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데리러 온 거라면 헛걸음했어. 난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게 좋아.”장소월이 그린 것은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금빛 햇살이 꽃밭을 따스하게 비추고 해바라기들은 햇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광명과 희망이 충만한 광경이었다.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해준다.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왕왕 먹구름이 빼곡히 박혀있고 폭풍우가 내리는 밤하늘을 그리곤 한다. 하지만 장소월은 내면에서의 밝고 찬란한 희망만 끄집어내 그림으로 표현해냈다.그녀의 그림 실력은 꽤나 빼어났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어떠한 미술학교든 갈 수 있을 것이다.장해진은 그녀가 붓을 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언제 이런 실력을 키웠는지 전연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이내 장소월은 종래로 누군가의 강요를 듣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지금 나와 돌아갈래, 아니면 사람들을 불러올까?”전연우는 소파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학부모 회의 통지서와 캠프 신청서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정보를 작성했고 남은 건 학부모 사인 하나뿐이었다.전연우의 얼굴에 서늘함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돌아가 당신의 백윤서를 괴롭힐까 봐 두렵지도 않아?”장소월은 그림에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연우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당신의 간섭만 없다면 난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낼 수 있어.”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다.학교에 소문을 내고 사진을 올린 일은 전연우를 제외하면 아무도 하지 못한다.지금 그녀는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건달들과 몸을 섞은 더러운 물건이 되어있다.하여 학교에서도, 올림피아드 팀에서도 쫓겨났다.그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그 말에 기름을 따르던 강용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장소월은 조심하지 않아 유리에 손끝을 베었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덤덤한 얼굴로 휴지로 닦아내고는 말했다.“하지만 강용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 오빠에 비하면 강용은 그저 성격이 조금 거칠 뿐이야. 친구 사이에 투덕거리는 건 흔한 일이지.”그는 손과 발이 부러져 몇 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쁜 짓을 했음에도 죽을 때까지 처벌을 받지 않는다.그녀는 더는 이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전연우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같이 밥 먹을래? 쟤 음식 솜씨 좋아.”전연우는 그녀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순수하고 무해해 보였지만 낯선 거리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이렇듯 상냥한 말보다 마음속의 감정을 꺼내 자신에게 토해내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거짓된 모습이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집에 남는 그릇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오빠는 접시에 담아 먹어야 해. 그릇 하나는 강용이 직접 갖고 온 거야.”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색 정장의 단추를 잠그며 싸늘하게 말했다.“너한테 3일을 줄 테니까 짐을 정리해. 내가 데리러 올게.”장소월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거절했다.“난 돌아가지 않아!”“네 뜻대로는 안 돼. 의부님은 나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전연우가 집에서 나갔다.강용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얼른 와서 거들어.”그는 고추를 씻으며 고추 고기볶음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거두고 주방으로 걸어갔다.그렇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주시할 것이다.이제 장소월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조용한 밥상 위.장소월이 고추를 한 입 깨물었다.“내일...”“아직 오늘 음식도 채 먹지 않았는데 벌써 내일 끼니 생각을 해? 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그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강용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었
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강용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그의 성적 향상을 지켜보고 있었다.저번에 치른 지리 시험에서 강용은 그녀가 준 필기대로 공부해 꽤 높은 점수인 89점을 받았다. 마지막 두 문제의 풀이 과정에서 몇 점을 깎였다.문과는 모두 암기 과목이라 그에겐 별로 어렵지 않았다.예전 성적이 형편없이 낮았던 건 그저 공부와 담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공부하겠다는 결심만 선다면 강용은 그 누구보다도 잘할 것이다.오후 세 시, 장소월은 흥취반 수업에 갔다.강용도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강용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장소월을 찾아갔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곧바로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책가방을 바닥에 던지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걸쳐놓았다. 널찍한 교복 바짓자락이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말 안 듣는 불량학생 기운이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어디에 있어?”허철이 걸어왔다.“또 왔어? 너 계속 이렇게 괴롭히다간 쟤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만둬. 장소월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잖아?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쟤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강용은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툭툭 털며 입술을 꽉 깨물고 허철과 시선을 마주했다. 방서연은 그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끌어간 뒤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얌전히 사람으로 살 것이지, 꼭 말도 못 하는 개가 되고 싶어 한단 말이야.”강용이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일어나 책상을 쾅 내리치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학생들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앞으로 똑똑히 기억해. 장소월을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 누가 감히 내 뒤에서 허튼소리를 지껄인다면 학교 뒤 호수에 집어넣어 그 더러운 뇌를 깨끗이 씻어내게 만들 거야.”강용이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장소월에게 카드를 건네며 비아냥거렸던 곽원주였다.당시 강용은 학교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장소월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곽원주는 강용에게 짓눌려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용은 학교에 오기만 하면 한 손으로
