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요. 알겠어요.”그녀는 문을 나서고 잠시 걸은 뒤에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여기는 결코 혈액 검사하러 가는 길이 아니다.이곳 복도는 너무 조용해 센서 등도 모두 꺼져 있는 상태였다.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당신은 이 병원 간호사가 아니에요. 대체 누구죠?”거짓말이 들키자 여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뛰어가더니 비상구로 빠져나갔다. 장소월이 쫓아 가보았지만 비상구는 이미 잠겨 있었다.그녀는 돌아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상승 도중 멈추었고 그렇게 그녀는 그 속에 갇혀버렸다.장소월이 쾅쾅 문을 두드렸다.“문 좀 열어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다녔던 것이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지?인시윤일까?아니, 인시윤일 리는 없다.인시윤은 지금 수술을 받고 있으니 그렇게 빨리 뛸 수 없는 몸이다.그 순간 환풍구로 이상한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후, 장소월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아무런 예고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서철용이 배은란을 찾았을 때, 남자 한 명이 껄떡거리며 길을 묻고 있었다. 불순한 의도가 명확했다. 그 순간 다행히 서철용이 나타난 것이다.“다음엔 조심할게. 집안에만 있다 보니까 너무 답답해서 나오고 싶었어.”“나가고 싶을 땐 나한테 전화해. 아니면 도우미랑 같이 나가도 되고. 너 혼자 나가는 거 걱정돼.”도우미가 마지막 음식까지 밥상 위에 차려놓았다.서철용이 물었다.“소월 씨는요? 왜 안 보이는 거예요?”도우미가 말했다.“아까 간호사가 찾아와 혈액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어요. 한참 됐는데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네요.”서철용이 불길한 예감에 이마를 찌푸렸다. 어떻게 이상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5분 전에 검사 결과 보고서를 전연우의 메일에 전송했는데 말이다.“큰일 났어. 은란아, 누가 부르든 절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난 나가봐야겠어.”배은란이 그를 부르려고 입을 뗀 순간, 서철용
분명 이곳이다.서철용은 반지를 주워들었다. 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아니면 6천억짜리 반지가 왜 여기에서 굴러다니겠는가.서철용은 거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방을 뒤져 공구를 찾고는 소화기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다.그때, 서철용의 귀에 비상구 복도 쪽 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열어보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잠겨 있었다.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다행히 일찍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몇 분만 늦게 왔다면 불길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다. 아니면... 악의를 가진 그 사람들이 장소월을 여기까지 유인하고 불까지 질렀을 리 없으니 말이다.불길이 조금 잡히자 서철용은 수건으로 코를 막고 모든 방을 뒤져보았다.소방대가 도착했을 때, 서철용은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흡수해 정신이 흐릿해지고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계속해 찾아야만 했다.“너 절대 다치게 안 해.”‘난 이모한테 반드시 널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그토록 오랫동안 너한테 상처를 줬으니, 이번엔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무사히 구해낼 거야...’마지막으로 서철용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불길은 그의 몸에까지 번지지 않았다. 비상구를 통해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에게 산소마스크를 끼워주고는 밖으로 구조해 나갔다.“팀장님,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장소월은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힘으로 문을 두드렸다.몇 분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완전히 혼미상태에 빠진 장소월을 구해냈다.전연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추 산장을 나섰다.송시아가 그를 잡았다.“전연우 씨, 잘 생각해봐야 해요.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천신만고 끝에 따온 거란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가면 이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거예요.”전연우는 단호히 송시아의 손을 뿌리쳐버렸다.김 대표가 물었다.“송시아 씨,
수술이 진행되고 한 시간 뒤.전연우는 병원에 도착했다. 배은란도 수술실 문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전연우가 경직된 얼굴로 배은란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왜 불이 난 건데요.”배은란은 서철용이 걱정되어 한참을 운 탓에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 역시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배은란을 보살피던 도우미가 일어나 자초지종을 한번 말해주었다.전연우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CCTV 영상 찾아봐.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기성은이 머리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기성은은 병원 16층 CCTV 영상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있어 얼굴은 조금도 확인할 수 없었다.경찰서에서는 이 일을 조사한 뒤 대체적인 그녀의 얼굴을 그려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윤곽으로 조금의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이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기성은이 조사 결과를 전연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조사해보았는데 이 사람은 병원 간호사 명단에 없습니다. 외부 인원이 간호사로 위장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16층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전연우가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인시윤은 몇 층에 있어?”“12층입니다.”전연우는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갔다.기성은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대표님, 인시윤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하지만 인시윤은 지금 저희들의 감시 아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인시윤은 아닙니다.”전연우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인시윤에 대해 잘 알아?”기성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만일
인시윤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손으로 전연우의 팔목을 꽉 잡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연우 씨...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상처 줄 거예요...”“지금 이 몰골이 된 것도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걸로도 모자라요? 내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가져야 만족하겠어요?”전연우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간호사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전연우가 시뻘건 핏줄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널 죽일 수 있나 없나 지켜봐.”전연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아 책상에 눌러놓고는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뜨거운 물을 집어 그녀의 입안에 부어 넣었다.인시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휘저었다.전연우의 손등에 인시윤의 손톱에 긁힌 자국이 몇 가닥 생겨났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점점 더 거세져 갔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인시윤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얼굴이 마비되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그녀의 숨통이 끊어지려는 순간, 전연우가 그녀를 놓아주었다.인시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천히 바닥에 흘러내려 널브러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전연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보는 것과도 같이 무심하고 냉정했다.전연우도 손에 화상을 입었다. 손등 피부가 모두 데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이다.인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운 물 때문에 화상을 입어 조금의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지금 이 고통 기억해.”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손의 물기를 닦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전연우가 말했다.“하루 시간 줄 테니까 이번 일을 꾸민 놈들 모조리 찾아서 북경 감옥에 집어넣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저녁 12시, 장소월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전연우는 그때부터 침대 옆
