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이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정말 시윤을 찾으려 했다면 그녀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고 나서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시윤의 마음속 부모는 그녀를 키워준 양부모인 양현숙과 이성호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친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시윤은 극도로 반감이 들었다.시윤이가 혼란스러워할 때 그녀의 손등 위에 작은 손이 올라왔다. 도윤이가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윤을 위로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윤은 도윤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웃으며 도윤을 안았다. “엄마는 도윤이와 아빠, 외할머니만 있으면 돼.” 도윤은 아빠라는 말을 듣고는 입을 삐쭉거렸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시윤이가 도윤으로 인해 마음이 풀리던 순간 도준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윤은 즉시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싫어서 어색하게 말했다. “그 노인이 뭐라고 했어요? 제가 조상 찾기에는 관심 없다고 말했죠?” 도준은 시윤의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노인은 당신이 만나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증손자를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어.”“도윤이를 보겠다고 했다고요?” 시윤은 도윤을 꼭 안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를 밖에 버려둔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제 아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다니! 정말 양심 없는 사람들이네!” 도준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무시하면 돼.” 시윤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물었다. “혹시 도준 씨한테 제 친부모가 누구인지 말해줬나요? 왜 저를 버렸는지...” 시윤은 어릴 때부터 행복하게 살았지만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시윤은 친부모가 바라던 아이가 아니라 버려진 아이였다. 만약 양현숙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도준은 그녀가 고개를 숙
시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제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반드시 부모로 인정해야 한다는 건가요?”“아니요, 시윤 씨와 도윤 도련님이 유럽에 한번 오시면 됩니다.” 또 도윤이었다. 시윤은 왜 그들이 도윤을 꼭 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물음에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윤 씨의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주인이자 당신의 할아버지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꼭 도윤 도련님을 한 번 보고 싶어 합니다.”자신의 친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시윤은 마음이 복잡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 소식을 듣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시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제 친어머니는요?” “사모님은 시윤 씨를 낳고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시윤은 잠시 침묵했다. “알겠어요, 한번 가볼게요.” 노인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비행기는 준비되어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해서 세 식구는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시윤은 화려한 내부 장식을 보며 도준을 손짓해 불렀다. 도준이가 고개를 기울이자 시윤은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희 셋 이대로 팔려가는 거 아니에요?” 도준은 그녀의 겁먹은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하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시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천하의 민 사장님은 설마 아내와 아이조차 못 지켜요?”“그렇지, 맞는 말이야.” 도준은 시윤의 목을 감싸 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당기며 말했다.“당신이 내 아내라는 거 인정하는 거야?” 시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시선을 피했다. “인정 안 해도 소용없잖아요. 이미 이젠 당신 사람이잖아요.” 도준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면 다시 결혼하자.” 두 사람이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 있던 도윤은 창밖을 보며 점점 슬픈 표정을 지었
노인은 시윤이가 화를 내자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네 어머니는 네 아버지 몰래 너를 낳았어. 우리는 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네 존재를 알게 되었어. 네 어머니는 쌍둥이를 낳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그날 등록된 쌍둥이에 대한 정보는 없었어.”시윤은 눈썹을 찌푸렸다. 당시 권미란이 그녀들 중 하나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몰래 흔적을 지웠을 것이다. 남은 시윤은 양현숙에게 주워져 그녀의 아이로 키워졌으니 이렇게 어긋난 것이다.“그럼 저를 어떻게 발견한 거죠?”“네가 공개적으로 네가 시윤이지, 권씨 집안의 넷째 아가씨가 아니라고 말한 후에야 너희 쌍둥이가 흩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어.”기억을 되새겨보자 그날 시윤은 도준이가 ‘형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라는 오명을 쓰게 될까 봐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권하윤이 아니라고 밝혔었다. 바로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던이 찾아왔다. 알고 보니 이런 이유였다.하지만 시윤은 그들이 자신을 계속 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에 거부감과 경계를 드러냈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을 저에게 알리지 않고 제 소원을 들어주려 한 거죠?”“보다시피, 찰스는 대가족이니 사생아를 인정하기 전에 상대의 품행을 고찰해야 해.”“사생아?”시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네 아버지는 이미 결혼했고, 아이가 셋이나 있단다.”이 말을 듣자마자 시윤은 즉시 도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집에 가고 싶어요.”도준은 시윤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쩐지 곧 죽을 것 같더라니. 나이 먹고도 말을 그따위로 밖에 못하니 다시 태어나는 게 낫겠어.”그 말을 끝으로 도준은 시윤을 데리고 나갔고 노인은 기침하며 숨을 몰아쉬었다....나가자마자 집사가 뒤쫓아왔다.“시윤 씨, 잠깐만요!”집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방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시윤 씨의 아버지는 불륜이 아니라 결혼하기 전
