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위험을 감지하고 시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도준이가 그를 들어 올렸다. 마치 병아리를 잡듯 아들을 잡은 도준은 눈썹을 살짝 찡긋거리며 말했다. “정말 겁이 없나 보네.”도윤은 엄청난 위기를 느꼈다....아래층.시윤은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이 내려오지 않자 그들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 이때 도준이가 도윤을 안고 내려왔는데 도윤은 왠지 축 처진 것처럼 보였다.“도윤아, 왜 그래? 어디 아파?”도준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졸려서 그래. 맞지?”방금 전 도준의 표정을 떠올린 도윤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졸려요.”시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럼 자러 가.”방해가 되는 도윤을 방으로 돌려보낸 후 식탁에는 도준과 시윤 두 사람만 남았다.이번 공연이 끝난 후 시윤은 마침내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몸매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탕수육 두 조각을 입안에 넣었다.도준의 시선은 시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윤은 입안의 탕수육을 오물거리며 울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도준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휴가 때 무슨 계획 있어?”“최근에 도윤이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으니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도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도윤이는 아직 멀리 나가본 적 없잖아. 다 같이 어디 놀러 갈까?”시윤은 여행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설렌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강원은 어때?”강원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시윤은 고민 없이 동의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를 위해 직접 차를 몰기로 선택했다.다음 날 아침, 시윤은 도윤을 안고 조수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이 고층 빌딩에서 푸른 산과 맑은 물로 바뀌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생각에 잠긴 시윤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시윤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도윤은 '아빠'라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투지가 생긴 듯 네 발로 일어났지만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다시 박았다. 도윤의 작은 엉덩이는 귀엽게 들려 있었다.시윤은 잠에 취한 도윤을 안고 나왔다. 도준은 그녀의 방문 앞에 기대어 서 있다가 도윤을 보고 눈썹을 찡긋거렸다. “졸리다면 그냥 다시 재우면 되잖아.”도윤은 잠에서 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아침 공기는 조금 쌀쌀했다. 시윤이가 코를 훌쩍이자 따뜻한 외투가 그녀의 등 위에 덮였다.시윤은 고개를 숙여 미소를 지으며 멀리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도준을 불렀다. “도준 씨.”도준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만약 오늘 날씨가 맑다면 우리 재혼해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입술이 뜨거워졌다. 도준이가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 “약속했어.”하지만 도준이 저지른 죄 때문인지 밝아야 할 하늘이 계속 어두워지기만 했다. 오히려 흐린 날씨가 될 기세였다.도준은 혀끝으로 뺨을 살짝 찌르며 시윤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거야?”시윤은 맹세했다. 정말로 일기 예보를 보지 않았다고. 일출을 보지 못하게 된 시윤은 도윤을 안고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발끝으로 지면을 살짝 밀며 흔들렸다. “아마도 하늘이 제가 그렇게 빨리 동의하는 것을 반대해서 일부러 그런 것 같네요.”도준은 흔들의자가 앞으로 흔들릴 때 시윤의 등받이를 잡고 몸을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직 아침이잖아. 하루가 남았는데 뭐가 그리 급해?”시윤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수수한 얼굴은 새벽의 어두운 빛 속에서 매우 선명해 보였다. “도준 씨는 흐린 날씨를 맑게 바꾸는 능력이 있나 봐요?” 도준은 가볍게 웃으며 시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시윤은 도준이가 자신이 생각해낸 꾀에 넘어가자 몰래 기뻐했다.일출을 보지 못하게 되자 시윤과 도윤은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에 잠깐 잠에서 깼던 도윤은 다시 깊이 잠들
오늘 이 비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았고 점심이 다 지나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윤은 오늘 하루 종일 맑은 하늘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웃으며 말했다. “도준 씨도 못하시는 게 있나 봐요.”도준은 시윤의 도발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보여?”이때 밖에서 우원준과 장욱이 들어왔다.“민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장욱은 도준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도준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말았다. 장욱은 입을 삐죽 내밀며 물러났다. “정말 무정해요.”원준은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이 아이, 설마 네 아이야?”도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내 아내가 낳아준 아이야.”원준은 도준의 자랑스러운 표정을 보고 애써 욕설을 참았다. 그리고 도윤을 보며 질투 섞인 말투로 말했다. “아이 하나 낳는 거야 나도 할 수 있어.”그때 도준의 시선이 원준을 향했다. “아이 낳는 것보다 잘 돌보는 게 더 중요해.”“아이 돌보는 게 뭐가 어려워?”“안 어렵다 이거지. 마침 나 좀 볼 일이 있어서 너희 둘이 하루만 아이를 돌봐줘야겠어.”“뭐?”원준은 매우 당황했다. 분명 아이 낳는 얘기였는데 갑자기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원준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시윤을 데리고 나갔다.시윤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걱정했다. “저 두 사람은 아이를 돌본 적이 없잖아요. 정말 두 사람한테 도윤을 맡겨도 괜찮을까요?”“우리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잖아. 걱정 마. 문제가 생기면 전화할 거야.”시윤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왜 도윤은 두고 온 거죠?”도준은 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맑은 하늘을 찾으러 갈 거야.”“네?”...잠시 후, 시윤은 도준에게 이끌려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착했다. 시윤은 헬리콥터에 오르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설마 강원에 비가 오니까 맑은 하늘을 보러 다른 도시로 가는 건가요?”“응.”시윤은 깜짝 놀랐다.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도
