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자 시영이가 와인 잔을 잡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영은 태연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 거죠?”민지는 완전히 시영의 매력에 빠져있었기에 케빈의 상처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본 것을 모두 말해 주었다. “케빈 씨는 아가씨의 개인 경호원인데 살고 있는 방은 너무 초라해요. 게다가 온몸에 새로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겹쳐 있어요. 분명 누군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어요. 케빈 씨는 너무 불쌍해요. 아가씨께서 좀 도와줄 수 없을까요?”방 안은 몇 초간 고요했다.시영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한 겹의 안개가 낀 것처럼 속을 알 수 없었다. 시영은 케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케빈, 민지 씨가 그렇게 걱정하니 방을 옮겨서 지내도록 해. 그리고 앞으로는 민지 씨가 너의 상처를 책임지게 될 거야.”케빈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버림받을 것 같은 공포가 다시 그를 휩쓸었다. 케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고마워요, 아가씨!” 민지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케빈을 대신해 시영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케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시영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케빈, 이제 필요 없으니 이만 가서 쉬어.”케빈은 감히 시영의 명령에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민지는 케빈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시영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하듯이 물었다.“민지 씨는 케빈에게 관심이 있나 봐요?”민지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케빈 씨는 정말 신비로운 분인 것 같아요.”신비로운 남자는 천진난만한 소녀에게 가장 매력적이다. 시영은 민지를 보자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민지는 말문이 터져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케빈 씨는 원래 이렇게 말이 없나요?”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지금과는 다른 미소를 띠었다. “네, 케빈이 처음 제 경호원이 되었을 때 제가 일부러 하루
시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네 비천한 목숨을 살려줬으니까 감사하긴 해야지.”시영은 다리를 흔들며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을 보였지만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참, 내가 너에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줬어. 맘에 드는지 함께 가서 보자.”케빈이 막 일어서려는 순간 시영은 발을 그의 상처투성이인 등에 올렸다. “네가 개라는 걸 잊은 거야?”케빈은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기어 나갔다.시영은 이미 가정부들을 물러가게 했다. 케빈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개를 훈련시키듯 자신의 보디가드를 훈련시키는 것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곧 방에 도착했다.시영은 방으로 들어간 뒤 손으로 문을 스치며 뒤돌아 케빈에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어두운 방에는 한 줄기 빛도 없었고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그래, 그럼 앞으로 여기가 네 방이야. 매일 밤 여기서 자야 해, 알겠어?”“알겠습니다.”이곳은 마치 케빈의 전용 감옥처럼 어둠을 가득 담고 시영의 마음속에 드러낼 수 없는 또 다른 면을 담고 있었다. 시영을 보지 못할 때 케빈은 여기 누워 있어야만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그 불안함은 마치 케빈의 목을 움켜쥐는 손처럼 그를 죽도록 두려워하게 했다. 케빈은 허공에 손을 뻗어 목을 움켜잡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시영이 그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가 잘못한 것 때문일 것이다.케빈은 나무토막을 구해 자신의 방 창문을 하나씩 막았고 가구를 모두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는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없다. 케빈은 날마다 속죄해야 하고 시영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케빈은 민지가 약을 갈아주는 것을 거절하고 팔의 상처가 아물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써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시영과 유일하게 연결된 상처였기 때문이다.여름이 되자 날이 더욱 길어지고 더 견
밤이 깊었다.시영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케빈은 무릎을 꿇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빈의 실력으로는 난원의 방어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그가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시영의 명령 때문이었다.시영은 그를 무시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나가.”케빈은 움직이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했다. “아가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벌을 주세요.”시영은 스킨케어 제품의 뚜껑을 열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너는 이제 내 보디가드가 아니니 벌을 줄 이유가 없어.”케빈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화장대 쪽으로 무릎을 꿇고 다가가 그녀가 수없이 그를 때렸던 채찍을 꺼냈다. “벌을 주세요.”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가 먹었니? 나가라고 했어.”케빈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옆에 그대로 있었다. 시영은 짜증이 나서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넌 정신이 나간 거야? 지금 나한테 맞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케빈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배에서 피가 흘러나왔다.시영은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한 달 넘게 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상처가 있을 수 있지?“옷 벗어!”케빈은 셔츠를 풀었다. 