시윤은 이 말을 듣고 도윤을 더욱 꽉 껴안았다. 역시 그녀의 아들을 노리고 온 거였다.집사는 시윤의 반응을 보고 조건을 제시했다.“도윤 도련님이 이곳에 남아 어르신의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신다면 어르신은 이 정원을 도윤 도련님께 드릴 생각입니다.” 방금까지 반감을 가졌던 시윤은 이 말을 듣자 눈이 커졌다. ‘뭘 준다고? 방금 뭘 준다고 한 거야?’시윤은 도윤의 작은 이마가 갑자기 금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 어르신은 정말 시윤 씨의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시거든요.”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집사는 말을 마치고 한쪽으로 물러났다.시윤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도윤이를 남겨야 하나?”도준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당신 방금까지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잖아.”“아직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 보수라면...”도준은 웃으며 시윤의 이마를 톡톡 쳤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마음이 흔들린 거야?”시윤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도윤이한테는 어차피 도준 씨가 있잖아!’이 생각에 시윤은 즉시 당당해졌다.“집으로 가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윤은 떠나기 전에 도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노인을 한 번 더 보러 갔다.‘어르신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단 한두 달 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이 정원을 가질 수 있는데, 정말 거절하실 건가?”시윤은 도준을 보며 말했다. “저희도 돈은 얼마든지 있거든요.”도준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한다면, 이 분이 돌아가신 후에 한민혁더러 사라고 하면 돼.”콜록-노인은 점점 더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작은 손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노인이 고개를 들자 도윤이가 시윤에게 안긴 채 작은 몸을 내밀어 연한 색의 눈썹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순간적으로 노인은 자신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아 눈물을 흘렸다. 노인은 마른 손으로
짝-고요한 방 안에는 오직 귀를 찢는 듯한 따귀 소리만이 반복되고 있었다.밖에서는 사교성이 뛰어나고 친절한 부사장이며 민 씨 집안의 셋째 딸이었던 민시영은 지금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손바닥이 불타듯 아팠지만 그녀의 가슴속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그녀가 남자를 얼마나 때렸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시영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때 케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채찍으로 바꾸세요. 손이 아프실 겁니다.”민시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날 배려하는 척하지 마. 네가 그러면 내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해? 착각하지 마!”시영은 서랍에서 케빈을 여러 번 때렸던 채찍을 꺼내어 세게 휘둘렀다.한밤중이 되자, 케빈의 상반신은 더 이상 멀쩡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시영은 케빈을 내려다보며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이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케빈은 방금 출소한 상태였고 짧은 머리로 인해 차가운 인상을 주는 얼굴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눈을 내리깔고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마치 길들여진 짐승처럼.“제가 민재혁과 손을 잡으려 했고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이 잘못입니다.”퍽-시영은 또 한 번 케빈에게 채찍질을 했다.“틀렸어! 너는 내 개야. 개는 주인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돼!”케빈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채찍 끝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케빈의 눈가에는 곧 피가 맺혔지만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눈을 내리며 잘못을 인정했다.“네, 잘못했습니다.”“케빈, 기억해. 네 목숨은 내 거야. 내가 살라면 살아야 하고 죽으라면 죽어야 해. 이것이 네가 나에게 진 빚이야!”이 말은 채찍 상처보다 더 아팠다. 케빈의 얼굴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고 그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네, 아가씨.”케빈의 몸에 가득한 피를 보며 민시영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나 씻을 거야.”케빈은 땅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물을 틀었다.비록
