈 거야.”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연우는 같은 말을 두 번 중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항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목소리가 무거워졌다.장소월은 이제 그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몸에서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장소월은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전연우가 젓가락을 건네주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손만 뻗어 젓가락을 받았다.국수 그릇엔 계란 후라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노른자를 좋아하지 않는다.전연우는 냄비 안에 남은 모든 국수를 그릇에 담았다. 두 사람이 밥상에 마주 앉아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는 순간이었다.장소월은 아주 느린 속도로 먹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해오는 그의 터치를 모두 참아내야만 했다.“다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 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옷도 사자. 그렇게 얇은
그들은 차에 앉아 백화점에 갔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곧바로 위층에 올라가는 줄 알았으나 전연우가 향한 곳은 1층 보석 구역이었다.전연우가 매장 앞에 도착하자 직원은 전연우를 아는 듯 말을 걸었다.“전 선생님, 저번 주에 예약했던 Cartier가 이미 도착했습니다. 마음에 드는지 보시죠.”이어 그녀의 시선이 장소월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바로 선생님의 여자친구군요! 이 보석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장소월이 다급히 부인했다.“오해예요. 전 동생이에요.”여자친구?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오빠, 나 먼저 올라갈게.”한 걸음을 채 내딛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이 전연우에게 잡혀버렸다. 그가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해봐.”“싫어!”장소월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미안해요. 요즘 투정을 부리고 있어서 그래요.”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누구에게든 겸손한 모습으로 미소를 띠고 말한다.그가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목걸이였다. 장소월은 이 브랜드를 패션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세계 10대 보석 회사에서 만든 신상 아이템이었는데 한정판이라 돈이 있어도 구매하기 어렵다. 지금 가격은 6천만 원 정도인데 10년 뒤면 그 가치가 몇억까지 치솟을 것이다.장소월은 그가 어디에서 이런 큰돈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설사 그에게 더 많은 돈이 있다고 해도 전혀 갖고 싶지 않았다.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기분이었다.조금 전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해놓고선 이제 이토록 값비싼 목걸이를 선물하려 하다니!대체 그녀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눈꼴이 시리게 이미 걸려있는 목걸이를 본 순간 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직원이 곧바로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전 선생님의 눈은 정말 정확하네요. 아
이 돈... 그녀는 반드시 잊지 않고 그에게 돌려줄 것이다.그에게 조금의 빚도 지고 싶지 않았다.전연우가 쇼핑백을 들고 걸어갔다. 두 사람은 조금 전의 일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장소월의 눈에 옆 가게의 스카프가 들어왔다. 부드러운 촉감에 정교한 바느질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가격표를 보니 이것 또한 몇십만 원이었다.전연우가 말했다.“사고 싶으면 사.”“됐어. 아주머니가 이 가격을 안다면 아까워 하고 다니지도 못할 거야.”장소월은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사지 않는 오 아주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장갑 두 개를 사기로 결정했다.하나는 빨간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이었다. 도합 십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라 별로 비싸지 않았다.쇼핑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소월은 30분도 되지 않아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백화점에서 나가려 했다.자신의 것은 부족한 것이 없었기에 사지 않았다.“연우 아저씨?”“소월아.”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인시윤이 뒤에 네 명의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을 대동하고 걸어왔다.인시윤은 부잣집 아가씨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발엔 하이힐을 신고 몸엔 올해 가장 유행하는 샤넬 원피스를 입고서 말이다.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발산되는 고급스러움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이런 우연이! 두 사람도 쇼핑하러 왔어요?”전연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아가씨.”인시윤이 자연스럽게 전연우의 팔짱을 꼈다.“내가 나오자고 할 땐 거절하더니 지금 딱 걸렸죠? 아직 식사 시간 전이니 같이 쇼핑이나 더 할래요? 잠깐 쇼핑하다가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소월아, 네 생각은 어때?”장소월은 인시윤이 더욱 끈질기게 전연우를 조르기를 바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난 다른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두 사람이 같이 쇼핑해! 오빠... 검은색 장갑을 나한테 줘.”인시윤은 장소월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말했다.“가지 마! 너 우리 오빠를 만