방서연이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허철... 장난은 그렇게 치는 게 아니야!”“만약 네가 장소월이 받은 상처를 입고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생각해봐. 그게 웃기겠어?”방서연은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허철은 머리가 아둔해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한다.허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아버지의 죄 어쩌고 하는 것도 그만해. 요즘 법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야. 장해진은 분명 언젠가 법의 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장소월에게 왜 아버지의 죄를 들먹이며 비아냥거리는 거야?”“...”“강용은 양아치 같아도 무슨 일에서든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행동해. 강용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망나니가 아니야. 공부와 담을 쌓고, 술을 마시고, 카드를 치며 제멋대로 살지만 언제 한 번이라도 다른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는 거 본 적 있어?”허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그 자식 설마 성경험도 없는 거야?”“아니. 대학교 퀸카와 했다는 건 거짓이었어!”“그럼 백윤서는? 백윤서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날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차를 타고 돌아다녔어. 걔들은 진짜지!”허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눈앞의 호수를 바라보며 바람에 날리는 앞머리를 쓸어올렸다.“내 생각이 맞다면 장소월에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야!”그는 어쩌면 훨씬 전부터 장소월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허철은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대체 왜! 너 어떻게 알아? 난 못 믿어!”“실은 병원에 있을 때부터 장소월을 측은하게 생각한 것 같아.”“거짓말!”“그때 병원에서 강용이 옷을 들어 올렸을 때 봤던 복부에 새겨졌던 달 모양 문신을 기억해?”허철은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당시 강용이 왜 이런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 의아해 그에게 물었지만 강용은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그럼 처음부터 장소월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건가?“그럼 왜 사귀자고 하지 않는 건데? 예전 장소월이 백윤서를 괴롭힌 줄 알
저번 있었던 일을 떠올린 장소월은 여덟 시가 되기 전 돌아갔다. 가는 도중 병원에 들러 실을 뽑았다. 상처는 이제 어느 정도 치료되어 작게 힘을 주는 거론 다시 찢어지지 않는다고 한다.강씨 집안 서재.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방 안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강영수는 책상에 앉아 영상 회의를 마치고 나서야 삐뚤어진 옷차림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요즘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밖에서 뭘 한 거야?”“뭘 했겠어? 다 알고 있잖아.”강용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강영수가 몸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기댔다.“네 말이 맞아. 난 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어. 사람을 보내 널 감시한 건 네가 나한테 위협이 될까 봐가 아니라 밖에서 문제를 일으켜 날 귀찮게 하는 게 싫어서야. 강씨 성을 갖고 있으면 제멋대로 날뛰어도 된다고 여기는 거야?”“오늘 회사에 법원에서 보낸 기소장이 도착했어. 네가 학교에서 다른 학생을 괴롭혔다고...”강영수가 책상 위의 서류를 강용에게 던졌다.“요즘 회사 일이 바빠 너한테 관심을 쏟지 못했어.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서프라이즈를 안겨주네? 어?”강용이 웃으며 바닥에서 서류를 주웠다.“친구 사이에 장난을 좀 친 것뿐이야. 형은 걔들 말 들을 필요 없어.”강용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형이라는 글자가 흘러나왔다.그때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이어 3,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미모의 여자가 우유 두 컵과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일이 바쁜 것 같아 간식을 좀 만들어왔어. 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심유는 40세가 거의 되었지만 피부관리를 잘해 30세가 갓 넘은 아가씨 같았다. 매끈한 눈썹과 가늘게 뻗은 눈, 강남 여자 특유의 분위기를 물씬 내뿜고 있었다. 강용은 심유를 쏙 빼닮았다.심유의 등장은 본래의 괴이했던 분위기를 미묘해지게 만들었다. 강영수는 그녀에 대한 적의를 종래로 감추는 법이 없었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심유는 화를 내
“너 도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엄마가 그 성격을 죽이고 살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아저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안 그래도 지금 강씨 집안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이야.”심유는 마음이 약해져 따끔하게 혼내진 못했다.강용이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었는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가서 쉬세요.”강용은 그녀를 돌려보낸 뒤 서재 문 앞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저녁 열한 시 반이 되었지만 서재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강용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힐끗 본 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장소월은 욕실에서 씻고 나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 지금은 강용의 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돌연 검사에 나선 것이다.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는 끊겼다.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렸다. 전화를 꺼버린다고?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그녀는 곧바로 다시 걸었다. 하지만 야속한 연결음만 울릴 뿐이었다.네 번이나 걸어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장소월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이제야 받아? 강용, 너 대체 뭐 하는 거야?”강용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꼭 여자친구 같네. 왜! 내가 바람이라도 필까 봐?”“또 밖에서 허튼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공부 열정이 벌써 식은 거야? 오늘 너한테 내준 시험지는 다 풀었어? 너 계속 이러면 내 전부 시간을 너한테 낭비한다고 해도 널 구제할 수 없어.”“진짜 사납네. 앞으로 어떤 남자가 이런 널 데려가겠어. 잠시 후에 얘기해. 일단 끊어!”통화가 끊긴 순간, 장소월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핸드폰 너머론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오랫동안 전화를 받지 않다가 받은 걸 보면 아마 그녀에게 들킬까 봐 조용한 곳을 찾아 숨어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강용이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시험지는 다 풀었어. 수학 마지막 문제는 작년 수능 시험 문제랑 비슷하더라
