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돈은 어디에서든 벌 수 있다. 조금 더 벌기 위해 계속 이곳에서 일하다간 심장까지 멈춰버릴 것 같았다.예전 비서팀 사무실에 있을 땐 한가해 하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송시아가 돌아온 이후로는 매일 머리가 지끈거렸다.다른 맡길 일이 있으니 잠시 송시아 옆에 있으라는 기성은의 궤변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를 이렇듯 방치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으면 다 무시해버린다...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건가? 그래서 연락처도 차단했고?소민아가 자리에서 핸드폰을 하며 앉아있을 때, 옆에 있던 직원의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회사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 민아 씨 같아요. 가끔씩 부대표님의 화를 받아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잖아요.”“맞아요! 민아 씨, 정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나가면 다시는 성세 그룹같이 좋은 회사 못 만날 거예요.”“민아 씨는 걱정할 필요 없죠. 소씨 집안에 돈 많잖아요. 부자 친척을 두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소민아는 그들의 말 속에 들어있는 은은한 조롱과 비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못 들은 척 간식을 입에 넣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시계를 확인했다. 1분만 지나면 퇴근 시간이었다.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소민아 씨, 처음에 어떻게 회사에 들어왔어요? 설마 정말 낙하산이에요?”“그러니까요! 듣기론 학사나 석사 학위는 있어야 비서팀에 들어올 수 있다던데...”소민아는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소민아는 충전 선을 뽑아 가방에 집어넣으며 오지랖 넓은 그 직원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무슨 뜻이긴요. 심심해 보인다는 얘기죠.”그때 마침 비서실에 들어온 기성은이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맡은 일들은 다 끝냈어요?”그 한 마디에 소민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민아는 뒷담화를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늘 얼굴 두껍게 당당했던 소민아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소민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옅은 쌍꺼풀까지 있어 꽤나 청초하고 준수했다.지금까지 만났던 소개팅 남자 중에서 외모는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소민아 씨...?”“네... 맞아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았다.“제 엄마 소개로 나오신 분 맞나요?”“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들어가서 앉죠. 바깥은 추워요.”소민아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창가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뒤, 멋쩍은 듯 목덜미만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보고는 소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소민아라고 해요.”“신이랑이에요.”소민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는 데엔 이유가 있었어. 엄청 내성적이네.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자 두 사람은 임의로 몇 개 선택해 주문했다.“오래 기다리셨어요? 버스 타고 오는데 길이 너무 막히더라고요.”“네.”짧디짧은 한 글자뿐인 대답에 소민아는 너무 난처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컵을 들어 물을 마시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었다. 외모는 확실히 그녀의 이상형에 가깝다. 그저 말수가 조금 적을 뿐이다.너무나도 불편했다!한참이 지나도록 어떻게 한마디도 내뱉지 않는단 말인가.설마 무슨 나쁜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음식이 모두 오르자 소민아는 조심스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신이랑 씨, 우리 오늘 왜 만났는지는 알고 있죠?”“선이요.”“알고 있네요! 모르시는 줄 알았어요. 응당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 직업이라든가, 사는 곳이라든가, 재산이 얼마라든가, 차와 집은 갖고 있는지 등등...”신이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전 회
천극이라는 이름의 그 책은 소민아가 중학교에 다닐 때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다. 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경로라곤 고작 인터넷에서 겨우 찾은 몇 개 짤막한 인터뷰가 전부였다. 그건 신이랑이 출간한 첫 책이었는데 단숨에 소설 랭킹 1위에 올랐고 10만 자까지 올렸을 땐 구독량이 100만으로 치솟아 올랐다. 2주 뒤엔 웹툰까지 만들어졌다.당시 그야말로 전국의 학교를 뒤집어놓았었다. 소민아에겐 그 소설 자체가 그녀의 청춘이었다.소민아는 중학교 시절 신처럼 숭배했던 사람이 지금 이 시간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것도 그녀의 맞선 상대로서 말이다!세상에!정말이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녀는 꿈인지 생신지 확인하려 밥상 밑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꼬집었다.소민아는 너무 흥분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신이랑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사인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비주의 작가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절대 이랑 씨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을게요.”누군가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촉한 적은 처음이라 신이랑은 약간 불편한 듯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그래요. 다음에 가져다줄게요.”소민아가 흥분하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지금 사인해주면 돼요. 이럴 줄 알았다면 이랑 씨가 쓴 책을 가지고 나왔을 텐데.”그 순간 머지않은 곳에 있는 서점을 발견한 그녀는 무언가 번뜩 생각나 말했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올게요. 절대 가면 안 돼요.”신이랑이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소민아는 식당을 나가 맞은편 서점에 들어간 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과 검은색 펜을 하나 사고 뛰어나왔다.“제 이름이랑 소민아 선녀 대박 기원이라고 써주세요.”“네.”신이랑은 마치 기계 사람처럼 빈 공간에 소민아가 요구한 구절을 써주었다.살펴보니 그의 글씨도 외모처럼 청초하고 깨끗했다.“이렇게요?”그의 말투는 느릿하고도 부드러워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네
