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칼을 막아줬어도 장소월은 너한테 고마워하지도 않아.”그때, 장소월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엽시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장소월도 양반은 못 되겠네.”아직 문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돌연 자리를 뜨는 장소월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전연우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장소월의 행동을 지켜보았다.“고마워!”장소월이 마음을 담아 말하고는 허리를 폈다.“병원에 못 가봐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재덕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상처가 깊지 않으니 며칠만 치료하면 된다고 했어요.”엽시연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시끄러워! 장까지 배 밖으로 나왔는데 상처가 깊지 않다고? 이제 와 착한 척하지 말고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재덕이 엽시연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형,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내 말이 틀렸어? 예전에 우릴 얕잡아보고 무시한 게 누군지 잊었어?”“강용, 쟤 학교에서도 저렇게 착한 척해?”엽시연이 강용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엔 화도 잘 냈는데 지금은 많이 누르고 있어.”“전엔 내가 너희들한테 편견이 있었다는 거 인정해.”장소월이 솔직히 털어놓았다.“난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 너희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몰랐어. 미안해.”“다시 내 소개를 할게. 난 장소월이라고 해...”그녀가 손을 내밀자 재덕이 약간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전 재덕이에요.”“고마워.”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장소월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장소월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거기엔 장소월의 꾀도 숨겨져 있었다.오늘 밤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분위기는 훨씬 화기애애해질 것이다.그들과 헤어지고 인시윤과 함께 돌아가던 중 인시윤이 물었다.“너 무슨 말을 한 거야?”장소월이 말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 장소월은 학교를 나섰다.오후 네 시 반, 경찰서 취조실.엽준수가 머리를 밀고 죄수복을 입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멍하니 한곳을 쳐다보며 진술실 안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혼자 온 것이었다.그녀가 벽에 걸려있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엽준수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경찰이 나가자 장소월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에 온 건 아무도 모르니까.”엽준수는 이미 많은 고초를 당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악에 받쳐 소리쳤다.“내가 어떤 꼴로 있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 이제 만족해? 장소월, 넌 돈 많은 부모님을 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날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저 엄마의 치료비를 벌고 싶었을 뿐인데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내 인생은 네가 망친 거야! 나 널 죽이지 못한 게 미친 듯이 후회돼!”장소월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엽준수,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돈이 있었다고 해도 네 엄마는 그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넌 그냥 나한테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거야.”장소월은 그의 동공이 당황한 듯 확장되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아마 그의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난 예전 성적이 가장 낮은 반의 꼴등이었어. 그래서 6반에선 내가 부정행위로 반을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그리고 내가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것도 넌 아마 인시윤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질투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겠지... 사실 나도 나 자신을 의심한 적 있어. 정말 다 내 잘못인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건가? 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난 알게 됐어. 난 틀리지 않았어. 난 그저 내 인생에 깃든 모든 불행
장소월은 떠날 때 엽준수에게 만점에 근접한 시험지를 남겨주었다.점수를 본 순간, 그는 살을 에이는 얼음 구덩이에 들어간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가 틀렸다.그가 틀린 것이다!장소월의 말처럼 허영심 때문에 사채까지 쓰며 억지로 제운 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죽이고 모든 걸 망쳐버린 건 다름 아닌 엽준수 자신이다.18세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시험지를 꽉 움켜쥔 채 서럽게 울부짖었다.그게 무엇이든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이건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의 이치다!장소월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골목길 안에서 그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바짓자락을 거두어올린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꽃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장인이 빚어놓은 듯 준수했다. 하얀 눈꽃 한 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강용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 사고뭉치 악동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강용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그녀에게 걸어갔다.“밥 사준다며?”“그래서 계속 이곳에서 기다린 거야?”“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몇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삐딱해진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강용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침묵 끝에 강용이 입을 열었다.“저번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해?”장소월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유효기간은 이미 지났어.”“흥! 양심도 없는 년!”장소월은 사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 역시 일부로 발걸음을 늦추는 것 같았다.“마지막이야!”“...”“강용, 마지막이야. 내일도 오지 않으면 다시는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강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알았어.”저녁 식사는 구영관에서 하기로 했다.이곳의
