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머리를 붙잡고 연신 기침하는 권하윤의 등을 커다란 손이 두드렸다.기침이 멎고 나서야 그녀는 웃통을 벗고 있는 민도준을 발견하고는 갈라 터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만 두드려요. 아파요.”민도준이 건네는 물을 마신 뒤 그녀는 얼굴을 구겼다.“물 너무 차가운데 뜨거운 물 없어요?”이것저것 트집 잡는 권하윤을 보던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을 열었다.“한숨 자고 나더니 까탈스러워졌네?”반쯤 죽어 나갈 정도로 괴롭혀진 권하윤은 화가 나면서도 감히 말할 수 없어 그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바라봤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민도준은 물잔을 머리맡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권하윤은 놀라 무의식적으로 몸을 안쪽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움직이는 순간 허리에 통증이 전해져 이를 악물었다.민도준은 그녀의 일련의 동작을 여유롭게 바라보더니 차갑게 비웃었다.“그렇게 아프면서 뒤척이기는.”“이게 누구 때문인데요.”끝내 참지 못한 듯 발끈하는 권하윤을 민도준은 품속으로 끌고 오더니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누가 먼저 시작하래?”권하윤은 불만인 듯 잠깐 버둥대는가 싶더니 민도준의 품이 따뜻했는지 결국 힘을 풀고 그의 가슴에 기댔다.민도준의 말처럼 친밀한 행동을 하고 나니 사람이 까탈스러워졌는지 작은 소리로 허리가 아프다는 둥 중얼대기까지 했다.그녀의 모습에 민도준도 어쩌다가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문질러주었다.따뜻한 손바닥 열기가 전해지면서 가볍지도 세지도 않은 힘으로 살살 문지르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다.하지만 점차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귀에 거슬리는 벨 소리가 그녀를 잠에서 깨웠다.권하윤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민승현에게만 특별히 설정해 놓은 벨 소리였다.민도준은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아챘는지 농담 섞인 웃음을 지었다.“전화 온 거로 왜 그래? 바람난 게 들킨 사람처럼.”권하윤은 민도준과 장난칠 겨를도 없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저 힘이 없어 일어날 수 없
민승현의 상태와 목소리가 모두 이상했다.말할 때 혀가 자꾸만 말리는 듯했고 몹시 흥분한 것 같아 보였다.‘설마, 취했나?’권하윤은 이내 상대를 떠보았다.“너 술 마셨어?”“마셨다 왜! 약혼녀가 바람이 났는데 술 좀 마시면 안 돼? 씨발, 나 평생 이렇게 치욕스러웠던 적 처음이야! 권하윤, 네가 뭔데 나를 두고 딴 놈이랑 바람피우는데! 네가 뭔데!”보아하니 민승현은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따지려고 전화한 듯했다. 사태를 파악한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술에 취한 사람한테 도리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그녀는 약간 말투를 누그러트리고 입을 열었다.“너 많이 취했어. 밖에 나가면 위험하니까 한숨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민승현을 진정시키려는 그녀의 행동이 민도준의 눈에는 오히려 부드러운 태도로 약혼남을 달래는 모습으로 비쳤다.‘내 침대에서 내 동생을 달랜다고? 좋아, 아주 좋아.’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하지만 점점 위험해지는 민도준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권하윤은 민승현을 설득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지금 술 많이 마셔서 괴롭잖아. 얼른 침대에 누워서 휴식해.”그러던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권하윤은 고개를 쳐들었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숙이며 입을 열었다.“응. 지금 침대에 누웠지? 그러면…… 아!”짧은 비명과 함께 권하윤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삼켰다.다행히 침대에 누운 민승현은 점점 노곤해졌는지 반응이 많이 무뎠다.“왜 소리치고 난리야?”입을 열면 신음이 튀어나올까 봐 권하윤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하지만 눈을 부릅뜨며 방해를 해대는 민도준을 바라본 결과 오히려 더욱 심한 괴롭힘이 돌아왔다.심지어 반대편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자극해 댔다.다행히 거의 잠든 민승현은 반대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권하윤은 이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민도준이 핸드폰을 빼앗아 그녀의
이미 도망쳐 나온 마당에 다시 돌아갈 배짱이 없었던 권하윤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하지만 20분간 기다려도 주문을 받는 사람 아무도 없자 집으로 걸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그러던 그때,“띠-”하는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멀리에서 램프를 깜빡였다. 권하윤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이 시간에 어떻게 차가 있지? 설마 납치범들의 차는 아니겠지?’순간 전에 봤던 뉴스들이 뇌 속을 비집고 들어와 쉴 새 없이 재생되었다. ‘설마 다시 돌아가 민도준한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나?’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그때 갑자기 자동차가 조금 눈에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차가 그녀 앞에 멈춰서 창문을 내리더니 로건이 얼굴을 내밀었다.“권하윤 씨, 모시러 왔습니다.”권하윤은 멍한 얼굴로 별장 2층을 바라봤다.먼 거리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민도준이 창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이 갑자기 미세하게 떨리면서 가슴이 시큰거렸다.민도준은 언제나 이랬다. 그녀가 그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때 약간의 온정을 베풀곤 했다.차 안의 온기가 권하윤 몸속의 냉기를 몰아내는 순간 권하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로건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내 담요, 아니 목도리를 꺼내 들었다.“권하윤 씨, 이걸 걸치세요.”순간 로건이 험상궂은 인상을 그나마 부드럽게 보이기 위해 뜨개질을 시작했다던 한민혁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로건 씨가 뜬 거예요?”권하윤이 조심스럽게 물은 질문에 로건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도준 형님이 뜨개질하면 여성분들과의 거리를 가까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민도준의 말을 맹신하는 로건을 보자 권하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거친 손으로 뜬 목도리라 그런지 비뚤비뚤한 건 둘째 치고 중간중간 빠진 부분이 있어 마치 거미줄처럼 보였다.말문이 막혀 하는 권하윤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로건은 머리를 긁적이며 우직