시윤과 도준이 다정하게 있는 동안 원준 쪽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도윤은 자신의 젖병을 꺼내 원준에게 건넸고 배가 부르자마자 자신의 기저귀를 가리키며 장욱에게 갈아달라고 했다.두 사람이 모두 일을 마치자 도윤은 장난감 자동차를 하나씩 건네며 자신과 함께 놀아달라고 했다. 원준은 요즘 장난감들을 다뤄본 적이 없어 설명서를 찾으려던 중 도윤의 경멸 어린 눈초리를 마주쳤다. 원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장욱아, 이 아이가 나를 욕하는 것 같지 않냐?”장욱은 도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맞아요. 이 아이가 형을 깔보는 것 같아요.”원준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 너, 너! 두고 봐. 내가 금방 알아낼 거야!”결국 원준은 설명서를 찾아 장난감 자동차의 작동 방법을 알아낸 후 쉽게 도윤의 장난감 자동차를 이겼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때, 그래도 내가 더 잘하지?”도윤은 천천히 자신의 자동차를 들어 올리며 더욱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도윤의 표정은 한 살짜리 아이를 이겨서 자랑스럽냐고 묻는 것 같았다.원준의 표정이 굳어졌고 옆에 있던 장욱이 덧붙였다. “보스, 아직도 보스를 깔보는 것 같아요.”“닥쳐! 닥쳐!”“사장님이라고 불러! 이 자식아!”...시윤과 도준이 돌아왔을 때, 원준은 몇 살은 더 늙어 보였다. 그가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자신에게는 작은 악마 같았던 도윤이가 천사처럼 변해 시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아야.”시윤은 도윤이가 작은 팔을 흔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도윤이 그래도 저희 없는 동안 말 잘 들었죠? 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착해서 돌보기 쉬웠을 거예요.”원준과 장욱은 서로를 쳐다보며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지친 몸을 이끌고 떠났다. 들어올 때는 평범한 남자들이었지만 나갈 때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두 사람이 되었다. 문을 나서자마자 도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윤은 귀가 빨개지더니 몸부림치며 말했다.“무슨 소리예요! 도준 씨처럼 다 큰 사람은 혼자서도 잘 자잖아요.” 도준은 시윤을 꼭 껴안아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내가 지금 이 상태로 잠이 올 것 같아?”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시윤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거부했다. “아직 재혼도 안 했으니 제 허락 없이는 아직 안 돼요!”도준은 웃으며 시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내가 그새 서툴러져서 당신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거야?”도준이가 점점 더 과감해지자 시윤은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만 말해요!”도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맞춤을 하며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 “그동안 아들이 생기고 나서 날 너무 방치해둔 거 알아? 이제라도 남편인 날 챙겨줘야지.” 도준의 말에 시윤은 조금 생각에 잠겼다. 도윤이가 생긴 이후로 그녀의 신경은 도윤에게만 쏠려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가정의 단결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시윤이가 망설이는 동안 도준은 자신의 콧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보,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줘, 응?”도준의 말투는 항상 매혹적이었다. 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게...”도준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준은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엄청 부드럽게 할게.”그렇게 시윤은 도준을 따라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시윤은 약간 떨린 마음에 발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왜 옆방이 아니라 이 방을 고른 거예요?”이 방은 도윤의 방과 여러 방을 사이 두고 있어서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도준은 시윤의 움츠린 손을 잡아 천천히 방으로 끌어들이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좀 이따 당신이 큰 소리를 내면 도윤이가 깰지
