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의 눈동자에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미안해요. 잘못 봤네요.”그녀가 앞으로 걸어가자 소년은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갔다.“누나, 어디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연락처 주고받을래요?”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나 결혼했어요. 학생이 이러는 거 알면 남편이 화낼 거예요.”상대방은 약간 아쉬운 듯 말했다.“아... 그래요.”장소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둡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소년이 장소월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하는 줄로 알 것이다.그녀는 웃는 듯했지만 눈동자엔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일찍 집에 돌아가요.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그 나이엔...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그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장소월의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자 인정아가 선글라스를 내리고 초췌한 얼굴을 드러냈다.“타.”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저번 기자회견 후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었으니 말이다.블루데이 커피숍.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정아는 줄곧 선글라스를 하고 있었다. 등 뒤엔 경호원들을 대동했다.종업원이 커피 한 잔을 가져왔다. 장소월은 따뜻한 물 한 컵만 시켰다.종업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인정아가 입을 열었다.“전연우는 널 갖기 위해 갖은 수를 써서 내 아들과 딸을 해쳤어. 그 자리 영원히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아들과 딸을 함께 잃어버렸다. 그 충격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다. 2주도 안 되는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그건 저나 사모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전연우도 아주 잠시 저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싫증 나면 이 자리 주인이 바뀌겠죠!”장소월은 들고 있던 보온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사모님, 인과응보란 말 믿으세요?”“...”인정아는 그녀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그녀는 온몸의 피가 응고되고 사지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5년 전... 너무 괴로워 바다에 뛰어들 뻔했던 그 순간과 흡사한 느낌이었다.전연우... 너 정말...너무나도 무서웠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아찔해졌다.유전자 검사 결과서엔 그녀와 전연우가 남매라고 쓰여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친오빠였던 것이다!아니... 그럴 리가 없다!그녀와 전연우 사이엔 절대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못한다!이 유전자 검사는 틀린 것이다!장소월은 얼른 이성을 되찾고 최대한 마음을 추슬렀다. 그녀는 장해진의 딸이 아니다. 그녀의 친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에게 자식은 그녀 한 명밖에 없다!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다. 이 서류가 조작되었다는 것.전연우는 어쩌면 정말 장해진의 아들일지도 모른다.하지만... 대체 누가 이 결과를 조작했단 말인가.장소월은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거대한 산이 짓누르는 것 같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급히 컵에 있던 물을 마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그때 종업원이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컵을 건네주었다.“아가씨, 천천히 드세요.”장소월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난 우유를 주문하지 않았어요.”종업원이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저분이 시키신 겁니다.”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오토바이 소년이었다. 그가 헬멧을 벗고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커피숍 앞에 멈춰 섰다. 전연우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온 순간, 장소월은 그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불안함을 감지했다.‘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전연우, 대체 뭐가 무서운 건데?’전연우는 장소월의 앞에 놓여있는 우유를 쳐다보았다.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그와는 달리 장소월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 급한 일 있다며?”기성은은 탁자 위 봉투와 만년필을 보자마자 그녀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가져갔다.“그건 내 물건이에요.”전연우가 손을 뻗어 우유를 마시려는 그녀를 막으며 말했
장소월은 편안히 그의 세안 서비스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각종 클렌징을 그녀의 얼굴에 문질렀다.그녀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딱히 없었어. 그냥 좀 듣기 싫은 말은 했는데 나한테 별로 타격 없어.”예전 그보다 더 독한 말도 수없이 들은 장소월이다.“다 지웠으면 나 가서 씻을게.”장소월이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하고 샤워하는 사이, 전연우는 기성은의 전화를 받으며 서재로 향했다.기성은이 보고했다.“유전자 검사 결과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녹음기엔 대표님과 서철용의 대화 내용이 들어있고요. 대표님, 이 물건들 없애버릴까요?”순간 전연우의 몸에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예전 인시윤에게 가졌던 그 감정이 일렁였다.하지만 전연우는 이미 장소월을 위해 손을 씻었다.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모조리 없애버려. 그리고... 그 여자한테 경고해.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인씨 집안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거라고.”“네, 대표님.”