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또 복통이 찾아왔다는 것을 서철용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더 많이 함으로써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서철용이 프로의 손길로 그녀의 배에 안마를 해주었다. 그 결과 배은란은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계속해.”“어젯밤 전연우를 제지하기 위해 나갔던 거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인시윤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전연우 씨가 죽이려 했다는 거야? 왜? 인시윤은 그분의 아내였던 사람이잖아.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있어?”서철용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내? 그냥 이용했던 것뿐이야. 난 예전 전연우 같은 냉혈한에겐 약점이 없는 줄 알았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준 사람이 생겼고, 자연히 약점이 생겨버렸지. 내가 소월 씨를 언급하니까 바로 멈추더라고. 예전의 그 성격대로였다면 인씨 집안은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을 거야.”“전연우 씨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런데 인시윤은 왜 데려와 치료해주는 거야?”서철용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역시 내 와이프 대단해. 바로 이렇게 핵심 질문을 던지다니.”배은란이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어젯밤 인시윤한테 강영수에 대해 물었었거든. 무언가 알고는 있는데 일부러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난 그 당시 비행기 사고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어. 지금 상황으로 봐선 강영수는 죽지 않았어. 어쩌면 그걸 아는 사람은 인시윤 단 한 명일 수도 있어.”배은란이 그에게 물었다.“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정보를 캐낼 생각이야?”서철용은 입술을 깨물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 한 가닥의 안광이 번뜩였다.“지금은 한 단계씩 차례로 밟아보는 수밖에 없어.”다음 날, 서철용은 인시윤의 검사 결과 차트를 보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수술을 진행했다.서철용이 메스를
서철용이 되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요?”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약 가지러 갈게요.”이건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은 약이다. 지금 환자에게 처방한다고?“전 대표님, 사모님...”사무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서철용은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귀한 손님이 오셨네!”두 사람이 들어오자 서철용은 물 두 컵을 따라 장소월의 앞에 놓아주었다.“여기엔 설탕을 넣었어요.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고마워요.”“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장소월이 전연우에게 말했다.“먼저 가서 일 봐.”전연우는 잠시 나가야 했다. 그녀를 혼자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저녁 여섯 시가 되니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최근 날씨도 많이 추워졌다.전연우는 입고 있던 정장을 벗어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함부로 다니지 말고 여기에 있어. 곧 데리러 올게. 착하지. 내 말대로 해.”장소월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서철용은 이미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도 좀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전연우가 말했다.“소월이 잘 지키고 있어. 없어지면 절대 너 가만 놔두지 않아.”“얼른 가. 다 큰 어른이 뭐 길이라도 잃을까 봐 그래?”전연우가 나가자 장소월은 백팔십도 바뀐 표정으로 조금 전 그가 만졌던 얼굴을 슥 문질렀다.“저 인시윤 만났어요.”“이거 새것이에요. 아무도 안 썼어요.”담요를 꺼내 그녀 옆 소파 위에 놓아주던 서철용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아직은 인시윤을 만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에요. 소월 씨... 만나지 말아요. 인시윤은 소월 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어요. 얼굴까지 완전히 훼손되었으니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거예요.”장소월은 따뜻한 물이 담긴 유리컵을 손으로 감쌌다.“알아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그게 뭔지 나도 알아요. 강영수 소식을 묻고 싶은 거죠? 소월 씨... 인시윤은 말하지 않을
장소월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요. 알겠어요.”그녀는 문을 나서고 잠시 걸은 뒤에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여기는 결코 혈액 검사하러 가는 길이 아니다.이곳 복도는 너무 조용해 센서 등도 모두 꺼져 있는 상태였다.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당신은 이 병원 간호사가 아니에요. 대체 누구죠?”거짓말이 들키자 여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뛰어가더니 비상구로 빠져나갔다. 장소월이 쫓아 가보았지만 비상구는 이미 잠겨 있었다.그녀는 돌아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상승 도중 멈추었고 그렇게 그녀는 그 속에 갇혀버렸다.장소월이 쾅쾅 문을 두드렸다.“문 좀 열어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다녔던 것이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지?인시윤일까?아니, 인시윤일 리는 없다.인시윤은 지금 수술을 받고 있으니 그렇게 빨리 뛸 수 없는 몸이다.그 순간 환풍구로 이상한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후, 장소월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아무런 예고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서철용이 배은란을 찾았을 때, 남자 한 명이 껄떡거리며 길을 묻고 있었다. 불순한 의도가 명확했다. 그 순간 다행히 서철용이 나타난 것이다.“다음엔 조심할게. 집안에만 있다 보니까 너무 답답해서 나오고 싶었어.”“나가고 싶을 땐 나한테 전화해. 아니면 도우미랑 같이 나가도 되고. 너 혼자 나가는 거 걱정돼.”도우미가 마지막 음식까지 밥상 위에 차려놓았다.서철용이 물었다.“소월 씨는요? 왜 안 보이는 거예요?”도우미가 말했다.“아까 간호사가 찾아와 혈액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어요. 한참 됐는데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네요.”서철용이 불길한 예감에 이마를 찌푸렸다. 어떻게 이상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5분 전에 검사 결과 보고서를 전연우의 메일에 전송했는데 말이다.“큰일 났어. 은란아, 누가 부르든 절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난 나가봐야겠어.”배은란이 그를 부르려고 입을 뗀 순간, 서철용
