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 서!”15분 뒤, 장소월이 집에 올라가려고 할 때 어딘가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두 사람이 걸어왔다.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강용과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긴 원피스에 긴 파마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한 명이었다.여자가 강용의 눈앞까지 달려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강용, 넌 쓰레기야!”“네가 뭔데 나랑 헤어지자고 해? 고작 문자 한 통으로 날 차려고? 대체 날 뭐로 생각한 거야? 버리고 싶을 때면 언제든 버려도 되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했어?”강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든 담배꽁초를 던져버리고는 손을 호주머니에 슥 넣고 말했다.“그냥 엔조이야. 싫증 나면 끝내는 거지 뭐.”가로등 불빛 아래, 산산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를 흩날렸다. 그 바람에 길고 곧게 뻗은 눈썹이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그 순간, 그의 볼이 부어오더니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난 나한테 먼저 대시하는 여자엔 관심 없어. 넌 다른 남자를 알아봐.”성숙한 어른처럼 치장한 소녀가 가방 안에서 물 한 병을 꺼내더니 씩씩거리며 강용의 머리 위에 부었다.“너 기다려. 우리 아빠는 넌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소녀는 들고 있던 생수병을 홱 던져버리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자리엔 만신창이가 된 강용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의 물을 툭툭 털고는 앞머리를 이마 위로 올려붙였다.장소월은 예전에 봤던 강용의 여자친구가 아닌 것 같았다. 한창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을 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그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재밌냐?장소월은 그와 몇 초간 시선을 맞춘 뒤 덤덤한 표정을 짓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810214를 누르니 문이 열렸다. 이 숫자는 백윤서의 생년월일이었는데 오늘 전연우가 누르는 것을 보고 기억한 것이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거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녀를 위해 켜놓은 듯했다.문을 닫고 소파가 눈에 들어오니 조금 전 흥분했
오부연이 돌아간 뒤.강영수는 또다시 핸드폰을 켰다. 마음속의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순간 답답함에 들고 있던 책을 내팽개쳐버렸다. 그 바람에 가치가 2억에 달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찢어지고 말았다.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들은 오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도련님은 또다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이제야 어렵게 회사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는데 쓰러진다면 도련님에게 분명 이로울 게 없을 것이다.도련님은 강씨 가문 어르신과 사모님, 그리고 인씨 가문 전 사모님의 지지가 있어야만 안정된 보좌에 앉을 수 있다.이토록 중요한 시기엔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오부연은 아무리 신통한 약재라도 소월 아가씨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도련님의 병이 다시 재발했을 때 예전처럼 자신을 해치는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장소월은 숙제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강영수와의 문자를 끝내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씻고 나니 12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다.다음 날 여섯 시,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 아주머니는 이미 음식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다.장소월은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전연우도 평소보다 일찍 깨어나 방에서 나와 그녀와 마주 앉았다.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평화였다.오 아주머니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유리컵에 담은 뒤 오늘의 점심 도시락과 함께 장소월의 앞에 놓아주었다.“따뜻한 우유예요. 잊지 말고 마셔요.”“네.”“진통제 드셨어요? 아직 아파요?”생리통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장소월이 대답했다.“많이 나아졌어요.”“힘들면 저한테 전화해요.”“학교에 양호실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시계를 보니 곧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절반가량 먹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일어섰다.“저 버스를 타야 해요. 이만 갈게요.”“아가씨, 도시락을 갖고 가요.”장소월은 몸을 돌려 도시락통과 우유를 챙기고는 다급
이런 일이 있을 때면 학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제운 고등학교 임원들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다.우연히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소월 아가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진봉은 곧바로 대표님에게 보고했다.의자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장소월이 다쳤다고? 왜 이제야 나한테 알려주는 거야? 학교 쪽은 어떻게 됐어?”진봉이 말했다.“학교 측에서 처리 중입니다.”강영수는 몇천만 원짜리 만년필을 덮고 서류를 내려놓았다.“회의를 뒤로 미루고 학교 쪽에 전달해. 일은 내가 해결하겠다고 말이야.”진봉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강한 그룹은 제운 고등학교의 가장 큰 투자사지만 대표가 직접 출마할 필요는 없다. 회사 일에 비하면 학교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한없이 보잘것없다. 18살 소녀 한 명을 너무 과도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소월 아가씨의 일에 부딪히면 대표님은 사리 분별을 못하는 듯하다.하지만 그 여자와 소월 아가씨를 비교하면...아마 오직 소월 아가씨만이 깊은 어둠 속에 빠진 대표님을 끄집어 내올 수 있을 것이다.지나간 고통을 잊어버리고서 말이다....제운 고등학교.아침 자습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소월은 교장 사무실에 불려갔다. 인시윤도 함께 가야 했지만 인씨 가문의 위치 때문에 차마 귀한 집 아가씨는 부르지 못했다.장소월은 무슨 일 때문인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한결이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번 일은 이미 투자자들 귀에까지 들어갔어. 하지만 안심해. 학교 측에서 널 보호해줄 테니까. 안에 들어간 뒤 아무 말도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너 대신 해결해 줄 거야.”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한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피해자는 그녀 자신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무겁단 말인가.엽준수의 이모와 삼촌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잔혹한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년, 넌 내 동생을 죽이고 내 조카를 감옥에 보냈어...”“