장소월은 씻으니 피곤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밥을 먹으려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바깥에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초인종이 울리자 별이에게 분유를 먹이던 장소월이 말했다.“아주머니, 누가 왔는지 나가보세요.”“네.”은경애가 문을 열어보니 익숙한 손님이 와 있었다.소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월아! 나 왔어!”장소월이 문밖을 내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소현아 뒤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와 있었다.강지훈!“저 사람이 여긴 왜 온 거야?”장소월이 일어서자 소현아는 바로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소월아, 보고 싶었어. 네가 오겠다고 해놓고도 안 와서 내가 이렇게 왔어! 이거 봐... 나 너 주려고 맛있는 것도 많이 갖고 왔어!”그녀는 당연히 강지훈은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현아와 함께 왔으니 두 사람 모두 내쫓을 수는 없었다.“그렇게 큰 회사를 운영하면서 고작 이런 꼬락서니로 사는 거예요?”강지훈은 말투는 항상 이렇듯 직설적이다. 이어 그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아이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볼
장소월은 아이를 은경애에게 안겨주었다.“데리고 위에 올라가 있어요. 전 잠시 후에 갈게요.”은경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세상에... 저 사람은 누구지?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장소월은 주방에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자꾸만 은밀하게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에 그녀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괴이한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만큼은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소현아가 강지훈의 옆에 앉았다.“소월아... 역시 너희 집밥이 제일 맛있어.”장소월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강지훈이 있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맛있으면 많이 먹어. 아주머니한테 반찬 몇 개 더 해달라고 했어.”강지훈이 말했다.“오랜만에 왔는데 술 한 잔 주면 안 돼요?”전연우는 도우미를 시켜 최상품도, 싸구려도 아닌 중간 등급의 술을 가져왔다.그가 고개를 숙이고 생선 가시를 바른 뒤 장소월의 그릇에 놓아주었다.“마시고 얼른 가! 우린 외부인 집에 오래 안 둬.”외부인이라는 말을 들으니 소현아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앞으로 자주 소월이를 만나러 오면 안 된다는 거잖아?장소월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현아는 외부인 아니야. 누가 외부인인지는 스스로 알겠지.”“소월 씨, 여전히 예전처럼 까칠하네요. 우리 남자들과 같이 마시지 않을래요?”장소월은 단호히 대답했다.“난 인간쓰레기랑 술 안 마셔요.”팽팽히 맞서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현아가 식탁 아래에서 강지훈의 옷을 잡아당겼다.“사고 안 친다고 약속했잖아요. 소월이 괴롭히지 말아요. 아니면... 나 지훈 씨 안 볼 거예요.”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다. 강지훈은 애완동물 만지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얌전히 밥 먹어.”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렸다, 소현아와 강지훈이... 설마?그럴 리가 없다. 강지훈은 전연우와 똑같이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아니... 전연우보다 더 잔인한 짐승 같은 사람이다. 그의 손에 들어간 이는 그 누구도 빠짐없이 죽는
“지금 어쩌면 이미 몰래 잡아서 숨겨놓았는지도 모르겠네요.”“그런 쓸데없는 얘기 듣고 싶지 않아.”그와 인씨 가문 사이 일은 이미 깨끗이 끝났다. 인시윤이 어떻게 됐든 그와는 전혀 상관없다.위층에서 장소월이 받은 선물은 고작 소식 하나였다.다만 그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소현아는 동그랗게 불러온 배를 만지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내 배 속에 아기 두 명이나 있대! 나 아기들이 싸울까 봐 매일 밤 동화 읽어줘.”“아기들 진짜 착해. 하나도 안 보채.”임신한 지 2개월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느낌이 없는 게 정상이다.정말 강지훈의 아이였다.“현아야, 임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강지훈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장소월은 소현아의 일인 이상 남처럼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정도로 진행되고 말았다.강지훈 그 더러운 놈은 송시아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 절대 소현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앞으로... 상처를 받는 건 강지훈이 아니라 소현아 한 명일 뿐이다.노원우의 배신으로 인해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현아 역시 지금처럼 나약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소현아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소월아, 강지훈 나쁜 놈인 거 나도 알아. 나 하나도 안 멍청한데 자꾸 바보라고 욕해.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말 안 했어!”“절대 강지훈이 아이 아빠가 되게 하지 않아!”“내 뱃속 아이 아빠는 다른 사람이야!”장소월이 물었다.“다른 사람?”“그래!”소현아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고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얘기했다.“강용이야! 소월아... 이건 내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면 안 돼.”강용...작은 돌멩이 하나가 평온한 호수에 떨어져 층층이 물보라를 일으켰다.소현아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예전 학교 다닐 때 강용이 나한테 약속했었어. 돌아오면 내 아이의 아빠가 되어주겠다고. 그럼 영원