분명 이곳이다.서철용은 반지를 주워들었다. 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아니면 6천억짜리 반지가 왜 여기에서 굴러다니겠는가.서철용은 거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방을 뒤져 공구를 찾고는 소화기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다.그때, 서철용의 귀에 비상구 복도 쪽 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열어보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잠겨 있었다.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다행히 일찍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몇 분만 늦게 왔다면 불길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다. 아니면... 악의를 가진 그 사람들이 장소월을 여기까지 유인하고 불까지 질렀을 리 없으니 말이다.불길이 조금 잡히자 서철용은 수건으로 코를 막고 모든 방을 뒤져보았다.소방대가 도착했을 때, 서철용은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흡수해 정신이 흐릿해지고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계속해 찾아야만 했다.“너 절대 다치게 안 해.”‘난 이모한테 반드시 널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그토록 오랫동안 너한테 상처를 줬으니, 이번엔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무사히 구해낼 거야...’마지막으로 서철용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불길은 그의 몸에까지 번지지 않았다. 비상구를 통해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에게 산소마스크를 끼워주고는 밖으로 구조해 나갔다.“팀장님,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장소월은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힘으로 문을 두드렸다.몇 분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완전히 혼미상태에 빠진 장소월을 구해냈다.전연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추 산장을 나섰다.송시아가 그를 잡았다.“전연우 씨, 잘 생각해봐야 해요.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천신만고 끝에 따온 거란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가면 이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거예요.”전연우는 단호히 송시아의 손을 뿌리쳐버렸다.김 대표가 물었다.“송시아 씨,
수술이 진행되고 한 시간 뒤.전연우는 병원에 도착했다. 배은란도 수술실 문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전연우가 경직된 얼굴로 배은란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왜 불이 난 건데요.”배은란은 서철용이 걱정되어 한참을 운 탓에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 역시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배은란을 보살피던 도우미가 일어나 자초지종을 한번 말해주었다.전연우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CCTV 영상 찾아봐.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기성은이 머리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기성은은 병원 16층 CCTV 영상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있어 얼굴은 조금도 확인할 수 없었다.경찰서에서는 이 일을 조사한 뒤 대체적인 그녀의 얼굴을 그려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윤곽으로 조금의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이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기성은이 조사 결과를 전연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조사해보았는데 이 사람은 병원 간호사 명단에 없습니다. 외부 인원이 간호사로 위장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16층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전연우가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인시윤은 몇 층에 있어?”“12층입니다.”전연우는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갔다.기성은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대표님, 인시윤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하지만 인시윤은 지금 저희들의 감시 아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인시윤은 아닙니다.”전연우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인시윤에 대해 잘 알아?”기성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만일
인시윤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손으로 전연우의 팔목을 꽉 잡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연우 씨...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상처 줄 거예요...”“지금 이 몰골이 된 것도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걸로도 모자라요? 내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가져야 만족하겠어요?”전연우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간호사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전연우가 시뻘건 핏줄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널 죽일 수 있나 없나 지켜봐.”전연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아 책상에 눌러놓고는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뜨거운 물을 집어 그녀의 입안에 부어 넣었다.인시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휘저었다.전연우의 손등에 인시윤의 손톱에 긁힌 자국이 몇 가닥 생겨났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점점 더 거세져 갔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인시윤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얼굴이 마비되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그녀의 숨통이 끊어지려는 순간, 전연우가 그녀를 놓아주었다.인시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천히 바닥에 흘러내려 널브러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전연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보는 것과도 같이 무심하고 냉정했다.전연우도 손에 화상을 입었다. 손등 피부가 모두 데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이다.인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운 물 때문에 화상을 입어 조금의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지금 이 고통 기억해.”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손의 물기를 닦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전연우가 말했다.“하루 시간 줄 테니까 이번 일을 꾸민 놈들 모조리 찾아서 북경 감옥에 집어넣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저녁 12시, 장소월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전연우는 그때부터 침대 옆
