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언니 몸이 다 나으면 이 돈 다 써서 맛있는 거 사줄게요.”송시아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일이에요. 민아 씨... 약 가져온 다음 컴퓨터도 가져도 줘요.”소민아는 더이상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네, 부대표님. 알겠습니다.”소민아는 송시아에게 약을 가져다준 뒤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송시아가 핸드폰 버튼을 누르자 소민아는 순조롭게 송시아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에 가보니 확실히 그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컴퓨터 가방을 찾고 전원선을 뽑은 순간, 돌연 화면이 밝아졌다. 컴퓨터 바탕 화면을 본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던 것이다. 그는 창가에 서서 한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리 창문에 침대 하나가 비쳐 보였다. 주위 시설들을 보니 서울 고급 호텔 스위트룸인 것 같았다. 침대 위엔 섹시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송시아였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손이 덜덜 떨려 마우스까지 떨어뜨렸다. 주우려 허리를 굽힌 순간 반쯤 열린 서랍 안 사진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호기심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큰일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소민아는 결국 그 사진들을 꺼냈다.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경악과 분노가 차올랐다. 소월 언니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그곳에 있는 모든 사진에 대표님과 송시아가 담겨 있었다.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사무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재빨리 사진을 도로 넣어놓고 일어섰다...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민아는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가는 도중 죽 한 그릇을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병실 안, 송시아가 바삐 움직이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져올 때 다른 거 남겨두지 않았죠? 아니면... 사무실에서 내 물건 본 건
송시아는 너무나도 지독한 사람이다. 아니면 그 역시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일적으론 충분히 차분하지만 감정 면에선 조금 강압적이다. 절대 단 한 순간의 배신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만이 적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남자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소민아는 하루종일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장소월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전화기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소월 언니,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어느 병원에 있어요? 제가 갈게요.”장소월은 고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가 4시간 전 다행히 열이 내리고 큰 고비를 넘겼다.장소월은 자신을 위해 핸드폰을 들어주고 있는 전연우를 쳐다보았다. 소민아는 전연우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덜덜 떠는 소현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장소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네. 엘리트 개인 병원에 있어요. 오고 싶으면 와요. 운전 조심하고요.”“걱정 마세요, 언니. 저 할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뒤 장소월이 전연우에게 말했다.“민아 씨가 날 보러 올 거래. 네가 여기 있으면 분명 무서워할 거야. 잠깐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줄 수 있어?”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 하지만 딱 10분 만이야. 뭐 먹고 싶어?”장소월이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영관에서 파는 죽 먹고 싶어.”“그래. 기다리고 있어.”전연우는 병실에서 나간 뒤 정장 재킷을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옆에 서 있는 기성은을 쳐다보았다.“잘 지켜보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소민아는 참 배짱도 크다. 장소월이 말하지 않았다면 대표님이 어떻게 그녀를 병원에 들이는 걸 허락할 수 있
소민아가 말했다.“전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언니, 저 똑똑해요.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기성은이 팔을 들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시간 됐어요. 소민아 씨, 이제 나가야 해요.”“싫어요. 아직 소월 언니랑 얘기 안 끝났단 말이에요.”“급할 필요 없어요. 전연우가 오려면 아직 한참 더 걸릴 텐데 그동안 나랑 같이 있게 해줘요.”“그러니까요.”지금 소민아의 얼굴엔 기성은이 보기에 적의가 가득했다.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불편한 곳이 있으면 절 부르세요. 문밖에 있겠습니다.”“그래요.”기성은은 득의양양한 소민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무시해버리고 자리를 떴다.이 층 전체에 빌려 경호원을 배치했기에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기성은의 귀에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는 확실히 아부를 떠는 데 능한 것 같았다.30분 뒤, 소민아는 대표님이 돌연 돌아올까 봐 얼른 물건을 챙겨 병실을 나섰다.복도에서 기성은이 경호원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나쁜 놈.”기성은이 손을 뻗어 그 기고만장한 여자의 뒷덜미를 잡았다.“이번 일은 일단 그렇게 처리해. 가봐.”“네.”소민아가 물었다.“날 왜 잡은 거예요? 놓아주지 않으면 소리지를 거예요!”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리고 씩씩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대체 언제 그 왈가닥 성격 고칠 거예요? 너무 시끄러워요.”“그래요. 저 목소리 높고 시끄러워요. 그게 뭐요? 기 비서님한테 손해 끼친 거 있어요? 그래요! 기 비서님 여자친구처럼 부드럽고 친절하지 못해요. 됐죠!”그녀는 기성은의 구두를 쾅 밟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구두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는 기성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소민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죽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소민아는 온몸이 얼어붙었다.“대표님! 안녕하세요.”전연우는 여전히 강렬한 분위기를