장소월이 전연우의 옆을 지나가자 그는 웃으며 그녀 손목을 잡아 품에 끌어안고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보... 난 강지훈과 달라. 다시는 저놈과 접촉하지 않을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응?”그 목소리는 마치 약물처럼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심장을 치유했다. 그의 체취를 맡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온몸에 깃들었다.그녀는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물을 벗어나려 해도 결국엔 파도에 밀려 다시 돌아가곤 했다.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넌 항상 그렇게 말뿐이잖아. 송시아도 안 만나겠다고 했으면서 먹이 하나만 던져주면 나 버리고 가서 만나잖아. 강지훈도 마찬가지야. 나랑 한 약속 언제 한번 제대로 지킨 적 있어? 10조짜리 계약이랑 나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뭐 선택할래?”전생의 장소월이었다면 감히 이런 질문을 입에도 담지 못했을 것이다.그녀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질문이었다.묻지 않아도 그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 수 있다.10조가 아니라 6억짜리 계약도 그녀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을 것이다.‘전연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처참하게 버릴 것이다.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였다.장소월이 돌연 그를 밀어냈다.“의미 없는 질문이네. 알고 싶지 않아. 별이 보러 가야겠어.”“돈은 없으면 다시 벌면 돼.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내 아내야.”장소월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춰서고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평온하게 내뱉은 그 말이 그녀의 심장을 움직였다.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도우미가 남원 별장 정원에서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있던 그때, 어둠 속에서 은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후드를 입고 마스크를 한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오 아주머니세요?”도우미가 소리쳤다.돌연 그 그림자는 당황하며 도망쳐버렸다.“도둑이야! 도둑 들었어요!”도우미가 몇 번을 소리치자 경호원이 달려왔다. 하지만 날이 너무 어두워
“내일 문 앞에 조명 몇 개 더 달아야겠어. 그리고 마침 회사에서 새 기술을 개발했어. 그것만 쓰면 내가 없을 때 집에 들어온 사람 모두의 정보가 네 핸드폰으로 전송돼.”도둑 방지가 아니라 그녀를 감시하는 게 목적인 황당무계한 말이다....어둠 속에 숨은 범인은 고개를 들고 밝았다가 어두워지는 위층 방을 지켜보고 있었다.검은 모자 아래 그 눈동자엔 고통과 원한이 가득 담겨있었다.얼마 후 미세하게 새어 나오던 달빛이 완전히 검은 구름에 가려졌다.이어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빗물이 몸을 적시니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뚫고 들어갔다.새벽 네 시,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하늘에선 번개가 쳤다.옆방 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은 몸을 뒤집으며 이불 속에서 옆에 누운 남자를 툭툭 찼다.“전연우... 별이한테 가. 또 울어.”발길질에 잠이 깬 전연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명을 켰다.그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을 입고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전연우가 옆방에서 아이를 달래고 있음에도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장소월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별이에게 향했다.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며 비가 내리면 별이는 울음을 그칠 줄을 모른다.장소월이 다가갔다.“내가 할게. 언제 집 보수공사 하는 거야? 방음이 너무 안 돼. 비 오면 별이가 너무 울잖아. 계속 이렇게 울다간 몸 상할지도 몰라.”전연우가 말했다.“알았어. 내일 기 비서한테 와서 보라고 할게. 나 담배 한 대 피울 거야.”별이는 장소월의 품에 안겨서야 천천히 조용해졌다.비가 조금씩 그치자 장소월은 창문을 열어 시원하게 환기를 시켰다.장소월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톡톡 두드렸다.“남자애가 왜 이렇게 겁이 많아?”“엄... 엄마...”장소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네가 만약 내가 낳은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넌 내 아이가 아니고.’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순간, 장소월은
“발자국의 크기와 깊이로 봐선 여자인 것 같습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내일 내가 처리할게.”“네. 대표님.”전연우는 젓가락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내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 오늘 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푹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먹어봐. 내 솜씨도 꽤 괜찮아.”장소월이 말했다.“입맛 없어.”그녀의 경직된 모습에 전연우는 차분하게 달랬다.“아침밥으로 조금만 먹어. 두 시간 뒤면 날이 밝을 거야.”장소월이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덧 네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전연우, 더는 나쁜 짓 하지 마. 응?”“그래. 안 해.”...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빗속에서 달려 나왔다.인정아의 눈에 손에 날카로운 돌멩이를 쥐고 피를 뚝뚝 흘리며 이성을 잃은 듯 뛰어오는 여자가 들어왔다. 인정아가 다가갔을 때 여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시윤아... 왜 그래? 엄마 왔어!”인정아는 그녀 손에서 돌멩이를 빼내려 했으나 인시윤은 더더욱 힘껏 말아쥐었다.“장소월이에요! 장소월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요. 전연우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은 나라고요!”“우린 결혼까지 했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또 결혼할 수가 있어요.”그렇다... 온몸이 화상으로 뒤덮여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인시윤이었다.그녀가 살아남았다.하지만 목숨을 지킨 대가는 흉측한 괴물이 된 것이었다.그녀의 목소리 역시 듣기 힘들 정도로 거북했다.그녀가 거리에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들이 피하기에 급급할 것이다.“시윤아... 그놈 더는 생각하지 마! 전연우는... 처음부터 우리 집안을 이용하고 네 오빠를 이용할 생각이었어. 너랑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시윤아... 열심히 치료받으면 흉터도 다 사라질 거야! 엄마가 세계에서 제일 유능한 성형외과 의사들을 데려와서 너 예전처럼 만들어줄게...”인시윤은 더럽고 으슥한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부부처럼 아이를 안고 있는 그들을 보았다.“전연우가... 장소월에게 국수까지 끓여주더라고요.”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