그의 몸에는 여러 가지 상처가 있었다. 시영이가 전에 때렸던 곳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상처를 입었다. 화상, 자상, 채찍 자국 등이 있었다. 가장 심한 것은 배인데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그것은 시영이가 한 번 이성을 잃고 칼로 케빈의 배를 찔렀을 때 생긴 상처였다.시영은 그의 피투성이인 몸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지만 케빈은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시영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케빈, 네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면 내가 다시 너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같은 쓰레기가 내 흥미를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영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그녀를 짜증 나게 했기에 시영은 바닥에 있던 채찍을 집어 들었다. “나더러 때려달라고 했지? 그래, 좋아!”채찍
케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하얀색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아가씨는 어디에 있지?’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온몸에 상처가 가득해요!”고개를 돌리니 민지가 있었다. 케빈은 눈을 내리깔았다. 시영이가 그를 보러 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민지는 끊임없이 말했다. “케빈 씨는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들도 놀랐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그런 모습으로 실려온 거죠?” 민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케빈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어요. 뭐 하는 거예요?”케빈은 붕대를 풀었고 풀리지 않는 부분은 가위로 잘랐다. 그 상처들은 이미 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맞아서 생긴 멍들과 섞여 보기 흉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일어나서 병원을 나서려고 했다.민지는 케빈을 막아서며 말했다. “시영 아가씨가 저더러 당신을 돌보라고 했어요. 도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시영의 이름을 듣자 케빈의 눈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아가씨는 어디에 있나요?”“시영 아가씨요? 아가씨는 출장을 갔어요. 백진 쪽에 무슨 프로젝트가 있는데 누군가 소란을 피워서 시영 아가씨가 직접 확인하러 갔어요.”케빈은 즉시 시영이 이전에 맡았던 미완성 건물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이 프로젝트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지역에 있었으나 여러 해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시영은 이 장소가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적합하다고 생각해 오랫동안 조사해왔고 매입하려고 했다.회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여러 번 실패했기 때문에 시영은 직접 가기로 결정했다.케빈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다른 한편. 시영이가 백진에 있는 건물 부지에 도착하자마자 곤란에 부딪혔다.처음에는 건물 승인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그녀를 피했고, 그녀는 이전의 시공업자들과 연락하려고 했으나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
그날 밤, 시영 일행은 백진에 머물렀다.마을에는 술집, 노래방 등이 적어서 9시가 되자 거리는 이미 한산해졌다. 시영 일행은 달빛을 받으며 호텔을 나와 차를 타고 공사장으로 향했다.강소진 외에도 몇 명의 남자 직원들이 동행했는데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영은 백제 그룹의 부대표이자 민도준의 여동생으로, 어디를 가든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위험에 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일행은 상대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공사장 근처에 도착하자 차의 불을 끄고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공사장은 조용했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강소진은 황량한 산속을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부대표님, 여기 아무도 없는데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시영은 손전등을 들고 바닥을 살폈다. “여기 뭔가 이상해.”강소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최근 며칠간 날씨가 맑았는데 여기 흙이 조금 젖어 있어. 누군가 이곳을 파헤친 게 분명해.”“그게...”일행들이 확인해 보니 시영의 말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작업한 흔적도 보였다.누군가 비닐로 덮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비어 있는 것 같아요!”시영이가 탐색하려고 다가가려는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리 오세요!”그 사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비닐이 벗겨지더니 몇 명의 남자들이 그를 제압했다. 깊은 밤의 공사장에 숨어 있는 일꾼들, 모든 것이 음모의 냄새를 풍겼다. 시영은 즉시 차로 가자고 외쳤다.하지만 비닐 뒤의 인원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검은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차로 가는 길을 막았다. 시영은 강소진을 밀어냈다. “흩어져! 서둘러 건물 안으로 뛰어!”다행히 어둠 속이라 여기저기 흙더미와 벽돌이 쌓여 있어 시영은 숨어 다니며 마침내 공사가 중단된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시영이가 집중하여 아래층의 움직임을 듣고 있을 때 누