강용이 언급되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강영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강용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장소월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이곳의 화차가 맛있어. 마셔봐.”“그래.”강영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하지만 그가 기뻐하는지 아닌지는 보아낼 수 없었다.이 차가 그의 입에 맞을까? 이곳의 차는 모두 일반적인 자스민 차라 그가 평소 마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장해진도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데 그 가격은 모두 수백, 수천만 원에 달한다.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해 꺼내 보니 강용으로부터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일이 생겨서 못 가!」장소월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전화 한 통 하고 올게.”강영수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래. 다녀와.”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조용한 구석으로 가 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술집 안, 음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강용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양쪽에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를 안고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어떤 사람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강용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오만 원 짜리 한 무더기를 밀며 카드 한 장을 던졌다.그때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옆자리 아가씨를 쳐다보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힐끗거렸다. 아가씨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누른 뒤 강용의 귓가에 가져갔다.“누구시죠?”장소월은 핸드폰 너머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강용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바빠? 오늘 사지 못한 밥은 다음에 꼭 살게.」강용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뒤집어놓고 계속하
장소월이 화장실에서 나갔을 때 오부연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소월 아가씨!”“오 집사님?”장소월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데엔 분명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역시!비상구로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장소월이 물었다.“집사님, 무슨 일이시죠?”“아가씨, 이걸 봐주세요.”오부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장소월이 살펴보니 저번 주에 받은 심리 검사 결과가 쓰여있었는데 심각한 우울증 판정이 내려져 있었다.환자 이름을 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분명 강영수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이... 이건?”하지만 식사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든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도련님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리 설득해도 도련님은 일이 바쁘단 핑계로 약을 드시지 않아요. 도련님은 성격이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어요. 저번 주주총회에선 주주 한 명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어요. 이런 일은 이미 몇 차례나 발생했어요. 만약 지속된다면 주주들은 도련님의 성정을 문제 삼아 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도련님이 아가씨를 여러 번 도왔잖아요. 그러니까 도련님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설득해 주세요. 지금은 아가씨를 제외하곤 아무도 도련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리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강영수의 곁에서 몇 년을 일한 집사님도 하지 못하는 일을 몇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제가 어떻게요...”“소월 아가씨는 영리한 사람이니 도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저번 수술하는 날엔 아가씨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를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어요. 도련님께선 절대 이 말을 아가씨에게 하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그는 장소월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잠시 후 장소월은 룸에
인시윤이 말했다.“왜 웃어요!”엽시연이 연이어 부인했다.“웃은 거 아니에요. 사레에 들렸을 뿐이에요.”인시윤은 더는 엽시연에게 신경 쓰지 않고 흰송이버섯 볶음을 전연우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식지 않았는지 먹어봐요. 식었으면 하나 더 시킬게요.”장소월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장소월은 귓불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부끄러워진 것이다.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오직 오부연의 말 때문이었다.강영수는 병증이 악화되었고 우울증 치료제도 끊은 데다 매일 먹는 음식량도 아주 적다.강영수는 확실히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장소월은 이에 너무나도 큰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게 전연우의 앞이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겐 독립적인 인격이 존재한다. 줄곧 누군가의 손에 좌지우지 당하는 노리개처럼 뭐든 그의 말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아홉 시가 되어가자 백윤서가 전연우에게 말했다.“오빠,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전연우가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집에 갈 시간이네. 너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하잖아. 내가 데려다줄게.”인시윤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오빠, 오빠가 소월이를 데려다줘. 난 연우 씨의 차에 앉아 왔으니까 연우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게.”그녀는 재빨리 전연우의 손목을 잡았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빛을 읽은 그녀가 말했다.“그... 그래!”인시윤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결정하자.”이어 장소월이 말했다.“엽시연, 내가 이미 차를 불러놓았으니까 타고 가. 안전에 조심하고.”엽시연과 그의 친구들은 배불리 먹고 의자에 기대 쉬고 있었다.“알았어.”장소월과 강영수가 함께 문 앞까지 걸어 나갔다. 진봉이 차를 몰고 지하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찬 바람을 쐬니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그때 어깨 위에 외투 하나가 걸렸다.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강영수가 입고 온 그래이색 정장이었다.“네 옷
