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떠날 때 엽준수에게 만점에 근접한 시험지를 남겨주었다.점수를 본 순간, 그는 살을 에이는 얼음 구덩이에 들어간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가 틀렸다.그가 틀린 것이다!장소월의 말처럼 허영심 때문에 사채까지 쓰며 억지로 제운 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죽이고 모든 걸 망쳐버린 건 다름 아닌 엽준수 자신이다.18세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시험지를 꽉 움켜쥔 채 서럽게 울부짖었다.그게 무엇이든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이건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의 이치다!장소월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골목길 안에서 그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바짓자락을 거두어올린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꽃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장인이 빚어놓은 듯 준수했다. 하얀 눈꽃 한 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강용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 사고뭉치 악동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강용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그녀에게 걸어갔다.“밥 사준다며?”“그래서 계속 이곳에서 기다린 거야?”“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몇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삐딱해진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강용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침묵 끝에 강용이 입을 열었다.“저번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해?”장소월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유효기간은 이미 지났어.”“흥! 양심도 없는 년!”장소월은 사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 역시 일부로 발걸음을 늦추는 것 같았다.“마지막이야!”“...”“강용, 마지막이야. 내일도 오지 않으면 다시는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강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알았어.”저녁 식사는 구영관에서 하기로 했다.이곳의
강용이 언급되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강영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강용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장소월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이곳의 화차가 맛있어. 마셔봐.”“그래.”강영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하지만 그가 기뻐하는지 아닌지는 보아낼 수 없었다.이 차가 그의 입에 맞을까? 이곳의 차는 모두 일반적인 자스민 차라 그가 평소 마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장해진도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데 그 가격은 모두 수백, 수천만 원에 달한다.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해 꺼내 보니 강용으로부터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일이 생겨서 못 가!」장소월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전화 한 통 하고 올게.”강영수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래. 다녀와.”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조용한 구석으로 가 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술집 안, 음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강용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양쪽에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를 안고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어떤 사람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강용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오만 원 짜리 한 무더기를 밀며 카드 한 장을 던졌다.그때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옆자리 아가씨를 쳐다보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힐끗거렸다. 아가씨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누른 뒤 강용의 귓가에 가져갔다.“누구시죠?”장소월은 핸드폰 너머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강용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바빠? 오늘 사지 못한 밥은 다음에 꼭 살게.」강용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뒤집어놓고 계속하
장소월이 화장실에서 나갔을 때 오부연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소월 아가씨!”“오 집사님?”장소월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데엔 분명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역시!비상구로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장소월이 물었다.“집사님, 무슨 일이시죠?”“아가씨, 이걸 봐주세요.”오부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장소월이 살펴보니 저번 주에 받은 심리 검사 결과가 쓰여있었는데 심각한 우울증 판정이 내려져 있었다.환자 이름을 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분명 강영수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이... 이건?”하지만 식사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든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도련님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리 설득해도 도련님은 일이 바쁘단 핑계로 약을 드시지 않아요. 도련님은 성격이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어요. 저번 주주총회에선 주주 한 명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어요. 이런 일은 이미 몇 차례나 발생했어요. 만약 지속된다면 주주들은 도련님의 성정을 문제 삼아 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도련님이 아가씨를 여러 번 도왔잖아요. 그러니까 도련님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설득해 주세요. 지금은 아가씨를 제외하곤 아무도 도련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리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강영수의 곁에서 몇 년을 일한 집사님도 하지 못하는 일을 몇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제가 어떻게요...”“소월 아가씨는 영리한 사람이니 도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저번 수술하는 날엔 아가씨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를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어요. 도련님께선 절대 이 말을 아가씨에게 하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그는 장소월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잠시 후 장소월은 룸에