차가 권씨 저택에 도착하기 바쁘게 민승현은 즉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그는 오는 내내 머리가 조금 맑아졌지만 걸음을 걸을 때 여전히 비틀거렸다.“권하윤! 권하윤 당장 나와!”잠시 졸다가 깜짝 놀라 깬 경비원은 처음에 그를 웬 미친놈인 줄로 생각했다가 민승현이라는 걸 발견하고 이내 인사했다.“승현 도련님 아니십니까?”민승현은 잔뜩 취한 채 경비원의 멱살을 잡았다.“권하윤 지금 집에 있는 거 맞아?”“저, 저는 야간 경비라 잘 모릅니다.”“이 사기꾼!”민승현은 경비원을 확 밀쳐버렸다.“다 권하윤을 도와 나 속이는 거지! 씨발, 다 사기꾼들이야!”“오빠가 이렇게 부른다고 새언니 못 들어요. 전화해서 나오라고 해 봐요.”강민정은 말하면서 민승현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심지어 이미 권하윤의 번호를 누른 채로 말이다.권하윤이 바람을 피웠는데도 민승현이 파혼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권하윤을 벼르고 있었다.만약 민승현이 권하윤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면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했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거니까.그녀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권하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승현의 감정은 다시 한 번 폭발했다.“너 지금 어디야!”“말했잖아. 오늘 본가에 있다고.”“권하윤! 나 마지막으로 물을게, 너 그 자식 만나러 갔지?”“너 취했어, 할 말 있으면 내일 얘기하자!”“내일은 무슨 내일이야! 나 지금 너희 집 앞에 있으니까 당장 나와!”순간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지금 우리 집 앞에 있다고?”놀란 듯한 권하윤의 반응에 강민정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빼앗아 들었다.“그래요. 오빠가 언니 데리러 왔으니까 얼른 나와요.”“늦었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요.”권하윤이 나오려 하지 않을수록 민승현은 권하윤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갔다.방금까지 자신을 속이던 권하윤의 목소리를 생각하자 그는 살인하고 싶다는
권하윤은 문 안에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내가 피해줄까?”달빛 아래에 서 있는 권하윤은 외투 안에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어깨에 드리운 채 갓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게다가 남자의 사랑을 받아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어 무시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민승현은 몇 초간 넋을 놓고 권하윤을 바라봤다.솔직히 예전에 무뚝뚝하고 재미없던 권하윤은 어느 순간 조금 변화하긴 했었지만 언제나 경계심 가득한 모습으로 그를 배척하기만 했지 이처럼 그를 보며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비록 그 미소에 조롱이 섞여 있지만 말이다.민승현은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너, 정말 본가에 있었던 거였어?”“아니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내가 귀신이라도 된단 말이야? 아니면 바람피운 증거를 잡으려다 잡지 못하니까 배알이 꼬여?”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민승현은 마치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태도를 누그러트리더니 더 이상 아까 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예상 밖의 전개에 강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의심스러웠는데?’하지만 산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바람에 그녀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권하윤이 쉽게 빠져나간 것이 달갑지 않았는지 강민정은 은근히 두 사람을 이간질했다.“언니도 오빠 너무 탓하지 마요. 언니가 전적이 있으니 오빠가 의심한 거잖아요. 우리도 언니가 정말 무슨 어중이떠중이들과 엮이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와본 거예요.”그 말은 마치 권하윤이 몸을 함부로 굴렸으니 의심받아도 마땅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역시나 그녀의 말에 민승현은 권하윤이 자신을 배신했던 모습이 생각났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강민정은 본인의 말에 권하윤이 부끄러워 할 줄 알았지만 권하윤은 오히려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긴 해. 두 사람이 나 의심하는 것도 이해돼. 내가 바람피웠으니까 이렇게 혼자 있는 야밤에 다른 남자 찾
차에 돌아온 민승현은 있는 힘껏 차를 걷어차더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강민정은 그런 그의 모습에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한참을 말없이 운전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민승현이 했던 약속이 생각났는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빠, 아까 이모한테 우리 사이 말하겠다고 했던 건…….”“아직 때가 아니야.”민승현은 화가 치밀어 머리에는 온통 권하윤을 어떻게 혼내줄지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그 대답에 강민정은 속이 뒤틀렸지만 오히려 사려 깊은 표정을 지었다.“알겠어. 오빠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하지만 민승현은 그녀의 고백에도 관심 없는 듯 “응”이라는 짤막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그의 건성건성 한 대답에 강민정은 권하윤이 더욱 미워났다. 그 재수 없는 년만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다행히 얼마 전 손에 넣은 그림을 생각하자 불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그리고 할아버지 생신에 반드시 권하윤을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다짐했다.-강민정의 그런 생각을 모르고 있는 권하윤은 권희연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희연 언니, 늦은 시간에 옷 가져다 줘서 고마워.”