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에게 바로 속마음을 들켜버린 권하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공아름이 전에 권희연을 어떻게 대하는지 봤었던 기억이 순간 되살아났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얼마나 민감한데 만약 그녀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는 순간 자기 최후가 비참할 거란 공포감이 휩쓸려 왔다.게다가 전에 자주 아버지의 연주회를 들으러 왔었던 민시영도 언제 그녀를 알아볼지 모를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기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더군다나 비위를 맞추기 어려운 민도준까지 있으니 권하윤은 혼자 호랑이 굴에 들어간 토끼나 다름없었다.때문에 민도준이 안으로 들어가면 몰래 도망치려 했는데 그 계획까지 민도준에게 발각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권하윤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무슨 그런 말을, 도망치다니요. 제가 어떻게 도망치겠어요.”민도준은 그녀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그래, 안 그럴 것 같았어. 하윤 씨가 도망쳤다가 내가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하면…… 그렇잖아. 그런 일은 하윤 씨도 안 하겠지.”노골적인 위협에 권하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그러니 먼저 들어가요. 저 곧 따라 들어갈 테니.”“응.”민도준은 만족한 듯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권하윤의 어깨를 잡은 채 그녀의 귓가에 소곤댔다.“자기야, 이따 봐.”“네.”억지 미소를 지으며 민도준을 떠나보낸 권하윤은 그가 시선에서 사라지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상황 정말 개 같네!’-펜트하우스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야외에 있었고 자리마다 가림막이 놓여 있었다.이미 해가 저물어 네온사인이 밝아진 야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민도준은 갑자기 나타난 공아름을 보고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민시영을 힐끗 스쳐봤다.“이 수법 이젠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민시영은 일부러 모르쇠로 잡아뗐다.“무슨 소리야? 아까 아래층에서 만나서 내가 데려온 건데.”“하.”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담배 한 갑을 꺼내 입에 물더니 그제야 공아름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래요?”공아름은 민도준이 시선을 보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을 바라보는 공아름의 눈빛에는 이내 적개심이 묻어났다.“무슨 뜻이에요?”민시영은 공아름이 오해라도 할까 봐 얼른 끼어들었다.“하윤 씨, 오빠한테 고맙다고 해야죠. 나도 그렇고.”그러더니 이내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흔들며 입을 열었다.“재물신께서 저희한테 돈 뿌려줘서 고마워요.”“고마워요, 민 사장님.”권하윤도 얼른 한 마디 보탰다.한바탕 소동이 끝내 잠잠해 졌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공아름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와 민도준의 관계를 꿰뚫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공아름의 그런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권하윤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승현이가 저 수수하게 입는 거 좋아해서 평소에 이런 옷 못 입어봤어요. 시영 언니가 추천해 주지 않으면 아마 평생 입어보지도 못했을걸요.”그 말에 민시영은 이내 피식 웃었다.“그자식을 뭐하려 신경 써요? 예쁘면 입는 거지.”권하윤은 고개를 떨구며 일부러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승현이 말 듣는 게 좋아요.”“아휴, 아직 결혼도 안 했으면서 이렇게 금실이 좋다니.”그녀의 말이 역시나 먹혀들었는지 공아름은 이내 눈빛을 거두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보아하니 권하윤을 그저 남자 말만 듣는 재미없는 여자로 생각해 민도준이 절대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공아름이라는 위기를 해결하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잔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녀가 물을 마시려 할 때 테이블 밑에 놓인 다리 위에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순간 당황한 그녀는 몇 초간 경직되어 있더니 아무 일도 없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길이 민도준을 스치는 순간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에 대고 몇 글자 타자 타자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전송을 누르는 순간 권하윤 가방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눈치를 챈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민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고 민시영은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분위기는 순간 싸늘해졌다.하지만 공아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공은채의 죽음이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심지어 조금 짜증이 섞여 보이기도 했다.침묵 속에서 권하윤은 민도준의 반응을 몰래 관찰했다. 이 기회에 그가 공은채에 대한 태도를 알아낼 생각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담배만 피워대는 바람에 그녀는 아무것도 보아낼 수 없었다.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끈 민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적을 깨트렸다.“오늘은 이만 갈게.”그가 일어서자 민시영과 공아름도 함께 일어났다.게다가 공아름은 아예 손을 뻗어 그를 잡아당기려다가 민도준의 곁눈질 한 번에 화를 삼키며 손을 거두어들였다.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저 경성에 온 지도 며칠 됐는데 야경 한 번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함께 구경하면 안 돼요?”민도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차키를 손에 쥐며 민시영을 향해 턱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네가 같이 가줘. 뭘 사든 내가 계산할 테니.”