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가 말했다.“전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언니, 저 똑똑해요.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기성은이 팔을 들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시간 됐어요. 소민아 씨, 이제 나가야 해요.”“싫어요. 아직 소월 언니랑 얘기 안 끝났단 말이에요.”“급할 필요 없어요. 전연우가 오려면 아직 한참 더 걸릴 텐데 그동안 나랑 같이 있게 해줘요.”“그러니까요.”지금 소민아의 얼굴엔 기성은이 보기에 적의가 가득했다.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불편한 곳이 있으면 절 부르세요. 문밖에 있겠습니다.”“그래요.”기성은은 득의양양한 소민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무시해버리고 자리를 떴다.이 층 전체에 빌려 경호원을 배치했기에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기성은의 귀에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는 확실히 아부를 떠는 데 능한 것 같았다.30분 뒤, 소민아는 대표님이 돌연 돌아올까 봐 얼른 물건을 챙겨 병실을 나섰다.복도에서 기성은이 경호원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나쁜 놈.”기성은이 손을 뻗어 그 기고만장한 여자의 뒷덜미를 잡았다.“이번 일은 일단 그렇게 처리해. 가봐.”“네.”소민아가 물었다.“날 왜 잡은 거예요? 놓아주지 않으면 소리지를 거예요!”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리고 씩씩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대체 언제 그 왈가닥 성격 고칠 거예요? 너무 시끄러워요.”“그래요. 저 목소리 높고 시끄러워요. 그게 뭐요? 기 비서님한테 손해 끼친 거 있어요? 그래요! 기 비서님 여자친구처럼 부드럽고 친절하지 못해요. 됐죠!”그녀는 기성은의 구두를 쾅 밟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구두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는 기성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소민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죽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소민아는 온몸이 얼어붙었다.“대표님! 안녕하세요.”전연우는 여전히 강렬한 분위기를
“송시아는 이간질을 하려는 거예요. 이번엔 잘했어요.”뭐라고?대표님이 지금 그녀를 칭찬한 건가?소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대표님은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이게 진짜라고?세상에, 소민아는 처음으로 대표님이 가까이 다가가기 편한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기성은의 밑에서 일할 땐 하루가 멀다 하고 꾸지람을 들었었는데 대표님에게 직접 칭찬받는 날이 다 오다니.너무 감동적이다!장소월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전연우를 보고는 소민아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그녀 손에 들려있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본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고는 바로 빼앗아갔다.“의사 선생님 말 잊었어? 지금은 이런 거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냥 조금 맛만 봤어. 문밖에서 민아 씨 만나서 무슨 얘기 안 했지?”전연우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약 먹고 조금 더 자. 어디 불편하면 나 부르고.”전연우는 줄곧 사람들의 우러러보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왔다. 그의 권력과 지위에 눌려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 한 명을 보살피기 위해 침대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전연우 정도의 사람이라면 손가락만 한번 까딱해도 수많은 여자들이 흔쾌히 그의 침대에 오를 텐데 말이다. 심지어 전연우가 원하는 것 모두 해줄 수 있을 것이다.장소월은 이미 그의 약점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그녀를 담보로 협박한다면 전연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것만 같았다.사람들은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소위 말하는 사랑이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오직 장소월만이 전연우가 얼마나 악마 같은 인간인지 알고 있다.장소월이 보기에 그가 이토록 잘해주는 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전연우는 뼛속까지 장사꾼인 사람이라 이익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전연우도 그녀처럼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
여자는 나가다가 중간에 멈춰선 뒤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서철용이 물었다.“더 할 말 있어?”배은란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없어.”사실 그녀는 줄곧 꿈에 나오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익숙한 느낌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게 만드는 그 사람 말이다. 배은란은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서철용이 걱정할까 봐 줄곧 마음에 담아놓고 말하지 않았다.어쩌면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모두 이유 없는 환각일 수도 있다.며칠 뒤, 장소월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아래로 내려가 햇빛 쪼임을 했다.지금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다. 이틀 뒤면 퇴원해도 될 것이다.장소월은 병원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몸조리를 하고 있는 것뿐이니 어디에서 해도 무방할 것이다.경호원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일이 생겨 잠시 병원을 나가셨습니다. 한 시간 뒤면 돌아오실 겁니다.”“그 사람이 어디에 가든, 뭘 하든, 언제 돌아오든,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경호원은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장소월은 인공 호수 위에서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는 백조 두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태양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보기 드문 날씨였다. 몸이 살짝 따뜻해지는 것이 춥지도 덥지도 않게 알맞았다.이제 두 달만 더 지나면 봄이 온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그녀가 떠나온 지도 5년이 지났다.머지않은 곳, 한 사람이 자신을 꽁꽁 감싼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간호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호원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바짝 따라갔다.장소월이 병실에 돌아가 점심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깨어난 뒤에도 전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아마... 송시아한테 갔겠지.며칠 동안 전연우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었다.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을 전연우는 받지 않았지만 장소월은 누가 걸어온 것