다만... 오귀화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났다. 아직도 대학생을 후원할 돈이 남아있다니.간호사의 목숨을 살려준 건 오귀화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기성은이 말했다.“이번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배후의 그 사람...”그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대표님께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고 계시는 거죠. 설마 송 부대표님인가요?”전연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시아는 내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고 저렇게 날뛰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이 빚은 내가 모조리 갚아줄 테니까.”“지금 송시아는 뭐 하고 있어?”기성은이 대답했다.“송 부대표님은 매일 제시간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뒤에선 다른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고요. 현재 송 부대표님을 제외하고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인씨 가문입니다. 만약 인씨 가문과 송시아가 연합한다면 혹시나...”전연우가 담뱃불을 끄고는 말했다.“송시아는 야망이 큰 여자야. 하지만 성세 그룹 전체를 삼키기엔 아직 역부족이지.”“성세 그룹을 손에 넣고 휘두른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 건드릴 수는 없어.”“아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징크스 잘 감시해.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기성은이 물었다.“저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전연우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말했다.“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직접 처리한다면 껄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가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소민아의 언급에 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입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 말이다.“아직 송시아의 옆에 있습니다. 부서 이동을 권했지만 거절하더라고요.”“소민아한테 아무 얘기 안 했지?”“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전
새벽, 침대에 누워있던 장소월이 돌연 깨어나 연이어 기침했다. 전연우는 곧바로 벨을 눌렀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검사를 진행했다.전연우가 걱정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어때요?”의사가 각종 수치를 본 뒤 청진기를 내려놓고는 많이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사모님께선 이미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며칠 더 입원해 있다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전연우가 물었다.“그럼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거예요?”의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사실 지금쯤 깨어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전 앓았던 병 때문에 그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검사 결과로 봐선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며칠 더 지나면 아마 깨어나실 겁니다.”전연우는 지금까지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그의 굳은 얼굴에 의사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바로 병실을 떠났다.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소월이 의식을 되찾았다.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전연우.”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던 전연우가 그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 여기 있어.”장소월은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나 너무 괴로워.”당장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괜찮아. 오빠가 있잖아. 내가 의사 불러올게.”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나 죽을 것 같아.”전연우는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의식을 잃은 채 몇 년을 누워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예전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연우는 그녀를 잃을까 봐 너무나도 겁이 났다.전연우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고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내가 너 잘못되게 놔두지 않아. 조금 더 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장소월은 며칠 동안 줄곧 흐리멍덩한 상태였지만,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래.”장소월이 눈을 감자 전연우는 자리에서 일