50세 남짓한 남자가 일어서 분노에 찬 얼굴로 책상을 퍽 치며 말했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 내 동생은 죽어도 싸다는 거야?”“그럼 저는요? 전 무슨 잘못이 있어서 다쳐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엽준수에게 칼에 찔려 아직도 병원에 누워있는 친구는 또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를 잃고 감옥에 갔다고 하여 상대방 쪽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사망자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6,70년대 생으로 시골에서만 생활했기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법률 지식도 아주 희박하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말해도 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하지만 장소월은 시골 사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어릴 적 시골에서 살았었는데 당시엔 먹고 입는 것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문맹이었다. 할아버지는 쌀 한 가마니를 대가로 할머니를 아내로 맞이했다.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할아버지는 동네 양아치로 빈둥거리며 살다가 34살이 되던 해에 누군가와 싸우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이런 불행 속에서도 할머니는 종래로 다른 사람을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작은 힘으로라도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려 했다.“만약 그날 밤 그들이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죽어있는 사람은 저였을 거예요!”“죽었다고 하여 그 사람이 옳은 행동을 한 건 아니라고요.”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보기엔 제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엽준수의 가족분들, 저희가 이미 경찰서에 연락했으니 곧 엽준수를 데리고 올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피해자는 직접 올 수 없으니 그의 친구들이 대신 올 겁니다. 그들은 그날 밤 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옆에 서 있던 중년 여자가 씩씩거리던 남자를 한쪽으로 끌고 가 무언가 속삭였다.얼마 후 남자가 돌연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희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필경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니 천만 원만 주세요. 그럼 저희도 더는 이
휴게실에 앉아있던 장소월이 따뜻한 물이 담겨 있는 컵을 감싼 채 기성은에게 물었다.“전연우가 엽준수의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예요?”기성은은 문어구에 서서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했다.“아가씨, 모르는 게 좋아요. 전 대표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말끔히 해결할 거예요.”얼마 후 건물 입구에서 누군가 도착한 듯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네이비색 정장에 고귀한 분위기의 강영수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너... 여긴 왜 왔어?”뒤에 서 있던 오부연이 말했다.“강한 그룹은 제운 고등학교에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한 회사라 일이 생겼다는 소식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소월 아가씨죠.”강영수가 말했다.“오 집사.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죄송합니다. 도련님.”장소월은 시선을 거두고 불안한 듯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귀찮게 해서 미안해. 이번 일은 전... 오빠가 학교에 누가 되지 않게 잘 처리할 거야.”“소월아,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네 일은 이제 내 일과도 같아. 너 손 다쳤다면서? 봐봐...”강영수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난 괜찮아. 거의 다 나았어.”오부연이 말했다.“아가씨, 도련님에게 보여주세요. 도련님이 며칠 내내 아가씨를 걱정했어요.”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곳엔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장소월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강영수는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에 오부연은 방에서 나간 뒤 문을 닫았다.장소월은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불편해하는지라 순간 몸이 경직되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소월아? 너 지금 날 무서워하는 거야?”강영수는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했다. 매번 단둘이 있을 때면 이렇듯 심하게 경계했다. 마치 그가 그녀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듯 말이다
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실은 그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회사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녀를 도우려 왔으니 말이다. 장소월은 서울에서 강영수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일에 그가 직접 나설 필요는 전혀 없지만 오직 그녀를 위해 발걸음을 한 것이다...그가 그녀에게 잘해줄 수록 그녀는 더 큰 부담감을 느꼈다. 그의 이 깊은 마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강영수도 아직은 어린 나이이다. 앞으로 생길 가능성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그와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내고 싶어 접근하는 여자는 아주 많다. 때문에 강영수는 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강영수를 지옥에서 끌어내온 일로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해 이런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면 너무도 과분하다. 이미 충분히 갚고도 남았으니 말이다.그날 강영수가 그녀에게 준 생일 선물과 그녀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은 두 번의 생을 거쳐오면서 받은 가장 큰 서프라이즈였다.장소월은 처음부터 그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강영수는... 그녀의 계획 밖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을 가능성은 없다.강영수에게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이 쥐어져있어 그녀를 장씨 집안이라는 마귀소굴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한때는 다정하고 능력 있는 그에게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말이다.“좀 괜찮아졌어?”남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입술에 가까이 가져갔다. 시원한 입김을 상처에 불어주니 한결 시원했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손등에 있는 문신을 똑똑히 보았다. 강용의 몸에 새겨진 것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장소월이 물었다.“이 문신 도안에 무슨 의미가 있어?”강영수가 덤덤히 말했다.“그런 거 없어. 그저 당시 꽂혔던 거로 새겼을 뿐이야.”장소월은 그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큰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한 시간 남짓 지나자