“까먹었어. 다음엔 꼭 챙길게.”“응.”장소월은 강영수의 차에 탔다. 차 안은 에어컨을 켜서 별로 춥지 않았고, 그 외투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걸쳐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장소월은 차 시트에 기대어 긴 속눈썹을 감고 잠이 들었다.진봉은 백미러로 확인하고, 차 안의 불빛을 어둡게 조정했다. 차 안은 조용해서 그녀의 얕은 호흡이 잘 들릴 정도였다.강영수는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편안해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인기척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통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미안, 깼어?”부드러운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담요를 내려다보고는 졸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도착했어?”“아직 좀 남았어.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계속 자.”“응.”장소월이 다시 자려는데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장소월은 강영수에게 몸을 반쯤 기대고 그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장소월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순간 머리가 맑아졌다.자세가 친밀해서, 남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커플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그가 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그냥 별로였다.진도가 너무 빨라서일까?그럴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마음을 늦게 여는 타입이라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전연우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아마 이미 올라갔을 것이다.장소월이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차는 성인 남성이 달려서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늦게 달렸다.아파트 밑.“나 혼자 올라가면 돼. 이미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 도착하면 전화하고!”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장소월은 총명해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이미 장소월에게 들켰다. 강영수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났다.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30분 뒤, 불이 켜지지 않은 방에서 강영수는 전화를 받았다.여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착했어?”“응.”휴대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오 집사님에게 물어보니 요즘 너 약 잘 챙겨 먹는다며? 좀 나아졌어?”“응, 나아졌어.”“만약 어디 아프면 제때 병원에 가.”“음.”오 집사는 약과 물 한 잔을 들고 있었지만,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대략 5분 정도 지나 전화가 끊기자, 오 집사는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등불을 켜고 걸어갔다.“소월 아가씨인가요?”강영수는 몸을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맞아. 내 병에 대해 오 집사가 모두 말해줬어?”오 집사는 부인했다.“소월 아가씨께서 먼저 물어보셨어요. 저는 적당한 부분만 골라서 말씀 드렸고요. 사실 소월 아가씨도 도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아가씨는 집에서 잘 지내지 못해요. 그분을 위해서라도 도련님은 자기 몸을 잘 돌봐야 해요. 주주들을 설득해서 권위가 안정되어야만 아가씨를 고해에서 구해낼 수 있어요.”“맞아...”강영수는 몸을 돌려 반짝이는 거리를 보며 깊어진 눈으로 말했다.“강한 그룹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나한테 진정한 권력이 생기는 거고, 소월이도 옆에 데려올 수 있어.”주주총회에서 그의 자리는 이미 대부분 주주들의 불만을 받아 현재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철저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인간들이 완전하게 굴복할 수 있을까?“도련님, 아가씨 말대로 제때 약을 챙겨 드시고 일단 병을 고치는 건 어떨까요?”강영수는 약을 먹고 곧 잠이 들었다.그녀의 잘 자라는 말도 들었다.장소월은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주방으로 와 물을 찾았다. 날씨가 이미 추워져 다시 물을 끓여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씩 섞은 다음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윤서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펑펑 울었는지 약간 붉었다.“윤서야, 내일 다시 얘기해.”백윤서가 아무리
그때, 송시아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아직 혼수상태에 있는 전연우였다.어젯밤 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렸는지 전연우의 앞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밤새 시달린 탓에 그녀는 이제야 간신히 몸을 회복했다. “정말 네 말이 맞았어. 그 사람들 한시라도 빨리 전연우를 깨우려 하고 있어. 송시아, 전연우가 의식을 되찾으면 첫 공격 대상이 네가 될 거라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임정희, 넌 아직 전연우에 대해 잘 몰라.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이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보살피고 회사 관리까지 도왔어. 전연우도...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만약 정말 날 건드릴 생각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똑똑히 보라지 뭐, 지금 성세 그룹에서 자신의 발언권이 어느 정도인지.”“전연우를 깨어나게 할 가능성이 제일 큰 사람은 서철용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송시아는 전화를 끊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썹부터 입술까지... 여자의 눈동자엔 미친듯한 집착이 가득 차 있었다.“당신은 결국 내 것이 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당신이 의식을 회복하면 나한테 복종할 때까지 방에 가둬놓고 나만 볼 거예요.”그날을 떠올린 송시아는 돌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지금의 송시아는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소민아는 바로 급히 군의원으로 달려갔다.하지만 통행증이 없어 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그녀는 서철용의 전화번호를 받았던 것이 생각나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려서야 통화가 연결되었다.핸드폰 너머로 아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배은란이 출산한 건가?“무슨 일이에요. 말해요!”소민아가 말했다.“대표님의 검사 결과지 가져왔어요. 저 지금 병원 문 앞에 있는데, 혹시 얘기할 시간 있으세요?”서철용이 병실 창문
