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 장소월은 학교를 나섰다.오후 네 시 반, 경찰서 취조실.엽준수가 머리를 밀고 죄수복을 입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멍하니 한곳을 쳐다보며 진술실 안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혼자 온 것이었다.그녀가 벽에 걸려있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엽준수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경찰이 나가자 장소월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에 온 건 아무도 모르니까.”엽준수는 이미 많은 고초를 당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악에 받쳐 소리쳤다.“내가 어떤 꼴로 있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 이제 만족해? 장소월, 넌 돈 많은 부모님을 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날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저 엄마의 치료비를 벌고 싶었을 뿐인데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내 인생은 네가 망친 거야! 나 널 죽이지 못한 게 미친 듯이 후회돼!”장소월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엽준수,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돈이 있었다고 해도 네 엄마는 그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넌 그냥 나한테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거야.”장소월은 그의 동공이 당황한 듯 확장되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아마 그의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난 예전 성적이 가장 낮은 반의 꼴등이었어. 그래서 6반에선 내가 부정행위로 반을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그리고 내가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것도 넌 아마 인시윤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질투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겠지... 사실 나도 나 자신을 의심한 적 있어. 정말 다 내 잘못인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건가? 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난 알게 됐어. 난 틀리지 않았어. 난 그저 내 인생에 깃든 모든 불행
장소월은 떠날 때 엽준수에게 만점에 근접한 시험지를 남겨주었다.점수를 본 순간, 그는 살을 에이는 얼음 구덩이에 들어간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가 틀렸다.그가 틀린 것이다!장소월의 말처럼 허영심 때문에 사채까지 쓰며 억지로 제운 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죽이고 모든 걸 망쳐버린 건 다름 아닌 엽준수 자신이다.18세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시험지를 꽉 움켜쥔 채 서럽게 울부짖었다.그게 무엇이든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이건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의 이치다!장소월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골목길 안에서 그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바짓자락을 거두어올린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꽃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장인이 빚어놓은 듯 준수했다. 하얀 눈꽃 한 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강용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 사고뭉치 악동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강용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그녀에게 걸어갔다.“밥 사준다며?”“그래서 계속 이곳에서 기다린 거야?”“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몇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삐딱해진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강용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침묵 끝에 강용이 입을 열었다.“저번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해?”장소월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유효기간은 이미 지났어.”“흥! 양심도 없는 년!”장소월은 사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 역시 일부로 발걸음을 늦추는 것 같았다.“마지막이야!”“...”“강용, 마지막이야. 내일도 오지 않으면 다시는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강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알았어.”저녁 식사는 구영관에서 하기로 했다.이곳의
강용이 언급되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강영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강용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장소월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이곳의 화차가 맛있어. 마셔봐.”“그래.”강영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하지만 그가 기뻐하는지 아닌지는 보아낼 수 없었다.이 차가 그의 입에 맞을까? 이곳의 차는 모두 일반적인 자스민 차라 그가 평소 마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장해진도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데 그 가격은 모두 수백, 수천만 원에 달한다.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해 꺼내 보니 강용으로부터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일이 생겨서 못 가!」장소월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 전화 한 통 하고 올게.”강영수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래. 다녀와.”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조용한 구석으로 가 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술집 안, 음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강용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양쪽에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를 안고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어떤 사람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강용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오만 원 짜리 한 무더기를 밀며 카드 한 장을 던졌다.그때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옆자리 아가씨를 쳐다보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힐끗거렸다. 아가씨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누른 뒤 강용의 귓가에 가져갔다.“누구시죠?”장소월은 핸드폰 너머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강용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바빠? 오늘 사지 못한 밥은 다음에 꼭 살게.」강용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뒤집어놓고 계속하