장소월은 위층에 올라가 서철용을 찾아갔다.서철용이 쪽지를 살펴보니 확실히 인시윤의 글씨체였다. 얌전히 치료를 받아야 할 때에 이런 수단으로 장소월을 끌어내다니. 서철용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고 한참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가요. 인시윤 쪽에 정말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경호원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내 사무실 안에 비밀 통로로 가면 돼요. 전연우가 돌아오면 내가 메시지 보낼게요. 10분 밖에 못 줘요. 10 분... 컥컥컥... 10분 안에 안 돌아오면 찾으러 갈게요.”장소월은 계속 기침을 하는 서철용을 쳐다보았다. 저번 사고 이후 기침이 낫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사이니 이런 작은 병쯤은 혼자 치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고마워요.”장소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비밀 통로로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순조롭게 인시윤의 병실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화상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오늘은 인시윤 외에도 인정아 한 명이 더 있었다.인정아는 급히 들어온 불청객을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쏘아보았다.“여긴 왜 왔어. 지금 너 보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인시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제가 오라고 했어요. 먼저 나가 계세요.”인시윤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호사는 약을 다 바른 뒤 의료품을 들고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장소월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사모님.”장소월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거렸다.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인시윤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 나한테서 모든 걸 빼앗아간 기분이 어때?”“너와 전연우의 관계를 알고서도 뻔뻔스럽게 그 사람 옆에 있을 줄은 몰랐네. 장소월... 넌 역겹지도 않아?”장소월은 쪽지를 봤을 때부터 인시윤이 그리 쉽게 강영수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입술을 꽉 깨물고 완전히 망가져 버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 전연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던 인시윤이
“인시윤... 전연우가 비행기 사고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했어.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해. 그 원한을 나한테 푸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내가 왜 연우 씨를 미워하겠어? 그 사람은 내 남편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을 거야. 내가 미워하는 건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너야.”인시윤이 마구 쏘아붙이다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넌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난 그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너 대체 왜 돌아온 거야. 다 네 탓이야!”인시윤은 돌연 장소월을 잡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장소월, 내가 이렇게 빌게. 연우 씨랑 결혼하지 마. 그 사람 나한테 돌려줘, 응?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게.”장소월은 가슴이 저려왔다. 전연우 때문에 이렇게까지 미쳐버린 인시윤을 보고 있으니 전생의 자신이 떠올랐다. 인시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장소월의 손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코끝이 시큰거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눈물을 닦고 난 뒤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우린 예전부터 친구였잖아. 이러지 마... 나와 전연우에게 미래는 없어. 나도 줄곧 전연우 옆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야.”“인시윤, 세상엔 전연우 한 명만 있는 건 아니야. 너한텐 엄마도 있고, 친구들도 있잖아.”인시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말했다.“너 약속한 거야? 그 사람과 결혼 안 하겠다고, 나한테 양보하겠다고! 맞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해주었다.“맞아. 난 전연우 좋아하지 않아. 절대 결혼 안 해.”15분 뒤, 서철용은 안에서 전해져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후 안에서 급박한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이 소리쳤다.“간호사님, 사람이 쓰러졌어요.”서철용과 인정아가 빠르게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호사가 왔을 땐 서철용이 장소월을 데리고 떠난 뒤였다.사무실에 돌아온 뒤 서철용이 그녀에게 물을 한 컵 따라주었다.“어땠어요? 인시윤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장소월은 황급히 핸드폰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너무 조급했던 탓에 제대로 잡지 못해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복도에서 기성은에게 지시를 내리고 난 뒤, 전연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힐끗 살펴보니 지도 어플에 주소가 하나 찍혀 있었다. 장소월은 애써 태연한 척 핸드폰을 주워들었다.“뭘 보는 거야?”전연우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고는 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장소월이 검색한 곳은 이름도 없는 한 산속 마을이었다.