전연우는 학교에서 온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회의를 취소하고 학교로 달려왔다. 사실 이런 일은 기성은만 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전연우가 직접 걸음을 할 필요는 전혀 없는 일이다.기성은이 조심스레 말했다.“정말 엽준수를 퇴학시키실 겁니까? 10년의 처벌을 받게 하고요? 제가 알기론 아가씨의 행동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전연우가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깊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도 소월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아닙니다.”“네가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 기억해.”전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기성은이 자세를 곧추 세우고 말했다.“전 대표님만을 위해 일합니다.”당시 그가 전연우의 곁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그녀의 목숨은 전연우의 것이나 다름없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준 것이다.전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너한테 월급을 주는 건 내가 아니야!”장소월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전연우는 학교의 일에 대해선 종래로 물은 적이 없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날개를 달아 장씨 가문을 박차고 나오는 건 허황된 망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이제 많이 영리해졌다. 하지만... 그 영리함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다.휴게실.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영수의 눈빛을 피했다.“오빠가 일을 끝낸 것 같아. 난 나가봐야겠어.”그녀는 문을 열고 다급히 걸어 나갔다. 한 손엔 강영수가 준 약을 들고서 말이다.전연우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담배를 별로 피우지 않는다.기성은이 장소월이 오고 있음을 알리자 전연우는 채 피지 않은 담뱃불을 끄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전연우를 본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휴게실에서 나오는 강영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람핀 현장
진봉이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날 밤 지나갔던 모든 차량을 조사해보았는데 사고 차량은 폐차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관한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제 생각에 그 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강영수가 눈을 질근 감았다.“조사할 필요 없어.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으니까.”그 말을 들으니 진봉은 대표님이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장소월은 전연우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아래로 내려갔다.학교 문 앞에서 백윤서와 인시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인시윤이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너 괜찮아? 미안해! 내가 고 선생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어. 괜히 그것 때문에 엽준수가 널 오해했잖아.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나 ㅂ고 선생님한테 얘기해 네 시험지를 가져왔어. 소월아, 너 진짜 대단해!”장소월은 멍하니 시험지를 쳐다보았다.역시... 그녀는 인시윤의 힘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합격한 것이다.이 사실을 확인하자 그녀는 마음속에서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고... 고마워요...”“그리고...”인시윤이 장소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오빠가 넌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했어. 엽준수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엄마는 요독증 말기래. 설사 이번에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소월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나 이번 일로 오빠한테 처벌을 받았는데 글쎄 시를 300번이나 베끼래.”“그래...”처벌을 받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우리 오빠가 나한테 했던 두 번째 한 마디 때문에 난 처벌을 받아도 행복해.”백윤서가 말했다.“괜찮으면 됐어요. 엽준수는 감옥에 가게 되는 거예요?”전연우가 대답했다.“그럴 거야.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지.”6년 아니면 10년?전연우가 관여하면 종신형을 받을지도 모른다.천만 원을 요구했다가 한 푼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눈동자에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는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사랑해.]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너무 울어서 이제 더 이상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알고 있었다고, 줄곧 알고 있었다고 표현할 뿐이었다.그녀는 서민용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서민용의 손가락이 멈추었다.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를 느꼈다.배은란의 호흡이 안정되자 그는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배은란은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가락 앞쪽에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하지만 서민용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서민용의 눈빛에서 더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짙은 그 감정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민용 씨...” 배은란의 마음에 극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서민용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글자를 써 내려갔다.[나 보내줘.]배은란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당신 나을 수 있어. 철용 씨가 분명 말했단 말이야, 심장 수술까지 마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서민용은 잔잔하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의 결심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배은란은 더 이상 그를 마주하고 있을 수 없어 입을 가리고 복도로 뛰어나가 목 놓아 울었다.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병인이 서민용의 소변 주머니를 갈아주는 소리였다.배은란은 유리창을 통해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서민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마음도 함께 저려왔다.예전에도 그랬었다.서민용이 전신 마비로 침대에 누워 지내며 자신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 배은란은 인내심을 갖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지만, 돌연 어느 날 그에게 쫓겨났었다.그 후로는 도우미들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서민용은 그녀에게 자신