장소월이 화장실에서 나갔을 때 오부연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소월 아가씨!”“오 집사님?”장소월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데엔 분명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역시!비상구로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장소월이 물었다.“집사님, 무슨 일이시죠?”“아가씨, 이걸 봐주세요.”오부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장소월이 살펴보니 저번 주에 받은 심리 검사 결과가 쓰여있었는데 심각한 우울증 판정이 내려져 있었다.환자 이름을 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분명 강영수였다.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이... 이건?”하지만 식사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든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도련님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리 설득해도 도련님은 일이 바쁘단 핑계로 약을 드시지 않아요. 도련님은 성격이 점점 더 포악해지고 있어요. 저번 주주총회에선 주주 한 명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어요. 이런 일은 이미 몇 차례나 발생했어요. 만약 지속된다면 주주들은 도련님의 성정을 문제 삼아 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도련님이 아가씨를 여러 번 도왔잖아요. 그러니까 도련님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설득해 주세요. 지금은 아가씨를 제외하곤 아무도 도련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리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강영수의 곁에서 몇 년을 일한 집사님도 하지 못하는 일을 몇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제가 어떻게요...”“소월 아가씨는 영리한 사람이니 도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저번 수술하는 날엔 아가씨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를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어요. 도련님께선 절대 이 말을 아가씨에게 하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그는 장소월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잠시 후 장소월은 룸에
인시윤이 말했다.“왜 웃어요!”엽시연이 연이어 부인했다.“웃은 거 아니에요. 사레에 들렸을 뿐이에요.”인시윤은 더는 엽시연에게 신경 쓰지 않고 흰송이버섯 볶음을 전연우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식지 않았는지 먹어봐요. 식었으면 하나 더 시킬게요.”장소월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장소월은 귓불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부끄러워진 것이다.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오직 오부연의 말 때문이었다.강영수는 병증이 악화되었고 우울증 치료제도 끊은 데다 매일 먹는 음식량도 아주 적다.강영수는 확실히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장소월은 이에 너무나도 큰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게 전연우의 앞이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겐 독립적인 인격이 존재한다. 줄곧 누군가의 손에 좌지우지 당하는 노리개처럼 뭐든 그의 말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아홉 시가 되어가자 백윤서가 전연우에게 말했다.“오빠,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전연우가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집에 갈 시간이네. 너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하잖아. 내가 데려다줄게.”인시윤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오빠, 오빠가 소월이를 데려다줘. 난 연우 씨의 차에 앉아 왔으니까 연우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게.”그녀는 재빨리 전연우의 손목을 잡았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빛을 읽은 그녀가 말했다.“그... 그래!”인시윤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결정하자.”이어 장소월이 말했다.“엽시연, 내가 이미 차를 불러놓았으니까 타고 가. 안전에 조심하고.”엽시연과 그의 친구들은 배불리 먹고 의자에 기대 쉬고 있었다.“알았어.”장소월과 강영수가 함께 문 앞까지 걸어 나갔다. 진봉이 차를 몰고 지하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찬 바람을 쐬니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그때 어깨 위에 외투 하나가 걸렸다.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강영수가 입고 온 그래이색 정장이었다.“네 옷
“까먹었어. 다음엔 꼭 챙길게.”“응.”장소월은 강영수의 차에 탔다. 차 안은 에어컨을 켜서 별로 춥지 않았고, 그 외투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걸쳐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장소월은 차 시트에 기대어 긴 속눈썹을 감고 잠이 들었다.진봉은 백미러로 확인하고, 차 안의 불빛을 어둡게 조정했다. 차 안은 조용해서 그녀의 얕은 호흡이 잘 들릴 정도였다.강영수는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편안해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인기척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통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미안, 깼어?”부드러운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담요를 내려다보고는 졸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도착했어?”“아직 좀 남았어.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계속 자.”“응.”장소월이 다시 자려는데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장소월은 강영수에게 몸을 반쯤 기대고 그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장소월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순간 머리가 맑아졌다.자세가 친밀해서, 남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커플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그를 밀어낼 수 없었고, 그가 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그냥 별로였다.진도가 너무 빨라서일까?그럴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마음을 늦게 여는 타입이라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전연우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아마 이미 올라갔을 것이다.장소월이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차는 성인 남성이 달려서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늦게 달렸다.아파트 밑.“나 혼자 올라가면 돼. 이미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 도착하면 전화하고!”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장소월은 총명해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이미 장소월에게 들켰다. 강영수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났다.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30분 뒤, 불이 켜지지 않은 방에서 강영수는 전화를 받았다.여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착했어?”“응.”휴대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오 집사님에게 물어보니 요즘 너 약 잘 챙겨 먹는다며? 좀 나아졌어?”“응, 나아졌어.”“만약 어디 아프면 제때 병원에 가.”“음.”오 집사는 약과 물 한 잔을 들고 있었지만,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대략 5분 정도 지나 전화가 끊기자, 오 집사는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등불을 켜고 걸어갔다.“소월 아가씨인가요?”강영수는 몸을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맞아. 내 병에 대해 오 집사가 모두 말해줬어?”오 집사는 부인했다.“소월 아가씨께서 먼저 물어보셨어요. 저는 적당한 부분만 골라서 말씀 드렸고요. 사실 소월 아가씨도 도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아가씨는 집에서 잘 지내지 못해요. 그분을 위해서라도 도련님은 자기 몸을 잘 돌봐야 해요. 주주들을 설득해서 권위가 안정되어야만 아가씨를 고해에서 구해낼 수 있어요.”“맞아...”강영수는 몸을 돌려 반짝이는 거리를 보며 깊어진 눈으로 말했다.“강한 그룹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나한테 진정한 권력이 생기는 거고, 소월이도 옆에 데려올 수 있어.”주주총회에서 그의 자리는 이미 대부분 주주들의 불만을 받아 현재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철저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인간들이 완전하게 굴복할 수 있을까?“도련님, 아가씨 말대로 제때 약을 챙겨 드시고 일단 병을 고치는 건 어떨까요?”강영수는 약을 먹고 곧 잠이 들었다.그녀의 잘 자라는 말도 들었다.장소월은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주방으로 와 물을 찾았다. 날씨가 이미 추워져 다시 물을 끓여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씩 섞은 다음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윤서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펑펑 울었는지 약간 붉었다.“윤서야, 내일 다시 얘기해.”백윤서가 아무리