도준의 말처럼 시윤은 처음에는 그를 욕할 힘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소리칠 힘조차 없었다. 사실 도준도 좀 더 조심하려고 생각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막에서 몇 달을 걸은 여행자처럼 애타게 시윤을 찾았고 시윤은 그의 오아시스였다. 도준은 시윤을 자신의 아래에 눕힌 채 그녀의 모든 부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시윤은 간신히 만족한 도준에게서 풀려났다. 하지만 도준의 손은 여전히 시윤을 괴롭혔고, 그녀가 잠들지 못하게 했다. 시윤의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 “차라리 절 죽이지 그랬어요!” 시윤의 목에 뽀뽀하던 도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겠어?” 시윤은 믿지 않았다. 도준이가 정말로 그녀를 아낀다면 어젯밤 적어도 몇 번은 덜 했을 것이다. “목말라요!” 도준은 이번에 순순히 일어나서 시윤에게 물을 가져다줬다. 도준은 컵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뻗어 커튼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커튼을 완전히 열었다.시윤은 갑작스러운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이때 도준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씨가 좋네.” 시윤은 눈을 떠서 밖을 보았다. 창밖은 금빛으로 가득했지만 그녀 앞에 서 있는 도준만큼 빛나지 않았다. 도준은 역광에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시윤의 마음속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빛이 조금씩 방으로 들어와 모든 구석을 밝히고 있었다....이날 밤이 지난 후, 두 사람은 마치 신혼여행을 온 부부 같았다. 이를 지켜보던 도윤의 눈빛은 점차 분노에서 무감각해졌다. 그들이 돌아가기 전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영국 신사의 모습인 노인이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물었다. “혹시 도윤 도련님이 이곳에 있나요?” 도윤을 안고 있던 시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도윤의 머리를 감쌌다. “누구세요?” “저는 찰스 가문의 집사입니다. 아마 저희 8대 상속자인 찰스 던의 이름을
도준이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정말 시윤을 찾으려 했다면 그녀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고 나서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시윤의 마음속 부모는 그녀를 키워준 양부모인 양현숙과 이성호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친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시윤은 극도로 반감이 들었다.시윤이가 혼란스러워할 때 그녀의 손등 위에 작은 손이 올라왔다. 도윤이가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윤을 위로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윤은 도윤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웃으며 도윤을 안았다. “엄마는 도윤이와 아빠, 외할머니만 있으면 돼.” 도윤은 아빠라는 말을 듣고는 입을 삐쭉거렸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시윤이가 도윤으로 인해 마음이 풀리던 순간 도준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윤은 즉시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싫어서 어색하게 말했다. “그 노인이 뭐라고 했어요? 제가 조상 찾기에는 관심 없다고 말했죠?” 도준은 시윤의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노인은 당신이 만나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증손자를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어.”“도윤이를 보겠다고 했다고요?” 시윤은 도윤을 꼭 안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를 밖에 버려둔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제 아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다니! 정말 양심 없는 사람들이네!” 도준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무시하면 돼.” 시윤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물었다. “혹시 도준 씨한테 제 친부모가 누구인지 말해줬나요? 왜 저를 버렸는지...” 시윤은 어릴 때부터 행복하게 살았지만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시윤은 친부모가 바라던 아이가 아니라 버려진 아이였다. 만약 양현숙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도준은 그녀가 고개를 숙
시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제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반드시 부모로 인정해야 한다는 건가요?”“아니요, 시윤 씨와 도윤 도련님이 유럽에 한번 오시면 됩니다.” 또 도윤이었다. 시윤은 왜 그들이 도윤을 꼭 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물음에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윤 씨의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주인이자 당신의 할아버지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꼭 도윤 도련님을 한 번 보고 싶어 합니다.”자신의 친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시윤은 마음이 복잡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 소식을 듣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시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제 친어머니는요?” “사모님은 시윤 씨를 낳고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시윤은 잠시 침묵했다. “알겠어요, 한번 가볼게요.” 노인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비행기는 준비되어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해서 세 식구는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시윤은 화려한 내부 장식을 보며 도준을 손짓해 불렀다. 도준이가 고개를 기울이자 시윤은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희 셋 이대로 팔려가는 거 아니에요?” 도준은 그녀의 겁먹은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하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시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천하의 민 사장님은 설마 아내와 아이조차 못 지켜요?”“그렇지, 맞는 말이야.” 도준은 시윤의 목을 감싸 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당기며 말했다.“당신이 내 아내라는 거 인정하는 거야?” 시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시선을 피했다. “인정 안 해도 소용없잖아요. 이미 이젠 당신 사람이잖아요.” 도준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면 다시 결혼하자.” 두 사람이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 있던 도윤은 창밖을 보며 점점 슬픈 표정을 지었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