새벽 두 시.강용은 방으로 돌아와 채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안에선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강용은 문을 열려고 뻗은 손을 결국 내려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복도 끝자락에 걸어가 불을 붙였다.끝도 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깜깜함 속에서 강용의 눈동자엔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하늘에서 빛나는 몇 안 되는 별을 올려다보았다....다음 날, 태양이 떠오르고 날이 밝았다.따뜻한 햇볕이 방에 내리쬐었다...장소월은 일찍 일어나 베란다에 있는 식물에 물을 주었다. 거리에선 몇 명의 상인들이 수레를 끌고 부지런히 지나가고 있었다. 또 누군가의 집에서 만든 음식 냄새도 바람을 타고 풍겨왔다.이곳의 사람들은 평범하고 고단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들이 살고 있는 평안하고 인간미 넘치는 삶이 부러웠다.오늘 그녀는 집을 쓸고 닦으며 깨끗이 청소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심심할 때, 그녀는 항상 집안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그녀는 전연우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3일 후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다.그녀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하지만 이제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그녀는 계속 월세를 낼 생각이었다. 설사 줄곧 살지 않는다고 해도 만에 하나 또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점심 12시까지 기다렸는데도 강용은 오지 않았다.예전 그는 항상 아무리 늦어도 열한 시 반엔 도착했었다.장소월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홧김에 대명산의 스키장으로 향했다.다음 날 새벽 5시쯤, 산꼭대기에 올라가 설산의 일출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풍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버스로 한 시간가량 달리자 산에 도착했다. 그녀는 표를 산 뒤 사람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탔다. 20분이 지나니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이곳의 기온은 너무 차가워 장소월로 하여금
호텔 뒤편으로 몇 분 걸어가니 스키장에 도착했다. 장소월은 보드 장비를 착용하고 조심스레 뒤뚱뒤뚱 움직였다.“... 걱정하지 말고 대담하게 이동해요. 리듬을 잘 장악하고요. 넘어지면 제가 일으켜 줄게요.”거의 처음으로 이런 액티비티를 접한 장소월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보호장치를 입고 있다고 해도 만에 하나 부딪힌다면 분명 아플 것이다.한편으론 그녀는 눈앞의 사람들처럼 시원하게 맨 밑까지 내려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발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코치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어떻게 보드를 통제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넘어지면 얼마나 아플지를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럼 영원히 배울 수 없어요.”“네.”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30분이 넘게 연습했음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반면 함께 배웠던 8살짜리 남자아이는 빠른 속도로 배워냈다.그 외 애굣덩어리 아가씨가 한 명 있었는데 연습하며 수차례 미끄러 넘어져 결국엔 코치에게 벌컥 화를 냈다. 남자친구와 함께 왔지만 그는 혼자 스키를 타러 가버렸다고 한다.“아빠, 저 누나 진짜 멍청해요! 아직도 못해요.”남자아이가 천진한 얼굴로 장소월을 가리키며 깔깔 웃어댔다.아버지는 얼른 아이의 입을 막고는 호통을 쳤다.“그런 말 하면 안 돼. 빨리 이모한테 사과해!”이모?장소월은 화살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시큰거렸다.올해 1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모라니.저 부자 두 명은 똑같이 예의를 모른다.장소월은 예쁜 얼굴을 살짝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꼬마야, 사람을 욕하면 입술이 뭉개지고 승냥이한테 뜯겨간다는 거 아빠가 안 알려줬어?”남자아이는 그 말을 정말 믿었는지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아무리 타일러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코치님, 우리 저쪽으로 가서 해요.”“그래요.”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고작 꼬마보다도 못하다는 걸 말이다.가장 아래는 경사가 작은 초급자의 구역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급자 구역에서 즐기고 있었다.남자들은 보통 예쁜 여자를 대할 때 인내심이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
송시아에게 약을 발라주려 병실에 들어가려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겁을 먹고 문 앞에 멈춰 섰다.여자의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왜! 대체 왜 다들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한의준은 이마를 조금 찌푸릴 뿐 별다른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맺어왔지만 송시아는 여전히 한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의준은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자신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내가 말했잖아. 넌 편히 쉬면서 우리 아이를 낳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송시아의 눈엔 시뻘건 핏줄이 가득 서려 있었다.“우리 첫 아이도 그놈 손에 죽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그녀는 남자의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올려놓았다.“나도 당신만큼 아이를 원한다는 거 알고 있죠?”송시아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고,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남자의 과거는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단순히 그녀와 아이를 낳기 위해 찾아왔다. 