소민아는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식사시간,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다른 화제를 던졌다. 신이랑이 귀찮아할 거라 여겼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차근차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세 마디만 초과하면 입을 다물라고 다그치는 기성은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랑 씨, 저 이제 배불러요. 다 드셨어요?”“네. 저도 배불러요.”“아직 이른 시간인데 나가서 영화라도 볼까요? 요즘 재밌는 공포 영화 나왔다던데, 어때요?”“좋아요.”신이랑이 카운터로 걸어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소민아는 두 손을 뒤로 가져간 채 말했다.“이랑 씨, 다음엔 애플 페이 한 번 써봐요. 그럼 현금 가지고 다닐 필요 없어요.”“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괜찮아요. 오늘은 이랑 씨가 샀으니까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소민아는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제가 데이트 신청했을 때 거절만 하지 않으면 돼요.”“언제 부르든 나올게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쌓였던 눈이 녹아 바닥은 약간 젖어있었다.“지금 영화 보러 가면 소설 쓸 시간 없지 않아요? 오늘 올린다고 하셨잖아요.”“이미 다 얘기해뒀어요.”그가 그녀를 살짝 쳐다보고는 물었다.“안 추워요?”참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괜찮아요.”“이거 해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장갑을 꺼내주었다.소민아가 바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한테 주면 이랑 씨는요?”“난 안 추워요.”“그럴 리가요.”그녀는 어디에서 용기가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따뜻했다.“정말 안 춥나 보네요. 그럼 제가 할게요.”신이랑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는 당황스러움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소민아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이미 발까지 꽁꽁 얼어있었다. 손은 더 말할 것도 없다.“됐어요. 이제 가요. 마침 이 부근에 영화관이 있어요.”그는 키가 꽤나 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을 때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가 눈에 들어
두 시간 반의 영화가 끝난 뒤, 그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구석까지 밀린 그녀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다.“아아, 내 발.”신이랑이 그녀를 비좁은 공간 속에서 끌어냈다.“괜찮아요?”“네. 괜찮아요.”“조금만 참아요.”“네.”소민아는 그의 등 뒤 안전한 공간에 자리 잡았다. 꼭 맞잡은 창백하게 하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건장한 몸집을 눈앞에 두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당장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리며 요동쳤다.1층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그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나갔다.나간 뒤에도 신이랑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민아는 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아까 영화를 볼 때 자주 눈을 감고 있기도 했었다.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신이랑이 부드럽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조금 전 영화를 볼 때 엄마로부터 받았던 문자가 떠올랐다.“이랑 씨,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머리 아파하는 그의 모습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더없이 온순하고 귀여웠다.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약 먹으면 돼요.”그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인가보다. 느리고 부드러우며 친절하다.소민아가 말했다.“그럼 안 되죠! 저랑 같이 약 사러 가요. 머리 아픈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저도 잘 알아요. 매번 늦게까지 야근할 때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벽에라도 부딪히고 싶더라니까요.”“가요. 제가 약 사줄게요.”“난...”소민아는 신이랑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렇게 급히 앞으로 걸어가는 소민아는 온통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신이랑의 눈빛을 느끼지 못했다.머지않은 곳 검은색 승용차 안, 기성은과 소피아가 앉아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소피아는 건물에서 나오는 소민아를 발견했다.“기
