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다가오지 마.”목이 망가진 듯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었을 땐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장소월이 잘 보이지 않아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비춘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온몸이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너무나도 흉측한 그녀의 모습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그 소리를 들은 전연우는 여자 화장실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로 뛰어 들어갔다.장소월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전연우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왔다.“다친 데는 없어?”전연우가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장소월은 조금 전 그 얼굴을 떠올리니 또다시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난 괜찮아.”“그 여자 화상이 엄청 심했어.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 우리... 집에 가자.”그야말로 지옥에서 걸어 나온 귀신과도 같았다.장소월은 귀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지만, 그녀의 모습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귀신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장소월이 나간 뒤, 인시윤을 돌보던 도우미가 그녀를 찾으러 화장실에 왔다.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원래 깨끗했던 환자복 위에 알 수 없는 액체가 한 움큼 묻어 있었고, 역한 비린내가 풍겨왔다.인시윤은 지금껏 이토록 굴욕스러운 적이 없었다.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인시윤은 장소월 같은 하찮은 집안 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지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인시윤은 마음속에 광기가 일었고, 질투심이 천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었다.만약 장소월의 얼굴도 그녀와 같이 망가진다면, 전연우는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전연우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반반한 얼굴 때문이다.장소월... 전연우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단지 너의 그 얼굴일 뿐이야.인시윤이 병실로 돌아온 후, 간호사가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지금껏 차마 잡아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또 복통이 찾아왔다는 것을 서철용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더 많이 함으로써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서철용이 프로의 손길로 그녀의 배에 안마를 해주었다. 그 결과 배은란은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계속해.”“어젯밤 전연우를 제지하기 위해 나갔던 거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인시윤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전연우 씨가 죽이려 했다는 거야? 왜? 인시윤은 그분의 아내였던 사람이잖아.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있어?”서철용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내? 그냥 이용했던 것뿐이야. 난 예전 전연우 같은 냉혈한에겐 약점이 없는 줄 알았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준 사람이 생겼고, 자연히 약점이 생겨버렸지. 내가 소월 씨를 언급하니까 바로 멈추더라고. 예전의 그 성격대로였다면 인씨 집안은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을 거야.”“전연우 씨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런데 인시윤은 왜 데려와 치료해주는 거야?”서철용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역시 내 와이프 대단해. 바로 이렇게 핵심 질문을 던지다니.”배은란이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어젯밤 인시윤한테 강영수에 대해 물었었거든. 무언가 알고는 있는데 일부러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난 그 당시 비행기 사고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어. 지금 상황으로 봐선 강영수는 죽지 않았어. 어쩌면 그걸 아는 사람은 인시윤 단 한 명일 수도 있어.”배은란이 그에게 물었다.“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정보를 캐낼 생각이야?”서철용은 입술을 깨물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 한 가닥의 안광이 번뜩였다.“지금은 한 단계씩 차례로 밟아보는 수밖에 없어.”다음 날, 서철용은 인시윤의 검사 결과 차트를 보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수술을 진행했다.서철용이 메스를
서철용이 되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요?”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약 가지러 갈게요.”이건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은 약이다. 지금 환자에게 처방한다고?“전 대표님, 사모님...”사무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서철용은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귀한 손님이 오셨네!”두 사람이 들어오자 서철용은 물 두 컵을 따라 장소월의 앞에 놓아주었다.“여기엔 설탕을 넣었어요.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고마워요.”“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장소월이 전연우에게 말했다.“먼저 가서 일 봐.”전연우는 잠시 나가야 했다. 그녀를 혼자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저녁 여섯 시가 되니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최근 날씨도 많이 추워졌다.전연우는 입고 있던 정장을 벗어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함부로 다니지 말고 여기에 있어. 곧 데리러 올게. 착하지. 내 말대로 해.”장소월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서철용은 이미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도 좀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전연우가 말했다.“소월이 잘 지키고 있어. 없어지면 절대 너 가만 놔두지 않아.”“얼른 가. 다 큰 어른이 뭐 길이라도 잃을까 봐 그래?”전연우가 나가자 장소월은 백팔십도 바뀐 표정으로 조금 전 그가 만졌던 얼굴을 슥 문질렀다.“저 인시윤 만났어요.”“이거 새것이에요. 아무도 안 썼어요.”담요를 꺼내 그녀 옆 소파 위에 놓아주던 서철용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아직은 인시윤을 만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에요. 소월 씨... 만나지 말아요. 인시윤은 소월 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어요. 얼굴까지 완전히 훼손되었으니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거예요.”장소월은 따뜻한 물이 담긴 유리컵을 손으로 감쌌다.“알아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그게 뭔지 나도 알아요. 강영수 소식을 묻고 싶은 거죠? 소월 씨... 인시윤은 말하지 않을
