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넌 시윤이를 해치면 안 돼. 전연우, 넌 이미 오래전에 시윤이에게 아픈 상처를 줬고 목숨까지 빼앗을 뻔했어. 지금은 또 시윤이를 죽이겠다고 하고 있고. 우리 인씨 가문과 강씨 가문에 미안하지도 않아?”인정아가 총알을 장전했다.“오늘 2층에 한 발자국이라도 올라가면 바로 쏴버릴 거야.”전연우가 말했다.“소월이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일찌감치 폐허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감히 나한테 조건을 내걸어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때, 위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으악! 당신들 누구예요!”“당신들 뭐 하려는 거야!”얼마 후,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쫓겨 내려왔다. 그중 한 도우미의 손에는 핏물이 가득 들어있는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발을 헛디딘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바람에 핏물도 함께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사... 사모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 사람들 창문으로 들어와서 아가씨를 데려가려고 해요.”인정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연우를 쏘아보았다.“내 딸한테 손대면 죽여버릴 거야!”빗속에서 운전하고 있던 서철용의 귀에 머지않은 곳에서 전해져 오는 총소리가 들려왔다.인정아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 전연우는 빠르게 몸을 피했고 총알은 꽃병을 뚫고 지나갔다.“그 총은 한 발밖에 쏠 수 없어요. 이젠 뭐로 절 막을 건가요.”이 별장 전체는 전연우의 완벽한 통제하에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인정아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넌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 같은 놈이야!”전연우는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소매에 묻어 있는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그거야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달렸죠. 지금 이 상황에서도 강지훈이 인씨 가문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위해 퇴로는 몇 개 만들어야죠. 안 그래요?”“너...”인정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전연우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그녀를
“나 지금 수술하고 있어요. 곧 나을 거예요... 예전과 똑같이 될 거라고요.”불에 타 얼마 남지 않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 그녀의 손, 목 등 눈에 보이는 피부는 온통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이 흉측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날 강영수는 못 살았어요?”비행기가 추락하던 그 날...전연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인시윤의 반응을 포착했다. 그녀가 말했다.“비행기에 이상이 생겼을 때, 오빠는 하나밖에 없는 낙하산을 저한테 줬어요. 하지만 제가 도망치기도 전에 비행기는 바다에 추락해 버렸어요. 이후... 그 이후의 일은 저도 모르겠어요.”전연우가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한 사람의 본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인시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전연우는 선명히 알 수 있었다.인시윤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전연우도 더는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인시윤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 그는 이미 멀리 떠나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경호원이 걸어왔다.“대표님, 이 사람들...”전연우가 한 번 눈짓하자 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은 이번엔 정말로 뿌리까지 철저하게 제거하려나 보다.인정아는 걸상에 꽁꽁 묶여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전연우가 내려오자 그녀는 애써 발버둥 치며 앞으로 나갔다.“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전연우! 시윤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시윤이는 지금 조금의 충격도 받으면 안 된단 말이야!”“화가 났으면 나한테 풀어!”전연우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서늘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걱정 말아요. 아무도 빠뜨리지 않을 테니까.”경호원이 휘발유 한 통을 들고 와 뚜껑을 열었다.그 모습에 인정아는 더더욱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우릴 다 죽일 생각이야? 전연우! 이러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아?”“쓸데없이 소리를 지를 시간에 남길 유언은 없는지 생각해보는 게 낫지 않아요? 난 참을 만큼 참았어요.”바깥의 비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서철용은 마침 중요한
“전연우, 대체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인시윤이 눈만 남겨놓고 얼굴을 꽁꽁 싸맨 채 경호원들에게 묶여 내려왔다. 거실에 와보니 도우미와 엄마도 자신과 같은 처지로 앉아 있었다.마음속 공포심이 부풀어 올랐다. 문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짙은 휘발유 냄새가 코를 스쳐 지나갔다.전연우는 지금 이 시간 인씨 가문 사람들을 모두 불태워 죽이려 하고 있다.“우리 시윤이... 해지치 마.”인시윤은 전연우가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너무 무서워 눈물을 흘렸다.그날 사고에서 그녀를 집어삼켰던 불길이 인시윤에겐 크나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하여 그녀는 지금 완전히 겁을 먹었다.‘시윤’이라는 이름을 들은 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인시윤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이다.서철용은 전연우가 장소월 때문에 이렇게까지 미쳐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수없이 사형을 집행당한다고 해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역시 소월 씨 말이 맞았네. 넌 높게 올라갈수록 더더욱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어. 소월 씨는 저번 일도 떨쳐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고 있어. 그런데도 또 이런 일을 벌여? 내일 이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면 소월 씨는 분명 처음으로 널 의심할 거야.