“서민용 씨.”장 선생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민용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엔 극도의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냥 일상적인 검사를 하러 왔습니다. 긴장하실 필요 없으세요.”그는 진찰 기구를 꺼내 검사를 시작했다.서민용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치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장 선생은 수년간 의사 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민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반복해 굽혔다 폈다 하는 오른손 검지에 시선을 멈추었다.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 선생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고 그의 손가락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가져갔다.서민용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에 몇 글자를 끄적였다.[죽여주세요.]장 선생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민용 씨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요.”서민용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서철용.]장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서 선생님도 결정할 수 없으세요.”그는 친절히 서민용에게 말해주었다. “서민용 씨, 현재 당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사람은 문 앞에 있는 저 여자분입니다. 저분이 환자분을 보내주지 않는 한, 그 누가 와도 소용없을 겁니다.”배은란의 한마디면 서철용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서민용의 목숨과 맞바꿀 것이다.서민용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거뭇하게 메마른 눈동자로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장 선생은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환자분 마음 이해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죽는 것보다도 못하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서민용이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배은란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서민용이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자 배은란은 그를 위해 간병인을 고용하고 자신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며칠 후, 간병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아왔다.“저기요. 환자분과 이
두 꼬마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아쉬운 듯 계속 뒤돌아 서철용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사무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서철용은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한편.배은란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민용에게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무슨 일 있으면 아줌마에게 말해서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해. 그럼 엄마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그녀는 몇 마디 당부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서민용은 두 눈을 뜬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배은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아이들은 찾아서 집에 데려다줬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저 너무 오랫동안 못 본 탓에 낯설게 느껴서 그런 것뿐이야. 당신 수술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질 거고.”서민용은 눈을 감고 그녀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배은란이 상처 입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다.“미안해.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그는 그녀를 더럽다며 싫어했었다.“내가 만지는 게 싫으면 간병인 구해줄게. 난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배은란은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서민용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그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었다.배은란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 이만 나가 있을게. 당신은... 푹 쉬어.”그녀가 떠나자 서민용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장 선생은 서철용의 사무실로 불려갔다. 서철용은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서류 내용을 훑어본 장 선생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서민용의 현재 몸 상태로는 수술 못 해. 한시라도 빨리 회복시켜. 수술에 어떤 변수도 생겨선 안 돼.”서철용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장 선생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 선생님, 정말 이 정도까지 하셔야 합니까? 이거 배은란 씨도 알고 있습니까?”서철용은 못마땅한 듯