민선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지금처럼 변한 유월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대문이 굳게 닫혔다. 해이는 문밖에 서서 힘겹게 말했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걸 똑똑히 알고 난 뒤 다시 올게. 만약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너한테 다 얘기할게.” 소현아는 바닥에 떨어진 닭 다리를 주웠다. 방금 전 유월이 던진 의자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떨어진 지 3초 안 지났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유월은 문을 열었다. 텅 비어버린 마당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갔어... 정말 가버렸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유월의 모습에 민선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말했다. “유월아, 왜 그래? 유월아...” “유월아, 엄마 무섭게 이러지 마!” “유월아, 제발 말 좀 해 봐!” “언니... 왜 그래요.” 민선화가 유월에게 손을 뻗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갔다.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비추던 달빛이 사라졌다. 달님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했고, 짙은 먹물 같은 하늘에는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강영수에게는 절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오늘 밤엔 일단 여기서 자요. 내가 내일... 장소월 씨한테 데려다줄게요.” “네, 강영수 씨.” 소현아는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몸을 뉘운 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깊이 잠들었다. 강영수는 문밖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이 집은 그가 유월과 함께 살려고 지어놓은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유월을 향한 그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규영과 미경은 밤새도록 낙일 마을에서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해이야, 이 사람 도대체 누구야? 이 여자가 한 말이 정말 사실이야? 송 선생님이 아니라 장소월이였다고? 그리고 오늘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인데 왜 너 혼자 돌아온 거야? 유월이는 어쩌고?” 소현아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닭 다리 두 개를 집어 들고 해이 뒤로 몸을 숨겼다. “너무 무서워.” 소현아의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진흙탕에 넘어져 울먹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들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찾으려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자, 경찰은 곧바로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이곳에서 해이를 본 소현아는 분명 소월이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소현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다행히 낙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순박했고, 치안도 좋은 편이었기에 소현아는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해이는 뛰쳐나간 유월을 쫓아가지 못하고 먼저 처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현아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그 답을 찾고 있어요. 유월이는 괜찮을 거예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잖아.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나가서 찾아봐.” “찾을 필요 없어요!” 돌연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유월은 문턱을 넘어 들어와 벽에 걸려있던 그림을 집어 던졌다. “장소월은 네 약혼녀고 저 여자도 널 아는 친구라잖아. 다들 널 찾아왔는데 우리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그리고 우리 결혼은 오늘부터 없던 일로 해. 나 양유월,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남이 버린 걸 주워서 같이 살진 않아.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한 남자는 더더욱 싫어.” “나가! 다 나가라고!” “너무 무서워! 소월이 그림...” 소현아는 내던져진 그림을 보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액자 유리는
규영과 미경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모님, 어디 아프세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요!” “혹시 여기가 아픈 거예요?” 규영이 소현아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행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주인님은 그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현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응가 마려워요.” 미경은 곧바로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사모님, 이 근처에는 화장실이 없어요. 정 급하시면 저쪽 구석에서 볼일 보세요. 저희가 망봐드릴게요.” 소현아는 휴지를 받아들고 나무 뒤로 달려갔다. “잘 지켜봐야 해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안 그러면 나 화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소현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입을 가린 채 큭큭 웃어댔다. “내가 바보라고? 너희들이야말로 바보야.” 소현아는 재빨리 시내로 돌아가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에 든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 못 봤어요? 제 언니인데, 언니가 사라졌어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본 적 없어요.” 소현아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되었고, 그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있었다. 10분 뒤, 규영과 미경도 소현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을 다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미경이 울먹이며 말했다. “사모님이 사라지셨어. 이제 어떻게 해!” “주인님이 아시면 분명 우릴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우리 그냥 주인님께 얘기하자” “안 돼... 안 돼. 절대 주인님이 알게 해선 안 돼.” “노부인께선 사모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셔. 만약 주인님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아이를 없애려 하실 거야. 노부인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어. 사모님은 복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이와 함께 무사히 계실 거야