권하윤이 말하는 건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 치마였다.민승현을 속이기 위해 그녀는 집으로 오는 길에 권희연에게 미리 연락했고 그 덕이 이렇게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그때 권희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네가 내 동생인데 네 부탁 들어주는 게 당연하지.”그 말에 권하윤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고처음으로 권씨 집안 넷째라는 신분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권희연이 갑자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그런데 밤늦게 집에 안 가고 어디 갔었어?”“그게…….”권하윤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권희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곤란해하는 거 같으니까 안 물을게. 그런데
권하윤은 후자가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문태훈이 일부러 돈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을 속였다고 말이다.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그녀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권하윤은 내내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운전하다가 별원에 도착하기 바쁘게 이승우의 병실로 달려갔다.하지만 그녀가 도착한 병실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그녀는 겨우 오빠가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권하윤이 병실에 들어오자 이승우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윤이 왔어?”그는 권하윤에게 왜 이렇게 오랫동안 보러오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급히 찾아왔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아주 오래전 화목하던 집에서 그녀를 맞이했듯이 여상스럽게 행동했다.오랜 치료 끝에 이승우 몸에 부착되었던 튜브들은 이제 거의 없어졌고 여전히 마른 편이었지만 예전의 잘생긴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게다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했다.“오빠.”권하윤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며 손을 뻗으려다가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동작을 멈췄다.이승우는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채고는 손을 활짝 펴고 미소 지었다.“오빠 지금 몸이 약해도 너 안아줄 힘은 있어.”2년 만에 느껴보는 이승우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는지 권하윤은 오랫동안 그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이승우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권하윤을 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좋아했는데 커서도 그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그저 다 큰 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으면 안 되기에 가끔 권하윤에게 팔 혹은 다리를 내주어 베게 하고는 그녀가 얘기하는 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듣곤 했다.이승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권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말해 봐, 왜 이렇게 급하게 찾아왔어?”…….잠시 뒤, 이승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니까 문태훈을 만난 것도 모자라 그 자식이 너를 알아봤다고?”“지금은 괜찮아졌어. 일 모두 해결했거든. 그
“안다고 할 수는 없어. 그 여자 아버지 연주회 보러 자주 왔었거든. 대기실에서 아버지한테 꽃 선물하는 거 몇 번 본 적 있어.”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버지의 연주회라면 나도 자주 갔었는데 그때 만나기라도 했나?’만약 민시영이 그녀가 이씨 집안 사람이란 걸 안다면…….별원에서 나온 뒤 권하윤은 수심에 차 있었다.문태훈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원인도 있었지만 민시영이 “낯이 익다”던 말이 자꾸 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캐물어도 이승우는 여전히 그때의 일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보아하니 진실을 알려면 또 문태훈을 만날 수밖에 없겠군.’권하윤은 곧바로 문태훈을 만날 생각이었지만 별원을 나서는 순간 민시영의 연락받았다.민시영이 자기를 봤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액정에 뜬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저도모르게 경계심이 생겼다.전화가 몇 번 울리고 나서야 권하윤은 최대한 평온해 보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네, 시영 언니, 무슨 일이에요?”-반 시간 뒤 권하윤은 경성에 있는 한 고급 백화점에 도착했다.그녀가 도착하기 바쁘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시영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여기예요, 여기.”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려고 손을 드는 순간 권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민시영의 뒤에 지나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남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민도준?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어제 바로 민도준에게 원한을 샀던 터라 권하윤은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으면서 도망갈 수는 없는 터라 억지로 다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시영 언니…….”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민도준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마주치더니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한참을 삐걱대더니 어렵사리 한 마디를 토해냈다.“민 사장님도 오셨네요.”민도준은 고개를 숙이며 권하윤을 향해 씩 미소 지었다.“반갑네, 제수씨.”권하윤이 민도준의 눈빛에 어찌할 바를 몰라할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