신이랑이 차를 몰고 소민아를 회사에 데려다주는 길, 그녀가 노트북을 접고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지하철역에 내려줘요. 따로 들를 데가 있어서요.”신이랑이 물었다.“어디에 가는데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뭐 좀 사고 바로 회사에 갈 거예요.”“그래요.”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앞쪽 지하철역에서 차를 세웠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갔다. 믿음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상처받은 슬픈 신이랑의 눈동자도 보지 못한 채 말이다.엘리트 병원은 전부 송시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프런트에 걸어가 말했다.“안녕하세요. 전 성세 그룹 직원인데요,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건 제 사원증이에요.”프런트 직원 두 명은 서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예약은 하셨나요? 송 대표님의 전화가 없으면 올라가실 수 없어요. 현재 15층 VIP 병동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거든요.”소민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의 집착이 이렇게까지 심각했다니.“그럼 전연우 씨의 검사 결과서만 볼 수 있을까요?”간호사가 말했다.“저흰 잘 몰라요. 새로 오신 임정희 과장님께 물어보는 게 좋을 거예요. 거의 모든 일은 그분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거든요.”소민아는 명함 하나를 받고는 임정희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얼마 후, 복도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환자 상태가 많이 안정됐어. 이제부턴 자극 치료법을 쓸 거야. 매일 침으로 환자 혈 자리를 자극해 의식을 찾게 할 생각이야.”“네, 과장님.”임정희는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누구세요?”“안녕하세요. 전 소민아라고 합니다. 대표님에 관해 궁금한 게 있는데, 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임정희는 옆에 있던 어시스턴트들을 보내고는 그녀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민아 씨를 도울 다른 방법 찾아볼게요.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해줄 거예요... 오늘 백화점에 갔을 때 반지도 하나 봤어요. 민아 씨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크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여니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민아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요한 방 안엔 그녀의 고른 호흡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신이랑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았다. 그는 조용히 반지를 꺼낸 뒤 진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았다.“내가 좀 성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민아 씨...”“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민아 씨가 쉽게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이건 신이랑의 욕심이다. 그렇다... 소민아가 처음으로 결혼을 입에 올린 그 순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이혼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신이랑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를 안아 침실에 눕히고는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소민아는 이불 속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다음 날 날이 밝아올 때까지 여자는 깊이 꿈나라에 빠졌다.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이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놀란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는 머리카락을 잡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소민아는 목이 말라 컵에 물을 따르고는 몇 모금 마셨다. 그녀가 창가에 서서 잠을 깨고 있을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신이랑이 줄무늬 잠옷을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즈가 맞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헐렁했다. 소민아가 기성은이 이 집에 왔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잠옷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기성은은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리고 신이랑이 신고 있는 슬리퍼까지...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이에