“저기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한곳을 가리켰다.“와. 진짜 부자시네요. 가요... 여기 한 달 월세 엄청 비싸지 않아요?”소민아는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소민아는 그가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별로 안 비싸요.”“피곤하면 매일 집에서 소설만 써요. 힘들게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말고요. 이랑 씨는 모를 거예요. 제 예전 회사 상사들이 얼마나 괴물 같았는지.”그의 시선이 지긋이 소민아에게로 향했다.“출근하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요.”소민아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난 한 달에 몇억씩 손쉽게 버는 이랑 씨와 달라요. 출근 안 하면 누가 절 먹여 살리겠어요? 이제 더는 삼촌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이 말했다.“나 돈 많아요. 내가 먹여 살려 줄게요.”그 말에 소민아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돌연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그런 농담 안 웃기거든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절 먹여 살리겠대요!”“천천히 가까워져야죠.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신이랑은 잘못된 말을 내뱉은 아이처럼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한 고급 주택가에 들어서자 신이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도착했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약 가지고 가요. 전 더는 안 따라갈게요.”“돈 줄게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소민아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됐어요. 얼마 안 돼요.”“곧 열 시네요. 저도 이만 집에 갈게요. 어서 들어가요.”신이랑은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잘 자요.”“이랑 씨도 잘 자요!”소민아는 그를 등진 채 팔을 흔들었다.소민아는 주택가를 떠나 택시를 잡으려 거리에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팔을 스치고 지나서야 아직 그의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차가 움직이자 소민아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이 그녀로 하여금 숨이 막혀 말도 한마디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직하기 전이니 그녀는 아직 성세 그룹의 직원이다.소민아의 머릿속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를 흘겨보았던 오늘 낮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정말 밴댕이 소갈딱지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 한마디만 하면 줄곧 마음에 두고 괴롭힌다.설마... 복수하러 온 건 아니겠지.소민아는 이런 경직된 분위기 속의 고요함이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흘러나오는 박하 향기에 그녀는 잠시 긴장을 풀었다.창문 유리에 달린 디퓨저를 본 소민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기 비서님도 이거 사셨네요! 저번에 제가 추천해준 건데 써보니까 어때요?”빨간색 신호등 앞에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기성은은 손을 핸들에 올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차갑게 말했다.“소피아 씨가 준비한 거예요. 요즘 함께 출장 가는 일이 많이 차에 토할까 봐 걱정된다면서.”“아, 네.”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무튼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이었다.차 안이 조용해지던 그때,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익숙한 번호로부터 보내온 문자였다.[차 탔어요?]소민아가 살짝 도발했다.[밖에 나갈 때 핸드폰도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문자도 다 보내네요!]신이랑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요. 난 소설 올려야겠어요.][그래요. 최대한 많이 써서 저희 독자들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주세요.]부드러운 조명 아래, 신이랑은 물컵을 들고 책상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알겠어요.]그때 신이랑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엄마인 남지선이었다.“우리 아들! 선본 거 어떻게 됐어?”“좋았어요.”엄마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이놈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럼 한번 잘 만나봐. 매일 집에 틀어박혀 소설에만 매달려있지 말고 같이 산책도 좀 하고. 민아 엄마랑 난 오랜
“디자인팀 팀장 연봉이 그 사람 한 달 수입에도 미치지 못한다니까요.”“그만!”기성은이 돌연 소리쳤다.소민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역시 그와는 세 마디 이상 주고받지 못한다.소민아는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는 조용히 핸드폰을 만졌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갓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설을 읽으며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자리에 올려놓았다.“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택시비만큼 돈 드릴게요.”소민아는 핸드폰에 정신을 집중한 채 차에서 내렸다.“소민아 씨!”기성은이 핸들을 꽉 잡고서 소리쳤다.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네?”기성은이 창문을 내렸다.“내 여자친구 해요.”“?”소민아는 온몸이 경직되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한마디 말에 그녀는 호흡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밤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콧등에 떨어져서야 천천히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기성은이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나 도착하려면 35분 정도 걸려요. 내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민아 씨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네요.”소민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복도에 뛰어 들어가 비를 피했다. 그녀는 힘껏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나 꿈꾸는 거 아니지?”소민아는 집에 돌아간 뒤 한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릴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성은의 문자였다.[생각해 봤어요?]소민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가슴을 부여잡았다.“왜 이러지?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죽을 것 같아.”“기성은이 나더러 여자친구가 되어달래. 이게 진짜라고?”“진짜라고?”소민아는 예전 그녀의 잘못으로 몇억이나 손해 볼 뻔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