케빈은 그렇게 시영을 도와 몸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녀가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그곳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다 씻었습니다.”시영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빈은 일어나서 수건을 가져와 시영의 머리를 닦아주려고 했으나, 그녀는 갑자기 케빈의 목을 끌어안았다.호흡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케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시영은 그의 눈가에 있는 상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키스해 줘.”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영은 물속으로 눌러졌다. 시영의 머리가 욕조 가장자리에 부딪히려 하자 케빈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욕조의 물이 반쯤 넘쳤고 물속의 남녀는 미친 듯이 뒤엉켜 있었다.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 케빈은 시영을 침대에 눕히고 일어났다. 시영은 케빈의 손목을 잡고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영의 목소리는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고 다소 허스키했다.“가지 마.”“네.”케빈은 침대에 오르지 않고 침대 머리맡의 카펫에 앉아 벽에 기대어 시영의 손을 잡았다.시영은 최근 케빈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를 구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제 겨우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었다.손에 닿는 따뜻한 촉감은 시영을 십여 년 전, 처음 케빈을 만났던 순간으로 되돌려 놓았다......“시영아, 이 사람은 케빈이야. 네 보디가드야. 앞으로 너의 모든 외출에 케빈이가 동행할 거야.”당시 시영은 열두 살이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건장한 케빈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케빈 오빠, 잘 부탁해.”케빈은 그때 열여덟 살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악명 높은 국경 지역에서 자랐다. 케빈은 열 살 때 부모를 죽인 원수를 총으로 죽였고, 열세 살에 사설 용병이 되었다. 열일곱 살에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시영의 아버지 민용재에 의해 구출되어 국내로 왔다.케빈은 이미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 시영의 공주 치마와 그 가녀린 손을 보더니 그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가
그날, 케빈은 돌아온 뒤 그 시계를 한참 동안 보다가 결국 팔아버릴 생각을 접었다.케빈은 달력을 보더니 오랜만에 펜을 꺼내어 9월 9일에 몇 글자를 적었다. ‘생일’그리고 케빈의 인생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그로부터 2년 동안 케빈은 머리가 아팠다. 시영이가 열여섯 살이 된 이후 그녀는 이상하게 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사준 시계를 착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화를 내고, 어제 그녀가 했던 말을 잊어버리면 화를 냈다. 심지어 좋아하는 색을 잘못 기억해도 화를 냈다.케빈은 머리가 아팠다. 심지어 민용재가 셋째 일가의 동향을 묻는 동안에도 자주 딴생각에 빠졌다. ‘방금 몰래 사 오라던 버블티에 뭘 추가하라고 말했었지? 그 하얗고 투명한 것은 펄이었는지 젤리였는지. 노란 덩어리는 무엇이었지?’“케빈.”민용재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케빈은 정신을 차리고 민용재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더욱 음울해 보였다. “케빈, 나는 네 생명의 은인이야. 그 은혜를 잊지 마.”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케빈은 사실 생명의 은혜에 대해 매우 무감각했다. 케빈은 매일이 전쟁과 약탈로 가득한 곳에서 자랐다. 그곳은 주먹이 세거나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민용재가 그를 구한 것도 그를 셋째 일가의 스파이로 삼아 그들의 동향을 감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케빈은 민용재에게 별다른 감사를 느끼지 않았다. 케빈이 민용재의 말을 듣는 이유는 그가 민씨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둘째 부부는 온화했고 셋째는 순수했고 넷째는 중립을 지켰고 다섯째는 어리석었다.가족 간의 다툼은 누가 더 냉혹한가에 달려 있었다. 민용재는 그중에서도 뛰어났다.남쪽 정원을 떠나, 케빈은 버블티를 들고 난원으로 돌아갔다.케빈은 손을 들어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아가씨, 저 왔습니다.”“들어와.”케빈은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시영은 막 목욕을 끝내고 슬립 가운을 입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등에
시영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거기 서!”케빈은 손을 내린 채 문 앞에 서있었다. 그가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자 시영은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시영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리 와서 계속 머리를 말려, 명령이야!”케빈은 보디가드였고 시영은 아가씨였다. 그래서 케빈은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케빈은 다시 다가와 드라이어를 들고 시영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그가 돌아오긴 했지만, 더 이상 시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을 지키자 마음이 상한 시영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렇게 두 사람은 냉전 상태에 빠졌다. 시영은 일방적으로 케빈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고 올 때 인사도 하지 않고 그의 차를 타지 않았다.냉전이 3일째 되던 날, 케빈은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려는 시영을 막아섰다.“아가씨, 밖은 위험합니다.”민용재는 오랫동안 그와 연락하지 않았지만 케빈은 민용재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시영은 엄숙한 얼굴의 케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거야?”케빈은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할까 봐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소녀는 갑자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 주 내 열여덟 번째 생일에 함께해 줘야 해. 그리고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해.”케빈은 그녀가 왜 생일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시영은 민 씨 가문의 유일한 손녀이자 사랑받는 존재였기 때문에 생일은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연회장에서 케빈은 어두운 구석에 서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눈부시게 빛나는 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비록 시영은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런 자리에 익숙해져 있어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시영은 상류층 아가씨처럼 거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했다.옆에서 보디가드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저런 공주님은 어떤 사람이 어울릴까?”“시영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