송시아는 그의 일 처리 방식을 목격한 뒤에야 그가 그리 간단한 사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면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 어떤 지하 조직과도 마음대로 왕래한다.그토록 신비롭고 은밀한 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그건... 내가 하나씩 모두 갚아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더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병원에서 치료나 잘 받고 있어.”“언제까지 듣고 있을 거야! 들어와!”간호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천천히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이 흥분하신 것 같아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환자분, 지금 임신 2개월 째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치료하셨어요.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곧 퇴원할 수 있으실 거예요.”“뭐라고요? 임신했다고요?”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송시아의 눈동자가
향기로운 갈비찜 냄새에 소민아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보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신이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슬리퍼를 신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갈비를 들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신이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다가갔다.“천천히 먹어요. 다 민아 씨 것이에요. 아무도 빼어가지 않아요.”“이랑 씨, 저 밥 먹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밥 가져다줄게요.”신이랑은 그녀에게 밥이 가득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는 소민아의 습관까지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세 그릇을 먹어서야 공허했던 배를 채웠다.마지막으로 국 한 그릇까지 마시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신이랑이 그녀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더 먹을래요?”“이제 배불러요.”“너무 고마워요. 이랑 씨가 없었다면, 쓰러져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을 거예요.”“어젯밤 내가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어디에 갔었어요?”“병원에 갔었어요. 대표님께서 수술을 하셨는데 가족 사인이 필요해서요. 참, 집에 돌아왔을 때 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신이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민아 씨 기다리고 싶었어요. 밤새 안 들어오길래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어요.”소민아는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다시 삼켜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면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이랑이 해준 밥도 먹었고, 쓰러졌을 때 신이랑의 보살핌도 받았으니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참, 송시아 최근 뭐 하고 있는지 알아요? 대표님에게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왜 병원에 안 나타난 거예요?”신이랑이 말했다.“나도 민아 씨한테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송시아는 독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대요.”소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독약이라고요? 누가 감
간호사가 소리쳤다.“됐어요. 됐어요. 서 선생님, 환자 심장이 다시 뛰고 있어요.”서철용은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그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전연우! 전연우!넌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장소월을 놓지 못하는구나.서철용이 말했다.“조각은 이미 꺼냈으니까 마지막 봉합 수술만 하면 돼. 마지막까지 집중해야 해.”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네.”수술은 장장 6, 7시간이 걸려 오전 9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수술실 밖.부관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했다.“소장님, 현아 아가씨가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지금 돌아갈까요?”소현아의 이름이 들리니 옅은 잠을 자고 있던 소민아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강지훈이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도 급히 일어섰다.“강지훈 씨, 아니, 형부, 혹시 송시아 잡고 있어요? 송시아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강지훈은 음산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안 죽어.”그 짧은 세 글자에 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송시아를 잡아둘 사람은 강지훈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강지훈은 잠시 눈을 붙이며 북경 감옥으로 돌아갔다. 도착했을 때, 부관이 병원으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보고했다.“전연우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고 합니다. 의식도 곧 회복할 거라고 했습니다.”강지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실력 쓸만하긴 하네.”전연우는 중환자실에서 한동안 치료받아야 했다. 서철용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수술실에서 걸어 나왔다. 장시간 고강도의 수술을 마친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소민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철용이 말했다.“전연우를 계속 여기에 둘 순 없어요.”소민아는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는 걱정스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서 선생님, 송시아가 대표님이 깨어나시는 걸 방해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송시아의 야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송시아는 전연우뿐만 아니라 성세 그룹의 주인 자리까지 탐내고 있어요.”“신씨