장소월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요. 알겠어요.”그녀는 문을 나서고 잠시 걸은 뒤에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여기는 결코 혈액 검사하러 가는 길이 아니다.이곳 복도는 너무 조용해 센서 등도 모두 꺼져 있는 상태였다.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당신은 이 병원 간호사가 아니에요. 대체 누구죠?”거짓말이 들키자 여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뛰어가더니 비상구로 빠져나갔다. 장소월이 쫓아 가보았지만 비상구는 이미 잠겨 있었다.그녀는 돌아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상승 도중 멈추었고 그렇게 그녀는 그 속에 갇혀버렸다.장소월이 쾅쾅 문을 두드렸다.“문 좀 열어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다녔던 것이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지?인시윤일까?아니, 인시윤일 리는 없다.인시윤은 지금 수술을 받고 있으니 그렇게 빨리 뛸 수 없는 몸이다.그 순간 환풍구로 이상한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후, 장소월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아무런 예고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서철용이 배은란을 찾았을 때, 남자 한 명이 껄떡거리며 길을 묻고 있었다. 불순한 의도가 명확했다. 그 순간 다행히 서철용이 나타난 것이다.“다음엔 조심할게. 집안에만 있다 보니까 너무 답답해서 나오고 싶었어.”“나가고 싶을 땐 나한테 전화해. 아니면 도우미랑 같이 나가도 되고. 너 혼자 나가는 거 걱정돼.”도우미가 마지막 음식까지 밥상 위에 차려놓았다.서철용이 물었다.“소월 씨는요? 왜 안 보이는 거예요?”도우미가 말했다.“아까 간호사가 찾아와 혈액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어요. 한참 됐는데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네요.”서철용이 불길한 예감에 이마를 찌푸렸다. 어떻게 이상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5분 전에 검사 결과 보고서를 전연우의 메일에 전송했는데 말이다.“큰일 났어. 은란아, 누가 부르든 절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난 나가봐야겠어.”배은란이 그를 부르려고 입을 뗀 순간, 서철용
분명 이곳이다.서철용은 반지를 주워들었다. 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아니면 6천억짜리 반지가 왜 여기에서 굴러다니겠는가.서철용은 거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방을 뒤져 공구를 찾고는 소화기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다.그때, 서철용의 귀에 비상구 복도 쪽 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열어보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잠겨 있었다.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다행히 일찍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몇 분만 늦게 왔다면 불길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장소월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다. 아니면... 악의를 가진 그 사람들이 장소월을 여기까지 유인하고 불까지 질렀을 리 없으니 말이다.불길이 조금 잡히자 서철용은 수건으로 코를 막고 모든 방을 뒤져보았다.소방대가 도착했을 때, 서철용은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흡수해 정신이 흐릿해지고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계속해 찾아야만 했다.“너 절대 다치게 안 해.”‘난 이모한테 반드시 널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그토록 오랫동안 너한테 상처를 줬으니, 이번엔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무사히 구해낼 거야...’마지막으로 서철용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불길은 그의 몸에까지 번지지 않았다. 비상구를 통해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에게 산소마스크를 끼워주고는 밖으로 구조해 나갔다.“팀장님,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장소월은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힘으로 문을 두드렸다.몇 분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완전히 혼미상태에 빠진 장소월을 구해냈다.전연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추 산장을 나섰다.송시아가 그를 잡았다.“전연우 씨, 잘 생각해봐야 해요.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천신만고 끝에 따온 거란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가면 이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거예요.”전연우는 단호히 송시아의 손을 뿌리쳐버렸다.김 대표가 물었다.“송시아 씨,