“송시아는 이간질을 하려는 거예요. 이번엔 잘했어요.”뭐라고?대표님이 지금 그녀를 칭찬한 건가?소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대표님은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이게 진짜라고?세상에, 소민아는 처음으로 대표님이 가까이 다가가기 편한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기성은의 밑에서 일할 땐 하루가 멀다 하고 꾸지람을 들었었는데 대표님에게 직접 칭찬받는 날이 다 오다니.너무 감동적이다!장소월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전연우를 보고는 소민아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그녀 손에 들려있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본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고는 바로 빼앗아갔다.“의사 선생님 말 잊었어? 지금은 이런 거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냥 조금 맛만 봤어. 문밖에서 민아 씨 만나서 무슨 얘기 안 했지?”전연우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약 먹고 조금 더 자. 어디 불편하면 나 부르고.”전연우는 줄곧 사람들의 우러러보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왔다. 그의 권력과 지위에 눌려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 한 명을 보살피기 위해 침대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전연우 정도의 사람이라면 손가락만 한번 까딱해도 수많은 여자들이 흔쾌히 그의 침대에 오를 텐데 말이다. 심지어 전연우가 원하는 것 모두 해줄 수 있을 것이다.장소월은 이미 그의 약점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그녀를 담보로 협박한다면 전연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것만 같았다.사람들은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소위 말하는 사랑이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오직 장소월만이 전연우가 얼마나 악마 같은 인간인지 알고 있다.장소월이 보기에 그가 이토록 잘해주는 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전연우는 뼛속까지 장사꾼인 사람이라 이익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전연우도 그녀처럼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
여자는 나가다가 중간에 멈춰선 뒤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서철용이 물었다.“더 할 말 있어?”배은란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없어.”사실 그녀는 줄곧 꿈에 나오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익숙한 느낌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게 만드는 그 사람 말이다. 배은란은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서철용이 걱정할까 봐 줄곧 마음에 담아놓고 말하지 않았다.어쩌면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모두 이유 없는 환각일 수도 있다.며칠 뒤, 장소월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아래로 내려가 햇빛 쪼임을 했다.지금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다. 이틀 뒤면 퇴원해도 될 것이다.장소월은 병원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몸조리를 하고 있는 것뿐이니 어디에서 해도 무방할 것이다.경호원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일이 생겨 잠시 병원을 나가셨습니다. 한 시간 뒤면 돌아오실 겁니다.”“그 사람이 어디에 가든, 뭘 하든, 언제 돌아오든,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경호원은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장소월은 인공 호수 위에서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는 백조 두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태양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보기 드문 날씨였다. 몸이 살짝 따뜻해지는 것이 춥지도 덥지도 않게 알맞았다.이제 두 달만 더 지나면 봄이 온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그녀가 떠나온 지도 5년이 지났다.머지않은 곳, 한 사람이 자신을 꽁꽁 감싼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간호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호원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바짝 따라갔다.장소월이 병실에 돌아가 점심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깨어난 뒤에도 전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아마... 송시아한테 갔겠지.며칠 동안 전연우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었다.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을 전연우는 받지 않았지만 장소월은 누가 걸어온 것
장소월은 위층에 올라가 서철용을 찾아갔다.서철용이 쪽지를 살펴보니 확실히 인시윤의 글씨체였다. 얌전히 치료를 받아야 할 때에 이런 수단으로 장소월을 끌어내다니. 서철용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고 한참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가요. 인시윤 쪽에 정말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경호원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내 사무실 안에 비밀 통로로 가면 돼요. 전연우가 돌아오면 내가 메시지 보낼게요. 10분 밖에 못 줘요. 10 분... 컥컥컥... 10분 안에 안 돌아오면 찾으러 갈게요.”장소월은 계속 기침을 하는 서철용을 쳐다보았다. 저번 사고 이후 기침이 낫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사이니 이런 작은 병쯤은 혼자 치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고마워요.”장소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비밀 통로로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순조롭게 인시윤의 병실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화상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오늘은 인시윤 외에도 인정아 한 명이 더 있었다.