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훈은 민도준이 갑자기 쳐들어온 게 대체 무슨 뜻인지 몰랐고 방 안에 있는 여자가 제수씨라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몰랐기에 두려움을 숨길 수 없었다.이윽고 권하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 놀리지 마세요. 그저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뿐입니다.”“그래요?”민도준은 잔뜩 얼어붙은 문태훈을 가볍게 무시한 채 소파로 걸어가 상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계속해요. 나 없는 사람 치고.”“저, 그게…….”멍한 채 버벅거리는 문태훈을 민도준은 힐끗 스쳐봤다.“어려운가?”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문태훈은 “싫다”라는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설마 민도준한테 특별한 취미가 있나? 다른 사람이 관계를 가지는 걸 보는 걸 좋아한다거나.’황당해 보이는 추측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가능성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문태훈을 다그쳤다.“사람 말 못 알아듣나?”“아니요, 알아들었습니다.”민도준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는 소문은 해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문태훈은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이자 방금 전의 충동과 흥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문태훈은 굳은 몸을 움직으며 권하윤 쪽으로 다가가더니 상대를 아래에 누르면 동작이 너무 크고 요란할 것 같다는 판단에 그저 옆에 앉았다.한편, 흰 깃털 장식이 달린 가면 아래 권하윤은 복잡한 눈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녀도 문태훈과 마찬가지로 민도준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만약 그녀를 돕고 싶다면 상대를 직접 제지하지 않을 리 없는데 또 반대로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그러던 그때 어깨가 문태훈의 손에 꽉 붙잡히더니 얼굴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왔다.문태훈은 대충 입 맞추고 끝낼 생각이었지만 권하윤이 버둥대다가 가면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갑자기 전해져오는 고통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보
“재미도 보지 않고 가려 하다니 아쉽네.”민도준은 손을 뻗어 소파 위에 놓인 가죽 채찍을 손에 들고 반으로 접더니 툭툭 자기 손바닥을 쳤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극도로 긴장한 문태훈은 흠칫 놀라더니 벌벌 떨었다.그는 민도준이 자기를 이대로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때문에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를 보는 순간 이를 악물며 말을 꺼냈다.“오늘 제가 민 사장님 흥을 깨트렸으니 벌주 한잔 마실게요.”50도가 넘는 독한 양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위를 지날 때 마치 타들어가든 듯 뜨거웠고 이윽고 장에서 항의라도 하듯 경련이 일어났다.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의 양주가 바닥을 보이자 민도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됐어요. 오늘은 이만하죠.”문태훈은 허리를 꾸벅거리며 도망치듯 룸을 빠져나가더니 문이 닫히는 순간 복도 벽을 짚고 토했다.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벌을 받지 않았다면 민도준 손에 죽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마신 술을 토해내고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난 문태훈은 굳게 닫힌 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솔직히 이대로 포기하기 너무 아쉬웠다.‘권하윤한테 이렇게 대단한 뒷배가 있을 줄이야. 민도준이 동생을 위해 화를 푸는 건지 아니면 권하윤한테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네.’…….문태훈이 떠난 뒤 룸 안의 분위기는 순간 이상해졌다.권하윤은 아직도 손이 묶인 채 앉아 있었고 그녀 맞은 켠 걸상에는 채찍을 든 민도준이 앉아있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대를 보니 권하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민도준이 그녀의 신분에 대해 뭔가 눈치라도 챌까 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기도 했고 이 순간 손에 채찍을 든 민도준이 무서운 것도 한몫했다.VIP 룸에 있는 도구들은 모두 최상품들인지라 진짜 가죽이 방안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반으로 접힌 채찍이 민도준의 손바닥을 치며 소리를 낼 때마다 권하윤의 심장은 덩달아 움찔움찔 떨렸다.그리고 큰 손이 채찍을 꽉 움켜쥐는
남자의 다그침에 권하윤은 마지못해 손이 묶인 자세로 일어섰다.하지만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동작도 따라서 굼떠졌다.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자 곧바로 남자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약간 높은 끝음은 마치 그녀를 비웃는 듯했다.이에 난처하고 쪽팔렸는지 권하윤은 마치 자신을 증명하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끝내 일어서는 데 성공했지만 스텝이 꼬여 민도준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다음 순간 힘 있는 팔이 그녀를 붙잡더니 자연스레 그녀의 엉덩이를 한대 때렸다.“전희가 너무 형편없네.”권하윤은 귀밑까지 빨개진 채 아예 그 자세 그대로 민도준의 다리 위에 앉더니 꽉 묶은 손을 남자의 목에 걸쳤다.남자를 꽉 잡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묶어놓는 동작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바싹 가까워졌다.그 동작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렇게 꼭 붙어있으면 어떻게 움직이려고? 응?”비음이 살짝 담긴 마지막 한마디에서 약간의 애정을 느낀 권하윤은 심장 박동이 흐트러졌고 호흡이 가빠졌다.민도준의 얼굴은 사람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기분이 좋을 때 눈에 걸리는 웃음기는 사람을 현혹했다.코끗을 자극하는 옅은 담배 냄새와 허리에 걸친 남자의 큰 손이 느껴지자 방금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상황이 실감이 나면서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이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자 갑자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하마터면 민도준에게 빠질 뻔하다니.’문태훈이라는 위험 요소를 아직 제거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민도준을 잘 구슬려 그가 자기를 보호해 주는 듯한 모습을 문태훈한테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그가 조금이라도 자기한테 손대기 두려워 할 테니.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자기 입술을 민도준의 입술 위에 포개더니 살살 문질렀다.“민 사장님이 움직일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가벼웠지만 무엇을 암시하는지 명확했다.꼭