“저를 아세요?” 소현아는 눈앞의 남자가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알죠! 예전 소월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쓰러졌을 때, 제가 병원에 데려다줬었잖아요. 당신은 저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꼭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요. 그리고 학교에서 소월이를 잘 챙겨주라고 부탁도 했잖아요. 저 당신 말대로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소월이 괴롭히려고 하면 제가 다 막아줬다니까요. 그런데 소월이랑 결혼식 앞두고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그 후로 소월이도 사라져 버렸어요.”“저 소월이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됐어요! 그만 해요!” 유월이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쳤다.해이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격렬한 두통을 유발했다.규영과 미경은 눈앞의 남자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두려워 서둘러 변명했다.“선생님,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사모님께서 머리를 좀 다치셔서 가끔 헛소리를 할 때가 있어요.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제 가시죠. 밖에 비도 그쳤어요.”두 사람은 소현아를 반강제로 끌고 나갔다. 하지만 소현아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헛소리 아니에요. 다 사실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한텐 이제 기회가 없을 거예요, 소월이는 이미 다른 놈이랑 결혼했거든요.”규영은 재빨리 소현아의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났다.유월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불안한 마음에 돌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 지금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거야?”해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이 변해버렸다. 그의 눈동자엔 더이상 예전의 부드러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변하고 있다. 그 여자가 낙일 마을에 온 이후부터 그의 마음은 점점 예전과 달라지고 있었다.해이
“제 과거에 대해선 여전히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죠? 그리고 아까 옆에 있던 그 사람 저랑 많이 닮았던데, 혹시 저 그 사람과도 아는 사이인가요?” “지나간 일은 그냥 과거에 묻어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네 옆에는 이제 유월 씨가 있잖아. 나는 네가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아. 네가 무사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그 사람이 너에게 빚진 것들은 앞으로 내가 모두 갚아줄게.”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널 원래의 강영수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내 목숨도 내던질 거야. 내가 너한테 큰 빚을 졌어... “소월아!” 강용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우산을 든 강용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 강영수와 가까워지자 강용은 애써 마음속 두려움을 누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과거 강영수는 그에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았었다. 다리를 분질러 놓았을 때엔 2주가 넘도록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아주 잠깐 눈을 뗐는데, 고새를 못 참고 사라져?” 장소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고 물기부터 닦아. 그리고 얼른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야 해.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강용은 우산을 든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닦아줘!” 한 번 던져본 농담이었지만, 장소월은 정말로 휴지로 그의 이마에 묻은 빗물을 닦아주었다. “기분 좋아?” 강용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무 좋아.” “만족해?”“만족하지, 그럼 만족하고말고.” “이제 가자.” 장소월은 옆에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네.” 강용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대부분 장소월에게 치우쳐 있었기에, 강용의 어깨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에 탄 뒤 강용이 그녀에게 깨끗한 담요를 건네주었다.“우선 이걸로 닦아, 감기 걸리지 않게.” “혹시 괜찮다면, 깨끗한 옷이 있으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내가 차에서 내려줄 테니까.” 장소월은 담담하
두 명의 익숙한 시선이 장소월에게 고정되었다. “...아가씨, 내가 뭘 사 왔는지 봐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선글라스를 낀 강용이 탕후루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용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디에서 산 거야?” 강용은 유월의 곁에 있는 남자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 탕후루를 장소월에게 건네준 뒤 홱 뒤돌아 가 버렸다. 장소월은 그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 어떤 모순이 있었든, 어쨌든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길에서 마주친 그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장소월이 멀어진 뒤, 유월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해이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뭘 봐. 왜 아직도 보고 있어. 이미 저 멀리 갔잖아. 도대체 누가 네 와이프야? 차라리 그냥 저 여자한테 가 버리지 그래!” “그 여자가 아니라, 옆에 있던 남자. 익숙한 얼굴이었어. 전에...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아.” “됐어. 더이상 생각하지 마. 오늘은 친정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부모님께 무슨 선물을 사드릴지나 생각해.” 유월은 무언가 두려웠는지 급히 그의 생각을 끊어놓았다. 강용은 자연스럽게 장소월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영수가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야. 핏줄이 짓누른다고 해야 하나.” 장소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 괜찮네.” “내가 형을 구해 낙일 마을에 데려오고 난 뒤 며칠 후, 형은 혼자서 몰래 병원을 뛰쳐나갔어. 그러다 다행히 저 집안사람들을 만나서 잘 지내게 된 거야.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더라고” “유월 씨네 가족 말하는 거야?”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쩌다 보니 저 둘을 맺어준 꼴이 됐네.” “차라리 잘 됐지 뭐. 형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니까 난 당분간 편히 살 수 있겠어. 형이 뭐라도 기억해내면 나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 담담하게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걸 보니, 강용은 과거의