인정아는 급히 들어온 불청객을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쏘아보았다.“여긴 왜 왔어. 지금 너 보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인시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제가 오라고 했어요. 먼저 나가 계세요.”인시윤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호사는 약을 다 바른 뒤 의료품을 들고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장소월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사모님.”장소월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거렸다.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인시윤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 나한테서 모든 걸 빼앗아간 기분이 어때?”“너와 전연우의 관계를 알고서도 뻔뻔스럽게 그 사람 옆에 있을 줄은 몰랐네. 장소월... 넌 역겹지도 않아?”장소월은 쪽지를 봤을 때부터 인시윤이 그리 쉽게 강영수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입술을 꽉 깨물고 완전히 망가져 버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 전연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던 인시윤이
“인시윤... 전연우가 비행기 사고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했어.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해. 그 원한을 나한테 푸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내가 왜 연우 씨를 미워하겠어? 그 사람은 내 남편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을 거야. 내가 미워하는 건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너야.”인시윤이 마구 쏘아붙이다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넌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난 그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너 대체 왜 돌아온 거야. 다 네 탓이야!”인시윤은 돌연 장소월을 잡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장소월, 내가 이렇게 빌게. 연우 씨랑 결혼하지 마. 그 사람 나한테 돌려줘, 응?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게.”장소월은 가슴이 저려왔다. 전연우 때문에 이렇게까지 미쳐버린 인시윤을 보고 있으니 전생의 자신이 떠올랐다. 인시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장소월의 손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코끝이 시큰거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눈물을 닦고 난 뒤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우린 예전부터 친구였잖아. 이러지 마... 나와 전연우에게 미래는 없어. 나도 줄곧 전연우 옆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야.”“인시윤, 세상엔 전연우 한 명만 있는 건 아니야. 너한텐 엄마도 있고, 친구들도 있잖아.”인시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말했다.“너 약속한 거야? 그 사람과 결혼 안 하겠다고, 나한테 양보하겠다고! 맞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해주었다.“맞아. 난 전연우 좋아하지 않아. 절대 결혼 안 해.”15분 뒤, 서철용은 안에서 전해져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후 안에서 급박한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이 소리쳤다.“간호사님, 사람이 쓰러졌어요.”서철용과 인정아가 빠르게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호사가 왔을 땐 서철용이 장소월을 데리고 떠난 뒤였다.사무실에 돌아온 뒤 서철용이 그녀에게 물을 한 컵 따라주었다.“어땠어요? 인시윤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장소월은 황급히 핸드폰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너무 조급했던 탓에 제대로 잡지 못해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복도에서 기성은에게 지시를 내리고 난 뒤, 전연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힐끗 살펴보니 지도 어플에 주소가 하나 찍혀 있었다. 장소월은 애써 태연한 척 핸드폰을 주워들었다.“뭘 보는 거야?”전연우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고는 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장소월이 검색한 곳은 이름도 없는 한 산속 마을이었다.그녀는 전연우의 몸에서 분출되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때일수록 침묵으로 일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부러 무언가 숨긴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장소월은 태연한 얼굴로 컵에 물을 따랐다. 긴장되는 마음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그녀는 물을 한 모금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별거 아니야.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무료해서 어디 여행 갈 곳이 없나 검색해보던 중이었어.”정상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전연우의 날카로웠던 눈동자가 차츰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시 핸드폰을 그녀의 옆에 놓아주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고, 그녀도 드디어 거의 몸을 회복했다. 전연우는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든 자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갖지 말아야 할 마음은 일찌감치 떨쳐내는 게 좋을 것이다.전연우가 입고 있던 정장을 벗자 그레이색 정장 조끼와 목에 맨 정교한 넥타이가 드러났다. 그는 옆 의자에 앉아 힘껏 장소월을 끌어당겼다.장소월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전연우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검고 길게 자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예전에 비하면 짧지만, 그래도 이젠 꽤 비슷해졌다.전연우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제일 좋아했다.“나가고 싶으면 결혼식이 끝나고 러시아로 신혼여행 가는 건 어때? 너 거기 가고 싶어 했잖아.”장소월은 이미 오래전 가보았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