송시아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 송시아의 약점.소민아는 송시아의 약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사람 사이엔 상성이 있는 법이다. 전연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송시아를 통제할 수 없다.소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서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서철용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잠이 깰 기미를 보이는 여자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소민아가 물었다.“왜 그래요?”서철용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가요.”밝게 빛나는 조명을 쳐다보고 있으니 눈앞이 흐릿해졌다.‘전연우, 난 네가 네 퇴로를 만들어놓았다는 거 알고 있어. 사실 넌 이 모든 걸 예상했잖아. 송시아, 장소월 모두 네 계획 중 일부였던 거야. 아니면 내가 왜 널 천년 묵은 구미호라고 하겠어.’‘기성은은 계획 중 일부인 동시에 네 장기 말이기도 해. 하지만 이번엔... 전부 소민아에게 걸었던 거야. 소민아야말로 네 제일 중요한 장기 말 맞지?’‘결혼식을 준비하면서부터 넌 이럴 작정이었던 거야.’전연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서철용 역시 소민아와 송시아의 관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연우는 대체 어떻게 두 사람이 자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전연우... 넌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야!’‘모든 사람을 꿰뚫어 보고, 이번엔 자신까지 장기판 위에 올려놓았어.’‘이번 도박이 맞아떨어지길 바랄게...’소민아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신이랑이었다.이 깊은 밤에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이 추운 날 뭘 하려고!소민아는 얼른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이랑 씨, 지금이 몇 시인데 여기에 있어요!”신이랑이 몇 번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왔어요. 얘기는 잘 됐어요?”그녀는 신이랑에게 전부 말해주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우리 얼른 돌아가요
서철용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전연우는 반평생 지독한 악인으로 살아왔지만, 결국엔 이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장소월의 마음을 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장소월은 결코 그의 목숨 때문에 뒤돌아보지 않았다...전연우 본인이 쌓은 업보이니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누구도 절대 끼어들 수 없다.전연우와 장소월... 두 사람 사이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어찌 됐든 성세 그룹은 서철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또한 송시아 역시 전연우가 선택한 사람이다.조금 전 소민아는 송시아가 장소월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했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어느 날 장소월이 제 발로 걸어 나와 전연우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무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누구에게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소민아는 차를 몰고 나가 한참을 달려서야 배은란이 말한 만두 가게에 도착했다.그녀가 돌아와 말했다.“식어서 맛이 떨어질 테니까 지금 가서 데워올게요. 양념장은 사장님께서 이미 만들어주셨어요.”배은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부탁할게요.”“괜찮아요. 당연히 해야죠.”배은란은 소민아가 가져다준 만두를 먹고 잠이 들었다. 그때 시간은 어느덧 저녁 12시였다. 그녀는 문 앞 으슥한 곳에 앉아 덜덜 떨며 쪽잠을 잤다.그녀가 고개를 떨구었을 때, 눈앞에 남자의 가죽구두가 나타났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 선생님, 주무시려고요? 5분만 내어주실 수 있으세요? 서 선생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서철용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이제 4분 30초 남았어요.”“저와 송시아는 어린 시절 헤어졌던 자매였어요. 제 원래 이름은 송화영이고요. 송시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씨 가문과 손을 잡고 신군회를 시장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어요. 지금은 소월 언니 목숨으로 절 협박하며 신씨 집안 아들과 결혼하라며 강요하고 있고요.”“오늘 서 선생님을 찾아온 목적은 두 가
복도 끝 조명이 희미하게 켜졌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서철용과 함께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있었다.“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저 도와주실 거예요?”간호사가 분만실에서 다급히 걸어 나왔다.“서 선생님, 사모님께서 진통을 시작하셨어요. 아마 새벽 다섯 시쯤이면 아기가 태어날 거예요.”서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수고해 주세요.”간호사가 간단히 설명했다. 군병원 사람들 중 서철용이 의료계 유명한 실력자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의사라면 누구든 그와 같은 비범한 능력을 갖고 싶어하기 마련이다.간호사의 등장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져 버렸다. 서철용이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혼자 문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철용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를 부드럽게 다독이고 있었다.그때, 소민아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서씨 가문 후계자인 서민용의 부인이었다. 서민용은 그녀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차분하고 온화한 드넓은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몇 년 전 파티에서 처음 봤을 때, 아무리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져도 그의 옆에만 가면 순식간에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서민용, 서울 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꿈에 그리는 남자였는지 모른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여자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서철용... 고민해보니 대개 어떤 관계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하지만 서씨 가문에 대체 무슨 변고가 일어났길래 배은란이 시동생과 함께 다닌단 말인가?배은란은 진통의 고통 때문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창백한 얼굴로 서철용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순간, 소민아는 그녀 입에서 서민용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민용 씨, 바쁘면 가봐. 나 이제 괜찮아. 우리 아기 얌전해서 전혀 안 아파.”소민아는 문 앞에서 배은란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서철용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배은란에게 말했다.“나 안 바빠.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을