“다음엔 뭐가 좋을까?”벽을 한참 훑던 민도준의 눈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찾았다.”권하윤은 민도준 손에 들린 들린 딜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손에 묶여 있던 나일론 끈은 어느새 수갑으로 교체된 채 권하윤의 등 뒤에 고정되었고 얼굴이 소파에 파묻힌 채 등 뒤의 상황을 볼 수 없자 권하윤은 순간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흐릿한 불빛은 예쁜 곡선으로 휜 그녀의 등에 고스란히 떨어졌고 빨간 치마와 흰 피부가 대조되면서 시각을 자극했다.게다가 공기 속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등은 미세하게 떨렸고 선명한 날개뼈마저 움찔거렸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민도준의 눈에는 점점 욕망이 끓어올랐다.순간 손에 든 장난감을 보더니 불쾌한 듯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도 아직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이딴 장난감에게 그 기회를 먼저 내어줄 수는 없었다.권하린의 허리는 남자의 손에 의해 들리는 순간 매혹적인 곡선으로 휘었다.“아.”고통과 흥분이 섞인 낮은 신음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민도준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권하윤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어졌다.민도준의 체력과 주체할 수 없는 힘 때문에 그딴 장난감이 아니더라도 권하윤은 죽을 것만 같았다.게다가 오늘 그는 마치 권하윤을 일부러 괴롭히기라도 하려는 듯 일말의 자비도 없이 밀어붙였다.그제야 권하윤은 예전에 민도준이 자기를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그런 행위가 약 두 번 정도 지속되자 권하윤은 몸속에 누적되었던 피로감에 눈앞이 점차 점등되었고 끝내 의식을 잃었다.민도준은 축 늘어진 권하윤을 끌어안더니 긁는듯한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뱉었다.“이젠 쓰러진 척하시겠다?”그의 큰 손은 권하윤의 목을 받쳐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코로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하, 정말 쓰러졌네.”그의 품에 안긴 사람은 대
잠시 뒤, 그 사진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휴대폰으로 전송되었다.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훑어보던 강민정은 흐뭇해하는 동시에 사진 속 인물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하하하, 권씨 집안 아가씨가 이런 망나니랑 놀아나다니.”강민정은 그 외투가 한민혁 것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사립탐정을 고용해 권하윤의 뒤를 캤다.그리고 역시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오늘 끝내 그 증거를 잡았다.하지만 사진 속 권하윤은 그저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한 행동은 조금도 없었다.‘이러면 설득력이 없을 텐데.’“계속 뒤를 밟아요. 수위가 높은 사진만 찍을 수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자신이 어느새 상간남이 되었다는 걸 알리 없는 한민혁은 아침밥을 들고 블랙썬 펜트하우스로 올라가 민도준을 찾았다.그 과정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의 손에 들린 아침밥을 보자 그를 놀려대기까지 했다.“민혁 도련님은 점점 더 현모양처로 변해간다니까요.”“꺼져, 이게 진짜. 나도 부탁 받은 거거든.”밖에서 발톱을 드러내며 유세를 떨던 한민혁은 민도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다시 얌전해졌다.“도준 형, 사람은 이미 돌려보냈어요.”“응.”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은 채로 잠을 보충하는 민도준을 보자 한민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침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하지만 따뜻한 음식의 냄새와 포장은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았다.민도준은 냄새가 흘러나온 곳을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건강한 음식은 어디서 났어?”“권하윤 씨가 저더러 형한테 주라고 부탁했어요.”“하.”‘사람 달랠 줄도 다 알고. 이런다고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그저 피식 웃기만 하고 반대를 하지 않는 민도준을 보자 한민혁은 아예 포장을 뜯으며 음식들을 상 위에 펼쳐놨다.하지만 절반도 채 열지 않았을 때, 민도준이 손을 저었다.“열지 마. 나 안 먹어.”한민혁은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대접을 받았으니
[분발해서 다음번엔 꼭 민도준 씨 만족시킬게요.]분명 순종적인 말투였지만 민도준은 액정을 통해 권하윤의 시큰둥한 표정과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액정을 타고 위로 올라가자 전에 나눈 대화가 눈에 들어왔다.[민 사장님, 어제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아침 안 드시면 몸에 안 좋아요. 특히 신장에.][죽고 싶어?][농담이에요.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줄 서서 아침을 구매한 저를 봐서라도 조금만 드셔주세요.]…….민도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꽤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너무 순종적이어도 안 되고 방항적이어도 안되며 한상 적당한 선을 지키며 균형을 맞춰야 한다.때문에 권하윤은 손에 쥔 열쇠를 보는 순간 오늘 그 선을 잘 지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겨우 부릅뜬 채 샤워를 하더니 침대에 등이 닿기 바쁘게 기절하듯 잠들었다.