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반쯤, 강영수는 병원을 떠났다.진봉은 강영수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번진 것을 보고 장소월과 얘기를 잘 나눈 것으로 짐작했다.강영수가 먹고 있는 약보다 오히려 장소월이 말 한마디가 더 효과가 좋았다.도련님이 이렇게 그 여자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쩌면 좋았다.강영수는 주머니에서 진통제 몇 알을 꺼내 먹었다. 요 며칠 날씨가 추워서 그의 두 다리는 때때로 발작을 일으켰다.“오 집사한테 말해서 가문의 본가에 방 한 칸을 준비하라고 해. 모든 디자인은 소월이 취향대로 하고.”진봉은 화들짝 놀랐다.“아가씨 본가로 들어오세요? 그럼 사모님한테는 어떻게 말씀드릴까요?”“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 회사로 돌아가.”“네, 대표님.”장소월이 장가에서 나오는 건, 강영수에게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자신의 친여동생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도, 나서서 구해주기는커녕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 망신을 주다니.전연우는 아주 독한 사람이었다.장해진은 늑대 한 마리를 키운 격이었다.하지만, 장해진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안다면, 오랫동안 키운 양아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까?병원에서.장소월은 침대에 조용히 앉아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불빛이 눈 밑을 비추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자신이 맞는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가 가고 있는 길은 자칫 잘못하면 몸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전연우, 내가 떠나면, 당신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겠네!10시가 다 되어서야 장소월은 잠이 들었다.어두컴컴하고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에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고, 그윽한 눈으로 침대에 잠들어 있는 사람을 보았다.“오늘 성은이 말고 또 누가 왔다 갔죠?”오 아주머니가 대답했다.“강 씨 성을 가진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보러 오셨어요. 두 분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떠나고 아가씨가 침대에 앉아 계속 멍하니 있었어요. 그리고 학교 일은 이미 다 해결했다고, 다음 주에 아가씨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고
“퇴원이요?”오 아주머니와 백윤서는 모두 어리둥절하여 오부연을 보고 있었다. 전연우를 제외하고...장소월은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전연우의 깊은 눈동자를 무시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윤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소월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오부연이 설명했다.“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만든 음식을 좋아해서, 특별히 아가씨를 강가에 모셔 도련님을 돌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일은 사전에 장해진 어르신과 얘기를 마쳤고, 어르신도 동의한 일입니다.”오 아주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누구를 돌봐요? 아가씨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어르신께서 동의하실 수 있어요?”장해진이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씨 집안이 아니라 다른 집안이었어도 동의했을 것이다.장소월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며 자란 건, 장해진이 그녀를 거래의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다.강씨 가문은 서울의 권력자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진정한 명문 가문이었다.장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장해진이 강씨 가문의 신발을 닦아주는 것도 가당치 않은데, 강영수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사람을 달라고 하니, 장해진은 어찌 안 줄 수 있겠는가?강씨 집안이 말 한마디만 해도 장해진은 당장 딸을 내어줄 수 있었다.“장씨 집안의 일에 언제부터 하인이 나섰죠?”오부연은 차갑게 말했다.장소월은 오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조만간 돌아갈게요.”오 아주머니는 전연우를 힐끗 쳐다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휠체어를 준비해드릴까요?”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옷만 갈아입고 나갈게요.”“네, 도련님은 밖에서 통화 중이십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부연이 나가고 나서야 백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가문의 집사는 역시나 기질이 남달랐다.시종일관 전연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장소월은 그를 보지 않고도 그의 얼굴이 이미 잔뜩 일그
둘째 어르신은 평소 시간이 나면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해, 큰 정원을 만들어 다양한 종류의 꽃과 식물을 심었다.집 옆에는 5~6백 년 된 은행나무도 있었다.100년 전부터 강씨 가문은 상인이었고, 그 후 난세,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백 년 동안 집안이 쇠퇴하지 않았다.강가는 항상 규칙을 중시했고, 집안의 사람들은 반드시 본가에 함께 살아야 했다.유독 강영수만 많은 규칙을 어기며 살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강씨 집안의 둘째 어르신이 강영수를 아끼기 때문이다.강영수는 가문의 종손이고, 지금은 가업을 잇고 있으니 둘째 어르신은 늘 강영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핏줄인 것 외에도 강영수는 가문을 지탱할 수 있는 후계자였기 때문이다.강영수는 저택의 본채에서 가장 가까운 별채에 머물렀다.둘째 어르신은 조용하고 아늑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장소월은 강영수가 자신을 남원별장으로 데려가리라 생각했다.뜻밖에도 도착해보니 강가의 본가였다.장소월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가의 본가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다니. 산과 물을 끼고 있어 환경이 좋고 주변에 많은 보안 요원이 24시간 수시로 지키고 있었다.장소월은 놀라는 한편, 또 안타깝기도 했다.전생에 전연우가 강용을 이용해 강가를 얻은 후, 강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어쩌면 이곳도...당시 그녀는 수백 년의 사업을 가진 명문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큰 화재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보았다.전연우는 불과 3년 만에 강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이번 생에는 전생의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전연우는 잔인한 사람이었다.지금 장소월이 집안에서 도망쳤으니, 전연우는 또 어떤 수단으로 그녀에게 복수할까?“여기... 맘에 들어?”장소월은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천하 일성 열 개를 합쳐놓은 듯했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사는 곳은 강영수의 눈에 그저 낡은 벽돌집에 불과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예뻐.”그녀도 한때 이 집에 버금갈 정도로 호화로운 집에 살