인시윤이 말했다.“왜 웃어요!”엽시연이 연이어 부인했다.“웃은 거 아니에요. 사레에 들렸을 뿐이에요.”인시윤은 더는 엽시연에게 신경 쓰지 않고 흰송이버섯 볶음을 전연우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식지 않았는지 먹어봐요. 식었으면 하나 더 시킬게요.”장소월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장소월은 귓불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부끄러워진 것이다.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오직 오부연의 말 때문이었다.강영수는 병증이 악화되었고 우울증 치료제도 끊은 데다 매일 먹는 음식량도 아주 적다.강영수는 확실히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장소월은 이에 너무나도 큰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게 전연우의 앞이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겐 독립적인 인격이 존재한다. 줄곧 누군가의 손에 좌지우지 당하는 노리개처럼 뭐든 그의 말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아홉 시가 되어가자 백윤서가 전연우에게 말했다.“오빠,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전연우가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집에 갈 시간이네. 너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하잖아. 내가 데려다줄게.”인시윤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오빠, 오빠가 소월이를 데려다줘. 난 연우 씨의 차에 앉아 왔으니까 연우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게.”그녀는 재빨리 전연우의 손목을 잡았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빛을 읽은 그녀가 말했다.“그... 그래!”인시윤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결정하자.”이어 장소월이 말했다.“엽시연, 내가 이미 차를 불러놓았으니까 타고 가. 안전에 조심하고.”엽시연과 그의 친구들은 배불리 먹고 의자에 기대 쉬고 있었다.“알았어.”장소월과 강영수가 함께 문 앞까지 걸어 나갔다. 진봉이 차를 몰고 지하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찬 바람을 쐬니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그때 어깨 위에 외투 하나가 걸렸다.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강영수가 입고 온 그래이색 정장이었다.“네 옷
“까먹었어. 다음엔 꼭 챙길게.”“응.”장소월은 강영수의 차에 탔다. 차 안은 에어컨을 켜서 별로 춥지 않았고, 그 외투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걸쳐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장소월은 차 시트에 기대어 긴 속눈썹을 감고 잠이 들었다.진봉은 백미러로 확인하고, 차 안의 불빛을 어둡게 조정했다. 차 안은 조용해서 그녀의 얕은 호흡이 잘 들릴 정도였다.강영수는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편안해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인기척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통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미안, 깼어?”부드러운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담요를 내려다보고는 졸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도착했어?”“아직 좀 남았어.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계속 자.”“응.”장소월이 다시 자려는데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장소월은 강영수에게 몸을 반쯤 기대고 그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장소월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순간 머리가 맑아졌다.자세가 친밀해서, 남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커플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그가 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그냥 별로였다.진도가 너무 빨라서일까?그럴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마음을 늦게 여는 타입이라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전연우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아마 이미 올라갔을 것이다.장소월이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차는 성인 남성이 달려서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늦게 달렸다.아파트 밑.“나 혼자 올라가면 돼. 이미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 도착하면 전화하고!”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장소월은 총명해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이미 장소월에게 들켰다. 강영수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났다.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30분 뒤, 불이 켜지지 않은 방에서 강영수는 전화를 받았다.여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착했어?”“응.”휴대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오 집사님에게 물어보니 요즘 너 약 잘 챙겨 먹는다며? 좀 나아졌어?”“응, 나아졌어.”“만약 어디 아프면 제때 병원에 가.”“음.”오 집사는 약과 물 한 잔을 들고 있었지만,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대략 5분 정도 지나 전화가 끊기자, 오 집사는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등불을 켜고 걸어갔다.“소월 아가씨인가요?”강영수는 몸을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맞아. 내 병에 대해 오 집사가 모두 말해줬어?”오 집사는 부인했다.“소월 아가씨께서 먼저 물어보셨어요. 저는 적당한 부분만 골라서 말씀 드렸고요. 사실 소월 아가씨도 도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아가씨는 집에서 잘 지내지 못해요. 그분을 위해서라도 도련님은 자기 몸을 잘 돌봐야 해요. 주주들을 설득해서 권위가 안정되어야만 아가씨를 고해에서 구해낼 수 있어요.”“맞아...”강영수는 몸을 돌려 반짝이는 거리를 보며 깊어진 눈으로 말했다.“강한 그룹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나한테 진정한 권력이 생기는 거고, 소월이도 옆에 데려올 수 있어.”주주총회에서 그의 자리는 이미 대부분 주주들의 불만을 받아 현재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철저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인간들이 완전하게 굴복할 수 있을까?“도련님, 아가씨 말대로 제때 약을 챙겨 드시고 일단 병을 고치는 건 어떨까요?”강영수는 약을 먹고 곧 잠이 들었다.그녀의 잘 자라는 말도 들었다.장소월은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주방으로 와 물을 찾았다. 날씨가 이미 추워져 다시 물을 끓여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씩 섞은 다음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윤서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펑펑 울었는지 약간 붉었다.“윤서야, 내일 다시 얘기해.”백윤서가 아무리
“넌 이제 어린 애가 아니야. 무슨 일이든 내가 달래줄 수 없다고. 윤서야, 이번이 마지막이야!”백윤서는 전연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눈물이 그의 옷자락을 적셨다. 전연우의 말은 계속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오빠 곁을 떠난 적이 없어요. 늘 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오빠...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요. 만약 날 버린다면, 난 어떡해요.”전연우와 백윤서는 어려서부터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고, 함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확실히 특별한 정이 있었다.하지만 전연우는 욕심이 많아, 지금 가진 모든 것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처음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장씨 집안이었다면, 지금은 인시윤이 있다...전연우는 백윤서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권세와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 장씨 집안은 인씨 집과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없었다.돈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권세 앞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이 있으면 서울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고,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강가를 얻으려 할 것이다.“윤서야,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이 약속은 꼭 지켜.”전연우는 몇 마디 말로 백윤서를 달랬다.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방으로 들여보냈다.방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장소월은 전연우가 떠나기를 기다렸다.발걸음을 떼려는데, 남자가 소리 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전연우의 차갑고 무서운 눈동자에 장소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재밌어?”강한 압박이 그녀를 덮쳤다.장소월은 손에서 이미 차버린 물을 꽉 쥐고,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물 마시려고 나왔다가, 우연히 들었어. 당신 사생활이니까 나랑 상관없고, 외부에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야.”장소월이 한 발짝 내딛자, 전연우에게 팔이 잡혀 벽에 세게 부딪혔고, 컵의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뭐 하는 짓이야?”장소월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 아주머니와 백윤서가 모두 집에 있는데 전연우가 과연 심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전연우는