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벌써 오후였다.한숨 푹 자고 나니 오히려 몸 이곳저곳이 아파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켠 순간 문태훈이 보내온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권하윤 씨, 어제 너무 급하게 가는 바람에 얘기 채 나누지 못했는데 오늘 시간 돼요?]다시 공손하게 변한 그의 말투에 어제 그녀를 협박하던 일이 꿈이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오후 4시.권하윤은 경성에 있는 유명한 가정 요리 전문점에 도착했다.“오래 기다렸죠?”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가방을 옆자리에 놓고는 맞은편에 앉은 문태훈에게 싱긋 미소지었다.하지만 그녀와 달리 문태훈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눈에 빨간 핏발이 서 있는 걸 보니 간밤에 잠을 설친 게 틀림없었다.믿는 구석이 있는 듯 두려워하지 않는 권하윤의 모습을 본 순간 문태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어젯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니 화가 날 만도 했다.그의 시선을 의식한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긴
“공은채 씨 때문이거든요.”문태훈은 악의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그런데 그쪽 아버지가 공은채 씨를 죽인 범인이잖아요.”“그 입 다물어!”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그 말들 다 증거도 없는 헛소리예요! 게다가 공은채 씨는…….”솔직히 권하윤도 공은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공씨 가문에서 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지 모른다.그저 공은채가 죽은 뒤 자기 집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만 알뿐.하지만 문태훈과 이 일로 실랑이를 벌인다고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권하윤은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민 사장님이 공은채 씨 때문에…… 그 사람과 알게 됐다는 게 무슨 뜻이죠?”“그렇게 많은 걸 알 필요는 없어요. 그저 민 사장님이 만약 당신이 이성호 딸이라는 걸 안다면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것만 알아둬요.”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권하윤은 문태훈의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로 도박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말해요, 저한테 뭘 원하는지?”“뭘 원하냐고요?”문태훈은 말끝을 길게 늘어트리며 시치미를 뗐다.하지만 그걸 이미 간파한 권하윤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 일을 민 사장님한테 알리지 않은 건 이걸로 저한테서 뭔가 뜯어내려는 속셈 아니었어요?”자기가 먹지도 못하고 공손하게 다른 사람에게 권하윤을 바쳐야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뭔가 뜻어내는 게 문태훈한테는 나았다. 때문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권하윤 씨 역시 시원시원하다니까. 그러면 저도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할게요. 권하윤 씨가 민 사장님의 사람이라니 저도 그쪽한테 감히 손댈 수 없게 됐으니…….”“얼마요?”권하윤은 서사를 늘여놓는 문태훈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문태훈도 자기와 엮이지 않으려는 권하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바로 원하는 숫자를 불렀다.“200억.”권하윤은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혹시 저를 은행으로 보는 건 아니죠?”“권하윤 씨 지
상대방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민도준을 내서워 남을 속이다가 결국 당사자 앞에 들키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권하윤은 안절부절못했다.‘역시 사람은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맞나 보네.’만약 민도준이 이 자리에서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모든 걸 폭로하면 전에 그녀가 했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민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그녀의 눈빛에 민도준은 테이블에 위의 남겨진 음식을 보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밖에서 이렇게 훔쳐먹었으면서 아직도 배가 안 불러?”들을수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기를 폭로하지 않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윽고 민도준의 팔짱을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두 눈을 곱게 접었다.“민 사장님이 식사하시겠다면 곁에서 함께 먹어줄게요.”두 사람이 끈적하게 달라 붙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자 문태훈은 속이 후들거렸다. 이윽고 민도준이 뭔가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히 해명했다.“저기, 사실 오늘 권하윤 씨한테 사과하려고 불렀어요. 민 사장님이 권하윤 씨와 아직 볼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날게요.”말을 마친 문태훈은 민도준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발 빠르게 도망쳤다.다행히 일이 흐지부지 넘어가자 권하윤은 팽팽하던 긴장감이 확 풀리면서 손의 힘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권하윤이 꼭 껴안고 있어 따뜻해진 팔뚝이 그녀가 물러나는 순간 다시 서늘해지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젠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다 이건가?’순간 심술이 나는 듯 권하윤의 얼굴을 살짝 꼬집은 채 그녀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이용 가치가 없어지니 이젠 연기도 할 필요 없다 이거야?”민도준이 꼬집는 바람에 얼굴이 늘어나며 고통이 전해지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힘을 주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무마할까 생각하던 그때 민도준 곁에 서있는 민지훈과 맞닥뜨렸다..지금껏 유지해온 떳떳하지 못한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