전연우는 장소월의 입술에 마약이라도 바른 것처럼 완전히 중독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더는 끊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부부생활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소월은 이미 그의 폭력성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 잠자리를 할 때도 애무 한번 없이 자신의 카타르시스만 느끼고 끝마치곤 했다.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그는 더더욱 흥분했다.전연우는 참지 못하고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의자에 밀어 넣었다.“안 돼! 여긴 주차장이야! 사람들이 올 거라고!”“그럼 빨리하면 되지!”“미쳤어. 너 진짜 미쳤어!”그녀는 똑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다른 쪽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조수석에 앉은 뒤 차 문을 닫고 긴 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주차장엔 차가 가득 주차되어 있었다. 누군가 온다면 분명 보게 될 것이다.장소월은 너무 힘들어 눈물까지 흘러내릴 뻔했다.“집에 가자. 집에 가서 해! 여기선 안 돼!”전연우는 성욕이 끓어올라 이미 바지 지퍼를 내리고 무서운 물건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는 장소월의 검은색 스타킹을 폭력적으로 뜯어내고는 자세를 고쳐잡고 앉았다.남자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고 편안한 표정으로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네가 말만 잘 듣는다면 넣지 않아...”그 나긋하고도 압박감 가득한 목소리에 장소월은 모욕감을 느껴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30분 뒤.전연우는 휴지를 뽑아 장소월의 옷에 남아 있는 액체를 닦아냈다. 그는 무기력하게 축 처져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그녀의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위를 맛보았다.이제 진짜 칼이나 총이 아니라도 그녀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제 만족해?”장소월은 나른해진 팔을 들어 올려 온 힘을 다해 그의 뺨을 내리쳤다.“전연우, 난 네 성욕을 해결해주는 도구가 아니야.”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전연우는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내가 강씨 저택에 데려다줄게.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그에게 있어 그녀는 한순간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돌연 마음을 돌린 것이 내키지 않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건 호감도 아니고,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잠시 달아오른 소유욕일 뿐이다.앞으로 백윤서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시윤이 있다. 또한 어쩌면... 송시아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신선함이 사라지면 그녀는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다.그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있든, 얼마나 많은 백윤서가 있든 상관없다.장소월은 절대 다시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평생 혼자 외로이 늙어갈지라도 말이다...그녀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이다.구영관.두 사람이 들어가자 종업원이 전연우가 예약한 룸으로 안내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가 또 더러운 짓을 할까 봐 두려워진 장소월은 다급히 종업원에게 말했다.“룸은 필요 없어요. 홀에서 먹으면 돼요.”전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홀에 앉죠.”“두 분 절 따라오세요.”두 사람은 홀 안 창가 쪽 위치에 마주 앉았다.종업원이 말했다.“이건 보리차입니다. 맛보세요.”장소월이 대답했다.“감사합니다.”전연우가 메뉴판을 살펴보니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집밥이었다.“네 추천으로 온 곳이니 뭘 먹을지 골라봐.”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메뉴판을 훑어보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개를 주문했다.종업원이 주문서를 작성하다가 물었다.“손님, 두 분이 드시기에 적은 양 아닐까요?”장소월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이 먹을 건 직접 주문하라고 하세요.”“네. 손님.”전연우도 대충 매운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두 사람의 입맛은 많이 달랐다. 종업원이 자리를 뜬 뒤.“왜 그래?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장소월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전연우, 난 백화점도 갔고 지금 이렇게 밥 먹으러도 왔어. 대체 뭘 더 원하는데? 난 처음부터 말했어. 난 오빠한테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다고. 장씨 집안을 갖고 싶다면 가져. 난 하나도 아쉬울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