그때 진봉이 다가갔다.“대표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장소월의 목에 걸려있는 달 모양의 목걸이를 본 강영수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씩 올라갔다.“알았어. 그럼 난 먼저 회사에 갈 테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푹 쉬고 있어.”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강영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부연은 생각에 잠겼다.그는 장소월이 집에 남게 된 것이 내심 기뻤다. 도련님의 병은 완치되기 힘든 병이다. 강씨 집안에서 갖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들 몇 개월도 살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몸의 병을 치료한다고 해도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는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없다.도련님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장소월 밖에 없을 것이다.오부연은 도련님의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 그 여자가 아닌 장소월이길 바랐다!오부연이 말했다.“도련님께서 아가씨에게 방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절 따라오시죠!”장소월이 오부연과 함께 가정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열려있었다.“이곳이 바로 소월 아가씨의 방입니다. 도련님의 방은 바로 옆이고요.”“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을까 봐 걱정돼 방안 모든 물건을 장씨 집안 그래도 배치해 두었습니다.”장소월이 한 바퀴 훑어보니 확실히 오부연의 말대로였다. 그림을 건 위치까지도 완전히 일치했다.그녀가 장씨 저택에서 쓰던 물건을 모두 가져온 건가?저 침대도...?“드레스룸도 있어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바꿔드릴게요.”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편히 쉬세요. 무슨 일 있으면 분부하시고요.”“네.”오부연이 자리를 떠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들어가 한 바퀴 훑어보았다. 장씨 집안에서의 방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지만 그 풍경을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다.장씨 집안을 떠날 때부터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그분 봤어요? 전에 도련님과 사귀었던 분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갔다.핸드폰을 켜고 살펴보니 강용의 문자메시지는 저번 주에 멈춰있었다.제대로 공부는 하고 있을지...백윤서는 저번 기말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1반에 오게 되었다. 강용의 성적은 어땠을까?장소월은 그의 시험 성적이 궁금해 문자를 보냈지만 몇 분을 기다렸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그녀가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꺼졌던 화면에 불이 밝혀졌다. 강용의 답장인 줄로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소녀 한 명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가 도착해 있었다.오늘 대명산에 눈사태가 일어나 스키를 즐기러 갔던 사람들이 안에 갇혀버렸다고 한다.32명의 손님은 다쳤고, 8명은 불행하게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 명은 행방불명이라 아직까지도 경찰에서 총력을 다해 찾고 있다.그 사람은 20세 연극영화과 학생 나청하였다. 누군가 그녀를 찾는다면 그 즉시 경찰에게 연락하라는 기사였다.나청하?장소월은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 사진을 살펴보았다.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틀림없이 저번에 스키장에서 만난 전연우의 여자친구였다.갑자기 죽었다고?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올랐다.장소월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녀는 더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저녁 10시.강영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들어왔다. 하인 아주머니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도련님.”“소월이는요?”“소월 아가씨는 약을 드시고 잠드셨습니다.”강영수가 손을 휘저으며 하인을 보냈다.밤이 늦었으니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주방에 들어가 2000만 원짜리 위스키 마개를 따고 술잔에 절반 정도 부었다. 요즘은 수면제를 먹지 않으니 알코올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열한 시 반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다.그는 굳게 닫혀있는 장소월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이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가 항상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