수술이 진행되고 한 시간 뒤.전연우는 병원에 도착했다. 배은란도 수술실 문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전연우가 경직된 얼굴로 배은란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왜 불이 난 건데요.”배은란은 서철용이 걱정되어 한참을 운 탓에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 역시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배은란을 보살피던 도우미가 일어나 자초지종을 한번 말해주었다.전연우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CCTV 영상 찾아봐.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기성은이 머리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기성은은 병원 16층 CCTV 영상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있어 얼굴은 조금도 확인할 수 없었다.경찰서에서는 이 일을 조사한 뒤 대체적인 그녀의 얼굴을 그려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윤곽으로 조금의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이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기성은이 조사 결과를 전연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조사해보았는데 이 사람은 병원 간호사 명단에 없습니다. 외부 인원이 간호사로 위장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16층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전연우가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인시윤은 몇 층에 있어?”“12층입니다.”전연우는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갔다.기성은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대표님, 인시윤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하지만 인시윤은 지금 저희들의 감시 아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인시윤은 아닙니다.”전연우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인시윤에 대해 잘 알아?”기성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만일
인시윤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손으로 전연우의 팔목을 꽉 잡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연우 씨...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상처 줄 거예요...”“지금 이 몰골이 된 것도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걸로도 모자라요? 내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가져야 만족하겠어요?”전연우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간호사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전연우가 시뻘건 핏줄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널 죽일 수 있나 없나 지켜봐.”전연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아 책상에 눌러놓고는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뜨거운 물을 집어 그녀의 입안에 부어 넣었다.인시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휘저었다.전연우의 손등에 인시윤의 손톱에 긁힌 자국이 몇 가닥 생겨났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점점 더 거세져 갔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인시윤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얼굴이 마비되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그녀의 숨통이 끊어지려는 순간, 전연우가 그녀를 놓아주었다.인시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천히 바닥에 흘러내려 널브러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전연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보는 것과도 같이 무심하고 냉정했다.전연우도 손에 화상을 입었다. 손등 피부가 모두 데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이다.인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운 물 때문에 화상을 입어 조금의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지금 이 고통 기억해.”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손의 물기를 닦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전연우가 말했다.“하루 시간 줄 테니까 이번 일을 꾸민 놈들 모조리 찾아서 북경 감옥에 집어넣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저녁 12시, 장소월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전연우는 그때부터 침대 옆
다만... 오귀화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났다. 아직도 대학생을 후원할 돈이 남아있다니.간호사의 목숨을 살려준 건 오귀화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기성은이 말했다.“이번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배후의 그 사람...”그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대표님께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고 계시는 거죠. 설마 송 부대표님인가요?”전연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시아는 내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고 저렇게 날뛰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이 빚은 내가 모조리 갚아줄 테니까.”“지금 송시아는 뭐 하고 있어?”기성은이 대답했다.“송 부대표님은 매일 제시간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뒤에선 다른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고요. 현재 송 부대표님을 제외하고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인씨 가문입니다. 만약 인씨 가문과 송시아가 연합한다면 혹시나...”전연우가 담뱃불을 끄고는 말했다.“송시아는 야망이 큰 여자야. 하지만 성세 그룹 전체를 삼키기엔 아직 역부족이지.”“성세 그룹을 손에 넣고 휘두른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 건드릴 수는 없어.”“아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징크스 잘 감시해.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기성은이 물었다.“저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전연우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말했다.“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직접 처리한다면 껄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가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소민아의 언급에 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입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 말이다.“아직 송시아의 옆에 있습니다. 부서 이동을 권했지만 거절하더라고요.”“소민아한테 아무 얘기 안 했지?”“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전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