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소월 씨가 나한테 전화해서 가보라고 부탁했어. 소월 씨가 직접 왔다면 어땠을까?”“강영수의 죽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소월 씨는 줄곧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죄책감 때문에 몰래 강영수의 아이를 찾아 속죄하려 하고 있고. 하지만 넌!”“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들 다 죽으면...”“그다음으로 저세상에 가는 사람은 소월 씨일 거야. 확신해.”서철용이 소리쳤다.“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이 사람들 풀어줘.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서철용이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얼굴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았다.“상처 깨끗이 처리하고 병원으로 와요. 약속은 꼭 지키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그 누구도 인시윤 씨 돕지 못할 테니까.”말을 마치고 그는 전연우의 차에 올라탔다.“너 오늘 약 안 먹었어? 왜 이렇게 충동적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결혼 준비나 열심히 하면 되지, 꼭 와서 불까지 지르며 사람을 죽여야겠어? 소월 씨가 걱정된다면서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너 진짜 하늘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해.”전연우는 느릿하게 손을 닦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에 서철용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월 씨는 매번 예감이 참 정확해. 네가 밤에 나갈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더라고.”전연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시끄러워.”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다 널 위해 하는 말이잖아!”서철용은 전연우의 팔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얼마 후, 그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몸 상태는 꽤 괜찮아. 양기가 조금 왕성하게 돌 뿐이야. 당분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그리고 깨끗이 씻고 나서 집에 가. 휘발유 냄새가 진동해.”“소월 씨는 네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순간 알아챌 거야.”옆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잠들었을 것이다.이렇게 피곤해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전연우! 이렇게 사랑할 거였으면서 왜 그때 장소월에게 그토록 모질게 했던 거야. 이제 그녀는... 절대 다시 그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전연우가 남원 별장에 돌아갔을 땐 이미 열한 시였다.은경애가 말했다.“아가씨, 시간이 늦었어요. 이제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아니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전 괜찮아요. 아주머니는 별이 데리고 가서 먼저 쉬세요.”“대표님 돌아오신 것 같아요. 아이고, 드디어 오셨네요. 그럼 됐어요. 전 이만 올라갈게요.”부부 사이에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대표님
의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았다. 흐릿한 시선 속 전연우가 문 앞에서 도우미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안으로 들어오자 장소월은 침대에 손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전연우가 만지려 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가서 몸에 찌든 냄새 깨끗이 씻어내고 와.”전연우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의사 선생님한테 듣기로 너 오늘 저녁밥 안 먹었다면서? 도우미한테 죽 끓이라고 했으니까 곧 될 거야.”“다음부턴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해. 난 샤워하러 갈게.”장소월은 그와 말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전연우가 샤워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힘없이 이불을 거두고 걸상에 걸어놓은 그의 정장을 집어 들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확실히 휘발유 냄새였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그는 또 야밤에 나가 사람을 해치고 온 것이다.장소월은 분노에 차올라 정장을 던져버리고는 작업실에 들어가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철용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연우가 어디에 갔었는지 알죠? 대체 뭘 하고 왔길래 몸에서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는지 말해주세요. 전연우...”장소월은 한참이 지나서야 본래의 목소리를 되찾고 말했다.“또 사람을 죽인 거예요?”서철용이 그녀의 감정을 가라앉혀주며 말했다.“소월 씨, 침착해요. 내가 다 말해줄게요.”‘소월 씨, 요즘 누군가 계속 보고 있는 것 같다던 느낌이 맞았어요. 착각이 아니었어요... 인시윤이 줄곧 어둠 속에서 몰래 소월 씨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정전이 되었던 그날 봤던 그 사람 역시... 인시윤이었어요...’“소월 씨... 인시윤은 죽지 않았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장소월은 심장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눈동자 속엔 기쁨과 경악 등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서철용이 말을 이어갔다.“저번에 인시윤이 소월 씨를 해친 일