그녀는 전연우의 몸에서 분출되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때일수록 침묵으로 일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부러 무언가 숨긴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장소월은 태연한 얼굴로 컵에 물을 따랐다. 긴장되는 마음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그녀는 물을 한 모금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별거 아니야.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무료해서 어디 여행 갈 곳이 없나 검색해보던 중이었어.”정상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전연우의 날카로웠던 눈동자가 차츰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시 핸드폰을 그녀의 옆에 놓아주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고, 그녀도 드디어 거의 몸을 회복했다. 전연우는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든 자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갖지 말아야 할 마음은 일찌감치 떨쳐내는 게 좋을 것이다.전연우가 입고 있던 정장을 벗자 그레이색 정장 조끼와 목에 맨 정교한 넥타이가 드러났다. 그는 옆 의자에 앉아 힘껏 장소월을 끌어당겼다.장소월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전연우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검고 길게 자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예전에 비하면 짧지만, 그래도 이젠 꽤 비슷해졌다.전연우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제일 좋아했다.“나가고 싶으면 결혼식이 끝나고 러시아로 신혼여행 가는 건 어때? 너 거기 가고 싶어 했잖아.”장소월은 이미 오래전 가보았
거짓말.전연우는 몸을 뒤집어 일으키더니 그녀의 얼굴에 연이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입술에서 시작해 천천히 그녀의 목으로 내려갔다.“잠이 안 오면 다른 가치 있는 일이라도 해야지.”“아니. 안 돼, 전연우. 나 진짜 화장실 가고 싶어. 그리고... 나 아직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어. 잠자리하면 안 돼.”그런 장소월의 말에도 전연우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그는 어느새 장소월의 잠옷 단추를 모두 풀어헤쳤다.이불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그의 욕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매끄러운 액체가 나오지 않았는지 조금 거칠었던 탓에 장소월은 억지로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전연우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자를 안고 욕실에 들어갔다. 하반신에 흘러나온 선홍빛 피를 본 전연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아팠으면서 왜 말 안 했어?”차가운 욕조에 앉아 있던 장소월이 깊이 들어오려는 전연우의 손을 잡았다.“됐어. 그만해. 나 샤워하고 싶어. 몸이 불편해.”전연우는 거친 손바닥 위에 바디위시를 짜놓고는 장소월의 여린 피부에 문질렀다. 장소월은 힘없이 그의 몸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빠르게 그녀를 씻긴 뒤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니 마침 기성은이 약을 들고 들어왔다.전연우가 이불을 거두고 손가락을 상처 부위에 가져가자 장소월은 통증에 신음했다.“됐다니까. 하지 마. 너무 아파.”주위가 조금 부어있었다. 전연우는 장소월의 몸 상태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성욕을 참아왔다. 오늘 밤 한순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괜찮아. 조금 찢어졌을 뿐이야. 너무 깊은 상처는 아니야.”“다음엔 조심할게.”전연우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장소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의 이런 연약한 모습이 남자의 본능적인 욕구를 더더욱 자극했다.전연우는 그녀의 귀에 살짝 키스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
전화를 끊은 후 장소월은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깨끗이 닦은 뒤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남자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오고 눈부신 라이트가 번쩍였다. 전연우는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차에서 내려왔다.단숨에 3층까지 올라가 침실 문을 열었다.깊은 잠에 빠졌던 장소월은 침대 한쪽이 꺼져내려 가는 것을 느낀 뒤에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전연우는 외투를 벗고 오늘 갓 갈아놓은 침대 시트에 누워 이불과 장소월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그녀 몸에서 풍기는 꽃향기를 맡으니 하루종일 쌓였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잠이 채 깨지 못한 듯 간신히 눈을 뜨고는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이게 무슨 냄새야. 가서 씻고 와.”“그래. 금방 갈게.”장소월은 너무 졸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다. 전연우는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잠옷 어깨끈을 다시 올려주었다.얼마 후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갔다.전연우는 샤워를 마친 뒤 머리를 말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전연우는 그녀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밤새 하늘을 지켰던 어둠이 빛을 받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바깥엔 서리가 내렸지만, 집안엔 보일러가 틀어져 있어 온도가 적당했다.장소월이 슬리퍼를 신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이미 아침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메뉴는 잔치 국수였다.최근 장소월은 혼자 집에 있었기에 입는 것과 먹는 것 모두 최대한 간단히 해결했다.예전 거실에 내려와 보면 항상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지만, 요즘은 연속 며칠 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전연우는 늦잠을 자는 날이 별로 없다.지금은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전자기기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전연우는 여전히 원래의 루틴을 지키고 있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의 신문을 보는 그 루틴 말이다.장소월이 소파 앞 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은 신문 배달 안 왔나 보네요.”그중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