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봉이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날 밤 지나갔던 모든 차량을 조사해보았는데 사고 차량은 폐차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관한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제 생각에 그 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강영수가 눈을 질근 감았다.“조사할 필요 없어.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으니까.”그 말을 들으니 진봉은 대표님이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장소월은 전연우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아래로 내려갔다.학교 문 앞에서 백윤서와 인시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인시윤이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너 괜찮아? 미안해! 내가 고 선생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어. 괜히 그것 때문에 엽준수가 널 오해했잖아.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나 ㅂ고 선생님한테 얘기해 네 시험지를 가져왔어. 소월아, 너 진짜 대단해!”장소월은 멍하니 시험지를 쳐다보았다.역시... 그녀는 인시윤의 힘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합격한 것이다.이 사실을 확인하자 그녀는 마음속에서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고... 고마워요...”“그리고...”인시윤이 장소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오빠가 넌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했어. 엽준수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엄마는 요독증 말기래. 설사 이번에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소월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나 이번 일로 오빠한테 처벌을 받았는데 글쎄 시를 300번이나 베끼래.”“그래...”처벌을 받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우리 오빠가 나한테 했던 두 번째 한 마디 때문에 난 처벌을 받아도 행복해.”백윤서가 말했다.“괜찮으면 됐어요. 엽준수는 감옥에 가게 되는 거예요?”전연우가 대답했다.“그럴 거야.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지.”6년 아니면 10년?전연우가 관여하면 종신형을 받을지도 모른다.천만 원을 요구했다가 한 푼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
“네가 칼을 막아줬어도 장소월은 너한테 고마워하지도 않아.”그때, 장소월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엽시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장소월도 양반은 못 되겠네.”아직 문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돌연 자리를 뜨는 장소월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전연우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장소월의 행동을 지켜보았다.“고마워!”장소월이 마음을 담아 말하고는 허리를 폈다.“병원에 못 가봐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재덕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상처가 깊지 않으니 며칠만 치료하면 된다고 했어요.”엽시연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시끄러워! 장까지 배 밖으로 나왔는데 상처가 깊지 않다고? 이제 와 착한 척하지 말고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재덕이 엽시연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형,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내 말이 틀렸어? 예전에 우릴 얕잡아보고 무시한 게 누군지 잊었어?”“강용, 쟤 학교에서도 저렇게 착한 척해?”엽시연이 강용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엔 화도 잘 냈는데 지금은 많이 누르고 있어.”“전엔 내가 너희들한테 편견이 있었다는 거 인정해.”장소월이 솔직히 털어놓았다.“난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 너희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몰랐어. 미안해.”“다시 내 소개를 할게. 난 장소월이라고 해...”그녀가 손을 내밀자 재덕이 약간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전 재덕이에요.”“고마워.”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장소월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장소월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거기엔 장소월의 꾀도 숨겨져 있었다.오늘 밤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분위기는 훨씬 화기애애해질 것이다.그들과 헤어지고 인시윤과 함께 돌아가던 중 인시윤이 물었다.“너 무슨 말을 한 거야?”장소월이 말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 장소월은 학교를 나섰다.오후 네 시 반, 경찰서 취조실.엽준수가 머리를 밀고 죄수복을 입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멍하니 한곳을 쳐다보며 진술실 안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혼자 온 것이었다.그녀가 벽에 걸려있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엽준수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경찰이 나가자 장소월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에 온 건 아무도 모르니까.”엽준수는 이미 많은 고초를 당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악에 받쳐 소리쳤다.“내가 어떤 꼴로 있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 이제 만족해? 장소월, 넌 돈 많은 부모님을 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날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저 엄마의 치료비를 벌고 싶었을 뿐인데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내 인생은 네가 망친 거야! 나 널 죽이지 못한 게 미친 듯이 후회돼!”장소월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엽준수,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돈이 있었다고 해도 네 엄마는 그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넌 그냥 나한테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거야.”장소월은 그의 동공이 당황한 듯 확장되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아마 그의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난 예전 성적이 가장 낮은 반의 꼴등이었어. 그래서 6반에선 내가 부정행위로 반을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그리고 내가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것도 넌 아마 인시윤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질투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겠지... 사실 나도 나 자신을 의심한 적 있어. 정말 다 내 잘못인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건가? 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난 알게 됐어. 난 틀리지 않았어. 난 그저 내 인생에 깃든 모든 불행
장소월은 떠날 때 엽준수에게 만점에 근접한 시험지를 남겨주었다.점수를 본 순간, 그는 살을 에이는 얼음 구덩이에 들어간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가 틀렸다.그가 틀린 것이다!장소월의 말처럼 허영심 때문에 사채까지 쓰며 억지로 제운 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죽이고 모든 걸 망쳐버린 건 다름 아닌 엽준수 자신이다.18세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시험지를 꽉 움켜쥔 채 서럽게 울부짖었다.그게 무엇이든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이건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의 이치다!장소월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골목길 안에서 그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바짓자락을 거두어올린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꽃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장인이 빚어놓은 듯 준수했다. 하얀 눈꽃 한 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강용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 사고뭉치 악동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강용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그녀에게 걸어갔다.“밥 사준다며?”“그래서 계속 이곳에서 기다린 거야?”“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몇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삐딱해진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강용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침묵 끝에 강용이 입을 열었다.“저번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해?”장소월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유효기간은 이미 지났어.”“흥! 양심도 없는 년!”장소월은 사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 역시 일부로 발걸음을 늦추는 것 같았다.“마지막이야!”“...”“강용, 마지막이야. 내일도 오지 않으면 다시는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강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알았어.”저녁 식사는 구영관에서 하기로 했다.이곳의
