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어르신은 평소 시간이 나면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해, 큰 정원을 만들어 다양한 종류의 꽃과 식물을 심었다.집 옆에는 5~6백 년 된 은행나무도 있었다.100년 전부터 강씨 가문은 상인이었고, 그 후 난세,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백 년 동안 집안이 쇠퇴하지 않았다.강가는 항상 규칙을 중시했고, 집안의 사람들은 반드시 본가에 함께 살아야 했다.유독 강영수만 많은 규칙을 어기며 살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강씨 집안의 둘째 어르신이 강영수를 아끼기 때문이다.강영수는 가문의 종손이고, 지금은 가업을 잇고 있으니 둘째 어르신은 늘 강영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핏줄인 것 외에도 강영수는 가문을 지탱할 수 있는 후계자였기 때문이다.강영수는 저택의 본채에서 가장 가까운 별채에 머물렀다.둘째 어르신은 조용하고 아늑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장소월은 강영수가 자신을 남원별장으로 데려가리라 생각했다.뜻밖에도 도착해보니 강가의 본가였다.장소월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가의 본가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다니. 산과 물을 끼고 있어 환경이 좋고 주변에 많은 보안 요원이 24시간 수시로 지키고 있었다.장소월은 놀라는 한편, 또 안타깝기도 했다.전생에 전연우가 강용을 이용해 강가를 얻은 후, 강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어쩌면 이곳도...당시 그녀는 수백 년의 사업을 가진 명문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큰 화재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보았다.전연우는 불과 3년 만에 강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이번 생에는 전생의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전연우는 잔인한 사람이었다.지금 장소월이 집안에서 도망쳤으니, 전연우는 또 어떤 수단으로 그녀에게 복수할까?“여기... 맘에 들어?”장소월은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천하 일성 열 개를 합쳐놓은 듯했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사는 곳은 강영수의 눈에 그저 낡은 벽돌집에 불과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예뻐.”그녀도 한때 이 집에 버금갈 정도로 호화로운 집에 살
그때 진봉이 다가갔다.“대표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장소월의 목에 걸려있는 달 모양의 목걸이를 본 강영수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씩 올라갔다.“알았어. 그럼 난 먼저 회사에 갈 테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푹 쉬고 있어.”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강영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부연은 생각에 잠겼다.그는 장소월이 집에 남게 된 것이 내심 기뻤다. 도련님의 병은 완치되기 힘든 병이다. 강씨 집안에서 갖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들 몇 개월도 살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몸의 병을 치료한다고 해도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는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없다.도련님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장소월 밖에 없을 것이다.오부연은 도련님의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 그 여자가 아닌 장소월이길 바랐다!오부연이 말했다.“도련님께서 아가씨에게 방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절 따라오시죠!”장소월이 오부연과 함께 가정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열려있었다.“이곳이 바로 소월 아가씨의 방입니다. 도련님의 방은 바로 옆이고요.”“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을까 봐 걱정돼 방안 모든 물건을 장씨 집안 그래도 배치해 두었습니다.”장소월이 한 바퀴 훑어보니 확실히 오부연의 말대로였다. 그림을 건 위치까지도 완전히 일치했다.그녀가 장씨 저택에서 쓰던 물건을 모두 가져온 건가?저 침대도...?“드레스룸도 있어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바꿔드릴게요.”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편히 쉬세요. 무슨 일 있으면 분부하시고요.”“네.”오부연이 자리를 떠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들어가 한 바퀴 훑어보았다. 장씨 집안에서의 방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지만 그 풍경을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다.장씨 집안을 떠날 때부터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그분 봤어요? 전에 도련님과 사귀었던 분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갔다.핸드폰을 켜고 살펴보니 강용의 문자메시지는 저번 주에 멈춰있었다.제대로 공부는 하고 있을지...백윤서는 저번 기말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1반에 오게 되었다. 강용의 성적은 어땠을까?장소월은 그의 시험 성적이 궁금해 문자를 보냈지만 몇 분을 기다렸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그녀가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꺼졌던 화면에 불이 밝혀졌다. 강용의 답장인 줄로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소녀 한 명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가 도착해 있었다.오늘 대명산에 눈사태가 일어나 스키를 즐기러 갔던 사람들이 안에 갇혀버렸다고 한다.32명의 손님은 다쳤고, 8명은 불행하게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 명은 행방불명이라 아직까지도 경찰에서 총력을 다해 찾고 있다.그 사람은 20세 연극영화과 학생 나청하였다. 누군가 그녀를 찾는다면 그 즉시 경찰에게 연락하라는 기사였다.나청하?장소월은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 사진을 살펴보았다.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틀림없이 저번에 스키장에서 만난 전연우의 여자친구였다.갑자기 죽었다고?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올랐다.장소월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녀는 더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저녁 10시.강영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들어왔다. 하인 아주머니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도련님.”“소월이는요?”“소월 아가씨는 약을 드시고 잠드셨습니다.”강영수가 손을 휘저으며 하인을 보냈다.밤이 늦었으니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주방에 들어가 2000만 원짜리 위스키 마개를 따고 술잔에 절반 정도 부었다. 요즘은 수면제를 먹지 않으니 알코올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열한 시 반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다.그는 굳게 닫혀있는 장소월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이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가 항상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