다만... 오귀화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났다. 아직도 대학생을 후원할 돈이 남아있다니.간호사의 목숨을 살려준 건 오귀화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기성은이 말했다.“이번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배후의 그 사람...”그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대표님께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고 계시는 거죠. 설마 송 부대표님인가요?”전연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시아는 내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고 저렇게 날뛰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이 빚은 내가 모조리 갚아줄 테니까.”“지금 송시아는 뭐 하고 있어?”기성은이 대답했다.“송 부대표님은 매일 제시간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뒤에선 다른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고요. 현재 송 부대표님을 제외하고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인씨 가문입니다. 만약 인씨 가문과 송시아가 연합한다면 혹시나...”전연우가 담뱃불을 끄고는 말했다.“송시아는 야망이 큰 여자야. 하지만 성세 그룹 전체를 삼키기엔 아직 역부족이지.”“성세 그룹을 손에 넣고 휘두른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 건드릴 수는 없어.”“아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징크스 잘 감시해.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기성은이 물었다.“저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전연우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말했다.“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직접 처리한다면 껄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가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소민아의 언급에 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입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 말이다.“아직 송시아의 옆에 있습니다. 부서 이동을 권했지만 거절하더라고요.”“소민아한테 아무 얘기 안 했지?”“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전
새벽, 침대에 누워있던 장소월이 돌연 깨어나 연이어 기침했다. 전연우는 곧바로 벨을 눌렀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검사를 진행했다.전연우가 걱정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어때요?”의사가 각종 수치를 본 뒤 청진기를 내려놓고는 많이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사모님께선 이미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며칠 더 입원해 있다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전연우가 물었다.“그럼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거예요?”의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사실 지금쯤 깨어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전 앓았던 병 때문에 그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검사 결과로 봐선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며칠 더 지나면 아마 깨어나실 겁니다.”전연우는 지금까지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그의 굳은 얼굴에 의사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바로 병실을 떠났다.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소월이 의식을 되찾았다.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전연우.”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던 전연우가 그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 여기 있어.”장소월은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나 너무 괴로워.”당장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괜찮아. 오빠가 있잖아. 내가 의사 불러올게.”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나 죽을 것 같아.”전연우는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의식을 잃은 채 몇 년을 누워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예전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연우는 그녀를 잃을까 봐 너무나도 겁이 났다.전연우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고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내가 너 잘못되게 놔두지 않아. 조금 더 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장소월은 며칠 동안 줄곧 흐리멍덩한 상태였지만,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래.”장소월이 눈을 감자 전연우는 자리에서 일
회의가 끝난 뒤.송시아의 귀에 아직 회의실에 남아있는 임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은 점점 더 회사에 소홀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비서한테 다 맡기다니요.”“그러니까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요.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회사까지 내팽개치고 있어요.”소민아는 최근 며칠 동안 너무 바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송시아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업무상 배운 것이 꽤나 많았다.저번의 그 교훈을 잊지 않고 술자리에 나갈 때마다 사전에 숙취 해소제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는 그때처럼 술에 취해선 안 된다.기성은은 연속 며칠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소피아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소민아가 송시아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송시아가 말했다.“나 바깥에 나갈 거예요. 이제 따라올 필요 없어요.”“네, 부대표님.”“요즘 힘들었죠.”“아니에요, 부대표님. 확실히 많이 배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부대표님 옆에서 잘 해낼 거예요.”송시아는 보라색 정장을 입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소민아를 향해 빙그레 웃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부대표님, 조심히 가세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소민아는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신경을 드디어 조금이나마 풀어놓을 수 있었다.송시아는 사무실에 돌아가 차 키를 챙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주차장엔 거의 사람이 없었다.송시아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고 한 순간, 어둠 속 코너에서 돌연 한 남자가 튀어나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송시아는 발버둥 치다가 예전 배웠던 호신술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상대방은 그녀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 가뿐히 공격을 피했다. 송시아는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약효가 오래 가지 않는 약이라 몇 분 뒤 송시아는 의식을 되찾았다. 손발이 모두
오후 3시, 소민아가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천추 산장에서 예식장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는 송시아가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는 차에서 내린 뒤 송시아의 병실로 향했다. 한 걸음만 더 일찍 들어갔다면 침대에서 날아오는 컵에 가격당했을 것이다. 병실 안에서 분노하는 송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 다 꺼져버려! 쓰레기 같은 놈들. 아기 하나 못 지켜? 꺼지라고!”아기? 송 부대표님이 임신했었나?’그럼 누구 아이란 말인가?소민아는 얼마 전 송시아가 왜 입원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직장 상사의 사적인 일이니 깊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소민아는 문 앞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그래서 최근 헐렁한 옷을 자주 입고, 그녀에게 새콤한 맛의 블루베리를 사 오라고 시켰던 것이다.소민아 역시 송 부대표님이 임신을 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그 예측이 정말 맞을 줄이야.절대 대표님의 아이일 리는 없다.소월 언니를 목숨처럼 아끼는 대표님은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월 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왜 이토록 몸과 마음을 다해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겠는가. 간호사가 의료품을 들고 급히 안에서 나왔다. 소민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가 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송... 부대표님, 괜찮으신 거죠.”소민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송시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분출했던 분노를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놀랐어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부대표님. 얼굴... 다치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제가 신고해 드릴까요?”송시아는 입가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왼쪽 다리는 붕대에 감겨 걸려 있었다. 결코 가벼운 상황은 아니었다.오른팔 소매 안으로 커다란 멍이 보이기도 했다.“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