사람은 변한다.전연우는 그녀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장소월은 확실히 변했다. 멍청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공주에서 이제는 감히 그와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전연우는 손을 놓았다.“자신 있는 건 좋은 일이야... 소월아... 명심해! 네 성은 장씨야. 장가가 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얼마나 많은 원수가 있는지 아냐고? 네가 장가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순간, 네 목숨은 원수들의 손에 놀아나는 거지. 기생으로 팔려가고, 인신매매범에게 장기가 털리고...”장소월의 얼굴빛은 순식간에 변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전연우는 그녀에게 결코 자비로운 적이 없었다.장소월이 죽는다고 해서 장해진도 눈 하나 깜짝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구에 불과했으니, 그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었다.“설마 강영수가 있는 한, 네가 무사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자식도 그냥 널 심심풀이 도구로 여기는 거야. 네가 진짜 강씨 집안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아? 그런 헛된 꿈은 버려! 밖에서 잘 생각하고 들어와.”장소월은 한 번도 강영수와 어떤 결과를 바란 적이 없었다전연우의 뒷모습이 복도에서 사라지고, 머리 위의 센서 등이 꺼지고, 장소월은 혼자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전연우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그는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장소월이 다른 남자와 다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물건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장소월! 내가 널 갖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널 갖는 건 허용하지 않아! 네 마음에 내가 없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있어서도 안 돼. 아니면... 널 망쳐버릴지도 몰라!’새벽 12시 30분.장소월은 아파트 아래층에 혼자 앉아 머릿속이 텅 비었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줄이 끊어진 것 같았지만, 아무리 해도 연결이 안 되었다.검은 운동화 한 켤레가 보이더니, 오만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이건 집에서 쫓겨난 건가?”장소월은 고개를 들 필요 없이 목소리를
그는 사장과 여자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서철용은 그들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당신들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서철용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감과 비웃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제 바에서 배은란을 구한 사람이 바로 나였거든.”여자와 사장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배은란을 구한 이가 서철용이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직접 찾아와서 따져 물을 줄이야.“당신... 뭘 하려는 거예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철용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서철용의 어조는 냉담하고 단호했다. 사장은 서철용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자 앞으로 걸어가 한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팔을 들어 올려 따귀를 후려쳤다. 여자는 반응할 틈도 없이 가격을 당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그녀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고, 눈에는 충격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장을 노려보았다.“당신... 당신이 감히 날 때려?” 여자는 분노에 차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공포와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사장은 그녀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경멸과 혐오감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이다. 사장을 시켜 배은란에게 약을 먹이도록 한 사람 또한 이 여자다. 지금, 그녀는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당신... 당신들 두고 봐.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돌려 옥상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줄 리 없는 서철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여자의 옷을 낚아채 옥상 난간 옆으로 끌고 갔다.“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여자
“누구시죠?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사장이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 그녀는 서철용과 일면식이 없을뿐더러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서철용이라고 합니다. 당신과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냉담하고 단호한 서철용의 어조에 사장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서철용의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함부로 그의 화를 돋우지 않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애썼다.서철용은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는 사장에게 왜 배은란에게 약을 먹였는지, 왜 그녀를 해치려 했는지 따져 물었다.사장은 처음에는 부인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눈빛이 너무나 날카로워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누군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해명했다.“다른 사람이라고요?” 서철용은 코웃음을 쳤다. “어제 문 앞에서 서민용의 번호를 따가려던 그 여자 말인가요?” 그는 사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진작부터 그 여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민용을 바라볼 때 눈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배은란을 향할 때는 심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서민용은 수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 사장에게 그런 짓을 시킨 사람은 확실히 그 여자였다. 그녀는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라 사장과의 관계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이 어제 이곳에 왔었던 걸 기억해내지 못했다. 서철용 정도 외모의 남자라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그 여자 오늘 또 와요?” 서철용은 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네. 매일 옵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여자가 저한테 시킨 거예요.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서철용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그는 바 문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계획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주호걸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그가 주호걸을 무시한다고 해도, 주호걸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대략 10분 정도 지나자, 주호걸이 바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이 근처에 있었으니, 자연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철용은 온몸에서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그는 손에 든 빵을 서철용에게 내밀었다. 