“아니, 오빠!”민도준이 미련 없이 떠나가자 공아름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제가 돈이 부족할 것 같아요? 그저 도준 씨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하지만 민도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옆에서 구경하던 레스토랑 손님들은 공아름이 남자에게 거절당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렸고 그걸 본 공아름은 그들을 째려보며 소리쳤다.“보긴 뭘 봐!”그걸 본 민시영은 권아름이 화라도 내면 수습하기 어려울까 봐 곧장 그녀의 팔짱을 끼며 달랬다.“오빠가 정말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우리끼리 쇼핑 해. 아까 우리한테 옷 몇 벌 사줄 때는 한참을 시간 끌더니 너는 마음대로 사라잖아. 네 덕분에 나 이번에 오빠 돈 제대로 뜯어먹어야겠어.”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민도준의 요구에 권하윤은 눈앞이 깜깜했다.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민도준은 오히려 역할극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니 화가 나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이에 그녀는 침묵을 유지하며 항의를 표했다.“안 불러?”차 안에 앉아 있던 민도준은 선팅이 되어 있는 차 유리로 밖을 내다보여 입을 열었다.“왼쪽으로 돌아봐.”그의 차는 마침 기둥 뒤에 세워져 있었기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권하윤은 이내 발견했다.곧이어 들려오는 차 문 여는 소리에 권하윤은 운명을 받아들인 듯 낮게 얘기했다.“가서 봐, 자기야.”“착하네.”민도준은 사실 자기야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권하윤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녀에게 이런 요구를 제기했지만 상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글자를 내뱉는 순간 듣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때문에 그는 자비를 베풀 듯 다시 차 문을 닫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마치 뭐라도 찾는 듯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민시영은 걱정하는 듯 먼저 물어왔다.“왜 그래요?”“저 차키 레스토랑에 두고 왔나 봐요.”“네? 제가 같이 가줄까요?”“아니에요.”권하윤은 계획이 틀어질세라 두려워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먼저 가세요. 저 차키 찾는 대로 바로 집에 돌아갈 거라서.”“그래요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요.”어렵사리 두 사람을 떼어낸 권하윤은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가더니 두 사람의 차가 주차장을 나서는 걸 보고 나서야 쪼르르 민도준 차로 달려갔다.민도준은 조수석에 앉아 그녀가 도둑고양이처럼 경계하며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자 피식 웃었다.“무슨 도둑도 아니고. 뭐 비슷한가? 도둑은 물건 훔치고 하윤 씨는 사람 훔치고.”“…….”권하윤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매더니 조수석에 앉은 민도준을 바라봤다.“우리 어디 가요?”그 말에 민도준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밥 먹으러.”“밥은 방금 먹었잖아요
상 위에 술이 올라오자 권하윤은 손을 뻗어 그것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민도준이 그녀를 막으며 직접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마셔 봐.”은은한 술 냄새가 나는 액체가 청록색을 띤 자기 술잔에 담기자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그것을 받아 든 권하윤은 이내 액체를 홀짝였다. 그러자 순간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위까지 덥혀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어때?”마치 아까 벌어진 일을 잊은 듯 웃으며 물어오는 물음에 권하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 매운 걸 빼면 괜찮은 것 같아요. ”“이 술은 음미해야 해. 다시 마셔 봐.”민도준은 또 술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밀었다.그가 식사를 하는 도중 권하윤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술을 홀짝였다.역시나 민도준의 말처럼 처음 마셨을 때 느꼈던 매운맛은 점차 사라지고 짙은 과일 향이 느껴지면서 깊은 맛이 났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쓴맛도 조금 섞여 있었다.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술인지라 권하윤은 두잔 정도 홀짝이고는 잔을 내려놨다.하지만 그 두잔 만으로도 그녀의 머리는 어지러워졌다.취했다는 느낌보다는 몸에 열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이 더욱 심했다.‘대체 몇 도인데 이렇게 강한 거야?’그사이 식사를 마친 민도준은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치더니 권하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저 여기 있잖아요.”권하윤은 취기가 돌았는지 반응이 조금 더뎠다.하지만 그녀가 반응할 새도 없이 민도준은 그녀의 팔을 확 끌어당겼고 그 힘 때문에 그녀는 민도준의 품에 안겼다.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에 팔을 두른 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취했어?”권하윤은 그 말에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저 조금 더워요.”“주량이 말이 아니군. 더 연습해야겠어.”민도준은 말하면서 한 손으로 술을 따라 권하윤 입가에 갖다 댔다.하지만 권하윤은 취할까 봐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기에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민도준의 의견을 물었다.“그만 마시면 안 돼요