엘리베이터를 나선 뒤 서철용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송시아가 저렇게 날뛰는 것도 한때일 뿐이에요. 전연우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니 부디 송시아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라요.”강지훈이 말했다.“그런 거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냥 전연우의 목숨만 살리면 돼요.”“당연하죠.”서철용은 익숙한 길을 따라 수술준비실로 향했다.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심장외과 과장이 서철용을 보고는 구세주라도 발견한 듯 달려나갔다.“서 원장님!”서철용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어요. 시간이 급박해서 수술 끝나면 바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해요. 들어와서 어시스턴트 해요.”“네.”서철용은 무균 수술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흡기 단 채 수술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그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오랜만이야, 전연우!”전연우의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소민아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조금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실 앞에 가보니 한 사람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는 바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이... 이런 우연이! 형부도... 여기 계셨어요?”강지훈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강지훈은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소민아는 강지훈이 앞에 있으니 사나운 호랑이 앞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들고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의 수술을 하고 계세요. 대표님 곧 깨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기성은 씨도 돌아오는 거 맞죠!]소민아는 이번에도 기성은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그녀는 송시아와 임정희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대표님의 수술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나타나지 않다니.시간이 점차 흐르고 다섯 시간 뒤, 바깥에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수술 어시스턴트가 땀을 훔쳤다.“서 선생님, 호흡 가다듬으세요. 모든 수치 이상 없습니다.”그때, 상처를 잡고 있던 다른 어시스턴트가
엘리트 개인 병원.새벽 12시, 담당 간호사가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전연우의 심장 박동 수치가 현저히 내려가기 시작해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당직 의사가 다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에요? 환자 상태는 어때요?”간호사가 급히 말했다.“환자분의 상처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물지 않습니다. 약을 발라주려고 보니까 상처에서 대량의 출혈이 발견되었어요. 다른 간호사한테 혈액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지금 당장 임정희 선생님한테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알려요.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어요.”“하지만 저번 회의에서 임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이 환자분 심장에 박힌 조각은 제거하기가 너무 힘들다고요. 조금만 빗나가면 심장 혈관을 건드릴 수도 있어요. 지금은 서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수술 못 해요.”“병원에서도 서 선생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해요! 일단 환자분의 가족한테 연락해 병원에 나오라고 해요. 어찌 됐든 이 수술은 반드시 해야 해요.”간호사가 말했다.“아까 이미 연락해봤어요. 하지만 송시아 씨는 연락 두절이에요.”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뭐라고요?”그때 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돌연 걸려온 병원의 전화를 받고 소식을 들은 뒤,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고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서철용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장소월이었다.핸드폰 너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이 물었다.“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배은란과 깨어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전연우의 상태가 엄청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어요.”“소월 씨, 지금은 전연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핸드폰 너머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전화가 끊겼다.이어 핸드폰에 소민아의 이
“하지만 서 선생님, 지금 당장 병원에 가시면 송시아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겁나요. 또한... 송시아라면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선생님을 감시하도록 했을 거예요. 연구원을 나서는 순간 위험해져요.”서철용은 들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재를 툭툭 털어냈다. 확실히 니코틴은 머리를 맑게 해주는 데에 효능이 있었다.“송시아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서울에 머리가 달린 사람이 송시아밖에 없는 줄 알아요?”“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기생해서 사는 기생충일 뿐이에요. 한 번 맞춰봐요... 송시아는 왜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앉은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권한은 없는 걸까요?”소민아가 되물었다.“그 이유가 뭔데요?”서철용이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답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찾아야죠. 그런데... 기성은이 처음에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저한테 많은 걸 숨기고 있어요.”서철용이 웃으며 말했다.“몸에 손발도 붙어있고, 입도 있는데 알아보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모르겠으면 많이 질문하고 조사해봐요. 그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거예요. 그 누구보다 치밀해야 해요. 이래서야 송시아랑 싸울 수 있겠어요?”소민아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전 송시아와 싸우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단지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고 싶을 뿐이에요. 언니는... 송시아는 예전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 눈엔 정말 그 누구보다 좋은 언니였거든요. 대체 뭐가 송시아를 이렇게까지 바뀌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목표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부적절한 일이라도 전혀 서슴지 않아요. 계속 이렇게 그릇된 길로 가게 놔둘 순 없어요. 일이 아직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간 건 아니니까 기회는 있어요.”서철용이 시선을 떼고 창밖을 쳐다보았다.“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있긴 있었네요.”“성세 그룹이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