그는 서철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주말 이 시간이면 분명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었을 그가 오늘은 술집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배은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배은란이 알아주기나 할까.“입맛 없어. 먹고 싶지 않아.” 서철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음식이라곤 조금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 안 먹으면 무슨 힘으로 싸우려고?” 서철용이 거절했지만, 주호걸은 손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빵을 들고 있었다. 서철용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주호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 그는 빵을 받아들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그 후에도 계속 술집 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그렇게 쳐다보면 누가 감히 문을 열겠어?” 주호걸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철용에게 말했다. 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가까이 다가오겠는가?게다가 서철용의 오늘 차림새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도둑으로 취급했을 것이다.서철용이 고개를 돌려 주호걸을 바라보았다. 주호걸의 말이 옳다. 그의 생각이 짧았다. 그는 옆으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장소로 옮겼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그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드디어 3시쯤 되었을 때,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집 사장이었다! 배은란의 물에 장난질을 쳐놓
한편, 서철용은 곧장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배은란이 일하는 바로 향했다.그는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배은란이 잘못한 것도 없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만약 그가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배은란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서민용도 다시 배은란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서철용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아직 낮시간이라 바는 문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주호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여보세요.” 서철용은 냉담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지금의 그는 누구에게도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주호걸을 포함해서 말이다.하지만 만약 배은란이 말을 걸어온다면, 아마 다른 모습일 것이다.“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서철용을 찾으려 수없이 반복해 전화를 걸었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서철용의 학교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서철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줄곧 서철용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서철용이 배은란을 데리고 떠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그는 단지 지금 서철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기 때문이었다.“바에 있어.”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제 바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주호걸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계속 주호걸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바로 찾아올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또한 그와 주호걸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무엇을
어젯밤은 너무나도 뜨겁고 격렬했다.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워서 입 밖에 내뱉기가 어려울 뿐이었다.“은란아, 깼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배은란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여 이런 상황에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응.” 배은란은 행복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다면, 언제 서민용과 그런 일을 하겠는가.“너 주려고 아침밥 사 왔는데, 다 식었네.” 서민용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쳐다보며 말했다.“지금 먹을게.”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서민용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를 위해 사 온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어젯밤 그가 이곳에 없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은란아, 술집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서민용이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어젯밤 내내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어제 어떤 여자가 그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던가. 배은란의 안전은 더더욱 장담할 수가 없다.그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제 더는 술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만약 서민용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서민용이 적시에 와주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장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전에는 사장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못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어제 사장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물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할까
“민용아, 난 네가 정말 좋아.” 배은란은 손을 뻗어 서철용의 목을 감싸 안았지만, 입으로는 서민용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손을 잡고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예상치도 못한 큰 힘으로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민용아,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 배은란의 말투에는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나랑 사귄 지가 언젠데, 왜 한 번도 날 건드리지도 않는 거야.” 그녀는 서철용의 어깨에 기대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었던지라 서철용은 화들짝 놀랐다.이미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민용이 이토록 보수적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은란아,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나중에 결혼하면 해줄게.”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배은란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챌까 봐 감히 크게 말하지는 못했다.“하지만 나 지금 너무 괴롭단 말이야.” 배은란은 연약한 몸을 서철용의 품에 기댄 채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서철용은 처음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단지 이곳에서 그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그 역시 남자인지라 사랑하는 여자의 도발을 참아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착하지. 잠들면 괜찮아질 거야.” 서철용은 애써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배은란을 눕히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도저히 그녀를 침대에 눕힐 수가 없었다.몸은 이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는 간신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녀를 밀어냈다.