장소월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외부에서 소란이 생겨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다만 그녀는 무서운 악몽을 꾸고 있었다.전연우가 불꽃 속에 총을 들고 서 있었는데 그의 몸은 온통 검붉은 피로 뒤덮였고 발밑엔 시체들이 무더기로 누워 있었다.장해진, 강만옥, 강영수, 강씨 노부인, 인시윤, 인정아, 그리고... 강용까지...모두 그에게 짓밟혀 죽어버린 것이다.또 별이는 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장소월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전연우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장소월은 한명 한명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안돼!”그녀가 깜짝 놀라며 깨어났다.그 소리에 은경애는 다급히 옆방으로 달려왔다.“아가씨, 드디어 깨셨네요. 오전 내내 주무셨어요. 두 시간만 더 지나면 저녁 식사시간이에요. 조금 전 대표님께서 전화하셨는데 아가씨가 아직 주무신다고 하니까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시더라고요.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세요. 대표님은 정말 아가씨를 끔찍이 아끼세요.”장소월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길게 잤을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가 흐릿하고 무거운 머리를 어루만졌다.“어젯밤에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급히 집에 돌아온 전연우가 가장 처음 확인한 것은 바로 장소월의 몸 상태였다.괜찮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 검사를 받았다.장소월은 그가 과장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걱정의 마음 중 진심이 몇 퍼센트나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장소월은 혈액 검사를 하려 의자에 앉아 소매를 걷었다. 전연우는 장소월의 외투를 받아들고 매서운 눈빛으로 주사기를 들고 있는 간호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간호사였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그의 공포스러운 시선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간호사는 감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아프지 않게 해요.”전연우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대표님, 사모님, 걱정 마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저 사람은 신경 쓰
“꺼져. 다가오지 마.”목이 망가진 듯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었을 땐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장소월이 잘 보이지 않아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비춘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온몸이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너무나도 흉측한 그녀의 모습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그 소리를 들은 전연우는 여자 화장실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로 뛰어 들어갔다.장소월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전연우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왔다.“다친 데는 없어?”전연우가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장소월은 조금 전 그 얼굴을 떠올리니 또다시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난 괜찮아.”“그 여자 화상이 엄청 심했어.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 우리... 집에 가자.”그야말로 지옥에서 걸어 나온 귀신과도 같았다.장소월은 귀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지만, 그녀의 모습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귀신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장소월이 나간 뒤, 인시윤을 돌보던 도우미가 그녀를 찾으러 화장실에 왔다.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원래 깨끗했던 환자복 위에 알 수 없는 액체가 한 움큼 묻어 있었고, 역한 비린내가 풍겨왔다.인시윤은 지금껏 이토록 굴욕스러운 적이 없었다.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인시윤은 장소월 같은 하찮은 집안 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지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인시윤은 마음속에 광기가 일었고, 질투심이 천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었다.만약 장소월의 얼굴도 그녀와 같이 망가진다면, 전연우는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전연우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반반한 얼굴 때문이다.장소월... 전연우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단지 너의 그 얼굴일 뿐이야.인시윤이 병실로 돌아온 후, 간호사가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지금껏 차마 잡아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또 복통이 찾아왔다는 것을 서철용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더 많이 함으로써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서철용이 프로의 손길로 그녀의 배에 안마를 해주었다. 그 결과 배은란은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계속해.”“어젯밤 전연우를 제지하기 위해 나갔던 거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인시윤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전연우 씨가 죽이려 했다는 거야? 왜? 인시윤은 그분의 아내였던 사람이잖아.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있어?”서철용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내? 그냥 이용했던 것뿐이야. 난 예전 전연우 같은 냉혈한에겐 약점이 없는 줄 알았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준 사람이 생겼고, 자연히 약점이 생겨버렸지. 내가 소월 씨를 언급하니까 바로 멈추더라고. 예전의 그 성격대로였다면 인씨 집안은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을 거야.”“전연우 씨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런데 인시윤은 왜 데려와 치료해주는 거야?”서철용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역시 내 와이프 대단해. 바로 이렇게 핵심 질문을 던지다니.”배은란이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어젯밤 인시윤한테 강영수에 대해 물었었거든. 무언가 알고는 있는데 일부러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난 그 당시 비행기 사고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어. 지금 상황으로 봐선 강영수는 죽지 않았어. 어쩌면 그걸 아는 사람은 인시윤 단 한 명일 수도 있어.”배은란이 그에게 물었다.“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정보를 캐낼 생각이야?”서철용은 입술을 깨물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 한 가닥의 안광이 번뜩였다.“지금은 한 단계씩 차례로 밟아보는 수밖에 없어.”다음 날, 서철용은 인시윤의 검사 결과 차트를 보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수술을 진행했다.서철용이 메스를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