강한 그룹 대표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학교 문 앞은 전문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아이를 데려다주는 학부모와 차들로 붐비었다. 강한 그룹의 차를 알아본 순간, 모두 양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제운 고등학교 학생들 중 장소월이 강씨 집안 사생아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강씨 집안 후계자와도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강한 그룹 대표가 친히 장소월을 학교에 데려다줬으니, 이는 그녀는 이미 강씨 집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감히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장소월은 불편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나 먼저 들어갈게.”강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저녁 수업이 끝나면 데리러 올게.”“그래.”장소월은 야간자습을 해야 했기에 학교를 마치는 시간과 그의 퇴근 시간이 거의 비슷해졌다. 때문에 마땅히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마침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인시윤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못마땅함을 감출 순 없었다.저번 그녀와의 일 때문에 장소월이 자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려워진 강영수는 인씨 집안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단단히 경고했다.그녀는 한 번 혼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강용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어머니는 그녀더러 오빠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저번 오빠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장소월 덕분이었다.그녀는 이미 강용 때문에 장소월과 얼굴을 붉혔다.인시윤은 이제 와 어떻게 장소월에게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오빠, 소월이가 강가네에 갔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학교에 올 거예요?”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건 시윤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요. 지각하면 안 되잖아요.”“알겠어요. 오빠.”장소월은 6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강용은 여느 때처럼 반팔 티셔츠를 입고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책
교실은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올림피아드 팀 그녀 자리에 백윤서가 들어갔다는 것이었다.그 사실이 장소월을 가장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이제 와보니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1반의 진도는 아주 빨라 교과서의 내용은 모두 끝마쳤고 학생들은 복습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그녀는 며칠 동안 등교하지 못했기에 그동안 뒤처졌던 내용을 빨리 배워야 했다.그보다 더 머리가 아픈 건 강용 문제였다.백윤서도 1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도를 따라가야 했기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오전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에야 백윤서가 장소월을 찾아왔다.“소월아, 함께 밥 먹으러 가자!”장소월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난 잠시 뒤에 갈게요. 먼저 가요!”백윤서가 바삐 움직이는 장소월의 두 손을 보며 물었다.“공부 계획표? 이거 뭐야?”장소월이 설명했다.“강용한테 줄 거예요. 성적이 잘 나오지 못했더라고요. 과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되잖아요.”“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또 수업이 있어서!”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계획표를 만든 건 강용으로 하여금 목표를 세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모두 다 완성한 뒤 그녀는 6반으로 향했다.오늘은 약간 흐린 날씨였는데 포슬포슬 빗방울까지 떨어졌다.텅 빈 교실에 강용 혼자만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그녀가 걸어가 강용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강용, 나랑 도서관에 가자.”강용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날 귀찮게 하지 마.”영 석연치 않은 말투였다.장소월이 그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열은 안 나는데?”“강용,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었어? 너 서울대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계속 이러면 서울대 문턱도 못 밟아...”그녀의 잔소리에 완전히 잠이 깬 강용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의 눈에 그의 눈 밑에 나 있는 붉은 상처가 들어왔다.그는 이마를
강용도 도착했다.역시 그 말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나 보다.강용은 오자마자 책가방을 책상에 내던졌다.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장소월이 잡아 옆 의자에 놓아두었다.“이왕 왔으니까 시작하자.”강용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먼저 수업할래, 아니면 얘기할래?”“네 생각엔?”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엔 아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도서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가방에서 화첩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이 화첩을 본 사람은 날 제외하고 네가 처음이야.”강용은 한장 한장 펼쳐보았다. 모두 연필로 그린 풍경화였고 그림마다 장소가 표기되어 있었다.“어때?”“꽤 볼만 하네.”“뭐 부족하다가 생각되는 거 없어?”“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이 장소들은 모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야. 또한 내가 서울대에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 그림에 색을 입히지 않은 건 언젠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조금씩 칠하기 위함이야.”“나 정말 가 보고 싶어.”“강용, 이 세상엔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나한테 있어 감정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야. 난 혼자라도 외롭지 않아. 오히려 곁에 아무도 없는 자유로움이 좋아.”“그게 우정이든 아니면... 사랑이든!”“강용, 내 말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바라보는 건 앞으로의 먼 미래이지, 지금 눈앞의 것이 아니야!”“네가 말한 강씨 집안... 확실히 보통 사람은 닿을 수도 없는 곳이야. 또한 네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하지만 나한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어. 난 지금 천천히 내 미래와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고.”“강용, 사실 너와 난 똑같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어... 우린 이러면 안 돼...”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아무런 목표도, 영혼도 없는 미라가 아니다.“지금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장소월이 수학 문제집을 펴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