민도준은 권하윤이 취한 틈에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달래며 사실을 알아내려고 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자기 행동에 부끄럽지 않은 태도였다.‘그러게 누가 이렇게 경계심이 많으랬나?’사실 그가 주문한 술은 특별히 제작된 거다. 주량이 안 좋은 권하윤이 아니라 주량 좋은 남자가 마셔도 몇 잔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강한 술.그런 술을 여러 잔 마셨으니 권하윤은 당연히 무사할 리 없었다. 이미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채 나른하게 민도준의 어깨에 기대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민도준이 그녀의 등을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을 거다.민도준은 그 자세 그대로 마치 아이 달래듯 몸을 흔들며 권하윤을 달랬다.“착하지. 말하면 이뻐해 줄게.”술에 취한 권하윤의 목소리는 마치 물복숭아처럼 말캉했다.“제가 권씨 가문 무서워하는 건…….”“응 왜 무서워?”“그건, 그건 도준 씨가 공아름 씨와 결혼할까 봐.”민도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뭐라고?”권하윤은 무거운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묻으며 낮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마요.”“제수씨?”“권하윤?”민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권하윤의 목덜미를 잡고 그녀를 자기 몸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가 이미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하.”‘아주 좋아. 이렇게 취했으면서 거짓말을 한다고?’그는 권하윤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낮게 읊조렸다.“자기야, 우리 어디 천천히 놀아 봐.”이미 잠든 권하윤은 귓가로 불어오는 숨결에 간지러웠는지 몸을 움직이더니 편안한 자세를 찾아 다시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씁! 머리야.’겨우 눈을 뜬 권하윤은 그제야 이미 날이 밝았다는 걸 발견하고 이불을 들췄다.다행히 옷은 멀쩡히 입고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그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민도준과 함께 식시하러 가서 술을 마신 것 같았는데…… 그래 술!’어제의 기억이 미세하게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했고
민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권하윤의 턱을 손가락을 문질러댔다.갓 욕실에서 나온 터라 권하윤의 피부는 더욱 촉촉하고 매끄러워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손끝으로 빠져나갔다.민도준은 살짝 벌어진 권하윤의 입술을 스쳐보더니 애써 불안을 감추고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맞춰 봐.”“저 설마 술주정 부린 건 아니죠?”“맞아. 어제 길가에서 나 꼭 끌어안고 울며불며 자기랑 자달라고 했어.”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창피하기도 했지만 실수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해 표정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끝내 조심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정말요?”민도준의 눈꼬리에 웃음기가 언뜻 지나가더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를 차에 밀어 넣으며 차에서 하자며 내 위로 달려들었어.”권하윤은 들을수록 말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취해도 그렇지 제2의 인격이 나올 리는 없었으니까.그제야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거짓말.”권하윤의 반응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침대에 기대더니 나른하게 말했다.“그만 놀릴게.”하지만 농담 섞인 눈은 다음 순간 알 수 없는 빛을 뿜어냈다.“하윤 씨 입으로 공씨 가문이 무섭다고 했어.”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권하윤은 순간 호흡이 멈췄고 표정도 점차 무너졌다.하지만 애써 침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그 다음엔요?”“그건 본인한테 물어야지.”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공씨 가문을 무서워해? 응? 제수씨?”권하윤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현재 권씨 집안 넷째 신분인 그녀는 공씨 가문과 그렇다 할 접점도 없었다.게다가 어제 본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하지만 곧바로 뭔가 결심이라도 내린 듯 입을 악물더니 목욕 타월이 벗겨지는 것도 관여하지 않고 민도준 쪽으로 기어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대고 그의 눈을 피했다.“민도준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민도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욕망의 굴레에 깊이 빠져있었다.분명 연약한 여인이었지만 그녀를 꼼짝 없이 옭아매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그런 느낌은 이상하리만치 좋으면서도 불쾌했다.그는 모든 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상대의 가식적인 연기에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그런데 상대는 오히려 교활하게 무방비한 상태의 그를 완전히 혼미하게 만들었고 저도 모르게 진짜인지도 모르는 상대의 연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그 흔들림은 그의 욕망을 불태웠고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에게 모든 걸 쏟아냈다.민도준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이유를 알지 못한 권하윤은 그저 낮은 소리로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하지만 정신을 잃기 1초 전 그의 귓가에 정서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윤 씨는 지금 가장 현명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어.”권하윤은 묻고 싶었다. 이게 왜 현명하지 못하냐고.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아가씨, 분부대로 권하윤 씨에 대해 조사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케빈의 말에 민시영은 눈살을 찌푸렸다.“확실해?”“네. 권씨 집안은 엄격한 집안인 데다 권하윤 씨는 계속 집안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게다가 학교도 가문에서 설립한 여고와 여대를 나와 줄곧 규칙을 따르며 자라 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케빈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잘못 기억한 건가?’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집착과 갈망이 섞여 있고 개처럼 충성스러웠지만 개만큼 순수하지는 않았다.그녀는 이내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그런 역겨운 눈으로 나 쳐다보지 마.”“죄송합니다.”케빈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꺼져.”케빈을 마주할 때만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