“넌 이제 어린 애가 아니야. 무슨 일이든 내가 달래줄 수 없다고. 윤서야, 이번이 마지막이야!”백윤서는 전연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눈물이 그의 옷자락을 적셨다. 전연우의 말은 계속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오빠 곁을 떠난 적이 없어요. 늘 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오빠...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요. 만약 날 버린다면, 난 어떡해요.”전연우와 백윤서는 어려서부터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고, 함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확실히 특별한 정이 있었다.하지만 전연우는 욕심이 많아, 지금 가진 모든 것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처음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장씨 집안이었다면, 지금은 인시윤이 있다...전연우는 백윤서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권세와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 장씨 집안은 인씨 집과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없었다.돈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권세 앞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이 있으면 서울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고,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강가를 얻으려 할 것이다.“윤서야,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이 약속은 꼭 지켜.”전연우는 몇 마디 말로 백윤서를 달랬다.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방으로 들여보냈다.방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장소월은 전연우가 떠나기를 기다렸다.발걸음을 떼려는데, 남자가 소리 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전연우의 차갑고 무서운 눈동자에 장소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재밌어?”강한 압박이 그녀를 덮쳤다.장소월은 손에서 이미 차버린 물을 꽉 쥐고,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물 마시려고 나왔다가, 우연히 들었어. 당신 사생활이니까 나랑 상관없고, 외부에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야.”장소월이 한 발짝 내딛자, 전연우에게 팔이 잡혀 벽에 세게 부딪혔고, 컵의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뭐 하는 짓이야?”장소월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 아주머니와 백윤서가 모두 집에 있는데 전연우가 과연 심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전연우는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
송시아가 이토록 반쯤 미치광이 같은 모습으로 변할 줄은 기성은도 예상하지 못했다.“거추장스러운 것!”송시아는 전연우의 무명지에서 은색 반지를 빼내 바닥에 던져버렸다.“이건 대표님의 물건입니다. 송시아 씨,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찾으면 어쩌려고 그래요?”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장소월은 한번 또 한 번 전연우를 해쳤어요. 전연우 성격에 어떻게 장소월 그 나쁜 년을 가만 놔둘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기 비서가 연우 씨 옆에서 일한 오랜 세월을 생각해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할게요. 하지만... 기 비서를 제외한 다른 쓸데없는 사람은 절대 들어오게 하면 안 돼요.”“장소월은 연우 씨를 죽이려 했어요. 난 절대 쉽게 장소월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곧 경찰에 신고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야죠. 그리고 나와 전연우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하겠죠.”기성은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송 부대표님이 실망하실 텐데 이걸 어쩌죠. 실은 대표님께선...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고 계셨어요. 결혼식을 치르기 전 이미 법무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사모님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두셨거든요.”“뭐라고요?”송시아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기성은을 쳐다보았다.“연우 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연우 씨...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말해봐요! 대체 그 이유가 뭐냐고요!”송시아는 미쳐버렸다. 완전히 미쳐버렸다!기성은은 눈을 내리뜨리고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았다.“대표님이 뭘 하시려는 지는 저와 송 부대표님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기성은은 병실에서 전해져 오는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기성은 역시 대표님이 왜 이러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자신의 목숨으로 도박을 하다니...기성은이 집에 돌아왔을 땐 저녁 8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비쳐나오는 밝은 조명을 보
소민아는 멀어져가는 그의 곧게 뻗은 건장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기성은이 조금 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게 다른지는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후, 돌연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중얼거렸다.“오늘... 나한테 시끄럽다며 짜증 내지 않았어. 평소 같았으면 욕 된통 먹었을 텐데.”소민아는 기분이 좋아져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기성은이 없으니 그녀는 마음 놓고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기성은은 예전 그녀가 신었던 슬리퍼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 슬리퍼는 기성은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준 물건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자체 제작한 것이었는데 가격은 몇십만 원이 넘었다.소민아는 보통 집에서 몇천 원짜리 저가의 슬리퍼를 신곤 한다. 그녀는 바로 기성은이 준 그 슬리퍼로 갈아신었다.그가 나간 지 30분이 지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인덕션을 끄고 조심스레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불청객 주가은이었다.주가은이 여기엔 왜 왔단 말인가?소민아는 현관에 있는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고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외투까지 벗어 던지고 야한 하얀색 민소매 끈을 드러낸 채 문을 열었다.“자기야, 이렇게나 빨리 돌아온 거야?”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주가은의 눈앞에 소민아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주가은의 얼굴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소민아 씨?”소민아는 팔짱을 끼고 나른하게 문에 기대어 섰다.“주가은 씨였네요!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들어와서 앉아요! 마침 밥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성은 씨는 한 시간 뒤에 돌아올 거예요.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아니에요. 오늘은 물건을 돌려주려고 온 거예요.”주가은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리켰다.“이건 기성은 씨가 저번에 제 차에 두고 내렸던 옷이에요. 이미 다 세탁했어요. 돌려줄게요.”소민아가 말했다.“우리 성은 씬 정말 너무 덤벙거려서 문제예요. 어떻게 옷을 두고 내릴 수가 있어요. 주가은 씨한테 신세를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