어떻게...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예전 파티에 참석해 치마가 어질러졌을 때 배은란의 치마를 빌렸었다. 시간이 3년이 넘게 흘렀으니 배은란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소민아가 말했다.“서 선생님, 지금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저 마침 차 몰고 왔는데 모셔다드릴게요.”배은란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손에 끌려 방향을 바꾸어 걸어갔다. 서철용은 그녀에게 관심을 줄 조금의 생각도 없어 보였다.“민용 씨 찾아온 거 같은데 용건이 뭔지 물어볼까?”배은란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배에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악, 내 배...”“아기가 곧 나올 것 같아.”“배가 너무 아파.”서철용의 눈에 배은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들어왔다. 그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소민아가 차를 몰고 다가왔다.“서 선생님, 얼른 차에 타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서철용은 어쩔 수 없이 양수가 터진 여자를 안아 차에 앉혔다. 임산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소민아는 부드러운 음악을 틀었다.“서 선생님, 어느 병원으로 갈까요?”서철용은 바로 병원 이름을 말했다.“군병원이요.”군병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각종 설비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군인 가족이나 특수 인원들에게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서철용은 연구원 대리 원장이었기에 이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소민아는 길눈이 밝아 막히는 도로를 피해 빠르게 지름길로 통과해 30분도 채 되지 않아 군병원에 도착했다.그녀는 처음으로 군병원이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경계가 삼엄해 특수한 통행증이 없으면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소민아는 서철용의 뒤를 따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가 빠르게 배은란을 분만실로 데려갔다.간호사까지 따라 들어가고 문밖에 서철용과 소민아만 남아 있었다.소민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서 선생님, 소월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요.”서철용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소민아는 인맥을 동원해 백방으로 알아본 뒤에야 소월 언니를 데려간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다.그녀는 신이랑에게 말하고 난 뒤 주소에 따라 한 연구소에 도착했다. 신이랑이 함께 오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완곡히 거절했다.문 앞에선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내부 인원이 아니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소민아는 명함 한 장을 경비원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엄숙한 얼굴로 그녀에게 경고했다.“여기엔 아가씨가 찾는 사람 없어요.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돌아가요. 아니면 업무 방해죄로 신고할 거예요.”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신분을 갖고 있다.소민아 역시 더는 억지로 들어갈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렸다.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에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소민아, 너 바보야? 이랑 씨는 시장님의 아들이잖아.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인데 왜 같이 오겠다는 거 거절했어. 평소엔 머리 좋은 거 같더니 이럴 때 보면 정말 멍청해.”경비원은 그녀가 돌아가지 않자 연구원으로 전화를 걸었다.“서 선생님, 누가 찾아왔어요.”서철용은 마스크를 벗고 연구실 바깥으로 나와 복도 끝에 걸어가고는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어떻게 생겼어요?”“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왔습니다. 이름은 소민아랍니다. 장소월의 친구이고, 언니가 소현아라고도 했습니다. 사람을 찾으러 온 것 같습니다.”“알겠어요.”서철용은 전화를 끊고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전화를 걸려 한 순간, 아무도 믿지 말라던 기성은의 말이 떠올라 바로 끊어버렸다.그녀는 차 안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점심부터 오후, 오후부터 저녁까지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자꾸만 졸음이 몰려와 얼마나 많은 커피를 시켰는지 모른다.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저녁 여덟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떨어져 전원이 꺼져버렸다.그녀는 흐릿한 정신을 가다듬
신이랑은 너무 성급했다. 이 청첩장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녀 역시 알지 못했다....다음 날 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소민아는 신이랑과 교제를 시작했다고 송시아에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송시아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소민아가 하루빨리 신씨 집안 며느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럼 걱정 없이 신군회를 시장 자리에 올릴 수 있고, 신이랑도 비서실장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당신 말대로 이랑 씨와 사귀고 있어요. 그럼 당신도 약속대로 소월 언니 해치지 않는 거 맞죠?”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연하지. 장소월이 서울시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돼. 그럼 예전 일은 눈감아줄 수 있어. 너도 장소월이 영원히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그러니까 여전히 소월 언니를 해칠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거잖아요. 송시아 씨, 역시 당신은 믿을 사람이 못 되네요.”송시아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난 이미 최대한 양보했어. 더 이상 어떻게 하길 바라? 민아야... 내 동생이라는 방패로 너무 과분한 걸 요구하진 마...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거든.”“난 네 언니야. 다른 사람보다 이 언니를 먼저 생각해야 해. 장소월이 대체 너랑 전연우한테 무슨 약을 먹였길래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야. 대체 장소월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그냥 인정해요, 소월 언니를 질투하고 있다고. 당신 미모는 소월 언니의 만분의 일도 채 안 돼요. 심지어 인품은 비교할 바도 못 되죠. 소월 언니는 아무한테도 해를 끼친 적 없지만,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요?”그 말을 끝으로 소민아는 홱 뒤돌아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는 분노에 차올라 책상 위 모든 물건을 집어 던져 버렸다...소민아 역시 장소월이 어디에 있을지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당시 장소월을 데리고 떠난 사람을 본 건 소민아 한 명뿐이다.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날 결혼식에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녀도 송시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