하지만 배은란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다. 그녀는 곧바로 서철용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은란아, 이러지 마.” 서철용은 그녀의 키스에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민용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지금을 즐기면 안 될까?” 배은란은 애틋한 눈빛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약물의 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그녀의 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배은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술집에서 일하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그런 잘생긴 남자랑 사귀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한테 넘겨.” 여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배은란은 화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더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반항할 조금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여자는 우쭐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배은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서민용은 내 거야. 다시는 그 남자 앞에 나타나지 마.” 그녀가 배은란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려 한 순간, 누군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감히 이 여자를 함부로 건드려?” 서철용은 다시 여자를 향해 발길질했다.그는 종래로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배은란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게 누구든 백 배로 갚아주려는 생각이었다.여자는 서철용의 발로 차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나뒹굴었다.“꺼져!” 서철용이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여자는 겁에 질려 간신히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그녀는 본래 강약약강의 표본인 사람이었다.“민용아...” 배은란은 서철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지금의 그녀는 의식이 흐릿한 상태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선명히 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서민용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 배은란의 모습에 서철용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라줬다.“그래.” 그는 배은란을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배은란을 품에 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서민용 행세를 해야만 배은란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배은란의 마음속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따뜻한 품에 꼭 안겨 있으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민용아,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지켜.”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술집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심지어 술집에 있는 물에조차 입을 대고 싶지 않아 항상 물을 챙겨왔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전화하고.” 서민용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자꾸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다.“알았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단 말인가. “아니면... 오늘은 그냥 쉬면 안 돼? 하루쯤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서민용이 배은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는 조금 전 그 삐딱한 태도의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배은란이 돌아간 뒤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말이다. “안 돼. 쉬는 만큼 월급도 줄어들잖아.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한 건 돈이야.” 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 또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민용은 배은란의 결연한 눈빛을 보니 쉬이 결정을 바꿀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알았어. 그럼 꼭 몸조심해야 해.” 서민용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당부했다.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서민용은 길가에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은란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이 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배은란은 바로 돌아와 계속하여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각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미소를 띤 채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도 피로하고 불편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프로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맡겨진 일을 최대한 잘 해내려고 노력했다. 서철용과 주호걸은 줄곧 몰래 배은란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민용의 등장부터 배은란이 그에게 보이는 태도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
배은란은 난감한 표정으로 놓아달라며 서민용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서철용과 주호걸은 못마땅한 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일하는 중이잖아. 이러지 마.” 배은란이 서민용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서민용과의 친밀한 스킨십이 싫지는 않았지만, 근무시간이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안전에 주의해야 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또한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배은란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다른 방법이 없다.“응, 응.”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 먼저 가. 퇴근하면 얘기할게.”서민용도 따로 일하는 곳이 있었다. 배은란은 그가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 먼저 그를 보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일에 방해만 될 것이다.“알았어.” 서민용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떠났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그를 막아섰다.“잘생긴 오빠, 혹시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요?” 껄렁한 여자 한 명이 서민용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거의 술집에 살다시피 하는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과 어울렸었다. 하지만 서민용처럼 선비 같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하여 서민용을 보자마자 전화번호를 따겠다며 다가온 것이다.서민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배은란밖에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죄송하지만, 저는 여자친구가 있어요.” 서민용은 정중하게 여자를 거절했다.하지만 여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서민용에게 매달렸다. “에이, 전화번호 알려달라는 것뿐이잖아요. 연애하자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친구 한 명 더 생긴다고 생각해요.”서민용은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문 쪽을 바라보며 핑계를 대고 떠나려고 했다.바로 그때, 배은란이 다가왔다.서민용이 웬 여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