강한 그룹 대표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학교 문 앞은 전문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아이를 데려다주는 학부모와 차들로 붐비었다. 강한 그룹의 차를 알아본 순간, 모두 양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제운 고등학교 학생들 중 장소월이 강씨 집안 사생아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강씨 집안 후계자와도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강한 그룹 대표가 친히 장소월을 학교에 데려다줬으니, 이는 그녀는 이미 강씨 집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감히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장소월은 불편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나 먼저 들어갈게.”강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저녁 수업이 끝나면 데리러 올게.”“그래.”장소월은 야간자습을 해야 했기에 학교를 마치는 시간과 그의 퇴근 시간이 거의 비슷해졌다. 때문에 마땅히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마침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인시윤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못마땅함을 감출 순 없었다.저번 그녀와의 일 때문에 장소월이 자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려워진 강영수는 인씨 집안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단단히 경고했다.그녀는 한 번 혼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강용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어머니는 그녀더러 오빠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저번 오빠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장소월 덕분이었다.그녀는 이미 강용 때문에 장소월과 얼굴을 붉혔다.인시윤은 이제 와 어떻게 장소월에게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오빠, 소월이가 강가네에 갔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학교에 올 거예요?”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건 시윤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요. 지각하면 안 되잖아요.”“알겠어요. 오빠.”장소월은 6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강용은 여느 때처럼 반팔 티셔츠를 입고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책
교실은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올림피아드 팀 그녀 자리에 백윤서가 들어갔다는 것이었다.그 사실이 장소월을 가장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이제 와보니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1반의 진도는 아주 빨라 교과서의 내용은 모두 끝마쳤고 학생들은 복습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그녀는 며칠 동안 등교하지 못했기에 그동안 뒤처졌던 내용을 빨리 배워야 했다.그보다 더 머리가 아픈 건 강용 문제였다.백윤서도 1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도를 따라가야 했기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오전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에야 백윤서가 장소월을 찾아왔다.“소월아, 함께 밥 먹으러 가자!”장소월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난 잠시 뒤에 갈게요. 먼저 가요!”백윤서가 바삐 움직이는 장소월의 두 손을 보며 물었다.“공부 계획표? 이거 뭐야?”장소월이 설명했다.“강용한테 줄 거예요. 성적이 잘 나오지 못했더라고요. 과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되잖아요.”“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또 수업이 있어서!”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계획표를 만든 건 강용으로 하여금 목표를 세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모두 다 완성한 뒤 그녀는 6반으로 향했다.오늘은 약간 흐린 날씨였는데 포슬포슬 빗방울까지 떨어졌다.텅 빈 교실에 강용 혼자만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그녀가 걸어가 강용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강용, 나랑 도서관에 가자.”강용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날 귀찮게 하지 마.”영 석연치 않은 말투였다.장소월이 그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열은 안 나는데?”“강용,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었어? 너 서울대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계속 이러면 서울대 문턱도 못 밟아...”그녀의 잔소리에 완전히 잠이 깬 강용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의 눈에 그의 눈 밑에 나 있는 붉은 상처가 들어왔다.그는 이마를