온웅정은 그녀를 살펴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사람을 치료할 때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네. 자네 혼자 들어오고, 저 버릇 없는 녀석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게.” “어이, 늙은이, 내가 누군지 알아요?” 장소월이 소리쳤다. “강용!” 강용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알았어.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저 영감이 널 속이려고 하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 같은 놈.” 장소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용, 어른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밖에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있어.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알았어.” 장소월은 그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갔다. “앉게. 손은 이쪽에 올려놓고.” 장소월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온웅정은 그녀의 맥을 30초 정도 짚고 난 뒤 손을 내려놓았다. “...심장 박동이 좀 불규칙하네. 이곳 환경이 몸에 안 맞는 건가?” “몸에 큰 이상은 없으니, 돌아가서 푹 쉬고, 일찍 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금방 나을 걸세.”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그런 건 봐줄 수 없네. 자네가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계속 이 상태로 살아간다면, 누구도 자네를 구할 수 없네. 자네의 가슴엔 기가 꽉 막혀 있어...” “오랫동안 억누르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제대로 쉬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전에 내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도 효과를 보지 못했나?”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아직 기회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걸세. 자네처럼 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아
강용은 친부를 찾으러 서울로 가다가 길을 잃어 한 마을에 흘러 들어갔었다. 열 살밖에 안 되었던 그는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외딴 골목에서 심한 매질을 당하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거의 숨이 멎기 직전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예쁜 공주풍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막대사탕을 든 채로 말이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짓이에요. 내가 우리 아빠한테 당신들 혼내주라고 할 거예요. 우리 아빠는 장해진이에요.”그때 서울 지하 조직 수장이 장해진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아무도 감히 그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장소월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의 경호원이 있었고, 아홉 살밖에 안 된 장소월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구석에 웅크린 강용을 쳐다보았다.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안심해, 내가 다 쫓아냈으니까.” “내 이름은 장소월인데, 너는 이름이 뭐야? 왜 저 사람들한테 괴롭힘당한 거야?”“너 말 못 해? 벙어리인가 보네.” “에잇, 불쌍하니까 앞으로는 나랑 같이 다니도록 해. 내 애완견처럼 말이야! 너 우리 아빠 알아? 우리 아빠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 아무도 함부로 못 해. 아빠가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너 말 탈 줄 알아? 나 말처럼 너 타고 갈래. 돌아가면 맛있는 거 줄게.” 그렇게 아홉 살의 장소월은 강용의 등에 올라타 골목길을 나섰다... “됐어, 이제 차에 타면 돼. 내 말을 잘 들었으니 상을 줄게. 멍멍아, 나랑 같이 가자.” “우리 집에는 나 혼자밖에 없어서 같이 놀 사람이 없거든. 앞으로 너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인 거야.” “이제 저 사람들처럼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야 해.” “아, 깜빡했네. 우리 꾀죄죄한 멍멍이 벙어리였지.”아홉 살의 장소월은 주변 사람들에게 개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하여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따라 했
“아버지를 위해 죽은...” 강용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네가 서울을 떠난 게 전연우 때문이었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서철용으로부터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또다시 그 새장 안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전연우한테 원망이 남아있을까? 그를 향한 증오는 시간이라는 강물에 모두 휩쓸려 떠내려간 듯했다. 사랑? 그녀와 전연우 사이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감정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단지 다시는 그 숨 막히는 새장 속으로 들어가는 게 싫을 뿐이야. 인생엔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잖아. 그냥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 뭐.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나아.” 송시아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지난 생에서 송시아는 모든 것을 차지했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연우를 앗아갔었다. 이제 그녀가 떠났으니, 송시아는 더 이상 그를 빼앗으려 발버둥 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다 가져가라지.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아. 강용, 이제 네 이야기를 해줘. 그동안 뭘 하며 지냈던 거야?” “네 화첩 속에 담긴 곳들을 전부 찾아다녔어. 황량한 사막에서 저무는 해도 보았고, 눈 덮인 산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해돋이를 보기도 했어. 또 망망대해에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칠 때 폭우가 쏟아지던 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 “첫해에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어. 두 번째 해에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한동안 숨어 지냈지...” “누가 널 쫓았던 거야? 혹시 누구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었어?” “전연우... 그 사람이야?”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대체 그 사람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네 오빠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난 서울을 떠날 때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어! 전연우가 아니라 다른 패거리였어.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