“삼촌도 아빠고, 그분도 아빠예요.”옆에서 줄곧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소원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서철용은 꼬마 녀석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이 말을 배은란이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그는 속으로 상상해 보고는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엄마 앞에선 그런 말 하면 안 돼. 엄마가 너희 엉덩이를 때릴지도 몰라.”소원이는 의아한 듯 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소원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아빠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눈앞의 이 사람을 진정한 아빠로 여기고 있었다.그는 오랫동안 그들의 곁에서 사라졌었다. 하지만 소망이가 아팠을 때 달려온 사람은 엄마도, 병상에 누워 있던 아빠도 아닌, 바로 그였다.서철용은 어린아이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는 두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배은란의 마음은 얻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서민용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서철용의 가슴에 흐뭇함이 깃들었다.그들이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그가 잠시 이기적으로 행동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그는 이미 두 사람의 삶에서 빠져주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두 아이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서철용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돌아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가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 아이 한 명씩을 잡았다.두 아이는 바로 배시시 웃으며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서철용은 아이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그들을 데리고 주변 맛집들을 섭렵하고 장난감도 많이 사주었다.날이 점점 어두워져서야 그는 병원으로 돌아왔다.사무실에 들어서고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서철용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서철용,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줘...”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배은란은 감히 장 선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그 누구의 헌신도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장 선생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그분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두 분은 단순한 의사와 보호자 관계여야 합니다. 서민용 환자분의 주치의는 저이니,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와 소통하시면 됩니다. 더 이상 그분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장 선생의 그 말 때문에 배은란은 한동안 서철용을 찾아가지 않았다.그저 서민용의 수술이 끝날 때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서철용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서철용 또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몇 번의 수술 끝에 서민용은 드디어 깨어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온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나 있었다.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려와 서민용을 만나게 해주었다.그동안 그녀는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서민용의 건강 상태가 걱정된다며 캐물었다.너무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은 조금 어색해하는 듯했다.너무나 핼쑥해진 서민용의 모습에 소망이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소망아, 소원아, 아빠라고 불러야지.”배은란은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민용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소원이는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간신히 아빠라는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소망이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아니에요. 저 사람은 우리 아빠 아니에요...”배은란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민용의 반응을 살폈다.서민용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여 그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소망아!” 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소망이는 엄마의 말투에 겁을 먹고 계속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진 배은란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설명했다.“소망아, 아빠는 지금 아프셔서 그래. 네가 그러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서민용은 여러 차례 대수술을 거쳐 신체 기관들을 하나하나 교체했다.하지만 적합한 심장을 구하는 일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오늘도 서민용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배은란은 방금 수술을 집도하고 나온 서철용을 찾아갔다.“철용 씨, 나...”그녀는 서민용의 병실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서철용에게 부탁하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창백해진 입술과 눈 밑에 뚜렷하게 드리운 피로감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철용이 얼마나 큰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무슨 일인데?”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에 서철용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배은란은 말을 바꾸었다.“아이들 보러 집에 다녀오고 싶어. 아이들한테 밥도 좀 해주고...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서 가져다줄게.”서철용이 그녀의 건강과 서민용의 목숨을 묶어 놓은 덕분에 배은란은 몸에 다시 살이 붙었고 전체적으로 훨씬 건강해 보였다.서철용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했다.“서민용 병실에 들어가는 건 아직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한테 굳이 잘 보이려 할 필요 없어.”배은란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도 서철용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민용 씨가 괜찮다는 거 알았으면 됐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모르겠으면 안 해도 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서민용이 깨어나서 속상해하지 않지.”서철용은 조롱 섞인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배은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배은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뒤에서 장 선생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서 선생님!”배은란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서철용이 걷다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