강용도 도착했다.역시 그 말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나 보다.강용은 오자마자 책가방을 책상에 내던졌다.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장소월이 잡아 옆 의자에 놓아두었다.“이왕 왔으니까 시작하자.”강용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먼저 수업할래, 아니면 얘기할래?”“네 생각엔?”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엔 아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도서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가방에서 화첩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이 화첩을 본 사람은 날 제외하고 네가 처음이야.”강용은 한장 한장 펼쳐보았다. 모두 연필로 그린 풍경화였고 그림마다 장소가 표기되어 있었다.“어때?”“꽤 볼만 하네.”“뭐 부족하다가 생각되는 거 없어?”“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이 장소들은 모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야. 또한 내가 서울대에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 그림에 색을 입히지 않은 건 언젠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조금씩 칠하기 위함이야.”“나 정말 가 보고 싶어.”“강용, 이 세상엔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나한테 있어 감정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야. 난 혼자라도 외롭지 않아. 오히려 곁에 아무도 없는 자유로움이 좋아.”“그게 우정이든 아니면... 사랑이든!”“강용, 내 말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바라보는 건 앞으로의 먼 미래이지, 지금 눈앞의 것이 아니야!”“네가 말한 강씨 집안... 확실히 보통 사람은 닿을 수도 없는 곳이야. 또한 네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하지만 나한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어. 난 지금 천천히 내 미래와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고.”“강용, 사실 너와 난 똑같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어... 우린 이러면 안 돼...”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아무런 목표도, 영혼도 없는 미라가 아니다.“지금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장소월이 수학 문제집을 펴 그의
강용수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결정을 존중한다고 얘기했잖아. 이건 나와 강용 사이의 일이니까 너랑은 상관없어.”장소월은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강용이든 강영수든 말이다.그녀는 오직 자신만 사랑할 것이다!“고마워!”강영수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뭐가 고맙다는 거야?”장소월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알면서.”강영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래.”차에 올라 에어컨을 켜니 찬 공기가 금세 사라졌다.“나 오 집사한테 야식을 준비해두라고 할 거야. 너 뭐 먹고 싶어?”“오 아주머니가 준 만두가 좋겠어. 오랫동안 냉동해두면 맛없어져.”“그래. 다른 건?”“충분해. 저녁에 너무 많이 먹으면 살쪄.”강영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 대로 할게.”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신을 차려보니 강씨 저택에서 머문 지 어느덧 2주나 지나갔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나청하의 일이었다.지금까지 부러진 팔 하나를 찾았는데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나청하, 그녀의 신분을 확정했다.장소월의 예상대로 나청하는 죽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살고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허망하게 죽다니.그녀는 전연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는 그런 독한 짓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소월아?”기사를 찾아보고 있던 장소월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백윤서가 핸드폰을 주워 그녀에게 돌려주었다.“뭘 그렇게 집중해서 본 거야? 소월아, 곧 겨울 방학이야. 이번 겨울 캠프에 갈 거야? 선생님이 의향이 있으면 빨리 신청하래.”“난... 아직 고민 중이야.”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나 화장실에 다녀올게.”장소월은 문을 나서는 순간 한 사람과 부딪혔다.“으악!”통증에 이마를 어루만졌다.“아직도 앞을 안 보고 다녀?”이 목소리!
장소월이 그의 뒤를 따라 학교 문을 나설 때, 강영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늘 방학했지? 진봉한테 널 데리러 가라고 했어. 우리 같이 점심 먹을까?”장소월이 말했다.“나... 오 아주머니가 아프셔서 오빠 집에 가봐야 해.”“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가. 저녁에 데리러 갈게.”“응. 그래.”장소월이 전화를 끊고 차 옆에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려고 한 순간, 전연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앞에 앉아.”장소월은 그제야 쭈뼛거리며 조수석에 앉았다.돌연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장소월은 긴장감에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에게는 뼛속까지 깃든 두려움을 품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나청하의 죽음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집으로 가는 동안 그 누구도 나청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가든 아파트에 도착한 뒤, 전연우는 건물 아래 슈퍼 문 앞에 차를 세웠다.“내려. 마트 가야 해.”“난 안 갈래. 차에서 기다릴게.”“부탁이라도 해야 해?”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결국 차에서 내렸다.예전 그녀가 마트에 가자고 전연우를 졸랐을 땐 종래로 와준 적이 없다. 반면 백윤서와는 백화점 쇼핑도 종종 함께하곤 했었다.이제 그녀는 전연우에게 조금의 바람도 없었다.전연우는 해산물 구역으로 가 해산물을 가득 담은 뒤 채소와 과일도 꽤나 집었다.장소월은 옆에 서 있는 해산물 구역 책임자에게 양념장과 마늘을 요구했다. 이곳 해산물은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니 당연히 서비스를 조금은 넣어줄 수 있다. 처음으로 그와 함께 마트에 온 오늘, 장소월은 그는 정말 장을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변질된 것들, 시든 것들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하여 대부분은 모두 장소월이 고른 것이었다.이어 전연우는 그녀를 데리고 간식 구역으로 걸어갔다.“뭐 먹고 싶어?”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난... 이런 거 먹으면 안 돼.”장소월의 몸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