시영은 복잡한 발소리가 층마다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긴장했다. 이제 확실해졌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었고 시영은 절대 그들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케빈이 당장의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밖에 있는 수백 명을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두 사람은 소리 없이 건물 옆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건물은 10층 정도로 건설되었기에 두 사람은 곧 옥상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에서 바람 소리가 사방에서 휘몰아치자 마치 수백 명의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였다. 소리의 정도를 보아 최소 20명은 되는 것 같았다.익숙한 위기감에 시영의 심장은 불안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다시 그 칼날 위의 나날로 돌아간 듯했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깊이 박혀 피가 배어 나왔다.갑자기 시영이가 꼭 쥐고 있던 손이 다른 손에 감싸였다. 케빈은 매우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치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아가씨는 꼭 무사하실 겁니다.”시영은 케빈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은 마치 마음의 안정을 주는 약처럼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짧은 몇 분 만에 아래층을 수색하던 사람들이 옥상까지 올라왔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아무도 없어!”“말도 안 돼! 저쪽 몇 층은 다 찾아봤어. 설마 그 여자가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이야?”“계속 찾아!”이때 창밖에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숨을 죽이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영이 매달려 있었다.그들이 올라오기 전에 두 사람은 창밖으로 내려갔다. 케빈은 엄청난 힘으로 창턱을 붙잡고 조금씩 내려갔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케빈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창턱과 벽돌 사이의 틈새뿐이었다.게다가 케빈은 내부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의 등에는 조금씩 땀이 맺혔다.뒤에 매달려 있던 시영도 편하지 않았다. 케빈이 내려오기 전에 외
커다란 소리가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일제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시영은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2층으로 뛰어가는 순간 창틀에서 뛰어내렸다.모든 사람의 주의가 소리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시영은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시영의 심장은 격렬한 발걸음처럼 미친 듯이 뛰면서 가슴을 두드렸다. 여름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불어왔지만 따뜻해야 할 바람이 오히려 시영의 눈물을 불러일으켰다.시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단지 충성하지 않은 개일뿐이야. 죽어도 아쉬울 것 없어. 게다가 케빈은 전에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잖아. 이 사람들은 다 평범한 노동자들이고 케빈은 총도 가지고 있어. 분명 도망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설득해도 케빈이 죽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시영의 눈앞에는 자꾸만 케빈이 그녀를 업고 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몸에는 지금 그녀가 남긴 상처들과 예전에 남긴 상처들이 가득했다.방금 전에도 시영은 케빈의 등에 업혀 있었다. 시영은 그의 체력이 조금씩 소진되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케빈이 그녀를 업고 내려갈 때 시영은 그가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케빈의 뒷머리에는 그녀가 탁자로 내리친 상처가 흉측하게 남아 있었다.케빈은 그렇게 상처를 입었고 체력을 소진해가며 그녀를 업고 내려간 것도 모자라 수십 명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시영은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왜 그를 그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을까. 케빈이 건강했다면 목숨을 건질 기회가 훨씬 더 많았을 텐데.시영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고 그 고통은 그녀의 발걸음을 점점 느려지게 했으며 심지어 멈추려는 경향까지 보였다. 결국 도로에 도착하기 직전에 시영은 발걸음을 멈췄다.시영은 이를 악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시영아, 너는 민씨 가문의 아가씨이자 백제 그룹의 부대표야. 그리고 케빈은 단지 너를 배신한 개일뿐이야. 고
케빈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질 때 갑자기 한 대의 차가 공사장 안으로 돌진했다. 눈부신 전조등 불빛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차는 사람들 사이로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고 모두 급히 다가오는 차를 본능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는 케빈 앞에 멈췄다. 시영이 차 문을 열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타!”여자의 명령은 마치 강력한 아드레날린 주사와 같았다. 케빈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뒤에서 그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걷어차며 차에 뛰어올랐다.시영은 즉시 차를 출발시켰지만 놈들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몽둥이와 벽돌로 차창을 두드리며 외쳤다. “차 세워!”“내려!”시영은 당연히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 할 때 한 조각의 벽돌이 차창을 깨뜨렸다. 게다가 앞길은 장애물로 막혀 있었다. 시영은 후진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즉시 몰려왔다. 놈들은 깨진 차창으로 손을 뻗어 시영을 잡으려 했다. 시영은 핸들을 돌려 그 손을 꺾었고 곧 비명소리가 들려왔다.혼란 속에서 케빈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시영은 그의 점점 흐려지는 눈동자를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닥쳐!”이제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렸다. 주변은 그들이 던진 장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바퀴 아래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차 주변을 검은 물결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차창에 비친 그들의 분노한 얼굴은 마치 악마 같았다.차의 활동 범위는 점점 좁아졌고 시영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그녀는 차를 멈추면 두 사람의 목숨도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불행은 겹쳐 오고 조수석에 앉은 케빈은 이미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피는 중간 제어판에 떨어져 흘러내렸다.시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케빈! 눈을 떠! 내 명령을 거역할 거야? 당장 눈을 떠!”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