강용이 언급되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강영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강용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장소월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이곳의 화차가 맛있어. 마셔봐.”“그래.”강영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하지만 그가 기뻐하는지 아닌지는 보아낼 수 없었다.이 차가 그의 입에 맞을까? 이곳의 차는 모두 일반적인 자스민 차라 그가 평소 마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장해진도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데 그 가격은 모두 수백, 수천만 원에 달한다.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해 꺼내 보니 강용으로부터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일이 생겨서 못 가!」장소월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전화 한 통 하고 올게.”강영수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래. 다녀와.”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조용한 구석으로 가 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술집 안, 음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강용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양쪽에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를 안고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어떤 사람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강용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오만 원 짜리 한 무더기를 밀며 카드 한 장을 던졌다.그때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옆자리 아가씨를 쳐다보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힐끗거렸다. 아가씨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누른 뒤 강용의 귓가에 가져갔다.“누구시죠?”장소월은 핸드폰 너머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강용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바빠? 오늘 사지 못한 밥은 다음에 꼭 살게.」강용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뒤집어놓고 계속하
장소월이 화장실에서 나갔을 때 오부연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소월 아가씨!”“오 집사님?”장소월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데엔 분명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역시!비상구로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장소월이 물었다.“집사님, 무슨 일이시죠?”“아가씨, 이걸 봐주세요.”오부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장소월이 살펴보니 저번 주에 받은 심리 검사 결과가 쓰여있었는데 심각한 우울증 판정이 내려져 있었다.환자 이름을 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분명 강영수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이... 이건?”하지만 식사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든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도련님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리 설득해도 도련님은 일이 바쁘단 핑계로 약을 드시지 않아요. 도련님은 성격이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어요. 저번 주주총회에선 주주 한 명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어요. 이런 일은 이미 몇 차례나 발생했어요. 만약 지속된다면 주주들은 도련님의 성정을 문제 삼아 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도련님이 아가씨를 여러 번 도왔잖아요. 그러니까 도련님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설득해 주세요. 지금은 아가씨를 제외하곤 아무도 도련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리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강영수의 곁에서 몇 년을 일한 집사님도 하지 못하는 일을 몇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제가 어떻게요...”“소월 아가씨는 영리한 사람이니 도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저번 수술하는 날엔 아가씨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를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어요. 도련님께선 절대 이 말을 아가씨에게 하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그는 장소월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잠시 후 장소월은 룸에
인시윤이 말했다.“왜 웃어요!”엽시연이 연이어 부인했다.“웃은 거 아니에요. 사레에 들렸을 뿐이에요.”인시윤은 더는 엽시연에게 신경 쓰지 않고 흰송이버섯 볶음을 전연우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식지 않았는지 먹어봐요. 식었으면 하나 더 시킬게요.”장소월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장소월은 귓불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부끄러워진 것이다.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오직 오부연의 말 때문이었다.강영수는 병증이 악화되었고 우울증 치료제도 끊은 데다 매일 먹는 음식량도 아주 적다.강영수는 확실히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장소월은 이에 너무나도 큰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게 전연우의 앞이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겐 독립적인 인격이 존재한다. 줄곧 누군가의 손에 좌지우지 당하는 노리개처럼 뭐든 그의 말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아홉 시가 되어가자 백윤서가 전연우에게 말했다.“오빠,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전연우가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집에 갈 시간이네. 너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하잖아. 내가 데려다줄게.”인시윤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오빠, 오빠가 소월이를 데려다줘. 난 연우 씨의 차에 앉아 왔으니까 연우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게.”그녀는 재빨리 전연우의 손목을 잡았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빛을 읽은 그녀가 말했다.“그... 그래!”인시윤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결정하자.”이어 장소월이 말했다.“엽시연, 내가 이미 차를 불러놓았으니까 타고 가. 안전에 조심하고.”엽시연과 그의 친구들은 배불리 먹고 의자에 기대 쉬고 있었다.“알았어.”장소월과 강영수가 함께 문 앞까지 걸어 나갔다. 진봉이 차를 몰고 지하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찬 바람을 쐬니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그때 어깨 위에 외투 하나가 걸렸다.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강영수가 입고 온 그래이색 정장이었다.“네 옷
“까먹었어. 다음엔 꼭 챙길게.”“응.”장소월은 강영수의 차에 탔다. 차 안은 에어컨을 켜서 별로 춥지 않았고, 그 외투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걸쳐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장소월은 차 시트에 기대어 긴 속눈썹을 감고 잠이 들었다.진봉은 백미러로 확인하고, 차 안의 불빛을 어둡게 조정했다. 차 안은 조용해서 그녀의 얕은 호흡이 잘 들릴 정도였다.강영수는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편안해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인기척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통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미안, 깼어?”부드러운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담요를 내려다보고는 졸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도착했어?”“아직 좀 남았어.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계속 자.”“응.”장소월이 다시 자려는데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장소월은 강영수에게 몸을 반쯤 기대고 그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장소월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순간 머리가 맑아졌다.자세가 친밀해서, 남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커플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그가 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그냥 별로였다.진도가 너무 빨라서일까?그럴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마음을 늦게 여는 타입이라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전연우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아마 이미 올라갔을 것이다.장소월이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차는 성인 남성이 달려서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늦게 달렸다.아파트 밑.“나 혼자 올라가면 돼. 이미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 도착하면 전화하고!”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장소월은 총명해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이미 장소월에게 들켰다. 강영수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났다.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